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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북경과 장가게를 다녀오면서
Ⅰ. 서 론
2004년 1월12일 4박 5일간 중국의 수도 북경과 수려한 산수가 우거진 장가게를 다녀오게 되었다. 겨울이라 날씨가 매서울 정도로 추운날씨를 무릅쓰고 이제 중국 대륙을 5번째로 가게 되었다.
중국의 남방항공을 타고 북경까지는 약 1시간 넘을 정도로 멀고도 가까운 거리였다. 인천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밟으며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해외 나드리를 떠나고 있으며, 오히려 외국인은 적은편이어서 외화 낭비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며 한편으로는 인생 견문을 넓히고 한정된 울타리 속에서 학생들을 대하다 보면 견문 넓히기의 필요성도 절감하였다. 그저 잠시 머리를 식혀보고자 하는 마음과 인생의 여정이라 생각하고 떠나게 되었다.
이제 첫 번째는 대한의 아들로 국토방위의 임무 수행으로 월남전에 참전(2년)하는 일이고, 2번째는 미수교시 상해, 북경, 홍콩, 대만을 거쳐 오는 여행이었고, 3번째는 유럽의 영국, 독일 룩셈브룩크, 독일, 스위스, 이태리 등 교육부 주관 연수차 출국이었다. 4번째는 상해, 소주, 항주이며, 이번 해외 여행은 5번째로 그 유명하다는 북경시내의 관광과 장가게의 출국이었다.
4박5일간 북경, 장가게를 다녀오면서 보고 느낀점, 그리고 심층 분석 등으로 기록으로 남겨 보고자 북경의 천안문, 자금성, 명13능, 천단공원, 이화원, 해상박물관, 만리장성등 관광지와 장가게의 천자산 풍경, 하룡공원, 십리화랑, 인공호수인 보봉호, 황룡동굴, 토가족의 가무쇼 등을 보고 오면서 그 지역의 특성과 관공지의 특징을 서술하여 보고자 한다.
Ⅱ. 여행의 개요
1. 여행기간 : 2004. 1. 12일부터 1월16일 (4박5일)
2. 주관여행사 : 미래관광(주)
3. 참석자 : 박승수, 김천식, 권혁진, 이동현, 홍성웅, 정종숙, 장경래, 유인반, 이동철, 권닥꺼 등 내외와 한국 가이더 등 17명
4. 여행지 : 1일차 인천, 북경-부국해저세계, 천단공원, 서커스관광, 2일차 만리장성, 명13능, 이화원, 장가게 도착, 3일차 천자산 등정, 하룡공원, 백룡엘리베이터하산, 발맛사지 4일차 인공호수인 보봉호, 황룡동굴, 토가족 문물 박물관 장가게 출발 북경 도착, 5일차 천안문광장, 자금성, 인공산인 경산공원, 동인당 약국, 지하철, 쑈핑 후 귀국
5. 숙박지 : 1일차 북경 전문건국호텔, 2일차 장가게 민남국제호텔, 3일차 장가게 긍립호텔, 4일차 북경 전문건국호텔
Ⅲ. 북경시내 둘러본 관공지
1. 중국 북경의 개요
하복평야의 산기슭에 있는 대도시 북경. 인구 800만 명의 이 도시는 중국의 수도로서 천년의 도읍지이다. 옛 도시의 이미지가 곳곳에 남아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근대적인 건물이 여기저기 세워진 모습은 근대화를 지향하는 중국의 수도에 걸맞게 전통과 현대가 함께 공존하고 있다. 왕조가 무너져도 수많은 역사적 산물이 당당하게 버티고 있길래 그것들은 별 위화감 없이 잘 융화되고 있다. 역사라는 무거운 분위기가 생활에 가깝게 전해져 오는 도시이다.
중국 수도이며. 직할시이다, 화베이평야의 북단 둥베이, 몽골고원과 화베이를 잇는 요지에 있다, 베이징의 지형은 북서쪽으로 높고 남동쪽으로 낮으며, 북부와 서부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발해 쪽으로 평지가 펼쳐져 있다. 서부의 산지는 타이항산맥의 한 지맥인 시산이고, 북부는 옌산산맥에 속하는 쥔두산이다. 베이징의 하천은 하이허강의 지류로서, 북서에서 남동으로 흐르는 용딩강과 남류하는 자오바이강 등 두 하천이 중요하다. 기후는 겨울은 한랭하고 건조하며, 여름은 무덥고 비가 많다. 1월평균기온은 -4.6℃, 7월평균기온은 25.9℃, 연강수량은 645.2㎜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베이징의 도시건설은 급속히 발전하여, 신축건물이 급증하여 뚜렷하게 시가지가 확대되고 있다. 옛날의 성벽은 철거되고, 폭이 40∼100m로 확장된 장안가는 옛 성 바깥쪽 동·서로 연장되어 40㎞나 된다. 그 중심인 톈안먼 부근은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광장으로 정비되었으며, 인민대회당·중국역사박물관·중국혁명박물관 등이 건설되었다
산업으로는 공작·농업기계, 철도차량, 자동차, 전기, 전자기기, 합성섬유, 플라스틱 등의 중화학공업 및 면방적·양모방적·식품·의약·인쇄·제지 등의 경공업이 들어서 있다. 시산에는 풍부한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고 최근 채탄의 기계화에 의해 급격하게 산출량이 증가하고 있다.
