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0-16절. 푯대를 향하여
1. 지난 시간에 바울은 할례당이 자신들의 육체를 자랑한 데 대하여, 자신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지식에 방해거리가 되는 육체의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2. 오늘 이 시간에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푯대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계속 성장해가도록 전진해나간다는 것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New American Standard Bible: that I may know Him and the power of His resurrection and the fellowship of His sufferings, being conformed to His death;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τοῦ γνῶναι αὐτὸν καὶ τὴν δύναμιν τῆς ἀναστάσεως αὐτοῦ καὶ κοινωνίαν παθημάτων αὐτοῦ,
of the to know Him and the power of the resurrection of Him and fellowship of sufferings of Him
직역하면 ‘그와 그의 부활의 권능과 그의 고난들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란 뜻입니다.
따라서 ‘그’라는 단어는 ‘그의’라고 번역함이 좋습니다.
‘알려하여’(γνῶν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know) 단호하고 확실히 알고자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안다’(γινώσκω)는 단어는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συμμορφιζόμενος τῷ θανάτῳ αὐτοῦ,
being conformed to the death of Him
‘본받아’(συμμορφιζόμενος)는 현재분사 수동태이고(being conformed), 원형(συμμορφόω)은 ‘함께’(σύν)라는 전치사와 ‘형태, 모양’이라는 단어(μορφή)가 합성된 것으로 ‘같은 형태를 갖는다’(sharing the same form)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한 형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고 바울이 순교하고자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1. 그 부활의 권능
(1)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영광스러운 부활이었고, 죽음을 영원히 정복한 부활이었습니다.
그의 부활의 몸은 미래에 인간 부활체의 모델이었고, 영생할 몸의 본보기였습니다.
그의 부활의 권능은 바로 이런 것이었고, 장차 성도들은 이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였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였습니다.
(2) 한편 여기서 말하는 부활이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믿는 자의 삶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은 믿는 자 안에 성령으로 들어와 계십니다.
로마서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부활의 권능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도록 합니다(롬 6:4).
로마서 6:4.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그리스도를 단순히 역사적 실재 인물로만 알기를 원치 않고, 부활하셔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살아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활 속에서 실제적으로 체험하기를 원했습니다.
2. 그 고난에 참예함
이 고난도 단순히 그리스도의 대속적 고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께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희생하신 그 희생의 삶, 고난의 삶을 몸 된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롬 8:17-18.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고린도후서 4:10-11.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3.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이것은 '그 고난에 참예함'을 보다 분명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옛사람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내고,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으로 성장해감을 의미합니다.
로마서 6:5-6.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3: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n order that I may attain to the resurrection from the dead.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εἴ πως καταντήσω εἰς τὴν ἐξανάστασιν τὴν ἐκ νεκρῶν.
if by any means I may attain to the resurrection the from dead
‘이르러 하노니’(καταντήσ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I may attain) 확실히 이르러고 하는 것을 가리키고, 원형(καταντάω)은 ‘나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arrive at, reach my destination)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부활’(ἐξανάστασιν)이란 단어는 일반적인 부활이란 단어(ανάστασις)보다 더 강한 단어로서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 완전한 부활을 경험하면서 부활하는 것’(rising up to experience the full-impact of resurrection, i.e. thoroughly removed from the realm of death)을 가리킵니다.
1. 육체적인 부활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부활, ②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모든 성도가 부활하여 주님을 영접하는 것, ③ 천년 왕국 이후에 모든 불신자가 부활하여 최후의 심판을 받는 것.
요힌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사도행전 24:15.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고린도전서 15:22-24.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사도 요한은 모든 성도들의 염원인 첫째 부활을 예언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0:4-6.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2.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과 죽음을 당한 후에 부활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어찌하든지 순교하고 싶다는 말인가 하고 잘못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울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찌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고 싶고, 그럴 때 주님의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즉, 앞에서 바울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것들을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자랑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희생할 때, 자신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는 체험을 계속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예컨대, 물질을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때, 물질생활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건강을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때, 우리의 육신에 주님의 권능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앞에서 자신의 여러 가지 자랑을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의 죽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명예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혈통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돈을 자랑하는 사람은 돈에 대해서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죽일수록 예수님의 권능이 자기를 통해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얼마나 희생하느냐에 따라서,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우리 삶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희생하지 않고 복만 받으려는 사상은 성경과는 반대되는 사상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서 더욱 희생할까 하는 사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좀 더 시간을 바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좀 더 물질을 바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 좀 더 내 몸을 바칠까?
