11. 제26대 진평왕(眞平王 579~632 재위기간 53년 )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백정이며, 진흥왕 태자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만내라고도 한다.]부인이며, 갈문왕 입종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이며 갈문왕 복승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얼굴 생김이 기이하였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였으며, 지식이 깊고 의기가 활달하였다.
원년 8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왕의 어머니의 동생인 백반을 진정 갈문왕에 봉하고, 국반을 진안 갈문왕에 봉했다.
2년 봄 2월, 왕이 신궁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이찬 후직을 병부령에 임명하였다.
3년 봄 정월, 처음으로 위화부를 설치하였다. 이는 지금의 이부(吏部)와 같다.
5년 봄 정월, 처음으로 선부서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 각 한 명씩을 두었다.
6년 봄 2월, 연호를 건복으로 고쳤다.3월, 조부령 한 명을 두어 납세와 부역에 관한 사무를 관창케하고, 승부령 한 명을 두어 수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
7년 봄 3월, 가뭄이 들자 왕이 정전에 거처하지 않았으며, 평상시보다 음식을 줄이고 죄수를 직접 재심사하였다.가을 7월, 고승 지명이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진 나라에 갔다.
8년 봄 정월, 예부령 두 명을 두었다.여름 5월, 뇌성과 벼락이 치고 별이 비오듯 떨어졌다.
9년 가을 7월, 대세와 구칠 두 사람이 배를 타고 바다의 어디론가 떠나갔다. 대세는 내물왕의 7대손이며, 이찬 동대의 아들이었다. 그는 자질이 뛰어나고 젊어서부터 세속을 떠나 외지로 나가려는 뜻을 품었었다. 그는 담수라는 중과 사귀면서 말했다. "신라 같은 산골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것은, 연못의 고기가 산림의 크기를 모르고, 새장의 새가 바다의 넓음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는 장차 뗏목을 타고 바다를 지나 오 나라 월 나라로 가서 스승을 찾을 것이며, 명산에서 도를 구할 것이다. 만약 속된 자세를 바꿀 수 있거나 신선이 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표표하게 바람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천하의 신기한 노름이요,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나를 따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담수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대세는 그를 버리고 다시 친구를 찾았다. 그는 마침 구칠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사람됨이 굳건하고 남다른 절개가 있었다. 그는 곧 구칠과 함께 남산에 있는 절을 유람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불어와 정원의 연못에 나뭇잎이 떠다니고 있었다. 대세가 구칠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와 함께 서방을 유람할 생각이 있다. 이제 우리가 나뭇잎 하나씩을 주워 이를 배로 생각하고 띄워서 누구의 것이 먼저 가는지 보자." 조금 후에 대세의 잎사귀가 앞서자 대세가 웃으면서 "내가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구칠은 불끈 성을 내며 "나도 또한 사나이이다. 어찌 갈 수 없으리!"라고 말하였다. 대세는 구칠이야말로 같이 행동을 할만한 사람임을 알고, 은근히 자신의 뜻을 말했다. 구칠은 "그것이 바로 내 소원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마침내 서로 친구가 되어 배를 타고 남해를 떠났다. 그 후로 그들이 간 곳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10년 겨울 12월, 상대등 노리부가 죽었으므로 이찬 수을부를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11년 봄 3월, 원광 법사가 진 나라에 들어가 불법을 연구하였다.가을 7월, 서쪽 지방에 홍수가 났다. 유실된 인가가 3만 3백6십호, 사망자가 2백여 명이었다. 왕이 사자를 보내 곡식을 주어 구제하였다.
13년 봄 2월, 영객부령 두 명을 두었다.가을 7월, 남산성을 쌓았다. 그 둘레가 2천8백5십4보였다.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개축하였다.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
16년, 수 나라 황제가 조서를 주어 왕을 "상개부 낙랑군공 신라왕"에 배수하였다.
18년 봄 3월, 고승 담육이 수 나라에 가서 불법을 연구하였다.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겨울 10월, 영흥사에 화자가 발생하여 3백50호가 연이어 불에 탔다. 왕이 직접 나가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19년, 삼랑사가 낙성되었다.