스징산구에는 큰 제재소가 있고, 제강·압연 등의 공장과 각종 관련원료를 생산하는 공장도 세워져서 대철강콤비나트를 형성하고 있다. 남쪽 교외에는 장신뎬기차공장 외에 농업기계·교량·자동차부품 등의 공장이 있고, 동쪽 교외에서는 국립면방적공장 등이 조업하고 있다. 전통공업으로서는 경태람·옥기·상아조각·칠기 등 고래의 정교하고 치밀한 공예품이 있다
베이징은 전국철도망의 대중심을 이루며, 징광·징선·징바오·징청·징후 등의 철도가 전국 각지와 연결된다. 베이징 북동쪽 30㎞ 지점에 있는 순이현에는 베이징 수도공항이 있으며, 국내의 주요 도시 외에 세계 각지와 연락한다. 시내의 교통은 주로 버스와 트롤리버스이며, 도로와 녹지도 정비되어 있다. 1970년에 베이징역∼빈과원간의 지하철이 개통되었고, 84년에 창춘가에서 이 지하철과 갈아탈 수 있는 환상선이 완성되었다,
북경은 학술·문화의 중심으로서, 중국과학원과 중국사회과학원의 각 연구소를 비롯한 각종 연구기관과 베이징대학·칭화대학·베이징사범대학·베이징인민대학·중앙민족학원 등 많은 고등교육기관이 있고, 서교 문교지구의 중심에는 과학대회당 등 학술회의장도 설치되어 있다. 문화시설로는 중국역사박물관·중국혁명박물관·베이징도서관·노동인민문화궁·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베이징전람관·농업전람관·베이징동물원 등이 있으며, 베이징공인체육장·베이징체육관 등의 스포츠시설도 정비되어 있다. 역사적 도시 베이징에는 명승고적이 많이 있다.
옛 성내의 중심, 쯔진청은 명·청나라 때의 황궁으로 고궁박물원으로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남문 밖에는 태묘·사직단이 마주보고 있다. 그 남쪽에 쯔진청을 포함한 황성 전체의 정문인 톈안먼이 있다. 고궁 서쪽에 있는 북해·중해·남해는 북쪽의 십찰해에 이어지는 연못으로서, 황성의 정원으로서 만들어졌다. 옛 외성의 동부에는 명·청나라 때의 제장인 톈탄이 있다. 그리고 쯔진청 북문인 지안문 밖에 있는 종루·고루는 원나라 때의 대도의 중심이었다.
2. 북경에서 가본 곳
1. 부국 해저세계(해저박물관)
북경 국제공항에서 내려 제일 먼져 시내에 있는 해저 박물관을 견학하게 되었다. 겨울이라 호수는 얼음으로 덮혀 있으며 얼음 속에는 각종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동 벨트에 몸을 실코 가이더의 안내로 관람하게 되었다. 해저 박물관 내부는 두꺼운 유리관으로 연결되어 각종 물고기들이 살기에 적합하도록 수중 환경을 조성하고 각종 물고기들이 위에서 좌 우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우리나라 63빌딩의 해저 박물관과 흡사하였다. 수중에서 사육사들이 물고기들의 생활상을 관리하고 먹이를 주고 있었다. 한 마리 매운탕을 끌이면 잘 먹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곳 역시 중국의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점이 있었다. 악세사리를 처자 몰래 하나 샀다. 그러나 사고 호텔에 오니 기념품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2. 천단공원
해저 박물관을 나와 우리는 천단공원으로 향하였다, 중국의 고층 건물에 많은 시민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여흥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천단 공원에 도착한 나는 2번째로 오는 곳 이였다. 그래도 색 다른 점이 있으며 몇 년전 왔을 때와 기분이 달랐으며 낯설지 않고 기역이 되살아났다.
천단공원은 옛날 명.청대의 황제가 하늘에 오곡풍년을 빌었던 곳으로 고대 건축물이 있다. 이 공원은 북부가 원형이고 남부는 사각형이며 주변을 붉은색 벽으로 둘러싸고 있고 동서남북에 문이 있다.
