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묵조사전(震默祖師傳)
<동사열전(東師列傳)>
① 총목차(總目次) | ② 자서전(自序傳) | (원문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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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인(頭輪山人) 구계선집(九階選集) 편차(編次)
『동사열전( 東師列傳 )』 第二
震默祖師傳
祖師。名一玉。號震默。萬頃佛居村人也。母調意氏。
生時。佛居草木。三年萎枯。
人咸曰。間氣而生也。生而不喜葷腥。
性慧心慈。又曰。佛居生佛也。
진묵조사전(震默祖師傳)
조사(祖師)의 법명은 일옥(一玉)이고 호는 진묵(震默)이며,
만경현(萬頃縣) 불거촌(佛居村)에서 태어난 사람이며, 그의 어머니는 조의씨 (調意氏)이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 (佛居村)의 풀과 나무가 3년 동안 시들으니
사람들이 다 말하길,
“ 세상(世上)에 드문 기품(氣稟)을 가지고 타고난 사람이다.”
태어나서부터 냄새나는 훈채(葷菜)와 비린내 나는 고기(腥)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 腥膻; 비닐내, 노린내
성품이 슬기롭고 마음이 자비로우니,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불거촌의 산부처(生佛)이다.”
年七歲。歸全州西方山鳳栖寺。始讀內典。若刃迎觽解。過目成誦。不可師授。
故衆不知。而小沙彌視之。住持者。命燒香禮神衆。
久之。住持夢。神衆齊謝曰。吾儕小神。安敢受佛禮乎。願勿復燒香。得晨夕自便也。
於是。衆噪而爲佛再世也。
나이 7세 되던 해, 전주(全州)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栖寺)에 귀의(歸依)하여 처음으로 불경(內典)을 읽었다.
읽을 때는 마치 칼갓은 뿔송곳(觽)을 만나 해체하듯이,
눈이 스쳐 가기만 하여도 암송(暗誦)하니, 누구도 사사(師事 스승으로 모심)를 해줄 수가 없었다.
대중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범한 사미(沙彌)로 만 바라보앗다.
한번은 주지(住持)가 그에게 향을 사르고 신중(神衆)께 예배를 드리라고 시켰더니,
오래지 않아 주지(住持)의 꿈에 신중(神衆)들이 일제(一齊)히 사양(辭讓)하여 말하길,
“우리 모두는 작은 신(小神)들인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배(佛禮)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다시는 그분께서 향을 사르고 예를 올리지 말게 하여,
저희들이 아침저녁(晨夕)으로 마음 편하게 해 주시오.”
그리하여 대중들은 떠들석(噪)하며, 부처님이 세상에 다시 오신 것이라했다.
鳳栖寺之五里許。有若鳳谷金先生。沙溪先生之高弟也。相與徃來。爭席爭竈。爲方外之交。皆一時魁偉之人也。
先生借與綱目 。使一奚隨之。師於路信手披閱而了一𢎥。輙拋之。奚從而拾之。比及寺。盡覽一部。
他日先生。謂師曰。借書而拋之何也。曰得魚忘筌。先生抽卷試之。無一字錯焉。
봉서사(鳳栖寺)에서 5리쯤 떨어진 곳에 봉곡(鳳谷) 김선생(金先生, 金東準)이 있었는데,
그는 사계(沙溪, 金長生) 선생(先生)의 고제(高弟)였다.
진묵 대사는 그와 서로 더불어 왕래하면서 자리를 다투고(爭席) 사상을 다투며(爭竈)
방외(方外) 사람들과의 교류을 가졌으니, 다들 한 시대의 걸출(傑出)하고 위대(偉大)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대사는 봉곡(鳳谷) 선생에게서 『강목(綱目)』을 빌렸다.
선생은 하인을 시켜 그것을 지고 대사를 따라가게 하였다.
대사는 책을 한 권을 펼쳐 다 읽으면 길에 던져 버리니, 하인은 따라가며 그 책을 주워 담았다.
절에 이르러서, 책 한 벌(部)을 다 읽었다고 한다.
어느날 날 봉곡 선생이 진묵 대사에게 물었다.