만약 예수 믿으면서도 이런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자기 유리한 대로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사람이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닌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권능을 맛보시려면, 반드시 주님을 위한 고난에도 참여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지 아니하고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자 하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하나님의 권능을 맛보기 위해서 자기가 이 땅에 있을 동안 최선을 다하여 희생하기를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Not that I have already obtained it or have already become perfect, but I press on so that I may lay hold of that for which also I was laid hold of by Christ Jesus.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οὐχ ὅτι ἤδη ἔλαβον, ἢ ἤδη τετελείωμαι,
not that already I have obtained, or already I have been perfected
‘얻었다’(ἔλαβον)는 부정과거로서(I have obtained) 확실하게 얻는 과거의 사실을 가리키고, 원형(λαμβάνω)은 ‘잡다, 얻다’(take, receive)는 뜻입니다.
‘온전히 이루었다’(τετελείωμαι)는 완료수동태로서(I have been perfected) 이미 완전히 이룬 것을 나타냅니다.
오직--잡으려고 좇아가노라
διώκω δὲ, εἰ καὶ καταλάβω ἐφ’
I am pursuing however, if also I may lay hold of
‘잡으려고’(καταλάβω)는 부정과거 가정법 동사로서(I may lay hold) ‘잡을 수 있으면 잡으려고’란 뜻이고, 원형(καταλαμβάνω)은 전치사 ‘관하여’(κατά)와 동사 ‘잡다’(λαμβάνω)의 합성어로서 ‘강하게 붙잡는 것’(aggressively take)을 가리킵니다.
‘좇아가노라’(διώκω)는 현재형으로서(I am pursuing) 현재 좇아가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ᾧ καὶ κατελήμφθην ὑπὸ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that also I was laid hold of by Christ Jesus
‘잡힌 바 된’(κατελήμφθην)은 부정과거 수동태로서(I was laid hold of) 과거에 확 잡힌 것을 나타냅니다.
1. ‘이미 얻었다’(ἤδη ἔλαβον: already I obtained)는 것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가리키고(에베소서 2:6),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οὐχ ὅτι ἤδη τετελείωμαι: not that already I have been perfected)는 것은 아직 그 구원이 육신의 부활을 통해서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잘 아는 대로 구원의 과정에서 ‘이미 구원 받았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구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현재 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나를 구원해주셨는데, 나는 육신의 부활 때까지 아직도 붙잡힌 구원을 위해 좇아가고 있는 현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의롭게 된 것(justification)이 사실이지만, 성화의 과정(sanctification)은 일생을 통해서 고저를 그리면서 진행되고, 죽어서 주님 앞에 갈 때 영화가 완성(glorification)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순간에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된다는 완전주의(moral perfectionism)는 잘못된 것인데, 당시 빌립보 교회에도 이런 이단이 침투했고, 오늘날 구원파도 그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고 한 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그리스도에게 붙잡혀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으나, 그 후로 바울은 자기를 붙잡으신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사명을 감당해가고 있습니다.
즉 주님은 이미 우리를 붙잡으셨고, 우리도 주님이 붙잡으신 목표를 행해서 매일 기도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전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영생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이 영생과 부활은 성도들에게 주시기로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아직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하고, 성도의 삶은 부활과 영생을 향해 달음질하는 삶입닏다.
즉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즉 법적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도 장차 나타날 이 완전한 구원을 위해 믿음의 달음질을 성실히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기도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이것은 바울이 이미 구원 얻은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할 목표, 즉 예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함에 이르도록 달려가야 할 목표 사이의 긴장 관계를 나타냅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예수 믿을 때, 완전해졌으므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구원파는 잘못된 것입니다.
4.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났던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믿음의 경주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서, 바울은 그의 소원대로 완전함에 이르기 위하여 믿음의 경주 즉 영적 성장을 향해 계속해서 달음질해야 합니다.
5.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여기서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는 단어는 사냥이나 달리기 경주에서 목표물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나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바울 사도가 온전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처럼 자신을 구원해주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충성해야 할 것입니다.
6.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라’란 말은 아직 완숙한 자리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바울 사도쯤 되면, 완벽한 자리에 들어간 분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바울 자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위에 훌륭하신 장로님이나 권사님을 보면, 저분 정도면 달관의 세계에 들어갔을 것이다 싶은데, 그분들에게 물어보면 전혀 그렇지 못하다고 고백을 하십니다.