22년, 고승 원광이 조빙사 내마 제문과 대사 횡천을 따라 돌아왔다.
24년, 대내마 상군을 사신으로 수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가을 8월, 백제가 아막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병들로 하여금 싸우게 하여 그들을 대파하였다. 귀산과 추항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9월, 고승 지명이 수 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왕이 지명공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25년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범하였다. 왕이 직접 군사 1만을 이끌고 나아가 그들을 물리쳤다.
26년 가을 7월, 남천주를 없애고 다시 북한산주를 설치하였다.
27년 봄 3월, 고승 담육이 수 나라에 사절로 갔던 혜문을 따라 돌아왔다.가을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30년, 왕은 고구려가 자주 국토를 침범하는 것을 걱정하여 수 나라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하였다. 왕은 원광으로 하여금 수나라의 군사를 요구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원광은 "자기가 살기 위하여 남을 멸하는 것은 불교도의 행실이 아니지만, 제가 대왕의 땅에서 살고 대왕의 땅에서 나는 물과 곡식을 먹고 있으니,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면서 곧 글을 지어 올렸다.2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갔다.4월, 고구려가 우명산성을 점령하였다.
31년 봄 정월, 모지악 아래 땅에 불이 났다. 불탄자리의 넓이가 4보, 길이가 8보, 깊이가 5척이나 되었다. 불은 10월 15일에 이르러서야 꺼졌다.
33년, 왕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요구하는 내용의 글을 바쳤다. 수 양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군사를 동원한 사실은 [고구려기]에 실려 있다.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가잠성을 백일 동안 포위하였다. 현령 찬덕이 굳게 수비하였으나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고 성은 함락되었다.
35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 4월에 서리가 내렸다.가을 7월, 수 나라 사신 왕세의가 황룡사에 와서 백고좌를 열고, 원광 등의 법사를 초청하여 불경을 설법하게 하였다.
36년 봄 2월, 사벌주를 폐지한 후 일선주를 설치하고, 일길찬 일부를 군주로 삼았다. 영흥사의 흙으로 빚은 불상이 저절로 훼손되고, 얼마 후에 진흥왕의 왕비였던 비구니가 사망하였다.
37년 봄 2월, 왕이 큰 연회를 사흘 동안 베풀었다.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38년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을 공격하였다.
40년, 북한산주 군주 변품이 가잠성을 수복하기 위하여 백제와 싸웠다. 해론이 이에 종군하여 적과 만나 전력을 다하여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해론은 찬덕의 아들이다.
43년 가을 7월, 왕이 사신을 당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다. 고조가 직접 사신을 위로하고, 통직 산기상시 유문소를 사절로 파견하면서 조서, 그림, 병풍, 비단 3백 단을 보내왔다.
44년 봄 정월, 왕이 직접 황룡사에 갔다.2월, 이찬 용수를 내성(內省)의 사신(私臣)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즉위 7년에는 대궁, 양궁, 사량궁 세 곳에 각각 사신을 두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내성에 사신 1인을 두어 3궁을 동시에 관창하게 한 것이다.
45년 봄 정월, 병부 대감 두 명을 두었다.겨울 10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가 늑노현을 습격하였다.
46년 봄 정월, 시위부 대감 6명과 상사서 대정 1명과 대도서 대정 1명을 두었다.3월, 당 고조가 사신을 보내 왕을 "주국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책봉하였다.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우리의 속함·앵잠·기잠·봉잠·기현·혈책 등 여섯 성을 포위하였다. 이 때 3성이 함락되거나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가 봉잠·앵잠·기현 3성의 군사를 합하여 굳게 지키다가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47년 겨울 11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범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48년 가을 7월, 당 고조가 주자사를 보내 고구려와 화친할 것을 권하였다.8월, 백제가 주재성을 공격하였다. 주재성 성주 동소가 항전하다가 전사하였다. 고허성을 쌓았다.