기년전은 3층의 지붕이 있는 원형의 목조건축물로 천단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은 건물로 명대인 1420년에 세워져 1896년에 재건되었다. 내부 중앙에는 원형의 돌이 있는데 거기에는 자연의 용무늬가 있다. 천단 최상단의 중심점 위에서 작은 소리로 이야기를 하면 이야기를 한 그 사람에게는 자기의 목소리가 반사되어 확실하게 다시 들린다.
단은 명,청 시기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이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15세기 초 명나라때 천지단을 건조하여 하늘 땅에 함께 제사를 지냈는데 중엽에는 사방 교외에서 각각 하늘, 땅, 해, 달에 제사 지내는 제도를 실행하였다. 이곳은 전문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제공되었으므로 천단이라 명하였다. 청나라 때 확장하여 현재 중국에서 보존되고 있는 최대 규모의 제단 건축군이다
원구단은 한백옥석 난간으로 둘러싼 3층 석조 원대로서 높이 5m,옥처럼 희여서 그야말로 장관이다. 명 청시기 매년 동지날 황제가 친히 이 곳에 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하늘, 상재가 하사한 풍년과 태평에 감사를 드리고 또 내년의 국태 민안을 기원하였다. 원구단 상층 단면의 중심석을 천심석이라고 한다. 중심석에서 밖으로 층마다 9환의 부채형 석판을 깔았는데 환마다 9개씩 더 가하여 도합 3402개이다. 이 석판은 크기가 같고 모양이 같으며 빈틈없이 밀접시켜 수백년 비바람에 침식되었어도 여전히 평평하다. 사람들이 천심석 위에 서서 낮은 소리로 불러도 즉시 우렁찬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3. 천안문 광장
천안문 광장은 천안문사태로 우리에게 널리 잘 알려져 있는 광장이다.
자금성의 정문이며, 광장의 센터이며. 전체 넓이는 400,000평방m로 천안문 광장 오른쪽에는 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중국 인민의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혁명열사기념탑과 모택동기념관이 있다.
광장에는 전국 각 지에서 올라온 관광객 및 북경 시민들로 꽉 차 있다. 이 천안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천안문에는 모택동의 대형초상화가 중앙에 걸려 있고, 혁명 구호들이 붙어 있다. 이곳에서 박승수 교장이 설사가 나 화장실을 찾으려 야단법석을 부렸다. 우리나라 여의도 공원의 2배정도는 넓은 것 같아 보였다.
4. 자금성
고궁으로 옛날에 "자금성"이라고 불렀는데 명, 청 시기의 황궁이다. 고궁은 명나라 영락 4~18년(1406~1420)에 건조, 그후 수차 재건, 개수하였으나 여전히 원래 규모로 보전하였다.고궁은 부지 72헥타르, 수십 개의 대소 정원으로 구성되었는 데 방이 도합 9000여칸, 주위에 10M높이의 성벽을 쌓고 50여미터 너비의 성호를 팠으며,성벽 네 모퉁이에 각루를 건조하고 남쪽 중간은 오문이다. 고궁의 주요 건축물은 크게 외조, 내정 두 부분으로 나뉜다.
외조는 3층 한백옥석 기초위에 건조된 태화,중화,보화 3대전을 주체로 하는데 황제가 권력을 행사하고 성대한 전례를 거행하던 곳이다.내정은 건청궁, 교태전, 곤녕궁을 주체로 하는데 황제가 정무를 처리하고 거주하던 곳이며,그 양측의 동,서 6궁은 비빈들의 거처이다. 고궁은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황궁건축군이다. 전제 건축은 중축선을 기준으로 서로 대칭되게 배치, 주체가 두드러지고, 계층이 분명하 며,중국 고대 건축예술의 전통과 독특한 풍경을 구현하고 있다.
자금성 입구는 오문으로 고궁의 정문으로서 높이 35.6M 이다. 아래는 높고 큰 벽돌 돈대, 돈대위에 승루 5개가 건조되어 있는데 속칭 "오봉루"라고 한다. 오문 주 건물은 면적이 9칸, 겹처마 무전식 지붕이며,양측에 종고정이 설치되어 있다.매번 조회나 축전 때 북을 두드리고 종을 쳐 위엄을 과시하고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할 때면 황제가 친히 오문에 나와서 군졸들을 축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태화문 앞 동서 양측에 각각 구리사자 하나가 웅크리고 있는데 동쪽의 것은 수컷이고 서쪽의 것은 암컷이다. 숫사자는 오른발로 수구를 밟고 있는데 권력과 천하통일을 상징 하며,암사자는 왼발로 어린 사자를 쓰다듬고 있는데 자손들의 번성을 상징한다.