오히려, 그런 분일수록 자기의 부족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분일수록, 교회에서 오랫동안 일을 많이 하신 분일수록 자신의 무능과 부족을 많이 고백하는 겸손하신 분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과 대화를 해보면 부담이 없습니다.
자신의 부족과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족한 모습대로 다가가도 편안하게 엄마와 아버지같이 포근하게 대해주십니다.
7. ‘온전히 이룬다 함’은 에베소서 4장에서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온전케 해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즉, 성도를 온전케 해서, 봉사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이고, 교회를 점점 더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어느 때나 어디서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라면, 용서하고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면, 가련한 자들을 돕고 바리새인처럼 마음 아프게 안 하셨을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활의 사람으로 영화롭게 될 때까지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내가 얻었다 함도 아니요,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자기는 죽고, 온전히 주님만 드러내는 그런 자리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훌륭한 분도 어떨 때는 자기가 튀어나오고, 주님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도행전 15장 뒷부분에 보면, 바울은 자기의 은인과도 같은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같이 선교 사역을 못하고, 갈라서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어느 신학자(우치무라간조:内村鑑三)는 <바울의 결점>이라는 책을 써서, 바울처럼 훌륭한 분에게도 수많은 결점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놓았습니다.
이처럼, 바울의 결점들을 죽 나열해놓고서, “바울은 나의 선생님이요, 루터는 나의 형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같이 주님의 은혜를 많이 체험한 분도 자기의 부족을 많이 실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점들이 많은 바울과 루터를 존경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부족을 많이 느끼시는 분일수록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을 수 있는 분임을 알고,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이미 자만심으로 부요한 사람은 주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마음의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는 비고 비인 마음을 가지시고, 거저 주시는 은혜로 가득한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8. 바울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완전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구원파 사람들이 대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제 예수 믿고 완전해졌으므로, 죄를 안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개가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기 전에는 육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완전히 벗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장 9절에서 소아시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죄 없다 하면 거짓말하는 자라”고 하면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같이 훌륭한 분도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했으며, 고린도전서 15장 31절에서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까지 말했습니다.
구원파 사람은 “우리는 날마다 항상 감사와 찬송 뿐이라”고 하는데, 믿음이 어린 분들은 그런 구원파 사람을 보면, “와, 굉장한 세계가 있구나”라고 오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과 예수 믿는 것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구원파는 한국에서 30여 년 전에 생겼지만, 우리 교회는 수천 년의 정통 신앙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런 구원파는 완전주의입니다.
최초로 경상북도의 한 장로교회에서 강도사로 있던 권신찬이란 사람이 완전주의 운동을 해서, 따로 이단을 만든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완전주의 운동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즘 교회는 다 썩었고 엉터리다”라고 경솔하게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와 같은 교단이 아니고, 자유주의 노선을 가고 있는 다른 교단 교회라고 할지라도, 정말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올바로 믿음 생활을 하시는 일반 성도님들이 참 많은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9. “오직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 가노라”는 이 문장은 언뜻 생각해 보면 말이 성립 안 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나를 이미 붙잡으셨는데, 왜 또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으려고 쫓아가야 하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내용을 설명할 때 잘 들으시고 이해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확신할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내가 아무리 못나고, 죄가 많아도,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나를 선택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날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모든 죄가 용서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내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가 착하거나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하시고, 오직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짊어지셨고, 성령님이 책임지시고 천국까지 데리고 가시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꽉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손에서 빠져나갈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28-29절에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그리고 지옥에 가지 않도록 꽉 붙잡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혹시, 인간은 악감이 생기면, 비록 부모라도 자식을 버릴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된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시편 27편 10절에,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처럼, 바울이나 여러분이나 그리스도께 붙잡힌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아직도 그리스도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 기본 교리에 있어서 중요한 진리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표현으로서는 “이미”(already)와 “아직”(yet--not)의 구조라고 말합니다.