“책을 빌려 가지고 가서 내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진묵이 대답하였다.
“고기를 잡고 난 뒤에는 통발을 잊는 법이랍니다.”
선생이 시험 삼아 책을 뽑아 내용을 물어보았더니, 한 글자도 어긋남이 없었다.
<참고자료> ※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원문보기: (디지탈 장서각) |
송(宋)의 사마광(司馬光)이 지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대해 《춘추(春秋)》의 필법에 따라 ‘강(綱)’이란 주자(朱子)가 내린 대요(大要)로서『춘추』의 경문(經文)에 해당하는 것이고 ‘목(目)’이란 주자의 문인(門人)인 조사연(趙師淵)의 주(註)으로 경문에 대한 전(傳)에 해당한다. 전59권 86책(冊)으로, 주희는 생전에 이 책의 완성을 보지 못했고, 그 문인 조사연(趙師淵)이 번천서원(樊川書院)에서 이어 편찬을 완료하였다. |
※ (대순전경에서는 성리대전(性理大全)으로 나온다.(링크) 3:147 전주(全州) 봉서산 아래 게실새 하로는 종도(從徒)다려 일러 가라새대 김봉곡이 시기심이 많더니 하로는 진묵(震黙)이 봉곡(鳳谷)에게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려갈 때 봉곡이 곧 뉘우쳐 찾아갈 줄 알고 걸어가면서 한 권씩 보아 길 가에 버려 절 동구에 이르기까지에 다 보아 버린지라 봉곡이 책을 빌려준 뒤에 곧 뉘우쳐 생각하되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精通)하면 대적(對敵)하지 몯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야지고 유교는 쇠퇴하야지리라 하시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 오라 하니 그 사람이 뒤쫓아 가면서 길 가에 이따금 한 권씩 버린 책을 거두어 온지라 그 뒤에 진묵이 봉곡에게 가니 봉곡이 빌린 책을 돌리라고 청하거늘 진묵이 가로대 그 책은 쓸데 없는 것으므로 다 버렸노라 하니 봉곡이 노한지라 진묵이 가로대 내가 외우리니 기록하라 하고 인하야 외움에 한자의 오착(誤錯)이 없는지라 봉곡이 이로부터 더욱 시기하더니 그 뒤에 진묵이 상좌(上佐)에게 여드레동안 방문을 잠그어 둘 것을 부탁하고 범서(梵書)와 불법(佛法)을 더 연구하려고 시해(屍解)로 서역(西域)에 갔음을 봉곡이 알고 절에 가서 그 방문을 열고 얻지 시체를 방에 갈머두고 혹세무민(惑世誣民)하나냐고 꾸짖어 화장(火葬)하게 하였더니 팔일이 지난 뒤에 전묵이 돌아와서 신체가 없어졌음을 보고 공중에서 소리쳐 가로대 이는 봉곡의 소위(所爲)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精髓)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文明)케 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야 헛되게 되었으니 얻지 한스럽지 않으리요 이제 나는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를 면치 몯하리라 하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西洋)으로 갔나니라 하시니라 |