또 태화전 앞 동서 양단에 각각 선학과 거북을 하나씩 놓아두었는데 등에 뚜껑이 있어 단향을 피우면 연기가 주둥이로 피어 나온다. 선악과 거북을 장수를 비유한다.
태화전은 높이 8.13M 의 3층 한백옥석 기초위에 건조, 궁전 높이 35.05M 동서넓이 11칸 남북길이 5칸, 이밖에 낭하기둥이 한줄 늘어서 있고 궁전 내외, 기둥이 도합 84개이며 번쩍들린 겹처마에 지붕은 황기와를 얹고 장식이 점쟎고 화려하며, 기세가 비범하다. 명,청 시기 황제의 즉위,대혼,축수 및 중대한 축전, 출정 등 행사를 모두 이곳에서 거행하였다. 태화전의 내부를 보면은 면적이 2377평방미터이며, 중앙에 금칠을 한 용조각 보좌와 병풍이 놓여 있고 그 양측에 6개의 금칠 반룡 기둥이 서있다. 천정 한가운데는 구슬을 갖고 노는 금용으로 장식되어 있고 원구 헌원보경이 거꾸로 드리워 있으며, 천정판에는 옥새 채색화가 그려져 있다.
중화전은 태화전 뒤에 위치, 정자식 건축이다. 황제가 태화전에 나가 청정하기 전에 먼저 중화전에서 쉬면서 내각, 예부 대신 및 시위들의 예를 받은 후 승여(속칭 가마라고 한다. 현재 중화전에 보전되어 있고 청나라 황제가 궁내에서 사용하던 교통수단의 하나)를 타고 태화전에 이른다.
건청궁은 내정의 첫 궁전으로서 명, 청 시기 황제의 침실이며 또한 일상 정무를 처리하던 전당이다. 건청궁 내부를 보면 정중은 보좌, 그 위에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청나라 때에는 강희 황제 이후 재위 황제가 생전에 황위 계승자를 선포하지 않고 내정한 계승자 이름을 써서 휼갑안에 봉해 넣고 편액 뒤에 보관해 두었다가 일단 황제가 서거하게 되면 즉시 휼갑을 열고 황제 계승자를 선포하였다. 보좌는 전부 금박을 입히고 루비와 에머랄드를 상감한 금보좌로서 팔걸이와 등받이는 모두 금룡으로 휘감았다. 보좌 뒤는 금칠한 병풍이며 병풍 중앙에 8개의 금좌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황제가 자신을 단속하는 격언이다.
곤녕궁은 명대에는 황후의 침전이었으나 청대에 와서는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의 강희, 동치, 광서 황제가 이 궁전에서 혼례식을 했다고 한다.
신무문은 고궁 후문이다. 문루가 10미터 높이이 고궁 성벽 위에 건조되어 있으면 겹처마 무전식 건축으로서 문루 내에 종과 북을 설치해 놓고 문루 아래 성벽에 3개 아치문을 내었다. 청나라 때 수녀 선발시 응시 여자들이 이 문으로 입궁하였다. 이 곳을 나오면 바로 인공산인 경산공원이 나온다.
5. 만리장성
2일차 되는 날 북경의 팔달령 만리장성을 관광하였다. 팔달령 고속도로를 달려 만리장성에 도착하였다. 케이불카를 타고 장성에 오르니 그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추운 날씨에 바람이 세계 불어 몸을 가눌 수 가 없었다. 장성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였다.
춘추전국시기부터 중국은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제후들의 쟁패에 혈안이 되어 있어던 시기이므로, 자기의 영토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각자의 자기 영토 경계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이 성을 호방장성이라고 한다.
중국 역사 가운데, 3번의 큰 장성건축기가 있었는데, 진나라, 한나라, 명나라 때입니다. 이 때에 지어진 장성을 가리켜 진장성, 한장성, 명장성 이라 부릅니다.
진시황은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하고, 진왕조를 건립하였습니다. 진시황은 강력한 통치와 북방의 유목민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30만 군대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여 통일하기 전의 연,조,진의 성벽을 서로 연결하기 시작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욱 확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9년이란 긴 세월동안 축조하여, 마침내 중국역사상 첫 번째인 만리장성이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한무제는 당시에 새로 개발된 실크로드를 방어하기 위하여 약 2만리나 되는 장성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서쪽의 신강으로부터 동쪽의 요동지역까지 성을 쌓았으며, 이 장성이 중국역사상 가장 긴 만리장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명나라 때의 장성은 중국 장성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발달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공정이 가장 컸으며, 장성 축조기술 역시 가장 발달한 시기입니다.