즉, 이미 구원을 얻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이 두 가지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이미 우리는 영생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늘 시민권자가 되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하늘에 앉히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 우리는 여전히 세상 나라에 살고 있으며, 우리는 죽음도 맛보아야 하고, 세상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현재 이중구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완성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닮기 위해서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한 것이고, 모든 율법 규정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의를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그리스도께 붙잡혀 구원받았지만, 성경의 모든 의를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서 열심히 쫓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만일, 뼈대 있는 집안의 자녀가 그 집안 자녀답게 살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욕을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하나님을 닮은 생활을 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흉을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 붙잡혀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아직은 그리스도처럼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날마다 기도하여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우리가 푯대를 향해 살아갈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다음절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3절.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rethren, I do not regard myself as having laid hold of it yet; but one thing I do: forgetting what lies behind and reaching forward to what lies ahead,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ἀδελφοί, ἐγὼ ἐμαυτὸν οὐ λογίζομαι κατειληφέναι·
brothers, I myself not do consider to have taken hold of
‘나는’(ἐγὼ ἐμαυτὸν)은 ‘자 자신은’이란 뜻으로서 매우 강조되어 있습니다.
‘잡은 줄로’(κατειληφέναι)는 완료 부정사형 동사로서(to have taken hold of) ‘이미 잡을 줄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지 아니 하고’에서 동사(λογίζομαι)는 현재형입니다(consider).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ἓν δέ, τὰ μὲν ὀπίσω ἐπιλανθανόμενος,
one thing however, the things indeed behind forgetting,
직역하면 ‘그러나 한 가지 일, 뒤에 있는 것들은 참으로 잊어버리고’란 뜻입니다.
‘잊어버리고’(ἐπιλανθανό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forgetting) 현재 잊어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τοῖς δὲ ἔμπροσθεν ἐπεκτεινόμενος,
the things but ahead reaching forward
직역하면 ‘그러나 앞에 있는 것들을 잡으려고’란 뜻입니다.
‘잡으려고’(ἐπεκτεινόμενος)는 현재분사로서(reaching forward) 계속 잡으려고 나가는 모습을 가리키고, 원형(ἐπεκτείνομαι)은 ‘위로’(ἐπί)란 전치사와 ‘확장하다, 손을 뻗다’란 동사(ἐκτείνω)의 합성어입니다.
1. 이것은 마차 경주자의 모습에 비유한 것으로서 ① 잡을 줄로 여기지 않고, ②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③ 잡으려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직 목표물(부활과 영생)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뒤엣 것이란 과거 불신자로서의 잘못이나 복음전도의 성과를 잊는다는 것이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은 ‘한 일’(ἓν, one thing)로서 오직 전진에만 몰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2. ‘잊어버리고’(ἐπιλανθανόμενος)는 과거의 기억이 자신의 관심을 빼앗아 진보를 방해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의미하고, 바울이 과거 유대인으로서의 특권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루어 놓은 업적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목표를 붙잡기 위해서 전력 질주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3. 바울이 자신의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주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아가라고 강조한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이 자신들이 받은 은혜와 봉사가 완전한 것처럼 생각하는 완전주의자들(moral perfectionists)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1) 물론 빌립보 교인들이 은혜받은 것이 남달랐고, 그래서 다른 교회들보다도 바울을 위한 선교 헌금도 많이 보내주고, 헌신 봉사에 모범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지난 과거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앞으로 전진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2) 그렇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한 업적도 잊어버려야 새롭게 전진할 수 있고, 과거에 실수한 잘못도 잊어버려야 용기 있게 전진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 성공했던 일들은 감사함으로 잊어버려야 합니다.
지난날에 “믿음 생활 잘했지. 봉사도 기가 막히게 했고, 기도와 성경교육과 전도도 잘했지”라고 하면서, 옛날 것을 자꾸 울거먹으면, 교만해져서 새로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어떤 교단 사람은 과거에 신사참배 하지 않은 것을 여러 성도들만 모이면, 자랑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일제 강점기 때의 험악한 분위기에서 신사참배를 안 한 것은 너무도 훌륭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꾸 울거먹으면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교단을 갈라놓는 것은 잘한 일이 못 됩니다.
저희 고향 교회에는 지금 93세 되신 장로님(김권수)이 계십니다.
이 어르신은 일본 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안 하기 위해서 감옥에 두 번이나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일본 순사가 고문하느라고 손톱 밑에 대나무 못을 박으면서 신사참배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이겨내셨습니다.
그리고 해방되어서, 출옥 성도들 중에 전국적으로 한상동 목사님과 김창인 목사님 등 겨우 몇 분들 중에 한 분으로서, 너무도 유명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교역자들이 교역을 그만두고 교회에 목회자가 없을 때, 한 번에 5군데 교회를 돌보시기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잘 아는 것은 제 아버님이 그 장로님의 제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토록 유명하신 어르신이 지금껏 자신을 자랑하신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저희 고향 교회는 내년(2003년)이면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됩니다.