<증산천사공사기> 9:310 천사(天師)ᄭᅦ서 전주(全州) 봉서산하(鳳捿山下)에 게실새 제자(弟子)다려 일너가라사대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猜忌心)이 만터니 하로는 진묵(震黙)이 봉곡(鳳谷)의게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어가면서 생각하되 봉곡(鳳谷)은 시기(猜忌)가 만흔 사람이니 반드시 후회(後悔)하야 곳 차자가리라 하고 걸어가면서 한 책(冊)식 보아 노방(路傍)에 유기(遺棄)하야 사원(寺院) 동구(洞口)ᄭᅡ지 가기에 모다 보아 버렸더라. 봉곡(鳳谷)이 서적(書籍)을 빌닌 후(後) 과연(果然) 시의(猜疑)하야 가로되 진묵(震黙)은 불법(佛法)을 통효(通曉)한 자(者)라. 만일 유도(儒道)마저 통효(通曉)하면 막능적(莫能敵)이 될 것이오 ᄯᅩ 불법(佛法)이 크게 행(行)하게 되리라 하고, 급(急)히 사람을 보내야 그 책(冊)을 도로 차자오라 하야 그 사람이 ᄶᅩ차가서 노방(路傍)에 잇다금 한 책(冊)식 유기(遺棄)된 것을 수습(收拾)하야 갓더니, 그 후(後)에 진묵(震黙)이 봉곡(鳳谷)의게 간즉 봉곡(鳳谷)이 빌린 책(冊)을 청(請)하는지라. 진묵(震黙)이 가로되 그 글이 무용(無用)함으로 다 버렸다 하니 봉곡(鳳谷)이 노(怒)하거늘 진묵(震黙)이 가로대 내가 구송(口誦) 하리니 기록(記錄)하라 하고 연(連)하야 구송일편(口誦一遍)하니 일자(一字)의 오착(誤錯)이 업는지라. 봉곡(鳳谷)이 이 후(後)로 더욱 시기(猜忌)하더라. |
一日先生。使女奴。餽饌。路見師望空而立。奴致命。
師曰。汝欲有孕乎。奴不應。則師歎其福薄。而恐靈氣之妄泄。遠屛空外。歸語於先生。
其過從之頻數。情誼之默契。類多如此。
하루는 선생이 여자 종을 시켜 음식을 싸서 진묵 스님에게 보냈는데,
여종이 봉서사로 가는 길에 대사께서 허공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종이 심부름 온 연유를 말하자 대사(大師) 왈(曰),
“너 아이를 갖고 싶으냐?”
여종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대사(大師)께서는
그녀의 박복(薄福)함을 탄식하며, 영기(靈氣)가 헛되이 새 버릴까 두려워 멀리 허공 밖에 병풍을 쳐서 막아 버렸다.
여종이 돌아와 선생에게 그 사실을 말하였다. 봉곡 선생과 대사는 서로 수차 가까이 지냈으니
마음으로 말없이 묵묵히 여러번 가까이 지내심이 이와 같았다.
師沙彌時。過昌原馬[上]浦。有童女。見愛而勢不得相從。故遂死而爲男子。
會師於全州之大元寺。而爲侍童。名曰奇[童]。 師愛之。與之遊戱於離樂三昧之中。
經有離樂三昧。誰能認眞於居塵獨耀之際。所以無眼衆僧。尙乞師爲奇春洗麵。
師許。命衆僧。同坐展鉢。令侍者。各投一針於鉢水中。師鉢之針。變爲細麵。飣飣滿鉢。
喫之自若。諸僧之鉢。依舊是一針而已。( ***「上」甲本正誤表作「山」。「童」甲本正誤表作「春」。 )
대사가 사미(沙彌) 시절에 창원(昌原) 마산포(馬山浦 )을 지나는데,
어떤 여자 아이가 사미(沙彌)를 보고 사랑하였으나,
형편상 서로 같이 살 수 없음을 알고는 그 때문에 마침내 죽어서 다시 남자로 태어났다.
그 사내아이는 전주 대원사(大元寺)에서 대사(大師)를 만나 그를 모시는 동자가 되었는데 이름을 기춘(奇春)이라 하였다.
대사는 그를 총애하여 세속의 즐거움을 벗어난 이락삼매(離樂三昧) 속에서 유희(遊戱)하였다.
경전(悲花經)에 이락삼매(離樂三昧)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누가 티끌세상에서 홀로 빛나는 진여(眞如)의 실상을 알겠는가?
그러다보니 지혜의 눈이 없는 중들(衆僧)이 진묵 스님에게 기춘(奇春)이를 위하여 국수(麵)를 말아 달라고 간청하자
대사가 허락하고, 여러 대중들로 하여금 한자리에 둘러앉아 발우를 펴 놓게 하였다.
그러고는 시자를 시켜 각각의 발우 안 물속으로 바늘 하나씩을 던져 넣게 하였다.
그러자 대사의 발우에 담긴 바늘이 가는 국수로 변하여 발우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대사는 태연자약하게 그것을 먹었다. 그러나 다른 스님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바늘 하나씩만 들어 있을 뿐이었다.