명나라의 주원장이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원나라의 잔존세력들이 비교적 강력한 군사력이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북쪽에 있던 여진족이 끊임없이 침략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장성을 건축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명나라는 18번 이상의 커다란 장성 공사를 거쳤으며,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기본적인 장성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명장성은 동쪽의 요령성 단동 압록강변 호산에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로서 총 길이는 6350km나 됩니다.
명장성은 세가지의 특징이 있는데, 구조가 완벽하고, 관리가 잘되어 있으며, 배치가 조화롭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보려고 하는 팔달령 만리장성 역시 명나라때 축조되어진 명장성의 일부분입니다.
장성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은 물론 방어입니다. 방어를 위하여 장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였지요. 하지만 방어이외에도 많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첫째는 군사적 효과이고,
둘째는 경제적 효과입니다. 즉 장성을 축조하므로 말미암아 시골 농촌과 북쪽 신강쪽의 경제발전을 가져왔으며, 성안쪽의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충실하게 하였으므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각 민족들간의 융합을 가져왔습니다. 이거 이외에도 통신과 대외개방을 보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장성은 20여개의 제후국가와 봉건왕조가 건설에 참가하였고, 만약 높이 5m, 넓이 1m로 환산하여 다시 쌓으면 지구를 열바퀴를 돌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만리장성은 몇 번의 수리를 거쳐서 기본적으로는 어느정도 복원되었으며, 1987년에 유네스코에 의하여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은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방어성 성벽이며 중국의 16개지역을 통과하고 있으며 전체의 길이는 10만8천리가 된다고 합니다.
외벽의 부조를 보면 문 위쪽에 가루다 부조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인도 미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내벽에는 사천왕의 부조와 한자, 산스크리트 문자, 위그르 문자,파스타문자, 티베트문자, 서하문자등 6개의 문자로 표기된 다라니경문과 조탑공덕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원나라 시대의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 매우 높은 예술적 가치가 있습니다
장성은 크게 성대, 적대, 봉화대의 삼대로 되어있습니다. 그 중 성대의 구조는 매우 간단하게 되었있는데, 성대는 병사들이 비바람을 피하던 곳입니다. 적대는 크게 2층으로 되었는데, 하층은 정, 전, 회 등의 글자모양으로 되어있고, 상층은 몸을 숨기며 활, 총을 쏠 수 있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곳이 적을 막아내는 가장 중요한 곳이지요.
봉화대는 만리장성과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독립된 건출물이다. 적의 정세를 보고하는 봉화대로서 낮에는 연기로서, 밤에는 불을 피워 알리는데, 연기는 도중에 흩어지지 않고 꼿꼿하게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승냥이 배설물을 원료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장성의 재료로는 돌과 벽돌을 이용하였는데 제일 밑에 돌을 깍아서 깔 고 양 옆에 흙을 구워 만든 벽돌을 쌓은 후 중간에 흙을 넣고 그 위 에 다시 벽돌을 쌓았기에 매우 튼튼하지만 만든데 무척 많은 인력이 필요했겠지요. 장성의 성벽 높이는 평균 7.8m, 폭은 하단 6.5m, 상단 5.7m 로서 말 5마리가 나란히 달리거나 10명이 횡대로 걸을 수 있는 폭이다
6. 명13능
명 13릉은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약 50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황릉 구역은 장릉이 있는 천수산을 주봉으로 동,서,남,북 삼면이 뭇 산들에 둘러싸여 천연적인 대정원을 구성하며 정원 문은 남쪽에 있고, 그 양쪽에 망산과 호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마친 용과 범이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듯 하여 풍수지리설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치고 있다.
명나라 성조 주태로부터 사종 주유검 등에 이르기까지의 13명 황제가 모두 이 군산이 둘러싸고 송백이 무성한 구역 내에 매장되었는데 총면적이 약 40평방킬로미터이다. 명13릉은 영락 7년(1409년)에 장릉을 건조하기 시작해서부터 숭정 17년 (1644년)에 사릉을 수축하기까지 200여년을 경과하였다. 당시 전체 능묘구역의 사방 수십km범위는 금지구역으로서 매우 많은 신비로운 색채를 씌워 놓았었다. 1956년 중국 문화재 고고학자들이 명나라 만력 황제 주익균의 능묘 - 정릉을 발굴하고 지하궁전을 발견하였는데 관 이외에도 금,은,진주,보석,복식,옥기 등 보물 3,000여점의 보물이 출토되면서 정릉의 비밀이 밝혀졌다. 1959년 10월에 정릉 박물관이 설립되었으며, 이때부터 명 13릉은 북경지역의 유명한 관광명소로 되었다
7. 이화원
장가게로 출발하기 전 시간이 남아 일정을 당겨 이화원에 저녁 무렵 도착하였다, 역시 2번째 오는 곳이다. 이화원은 북경시 서북 교외에 위치, 도심에서 약 19km 거리로 청나라 때의 황실 원림과 행궁이었다. 이화원의 원명은 청의원이며 1764년에 건조되었다. 부지 290㏊헥타르, 그 중 수면이 220㏊이다. 원내는 궁정구, 전산 전호구, 후산 후호구 3개 경치구로 나뉜다.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000여칸으로 황제와 황후가 정치 활동을 하며 휴식, 유람하던 곳이다. 1860년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1888년에 자희태후가 해군 경비 500만냥 배근을 유용하여 재건, 10년만에 완공, 이름을 "이화원"으로 고쳤다.