그런데도, 지금껏 이 훌륭하신 장로님이 살아생전에 축하하지 못 하게 하셔서 한 번도 축하나 공로패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장로님의 자제분들이 6남매신데, 두 아드님은 장로님이시고, 한 분은 목사님이시고, 따님들은 모두 권사님들입니다.
(3) 또한, 우리는 과거에 실패했던 기억도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한 것은 하나님이 잊어버리시고, 그 죄악의 기록을 도말해버리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큰 실수를 했는데, 어찌 몇 마디 말로 자백했다고 용서해주실까?” 하며 의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 요한일서 1장 9절에는 분명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처럼 못난 사람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자기처럼 생각해서,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좀처럼 용서를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말로는 용서한다고 해놓고, 다시 그런 기회가 오면, “전에도 그런 짓을 하더니, 또다시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서, 옛날 것을 들추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 하나님도 그런 줄로 오해합니다.
실패를 잊지 못하면, 좌절감에 사로잡혀서 다시 그런 일을 못합니다.
결혼에 실패한 사람은 다시 사람 사랑하기가 무섭고 믿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 수영하다가 죽을 뻔한 사람은 다시 그곳에 들어가기가 무섭습니다.
어느 곳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한 사람은 다시 그곳에 가면 저절로 발에 쥐가 난다고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잊을 수 없으면, 잊어버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뒤에 것을 잊어버려야 전진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를 바라보면서, 푯대를 향해 전진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14절.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I press on toward the goal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
κατὰ σκοπὸν διώκω εἰς τὸ βραβεῖον τῆς ἄνω κλήσεως τοῦ Θεοῦ ἐν Χριστῷ Ἰησοῦ.
toward goal I press on for the prize of the upward calling of the God in Christ Jesus
‘달려가노라’(διώκω)는 현재형으로서(I press on) 현재 계속 달려나가는 것을 가리키고, 원래 뜻은 ‘추구하다, 박해하다’(pursue, persecute)는 의미입니다.
‘푯대를 향하여’(κατὰ σκοπὸν: toward goal)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1. 여기서 ‘푯대’란 성도들이 장차 받을 상급으로서 썩지 않는 영생이고,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운 자에게 주시는 면류관입니다.
디모데후서 4:7-8.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2. 바울이 달음질하는 목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이 부르심의 상은 구원의 완성 곧 부활과 영생입니다.
그것은 '완전 성화'나 ‘영화’라고 하는데, 이것은 이미 법적으로 얻은 의가 장차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βραβεῖον: prize)이란 경주의 승리자에게 주어진 보상으로서의 상을 가리킵니다. (the reward awarded to a victor)
3. 설교자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말한 대로, 경주자가 달음질할 때 바라보아야 할 것은 푯대이고, 관중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혹 거리끼는)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 '위에서 부르신 부름'이란 경주의 승리자가 상을 받기 위해서 심판관 앞에 있는 높은 단으로 올라가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에게 상을 주시는 분은 높은 하늘 보좌에 앉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름의 상’(βραβεῖον κλήσεως: prize of calling)이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받을 구원의 완성으로서 영생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보상과 댓가’(reward, wage)로서의 상(μισθὸς)은 핍박을 이긴 데 대한 보상, 구제나 주의 종들을 대접한 데 대한 보상, 복음 전도자에 대한 상급 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구원은 이런 보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4: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μισθὸς)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μισθὸς)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μισθὸν)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0:41-42.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μισθὸν)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μισθὸν)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μισθὸν)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고린도전서 3: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μισθὸν)을 받으리라.
요한이서 1: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μισθὸν)을 얻으라.
5. 성도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앙의 달음질을 성실히 행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영생과 부활입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로 완전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완전 성화를 향해, 그 부활과 영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한편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는 영생 구원 이외에 선하신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상급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6. 푯대를 향하여
이것은 '푯대를 똑바로 쳐다보고'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경주자가 시선을 뒤에나 옆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푯대만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달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갔듯이 우리들도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가기 바랍니다!
사람을 바라보면,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볼 때, 교만하게 되고, 나보다 앞선 사람을 보면, 낙심되기 쉽습니다.