師居日出庵。母居倭幕村。以蚊爲苦。師屬山靈。敺蚊於他方。永無蚊子之苦。母沒。歸葬於萬頃北面維仰山。
有掃除酻侑者。輒得農利。故 遠近村人。爭先恐後。至今數百年。封域宛在。香火不絕。
대사는 일출암(日出庵)에 살았고 그의 어머니는 전주 왜막촌(倭幕村)에 살고 계셨는데,
여름만 되면 어머니가 모기(蚊)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였으므로
대사가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모두 다른 지방으로 쫓아 버리게 하였다.
그 뒤로 지금까지 그 마을에서는 모기 때문에 고통받는 일이 아주 사라졌다고 한다.
대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만경(萬頃) 북면(北面) 유앙산(維仰山)에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그 묘소에 벌초를 하고 술과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면, 그 사람의 그해 농사가 풍년이 들곤 하기 때문에 멀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이 남보다 뒤질세라 앞다투어 묘소를 돌보곤 하였다. 그러한 전통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그 묘소는 늘 깨끗하고 향화(香火)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
師尙喜飮。然糓茶則飮。酒云則不飮。有僧漉酒。酒香入鼻。徃問曰。
汝漉甚麽。曰漉酒。師默然退。又徃問曰。汝漉什麽。答之如前。無聊而返。
又徃問之。答以下酒。遂斷望而返。俄有金剛力士。以鐵棒。打漉酒僧。
대사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으나 ‘곡차(穀茶)’라고 하면 마시고, ‘술(酒)’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았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술을 거르고 있었는데, 술 향기가 퍼져 코로 들어왔다. 대사는 그곳을 찾아가서 그에게 물었다.
“스님이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
스님이 대답했다.
“술을 거르고 있습니다.”
대사는 잠자코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다시 가서 물었다.
“그대가 거르는 그것이 무엇이오?”
방금 전처럼 대답하자 대사는 무료하게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대사가 또 가서 방금 전과 같이 물었다.
그러나 끝내 ‘술을 거른다’고 대답하였다. 대사는 마침내 실망하고 돌아왔다.
조금 있다가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철퇴로 술 거르던 스님을 내려쳤다.
師棲於邊山扶安月明庵。侍者有忌。故徃俗家。先判齋供。置卓上而啓之曰。
供養在此。時至自齋。時師在方丈內。推窓而坐。以手加闑。而閱楞嚴經。侍者宿家而來。坐如昨日。風戶噬指而血。
忘却收手。閱經自若。卓供如舊。侍者問侯。師曰。汝不叅祀而徑來耶。盖入首楞三昧。
不知夜之已經也。每夜。自東燈光來照。尋得。乃淸凉山木鳧庵全州地佛燈也。師遂移錫。改爲遠燈庵。
十六羅漢。常與師侍奉。燈光之遠照於[日] 明者。
대사가 일찍이 변산부안군 월명암(月明庵)에 살고 계셨다.
시자의 집안에 제사가 있어서 속가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미리 대사의 공양을 준비해 탁자 위에 놓아두고 아뢰었다.
“공양을 여기 차려 두었습니다. 공양 때가 되거든 챙겨 잡수십시오.”
그때 대사는 방장실에서 창문을 열고 앉아서 문지방에 손을 얹고 『능엄경(楞嚴經)』을 보고 있었다.
시자가 속가에서 묵고 암자로 돌아와 보니, 대사는 어제 그 모양으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대사는 바람이 들이치는 창문에 손이 찍히어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도 손을 거둘 줄도 모르고 태연히 경전만 읽고 있었고, 탁자 위의 공양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시자가 문안 인사를 올리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왜 제사에 참례도 않고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아마도 대사는 수능삼매(首楞三昧)에 들어서 밤이 이미 지난 줄을 모르셨던 모양이다.
매일 밤마다 언제나 등불 빛이 멀리 동쪽에서 비치곤 하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았더니 그것은 청량산(淸凉山) 목부암(木鳧庵), (全州 땅)의 불등(佛燈)의 불빛이었다.
대사는 곧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이름을 원등암(遠燈庵)으로 고쳤다.