이화원은 북쪽은 만수산을 등지고 남쪽은 곤명호를 안고 있다. 불향각을 주체로 지형과 수면을 충분히 이용하여 가산의 조성으로부터 길의 주향, 전당. 누가의 배치로부터 다리의 조형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전통적 원림 조성 기예를 충분히 계승, 발양함으로써 상부 상조의 전체적인 원림 예술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화원 정문은 삼명이암의 무전식 건축으로, 중간 정문은 "어로"로 황제, 황후가 출입하고 양쪽 문은 왕공, 대신들이 출입하며 태감, 병졸들은 남북 양측 옆문으로 출입하였다. 편액의 "이화원" 세 글자는 광서 황제가 쓴 것이다. 운룡석에 구슬을 갖고 노는 두 마리의 용이 부조되어 있는데 용은 황실의 존엄의 상징이며 또한 유지와 칙령의 표징이다.
인수전은 궁정구의 주요 건축물의 하나로서 원명은 근정저, 광서 연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 어지 정치를 베푸는 자는 장수한다는 뜻이다.
낙수당은 대형 사합원으로 자희태후의 침전이다. 대전은 붉은 기둥에 회색 지붕으로 조형이 특이하고 웅장 화려하다. 대희루옆에 큰 정원 "덕화원"내에 건조, 현재 중국에서 보전되고 있는 최대의 고대 극장으로서 높이 21미터, 상,중,하 3층으로 나뉜다. 아래층 천정판 중심에 천창을 내어 위층 무대와 통하게 되어 있으며 중간층 무대는 권양기로 도구와 배경을 위 아래로 오르내릴 수 있게 교묘하게 설치하여 변화 무궁하다.
자희태후(서태후) 는 자희의 성은 엽혁나라,청나라 제7대 황제 함풍(1851년~ 1861년 재위)의 귀비로서 함풍이 죽은 후 "수렴청정"의 명의로 48년 동안이나 조정의 대권을 독점하였다. 1905년 네덜란드 화가 Hubert Vos가 초청에 의해 자희태후의 초상화를 그렸다.이해 그의 연세 70을 넘었다.화상은 현재 덕화원 내에 보전되어 있다.
불향각은 만수산 전산 비탈 21m 높이의 거색기반 위에 건축, 남쪽은 곤명호를 마주하고 북쪽은 지혜해불전을 등지며, 이 불향각을 중심으로 각 건축군이 매우 정연하고 대칭되게 양날개로 펼쳐지면서 서로 호응하여 마치 한마리의 박쥐모습을 하고 있다.1860년 불향각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리고 그 후 원상태로 재건하였는데 이는 라마교의 건축물이다.
곤명호 동쪽 제방과 호심의 남호도를 연결하는 대형 석교로서 총길이 150m이다.교두와 난간 기둥에 도합544마리 돌사자가 조각되어 있는데 형태가 같은 것이 하나도 없고 참 넓어 권력의 힘을 과시한 것 같다.
8. 경산공원
자금성을 나오면 북경에서 제일 높다는 산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산은 인공으로 만든 산이라고 한다. 흙은 자금성을 만들면서 주변을 침략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방을 연못으로 만들면서 그 흙으로 산을 만들었다, 그 산이 바로 경산공원이다. 제법 높았다. 산을 조성하면서 주변에 돌과 나무를 심었으며 정상에는 정자도 있었다. 제법 산처럼 조경을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우리는 이곳을 내려와 북경 시내를 관광하고 결국에는 천안문 광장 근처의 그 유명하다는 동인당 약국으로 안내하였다. 약국에 들어서니 역시 한국 관광객으로 봅비었다. 조선족이라는 한의사가 건강관리와 지압에 대해 설명하였다. 결국은 약을 선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진맥만 보고 약은 사지 않았다. 사전 정보를 갖고 갔기 때문이다. 귀국 하여 들리는 말에 의하면 체질에 맞지 않아 오히려 병을 얻었다고 한다. 신토불이 라는 말이 생각났다.
