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해조 합천신문 논설위원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는 우리 고장 합천이 낳은 역사상 큰 인물이다. 근래 합천신문에서는 이 무학대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난 2020년 11월 26일부터 4회에 걸쳐 「무학대사 찾기」를 시리즈로 연재한 바 있다. 필자는 이 연재 기사를 읽고 많은 감회에 잠겼었다. 이유는 무학대사 고향이 바로 필자와 같은 합천 대병출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마을이 없어졌지만 임란창의기념관과 합천댐 아래 평학동 입구 옛날 상천(上川) 구리방(求理房)인 천평(川平)마을이 대사의 유년시절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는 그곳과 그리 머지않은 악견산 아래의 성리 대밭골(竹田)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무학대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으며, 지금도 합천댐 밑의 천평마을 입구에는 무학대사가 살았다는 선고부군(先考府君)이 쓴 무학대사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져 있는 인연을 갖고 있다.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무학대사의 업적이나 사상보다 고향에 관련사항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간 무학대사에 대한 사료 발굴 등을 통해 그의 생애나 업적, 사상을 밝혀내려는 노력이 가끔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이번 합천신문 연재(4회: 2020.11.26-12.24) 외에도 여러 문헌이나 구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합천신문에 고(故) 학산(學山) 박환태 사장의 역사논문이 「마지막 왕사 무학대사」란 제목으로 2002년 2월11일부터 12회에 실렸으며, 합천문화원 총서 46(2008.8.1.발행)인 박환태 편저 「합천의 전설과 설화(335-357면)」에도 상술되어 있다. 그리고 재경향우 정현규(전 행정안전부 의정담당관)의 무학대사 관련 연구서가 작년 5월14일 합천인터넷뉴스에 실리기도 했다.
또 경기 양주 회암사에 남아 있는 대사의 부도탑과 국가 공식기록인 「태조실록(太祖實錄)」외에도 「석왕사기(釋王寺記),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稿)」 같은 야사(野史) 또는 설화류(說話類)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어 무학대사에 대한 연구 자료로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여기에다 근래 황인규 교수의 「무학대사 연구(無學大師 硏究)」와 같은 노작(勞作)이 발간돼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무학의 가계와 혈통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합천문화원 총서 46권과 경기도 양주 회암사에 위치한 무학대사의 부도탑인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에 의하면 무학대사는 경상도 삼기현(三岐縣) 출신으로 아버지는 박인일(朴仁一)이고, 어머니는 고성 채(蔡)씨이다. 어머니 채씨가 꿈에 아침 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1327년(충숙왕 14) 9월 20일에 무학을 낳았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이름은 자초(自超), 호는 무학(無學) 또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치는 총명한 아이였다고 한다. 18세(1344년)에 출가하여 소지선사(小止禪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충목왕 2년에 화엄경을 읽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4-5년을 수도에 힘쓰다가 진천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에서 수도에 정진하여 이름을 얻었다. 공민왕 2년(1353년)에 원나라로 가서 인도승 지공선사(指空禪師)를 만났으며, 돌아와 조선 태조 원년에 왕사로 봉해지고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법호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태조3년 3월에 왕사 출생지인 삼기현을 군으로 승격시키고 부친 박인일을 문하시랑(門下侍郞)의 벼슬을 추증하였다고 한다.
한편 1989년 12월 충남 서산군수 박융화(朴隆和)가 서산에 세운 비문을 보면, 무학대사 부모가 고려말 왜구들에 잡혀 가면서 선상에서 격투 끝에 왜구를 죽이고 배가 표류하여 서산 간월도(看月島)에 정착하였다. 관전(官錢) 50량을 차용하여 갚지 못하여 어머니가 관가에 끌려가면서 서산 인지면(仁旨面) 애정리(艾井里) 우물가에서 아기를 낳았는데 학(鶴)들이 춤을 추며 아기를 보호하고 있어 아기 이름을 무학(舞鶴)이라 하고 우물을 쑥우물(艾井)이라 불렀다. 그리고 무학이 3살 때 부친이 사망하자 모친이 무학을 데리고 고향 삼기현(대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또한 금강산 어느 절에서 나온 전설(傳說)로 무학(舞鶴)은 부모 없이 자란 고아인데, 늙은 선비가 청상과부 며느리와 살면서 며느리가 절에서 불공을 드리고 집에 오니 마루에 천도복숭아가 있어 먹었더니 애를 낳아 시아버지와 불륜의 씨앗이란 소문이 돌자 아이를 몰래 갈대 숲속에 버렸는데 학(鶴)들이 보호하고 있어 다시 집에 데리고 와서 키웠다는 구전(口傳)도 있다.