오직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7.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상'은 경주를 다한 후에, 천국에서 주님께 받을 칭찬과 상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 19장 15-17절에는, 받은 직분에 충성하여 상급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 준 종들의 각각 어떻게 장사한 것을 알고자 하여 저희를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마태복음 25장 19-21절에는 받은 은사를 따라 충성하여 상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구원은 믿음으로 거저 받지만, 상급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성에 따라서 받습니다.
아무쪼록, 바울처럼 세상 것과 뒤에 것은 다 잊어버리고, 온전하신 주님이신 푯대를 향해 달려나가심으로 모두 상급을 받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Let us therefore, as many as are perfect, have this attitude; and if in anything you have a different attitude, God will reveal that also to you;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Ὅσοι οὖν τέλειοι, τοῦτο φρονῶμεν·
as many as therefore mature, this we should think
’생각할지니‘(φρονῶμεν)는 현재 가정법 동사이고(should be of mind) 원형(φρονέω)은 ‘분별력을 갖다, 생각하다, 판단하다’( have understanding, think, judge)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καὶ εἴ τι ἑτέρως φρονεῖτε,
and if anything differently you think
‘생각하면’(φρονεῖτε)은 현재형입니다(you think).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καὶ τοῦτο ὁ Θεὸς ὑμῖν ἀποκαλύψει·
even this the God to you will reveal
‘나타내시리라’(ἀποκαλύψει)는 미래형입니다(will reveal).
1. 여기서 '온전히'(τέλειοι, mature)란 더 이상의 노력이 필요치 않은 절대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전의 연약과 무지에 비하여 꽤 성장한 상대적 완전으로서, 더 높은 목표를 향한 노력의 여지가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고전 2:6; 14:20; 엡 4:13; 골 1:28; 4:12).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골로새서 4: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룬 자'가 되었으나,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의를 얻은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아직>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해가야 할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푯대 되신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성경을 순종해가야 합니다.
2.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혹시 빌립보 교인들 중에 바울과 신앙 사상이 다른 사람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그들을 바로 가르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바울과 다른 현재 상태를 옳게 여겨 교만하지 말고, 겸손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배우도록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처럼 바울을 잘 돕는 교회가 없으면서도, 그런 좋은 교인들을 향해서도, 혹시 자기와 사상이 다른 사람이 있으면, 서로 싸우거나 대항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연구하고 신앙생활을 더 해보라고 겸손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여간 싸움은 금물입니다.
그냥 지나가면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입니다.
3: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however, let us keep living by that same standard to which we have attained.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πλὴν εἰς ὃ ἐφθάσαμεν,
however to that which we arrived,
‘이르렀든지’(ἐφθάσαμεν)는 부정과거로서(we arrived) 과거에 어디에 이른 분명한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대로 행할 것이라
τῷ αὐτῷ στοιχεῖν,
by the same to walk,
직역하면 ‘똑같이 행하도록 (하라)’이란 뜻입니다.
‘행할 것이라’(στοιχεῖν)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to walk).
1. ‘어디까지 이르렀든지’란 서로 신앙의 성숙도가 달라서 서로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에라도, 오직 예수님을 푯대로 바라보고, 완전한 데까지 성장하도록 전진하라는 뜻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과 다른 입장을 가진 완전주의자가 있더라도, 그런 신자들이 바울의 신앙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들도 바울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고 전진하라는 뜻입니다.
‘똑같이 행한다’는 것은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우리와 동일하게 완전한 데 이르도록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지는 뜻입니다.
2. 비잔틴 사본(Byzantine Majority)이나 희랍교회 사본(Greek Orthodex Church)에는 <κανόνι τὸ αὐτὸ φροινεῖν>( rule the same to think)라는 ‘같은 규칙을 생각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비록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지라도, 그 성숙의 정도가 서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저 싸우지 말고, 믿음의 분량대로 최선을 다해 영적 성장을 이루어가라고 가르칩니다. (히 6:11,12)
특히 '그대로 행할 것이라'(τῷ αὐτῷ στοιχεῖν, by the same to walk)는 말은 '동일한 보조로 행하라', '일치하게 행동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번 성도들 상호간에 성숙과 의견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나갈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푯대를 향해 전진해갑시다!
서로 성도간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비교하지 맙시다.
그래서, 부족한 성도를 보고, 교만하지 말고, 나와 다른 성숙한 성도를 보고 비판하지 맙시다!
우리가 어떤 신앙 정도에 이르렀든지, 오직 푯대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전진해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한 상태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의의 말씀을 순종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