49년 봄 3월, 큰 바람이 불고 흙비가 내렸다. 이러한 날씨가 닷새 동안 계속되었다.가을 7월, 백제 장군 사걸이 서쪽 변경의 2성을 점령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8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50년 봄 2월, 백제가 가잠성을 포위하자 왕이 군사를 보내 격파하였다.여름에 큰 가뭄이 들자,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 기우제를 지냈다. 가을과 겨울에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자녀를 파는 일이 있었다.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52년, 큰 대궐 뜰의 땅이 갈라졌다.
53년 봄 2월, 흰 개가 대궐의 담장 위에 올라갔다.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미녀 두 명을 바쳤다.
그러나 위징은 이를 받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기뻐하며 "저 임읍에서 바친 앵무새도 추운 고통을 말하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황차 가족을 멀리 이별하고 온 두 여자의 처지야 어떻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신에게 맡겨 돌려 보냈다. 흰 무지개가 대궐 우물로 들어갔다. 토성이 달을 범했다.
54년 봄 정월, 왕이 붕어하였다. 시호를 진평이라 하고, 한지에 장사지냈다. 당 태종이 조서로 좌광록대보 벼슬을 추증하고, 비단 2백 필을 부조하였다.[고기에는 '정관 6년 임진봄 정월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당서]와 [자리통감]에는 모두 '정관 5년 신묘에 신라왕 진평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틀린 것이 아닐까?]
•지정 번호; 사적 180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지정일; 1969년 8월 27일
•시대; 신라 진평왕
•분류; 능
•내용; 경주 진평왕릉은 경주 시가지 동쪽 보문동의 평지 가운데에 있는 신라 26대 임금 진평왕(재위 579~632)의 무덤이다. 동쪽으로는 명활산성(사적 47호), 서쪽으로는 낭산(사적 163호)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문사지(普門寺址)가 있다.
진평왕은 본명이 백정(伯淨 또는 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며, 왕비는 마야 부인(摩耶夫人)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 다음으로 재위 기간이 길어 54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지명(智明)・원광(圓光)・담육(曇育) 등이 수・진나라 등에 왕래하였고, 수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당나라와 교류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였다. 즉 이때를 기점으로 삼국 전쟁 시기에 당과 연합할 수 있는 계기를 확고히 만들었던 것이다. 또한 불교 진흥을 위해 힘썼으며, 수도 방위 대책의 일환으로 591년에 남산신성(사적 22호), 593년에 명활산성을 축조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632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평(眞平)’이라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한지의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규모로 보아 이 고분이 왕릉 급인 것은 분명하다. 지정 면적은 4만 3,722㎡[약 13,249평]이다.
진평왕릉은 높이 7.9m, 지름 36.4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무덤 밑 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호석(護石;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남아있다.
•특기 사항; 규모로 보아 왕릉급 무덤임이 분명하며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 진평왕은 신라 26대 임금으로서 성은 김씨, 이름은 백정이다.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이 화백 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579년 8월에 즉위하였는데 키가 11척[약 3m 30㎝]이나 되는 거구였다고 전한다. 진평왕이 얼마나 거구였는지 그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루는 자신이 세운 내제석궁(內帝釋宮)이라는 절에 갔을 때였다. 돌계단을 올라가기 위해 진평왕이 발을 내딛자 체중을 견디지 못한 섬돌 두 개가 한꺼번에 부러졌다. 진평왕은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 돌을 옮기지 말고 그대로 두었다가 후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어라.”라고 했다. 그 후로 성 안에는 다섯 개의 움직이지 못하는 돌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때 부러졌던 돌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진평왕이 즉위한 해의 어느 날 천사가 대궐의 뜰에 내려와 “하늘에 계신 상제께서 왕에게 이 옥대(玉帶)를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천사의 말을 전해들은 진평왕이 꿇어앉아 공손히 옥대를 받으니 천사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로 진평왕은 큰 제사 때마다 이 옥대를 둘렀다고 한다. 그 후에 고구려왕이 신라를 침입하려고 계획하며 신하들에게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서 침범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으니 신하들이 “황룡사(皇龍寺)의 장륙존상(丈六尊像), 황룡사 9층탑, 그리고 진평왕의 천사옥대가 세 가지 보물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 말을 들은 고구려의 왕은 신라를 공격할 계획을 중지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