무학대사의 출생이 어디든 18세에 출가하기 전까지 유년시절을 대병에서 모친 밑에서 자란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합천신문(2020.12.24.일자 5면)에서는 유허지(遺墟址)가 대병면 대지리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근처 부도사(浮屠寺), 사나사(舍那寺)의 사찰의 유물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유년시절 성리 죽전마을에 살면서도 허굴산 청강사에 다닌 것과 마찬가지로 무학도 유년시절 천평지역에서 살면서 근처 대지리의 그 절에 다니면서 불교에 심취(心醉)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무학과 관련되어 전해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를 미루어 볼 때 그의 출생이나 생활근거지가 천평마을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먼저 천평마을 향강(香江) 강변에서 놀면서 목이 말라 물을 먹으려니 미지근한 물 밖에 없어 찬물을 먹으려고 도술(道術)을 부려 숟가락으로 샘을 팠는데 그 샘이 유명한 호박(臼)샘이며 일명 무학천(無學泉)이라 하였다. 이 물은 한 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고 겨울에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나며, 이 물로 목욕을 하면 여름에도 땀띠가 다 죽는다고 한다. 또한 천평마을에서 성리 개목정(介木亭)까지 큰 개울이 돌로 깔려있는 무학탄(無學灘)은 그의 모친이 무학을 기다리다 돌을 옮겨 생긴 것으로 아무리 비가와도 물이 바위 밑으로 스며들어 홍수가 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천평마을 근처 악견산 하단부에는 무학이 벽면수도(壁面修道)로 득도(得道)한 2개의 무학굴이 있고, 개목정과 여순목 중간에 무학이 천서(天書)3권을 묻어둔 무학바위(無學巖)도 있다. 또한 금성산 정상에는 무학이 직접 그렸다는 바둑판 그림이 있는 돌북(石鼓)도 있다. 그리고 무학이 출가하며 집을 떠날 때 동네 길섶에 돌감나무를 심어놓고 “이 감나무가 죽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며 집을 떠났는데 그 나무가 600여 년간 살다가 2001년에 고사하였다.
아무튼 무학대사의 출생지도 중요하지만 그가 세상으로 나가 조선 태조의 왕사로 조선의 건국과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는 풍수역할과, 조선조의 최고의 고승으로 서천국조사 지공(西天國祖師 指空)대사, 공민왕사 나옹(懶翁)대사와 함께 태조국사(太祖國師)로 유명 사찰의 삼화상진영(三和尙眞影)으로 추앙받고 민중들에게도 큰 인기와 많은 설화까지 전해지고 있어 우리 합천이 배출한 큰 위인임이 틀림없다.
이번 합천신문 연재에서도 ‘무학과 관련된 연구는 이제 시작이다. 지역에서도 무학대사 관련 유적지를 계속 발굴 보존하는 현창(顯彰)의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했듯이 앞으로 합천군민들은 물론 합천문화원이나 관련 행정당국과 대한불교조계종에서는 우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무학대사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그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기념관을 세우는 등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특히 오늘날은 지방화시대로서 자기 고장의 자랑인 자연환경, 축제행사, 농수산물, 문화재 등과 함께 지역 출신 인물을 내세워 전국의 관광객을 모셔오기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앞으로 개통될 남부내륙 KTX와 함양–울산 간 고속도로 시대를 맞아 황매산, 합천호, 봉화산 봉수대, 악견산성, 임라창의기념관, 영상테마파크 등으로 이어지는 서부관광벨트의 관광자원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 확신한다.
- 2021.2.25, 합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