십육나한(十六羅漢)이 늘상 대사를 시봉는데, 그 등불 빛을 멀리 월명암(月明庵)까지 비추었던 것이다.
府有一吏。素與師善。欠逋數百。而將欲逃之。來辭於師。
師曰。負逋逃走。豈男兒事。但歸家。判數斗米。却來。供養羅漢。有好道理。
吏去。依敎而來。供養羅漢。謂吏曰。府有闕窠麽。
曰。獄刑吏闕。而甚薄無聊。師曰。勿謂無聊。亟徃自請爲之。而幸無過三十日。吏去。師入羅漢堂。
以杖。次第打羅漢頭曰。
某吏事善助之。羅漢現夢於吏曰。儞有所求。就我言之。何以枉扣於師傅。致我苦耶。
以汝則不顧。師命不可不遵。故視汝事而後無如此。吏知有助。請爲獄吏。旣已獄訟繁興。囚徒盈[陛] 。
三十日內。刷了所[連]。讓任他吏。未幾新吏。拘於徵賂之罪。
전주부(全州府)에 어떤 아전(官吏)이 있었는데, 그는 평소부터 대사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관가의 재물 수백 냥을 사사로이 써서(欠逋) 장차 도망을 가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러 대사를 찾아왔다.
대사(大師) 왈(曰),
“관가의 재물을 빚지고 도주(逃走)하려함이, 어찌 사내가 할 일이겠는가?
그러지 말고 집에 돌아가 쌀 몇 말을 가지고 여기로 오너라.
저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면 틀림없이 좋은 도리가 있을 것이다.”
그 아전이 돌아가 대사가 시킨 대로 쌀을 가지고 왔다.
대사는 시자에게 밥을 지어 나한들에게 공양을 올리도록 시키고는 이내 그 관리에게 물었다.
“관청에 혹 빈자리가 있느냐?”
아전이 대답하였다.
“감옥의 형리(刑吏) 자리가 잠시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봉급이 매우 박하고, 또 일거리도 없는 자리입니다.”
대사(大師) 왈(曰),
“일거리가 없는 자리라 하지 말고, 어서 빨리 가서 그 자리에 자청하도록 하라. 30일을 넘기지는 마라.”
그 아전이 떠난 뒤에 대사는 주장자를 들고 나한당(羅漢堂)에 들어가 나한들의 머리를 차례로 세 번씩 때리고 말하였다.
“저 아전 아무개의 일을 잘 도와주어라.”
이튿날 밤에 그 아전의 꿈에 나한들이 나타나 꾸짖었다.
“그대는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와서 말할 것이지, 어쩌자고 괜히 우리 스승님께 아뢰어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
그대를 봐서는 일을 봐주지 않았으면 딱 좋겠지만, 스승님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르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이번만은 너의 일을 보아 줄 것이니,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라.”
그 아전은 뭔가 도움이 있을 것을 알고 자청해서 옥리가 되었다.
그러자 옥송(獄訟)이 계속 일어나서 죄수가 감옥에 가득(狴)하였으므로,
30일 안에 그 빚졌던 재물을 다 갚고(刷了所編)는 그 자리를 남에게 물려주었다.
얼마 안 되어 새로 온 아전은 뇌물을 먹은 죄로 구속되었다고 한다.
師獨行途中。遇一沙彌。同至樂水川邊。啓曰。小僧先渡。測其淺深。
遂輕輕而涉。師將厲之。身淹水中。沙彌。徑來扶出。始知羅漢見戱。
一偈記之曰。寄汝靈山十六愚。樂村齋飯幾時休。
神[道] 妙用雖難及。大道應[問] 老比丘。
대사가 홀로 길을 가다가 한 사미(沙彌)를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요수천(樂水川) 가에 함께 이르자 그 사미가 여쭈어(啓) 왈(曰),
“소승이 먼저 건너서 물이 얕은지 깊은지 알아보겠습니다.”
사미는 발을 벗고는 동동걸음으로 물을 건너갔다. 대사도 그를 따라 옷도 벗지 않고 건너려다가 그만 물속에 빠지고 말았다.