약국을 나와 주변에서 점심을 먹고 기념품을 사기도 했다.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천안문 광장 지하를 통하는 지하철 역을 내려가 보았다. 깨끗하지는 않았다. 역시 우리 나라 지하철이 우수하다는 것을 알았다. 왜 큰 아들이 인천지하철에 근무하니까 칭찬하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공공 시설물을 아껴써야 겠다는 마음을 다져 본다.
Ⅳ. 장가게
1. 장가게의 개요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무릉원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1334m이고, 풍경구의 면적이 264㎢에 달하며, 크게 장가계 국가 삼림공원, 삭계곡, 천자산 세 개의 풍경구로 나뉜다.
장가계 삼림공원은 무릉원의 핵심적인 구성부분이다. 1982년에 중국 최초의 국가삼림공원으로 지정된 이 곳은 삼림의 면적이 97.7%에 달한다. 공원 내에는 2000여종의 식물이 있으며, 28종의 진귀한 야생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이 곳에는 혹한과 혹서가 없으며, 연평균 기온이 12.8℃이다.
공원 입구에 보면 자연적으로 생성된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부부암이라고 불린다. 하나는 남자 모양이고, 다른 하나는 여자 모양으로 서로 몸을 기대고 있으며, 눈, 코, 머리카락, 입술 등이 똑똑하게 구분된다. 입구에서 관광객을 환영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전해지고 있다.
공원에는 황석채, 금편계곡, 비파계곡, 원가계 등 유명한 관광지들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삭계곡 자연보호구는 이 지역의 봉우리들은 여러 층의 석영사암으로 이루어져 봉우리가 특히 날카롭고 기이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봉우리들 사이로 거울같이 맑은 보봉호, 삭계호 등이 있는데, 산수가 어우러져 비경을 이룬다. 이 외에도 서해, 십리화랑, 황용동 등 200여 곳의 관광지들이 있다.
보봉호는 댐을 쌓아 물을 막아 만든 인공호수이다. 길이는 2.5㎞이며, 수심이 72m이다. 아름다운 호수와 그윽한 주위 환경이 어울려 무릉원의 수경(水景) 중의 대표작으로 뽑힌다. 호수 안에는 작은 섬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기이한 봉우리들이 들어서 있으며, 봉우리는 물을 감싸 안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산 속에 비취 알맹이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황용동굴은 군지평 동쪽으로 8㎞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지각운동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용암동굴로서 상하 4층으로 되어 있고 아래 2층에는 4계절 시내가 흘러내리는 동굴이다. 수직고도는 160m, 동굴길이는 15㎞이며, 이미 개발되어 있는 면적이 20㏊에 이른다.
동굴 내에는 저수지 1개, 시내 2갈래, 지하폭포 3개, 연못 4개, 큰 대청 13개이며, 관광할 수 있는 동굴 길은 96갈래나 된다. 또한 동굴 안에는 수많은 기이한 종유석들이 천태만상을 보여주고 있다.
장가게는 NESCO에 의하여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장가계는 호남성 서북부에 위치하며 천자산 자연풍경구, 장가계국가삼림공원, 삭계곡자연풍경구로 구성됩니다.
과거 지각변동에 의한 융기현상으로 해저지대가 육지로 솟아 오르고 오랜 기간 동안 침수와 자연변화를 거치면서 오늘날 산수화와 같은 절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2. 장가게에서의 여정
가. 장가게 도착 후 여정 황룡동굴에서
북경에서 야간에 비행기를 타고 2시간의 비행 끝에 중국의 중심지인지는 몰라도 어둠을 뚫고 하남성의 장가게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한국식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종업원은 조선족으로 한국말을 잘 하였다, 밖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어 별 하나 없는 어둠 캄캄했다.
바로 호텔에 투숙하여 하루의 여정을 풀고 2일차 밤을 지내며 장가게 여정에 들어갔다.
3일차 아침에 우리는 호텔을 나와 활룡동굴로 향하였다. 어찌 그렇게 많은 비가 오는지 모르겠다.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관광지마다 상인들이 우리를 괘롭혔다. 동굴에 도착하니 우리가 첫 번째로 관리원들이 출근을 하지 않아 기다려야만 했다.
동굴의 문이 열리면서 동굴 안으로 현지 안내원의 안내로 질서 정연하게 들어갔다. 한참 들어가다 보니 석회암 용암 동굴의 증유수가 떨어졌다. 그리고 이상한 모양의 석순들이 우리의 발길을 멈추게 하였다. 동굴안의 광장에서 안내원의 설명을 듣고 난후 동굴안의 웅덩이에서 배를 타고 동굴안의 모습을 살필 수 가 있었다. 동굴의 중간 쯤 들어가니 휴게소 모양의 동굴안의 작은 동산에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만이 사진을 찍께 하였다. 동굴에 도취하다가 나와 보니 비는 더욱 세차게 내렸다. 우리는 동굴을 나와 시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천자산으로 향하였다.
나. 천자산 등정, 하룡공원
천자산으로 가기위에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하여 천자선 자체의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정말로 경치는 아름다웠다. 이동하면서 인공호수의 물을 빼낸 것 같았다. 천자산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가면 천자산 정상으로, 좌측으로 가면 모노레일을 타고 천자산 밑에서 괘암 절벽에서 아름다운 경치와 천자산의 높은 봉우리를 볼 수 있게 조성하였다.
우리는 우측길로 가서 조금 가니 케이불카가 설치 되어있었다. 케이불카를 타니 흐린 날씨에 안개가 자욱하였으나 사이사이로 보이는 천자산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천자산의 정상은 안개로 자욱하였다. 안개를 헤치며 내려오니 하룡공원에 다다랐다. 이곳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내려오려니 대장(박승수)이 없었다. 길을 잃은 것이다. 한참 만에 만나게 되어 버스를 타고 내려 왔다.
중간까지 와서 우리는 도보로 곳곳에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멀리 보이는 곳이 원가게라한다. 천자산의 괴암괘석에 수려한 산수를 구경하며 내려왔다. 천자산을 내려오면서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케이불카를 타고 하산하였다.
우리는 점심을 먹고 다시 천자산 좌측으로 향하였다. 가이더의 안내에 따라 맹자의 생활 근거지라고 할까 하는 곳을 비를 맞으며 도보로 한참을 걸었다. 그리고 산 깊숙이 들어가려고 모노레일을 타려 했으나 눈이 내려 운행이 중지 되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걸어서 올라갔다. 숨이 가뿜을 안 집사람은 나를 밀고 올랐다. 정말로 처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칭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잘 다니까 무리는 없었다.
다. 보봉호(인공호수)
보봉호는 인공적으로 댐을 쌓아 만든 호수이다. 이 곳 역시 오르려니 숨이 찾다. 짚팽이를 2000원 주고 사서 짚고 처와 장경례, 정종숙의 도움으로 올랐다. 호수에 다다르니 넓고 웅장하였다. 호수 중간에 배를 타고 가니 중국의 어여뿐 원주민 아가시가 노래를 불러 주었다.
대장의 우스께 소리도 재미있었다. 호수를 돌고 돌아오는 데 역시 남자가 배를 타고 나와 노래를 불러 주었다. 배에서 내린 호수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호수를 내려오면서 기념 촬영과 기념품을 사가지고 내려왔다.
위 글은 여행 순서는 맞지 않지만 지역별로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장가게 일정(2일간)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다시 북경으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밤에 도착 하루를 묵은 후 명소를 관람한 후 귀국하였다.
Ⅴ. 결어
중국 13억 인구중 5% 이상이 우리나라 중산층 보다 높은 부를 가진 사람이라고 가정만 해도 우리나라 인구보다 많다. 한국인들이여 교만하지 말지어다. 중국에 가서 제발 겸손하게 행동해야 겠다는 마음이다. 그들이 불쌍하다고 손에 쥔 1000원 10000원짜리 한국돈으로 거들 먹 거리지 말아야 되겠다. 우리가 만나는 관광지의 사람은 중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관광지에서 귀찮게 따라붙는 아이들....우리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6.25동란 후 미군들만 보면 기브미 껌! 기브미 쬬코렛 하면서 따라다녔던 걸 나 역시 경험했다,
나이드신 모든 분들은 잘 기억할 것이다. 현재 조금 가졌다고 그들을 무시하면 안 되겠다. 아껴써야 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인류 4 대문명 발상지 였던 중국이 아니던가? 화약, 종이 등을 발명했고 우수한 문화를 세계 각지에 전파했던 중국이다. 그 저력이 아직도 잠재해있는 나라이다. 잘사는 사람과 도시 지식인들을 공산주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내몰고 모든 인민들에게 평등분배의 개념으로 개혁을 했지만 결국은 세상을 잠시 멈추게 했을 뿐이다.
이제 중국사회는 옛 자본주의 사회시절을 기억하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광활한 영토에 아름다운 산수, 찬란한 중국 문화에 우리는 4박 5일간의 북경, 토가족의 근거지 장가게, 원가게를 둘러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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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행기록으로 남겨주시니 감사합니다.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다시 유추해보았답니다. 자주들러 기억해도 괜찮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