사미는 얼른 와서 대사를 부축해 내었다. 대사는 비로소 나한의 놀림을 받은 줄 알고 게송 한 수를 읊었다.
寄汝靈山十六愚 영산(靈山)의 어리석은 너희 16인에게 부친다
樂村齋飯幾時休 요수촌(樂水村)의 잿밥 먹기를 몇 때나 그치려나
神通妙用雖難及 그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은 비록 미치기 어렵지만
大道應詢老比丘 대도(大道)는 이 늙은 비구(比丘)에게 물어야 하리라 * 詢 물을 순
師値[泉]少年川獵。烹鮮于溪邊。師俯視沸鼎曰。好箇魚子。無辜而受鑊湯之苦。一少年曰。師欲沾魚羹麽。
師曰。善喫。[小]年曰。這一沙鐤盡喫。師擡銅沙鑼。灌口頓[呼] 。 衆[人] 。 佛戒殺生。豈僧耶。
師曰。殺則非我。活之在我。解衣背水瀉之。無數銀鱗。從後門出。活躍水面。
師曰。好個魚子。遠游江海。勿再罹鑊湯之苦。衆人解綱而去。
한번은 대사가 길을 가다가
천렵(川獵)을 하는 여러 소년들[衆]이 개울가에서 생선국을 끊이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사는 끓는 솥을 내려다보면서 탄식하였다.
“이 좋은 고기들이 죄 없이 확탕(鑊湯)의 고통을 받고 있구나.”
그러자 한 소년이 장난삼아 물었다.
“스님도 이 생선국이 드시고 싶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나도 즐겨 먹지.”
소년(少年)들이 말하였다.
“그러면 이 한 사라(沙鑼)를 몽땅 다 드릴 터이니 스님 마음대로 실컷 드십시오.”
대사는 구리쇠 사라를 들고 입 속으로 몽땅 쏟아 부어 갑자기 들어마셔(頓吸) 버렸다.
무리들 왈(衆曰),
“부처님의 계법에는 살생을 하지 말라 하셨는데 어찌 스님이라 하겠습니까?”
대사가 말하였다.
“물고기를 죽인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이 물고기들을 다 살려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바로 옷을 벗고 물을 등지고 앉아 설사를 하였다.
그러자 셀 수 없이 많은 물고기들이 항문에서 쏟아져 나와 수면 위에서 펄쩍펄쩍 뛰어놀았다.
대사는 그 물고기들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이 잘난 물고기들아, 지금부터는 저 강이나 바다 멀리 나가서 놀고 부디 확탕의 고통을 받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여라.”
그러자 그 소년들은 탄복하고 모두 그물을 걷어가지고 돌아갔다.
師喚侍者。送鹽于寺南婦谷中。侍者曰。送與阿誰。
曰去當自知。侍者持鹽下谷。獵士數人。方膾獐肉。思鹽。不飮而坐。
致鹽于前。皆喜。此必玉老。憐我之飢。活人之佛。谷谷有之者。正謂此也。
언젠가 대사가 시자(侍者)를 불러 말하였다.
“이 소금을 봉서사 남쪽 부곡(婦谷)으로 가져가거라.”
시자가 여쭈었다. “가져다가 누구에게 줄까요?”
대사는 말하였다. “그곳에 가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라.”
시자는 소금을 가지고 부곡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사냥꾼 몇 사람이 막 노루 고기를 저며 놓고는, 소금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먹지 못하고 앉아 있었다.
시자가 소금을 그들 앞에 내려놓자, 그들은 모두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틀림없이 저 일옥(一玉) 노장께서 우리가 배를 곯고 있는 것을 가련하게 여겨서 보내 주신 것이리라.
사람을 살리시는 부처님(活人之佛)이 골짝 골짝마다 계신다고 하더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 이로구나.”
師索水。侍者進溫泔水。接之。含數口。向東方噀之。
後聞陜川海印寺失火。將至沒燒。一陣驟雨。自西而至。注滅之。其雨滴白濁。
粘物成瘢。其寺失火之日。乃師噴水之時也。
어느 날 대사가 물을 찾았다. 시자가 더운 뜨물을 갖다 드리자 대사는 그것을 받아 두어 모금 입에 머금어 동쪽을 향해 뿜어냈다.
뒤에 들으니 그때에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에 화재가 일어났었다고 한다.
온 절이 다 탈 지경이 되었을 때에 갑자기 한 줄기 소나기가 서쪽에서 몰려와 쏟아부으며 그 불을 껐다고 한다.
그 빗방울은 희뿌옇고 끈적끈적하였으며 어디에 묻으면 얼룩이 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해인사에 화재가 있었던 날이 바로 대사가 뜨물을 뿜은 날이라고 한다.
師住上雲菴。神足輩。以乞粮遠出。 月餘乃返。師面上蛛綱。膝間塵堆。爲之掃塵掇絲。通名拜謁。
師曰。儞還一何速耶。師住大元寺(全州地) 每齋。惟以[麥] 和水而食。
諸僧厭薄之。又穢汚其麩。俄有一僧。持飯盂。自空而來。進於師。
師曰。送飯則可。何必親來。僧言小衲。見住大芚海南 方食。飯盂自動。恠而執之。爲神力推引。
到此。師方說請齋之由。僧大異之。請願朝夕供養。拜辭而出。不霎時。還其寺。自是。飯徃盂來者。四年。
師語諸僧曰。汝寺。當遭七世之厄。果至今貧窶云。
대사가 일찍이 상운암(上雲庵)에 머물고 계셨다.
그 제자(神足)들이 양식을 탁발(托鉢)하러 멀리 나갔다가 한 달 남짓 만에 암자로 돌아왔더니,
대사의 얼굴에는 거미가 줄을 쳤고, 무릎 밑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제자들이 먼지를 쓸고 거미줄을 걷은 다음에 다녀왔다고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대사가 말하였다.
“너희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이렇게 빨리 돌아왔느냐?”
대사가 일찍이 대원사(大元寺- 全州地)에 계실 때였다.
대사는 늘 공양 때마다 오직 밀기울[麩]만을 물에 타서 먹곤 하였다.
대중 스님들은 밀기울이 너무 빡빡하다고 싫어할 뿐만 아니라 게다가 그 밀기울을 더럽게까지 여겼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어떤 스님이 밥 발우를 가지고 허공에서 내려와 대사에게 올리는 것이었다.
대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밥만 보내면 될 것을 하필 직접 이렇게 왔는가?”
그 스님이 말하였다.
“소승은 현재 대둔사(大芚寺 - 海南)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막 밥을 먹으려 하는데 발우가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밥그릇을 꽉 붙들었는데, 무슨 신력(神力) 같은 것에 끌려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대사가 비로소 그 공양을 청한 까닭을 말하였다.
그 스님은 아주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아침저녁으로 공양을 올릴 것을 자청하였다.
그 스님이 대사에게 절을 한 다음 하직하고 길을 나서자 삽시간에 본래의 절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년 동안 밥 발우가 계속 오고 가고 하였다.
그때 대사는 대중 스님에게 말하였다.
“너희 절은 장차 7대 동안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더니 과연 대원사는 지금까지 가난하다고 한다.
天啓壬戌。完府松廣。鴻山無量。同時塑像。並請證師。皆不徃。各授一物。置證壇。
以[(木+(旌-方)] 運觀之用。曰必當善成。後勿率爾改塗。且戒曰。量寺化僧。點眼前。愼勿出[沙] 門外。
松寺送柱杖。卓證壇。日夜孤立不倚。量寺送數珠。安證席。珠常呱呱自轉矣。
천계(天啓, 明 熹宗의 연호) 임술년(壬戌 광해군 14, 1622)에 완부(完府 완주군)의 송광사(松廣寺)와
홍산(鴻山)의 무량사(無量寺)에서 동시에 불상(塑像)을 조성하고자 하여 양쪽에서 한꺼번에 대사를 증사(證師)로 청하였다.
그러나 대사는 어느에도 가지 않고 각각 물건 하나씩을 주면서
증명단(證明壇)에 두어 운관(運觀)으로 깃대(旌)을 표시(表)하는 데에 쓰게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훈계하였다. * 상단은 증명단(證明壇), 하단은 부속단(附屬壇)
“그저 이렇게만 하면 두 절의 존상(尊像)은 반드시 다 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완성된 뒤로도 부디 경솔(率爾)하게 개금(改金)을 하지 말라.”
또 경계하며 말하였다.
“더구나 무량사의 화주승(化主僧)은 점안(點眼)을 하기 전에는 절대 사문(寺門) 밖에 나가는 것을 삼가하여라.”
송광사(松廣寺)에는 주장자(拄杖子)를 보내 증명단에 세워 두게 하였는데 밤낮 꼿꼿이 서서 넘어지지 않았고,
무량사(無量寺)에는 염주(數珠, 念珠)를 보내 증명석(證明席)에 올려 두게 하였는데,
염주(念珠)가 항상 딸깍딸깍(呱呱) 저절로 돌아갔다.
鴻山以三千金。獨當三尊之塑費者。常言來叅而過期不來。
化僧。因其[侯]望。不覺出於門外。忽被甲士打之而死。
홍산(鴻山)에서 3천금(三千金)을 내어 삼존불의 불상을 조성하는 비용을 혼자서 다 감당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항상 와서 참례하겠다고 말만 하면서 기한이 다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화주 스님은 그를 기다리면서(徵候 眺望) 깜박하여 사문(寺門) 밖에 나가고 말았다.
그러자 갑자기 어떤 갑사(甲士)에게 맞아 죽었다고 한다.
師吟偈 曰。
天衾地席山爲枕。月燭雲屛海作樽。 천금지석산위침, 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却嫌長袖掛崑崙。 대취거연잉기무, 각혐장수괘곤륜
대사(大師)는 게송(偈頌)을 읊으시니,
天衾地席山爲枕 하늘은 이불이요 땅은 자리이며 산은 베개라네
月燭雲屛海作樽 달은 촛불이요 구름은 병풍이며 바다는 술통삼아
大醉居然仍起舞 크게 취해 슬며시(居然) 일어나 춤을 추노라니
却嫌長袖掛崑崙 긴 소매, 곤륜산(崑崙山)이 걸릴까 염려되누나
一日沐浴。淨髮更衣。曳杖出門。沿溪而行。植杖臨流而立。以手指水中己影。而示侍者曰。這箇是釋迦佛[影]子也。
侍者曰。是和尙影。師曰。汝但知和尙假。不識釋迦眞。遂入室而坐。召弟子曰。吾將逝矣。恣汝所問。
弟子曰。和尙百歲後。宗乘嗣誰。師曰。何宗乘之有。再乞垂示。師不得已而曰。名利僧也。且屬靜老長。遂怡然順寂。
世壽七十二。法臘五十二。癸酉十月二十八日。鳳棲寺。有影像閣。又有語錄板。草衣意恂霽山雲𦤎。校正刊行。
어느 날 대사가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지팡이를 끌고 산문을 나갔다.
시냇가를 따라 거닐다가 지팡이를 세워 놓고 물가에 서서 손으로 물속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하였다.
“저것이 바로 석가불(釋迦佛)의 그림자(影子) 이니라.”
시자가 말하였다.
“저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단지 가짜 스님만 알 뿐 진짜 석가는 모르는구나.”
그러고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하였다.
“나는 이제 떠나련다. 그대들은 무엇이든 물어보라.”
제자들이 물었다.
“화상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누가 종통(宗統)을 이어(乘)받습니까?”
대사는 대답하였다.
“종승이 어디에 있다는 거냐?”
제자들은 재삼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다. 대사는 하는 수 없어 대답하였다.
“명리승名利僧이지만 우선은 정靜 장로에게 부촉한다.”
그러고는 편안히 세상을 떠나시니, 세속 나이 72세였고 법랍은 52년이었다.
그때가 바로 계유년(인조 11, 1633) 10월 28일이었다.
봉서사(鳳棲寺)에 스님의 영정을 모신 영상각(影像閣)이 있고, 또 어록을 새긴 판목(板木)이 있다.
초의의순(草衣意恂)과 제산운고(霽山雲𦤎)가 교정(校正)하여 간행( 刊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