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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천세려고택(松川世廬古宅)
소 재 지 : 경북 영덕군 병곡면 송천리 388 (송천1길 22-15)
건 축 주 : 권대림(權大臨)
건축시기 : 1700년대
소 유 자 : 권명기(053-585-9565)(관리자 : 권동달(053-732-0861))
문 화 재 : 문화재자료 제86호, 1985.08.05 지정
❏ 건축 이야기
송천자 권득여(權得輿, 1636~1716) 선생이 영해 관어대에서 송천리로 이거하였는데, 이 고택은 선생의 아들 칠우정 권대림선생의 주택으로 1700년대에 건립된 ‘日’자형의 가옥이다.
❏ 건축 특징
송천세려고택은 내부구조와 배치에 다소의 변형은 있으나, 경상북도에서 몇 안 되는 ‘日’자형 배치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물구조이다. 건축 당시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이중대문채 및 초가 방앗간채로 구성되었으나 이후 철거되어 현재는 한쪽이 틔어 있는 상태이다.
❏ 건축 구성
4칸 규모의 대문채를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정면 5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정침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의 중문 좌측에는 외양간과 곳간을 두었는데
곳간의 뒤에는 통래간과 부엌이 연접되어 좌익사를 이루면서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중문의 우측에는 사랑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책방과 사랑윗방이 연접되어 있으며,
사랑윗방 뒤에는 사랑아랫방을 두어 우익사와 연결되어 있다. 사랑윗방의 전면 쪽으로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랑마루를 두었는데 사랑마루는 전면으로 돌출되어 날개를 이루고 있다.
사랑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종량 위에 제형판대공(梯形板臺工: 사다리꼴의 판재로 된 대공)을 세운 5량가이며, 사랑방 윗벽에는 칠우정이란 현판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3칸 규모의 대청이 있고 안방은 대청의 좌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안방 윗머리에는 도장방이, 도장방 위에는 다락을 설치하여
마루에서 벽에 붙은 통나무 사다리로 오르게 하였다.
대청 우측에는 상방을 두었으며 상방 전면에는 영덕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래 툇간을 두었다. 대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운 3량가의 건실한 구조이다.
❏ 현판
칠우정, 송천세려(七友亭, 松川世廬)
❏ 문중 이야기
- 안동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영해문중
1988년 안동권씨 중앙종친회에서 펴낸 『안동권씨 보감(安東權氏譜鑑)』에 의하면 안동권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출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권씨는 본래 신라 왕족 김씨였다. 신라가 말기 현상으로 국력이 쇠퇴하였을 때 우리 시조 행(幸)께서 안동군을 수어하고 계셨다. 약세의 틈을 본 후백제 견훤이 갑자기
침공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고 왕비와 궁녀들을 함부로 유린 (중략) 이때 고려 태조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또한 견훤의 위세에 당하지 못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 우리 시조 행께서 때를 놓칠세라 고을 사람들에게 유세하기를 ‘불공대천의 원수를 물리치자’, ‘모두 모여라’ 격문으로 창의하시고 고려군을 영입하여 병산에서
견훤군을 대파하니 (중략) 고려 태조는 논공행상에서 전공이 모두 행의 덕이라 일컬으며, 기미에 밝고 권도 또한 통달하였다고 하여 ‘권(權)’자로 성자(姓字)를 사성(賜姓)
하고 안동군을 부(府)로 승격, 식읍(食邑)으로 하사하게 되어 안동권씨가 되었다.”
시조 권행(權幸) 이후 10세를 전후하여 안동권씨는 크게 15파로 분파되며, 이를 두고 '10세15대파(十世十五大派)'라 지칭한다.
10세 15대파는 세보를 만들면서 시조 태사공(太師公) 이후 10세에 이르러 후손을 번창시킨 파조 15인에게 붙인 고유의 호칭에서 비롯된다.
15개의 파는 권수중(權守中)의 종파(宗派)·권시중(權時中)의 부호장공파(副戶長公派)·권수평(權守平)의 추밀공파(樞密公派)·권수홍(權守洪)의 복야공파(僕射公派)·
권태달(權棣達)의 동정공파(同正公派)·권지정(權至正)의 좌윤공파(佐尹公派)·권영정(權英正)의 별장공파(別將公派)·권통의(權通義)의 부정공파(副正公派)·
권인가(權仁可)의 시중공파(侍中公派)·권형윤(權衡允)의 급사중공파(給事中公派)·권숙원(權叔元)의 중윤공파(中允公派)·권사발(權思拔)의 군기감공파(軍器監公派)·
권대의(權大宜)의 정조공파(正朝公派)[광석공파(廣石公派)]·권추(權樞)의 호장공파(戶長公派)·권척(權倜)의 검교공파(檢校公派)가 있다.
그 중 부정공파는 고려시대 부정공(副正公) 통의(通義)가 파조이다. 부정공파에 속하는 안동권씨들은 간헐적으로 크고 작은 벼슬을 역임하여 오다가 16세(파조로부터 6세)
권자형(權子衡) 이후로 인사들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안동권씨의 영해입향조는 권책(權策)이다. 조선 단종조 부제학 권자홍의 3자인 권책은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일족이 모두 화를 당할 때 13세 나이로 홀로 영해에 유배되어 인량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후 오랫동안 숨어 살다시피 하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 신원 되었다.
3대 독자로 이어오던 권책의 가문은 현손대에서 5개파로 분파하였다.
권응당은 종파, 권응우는 이파, 권응하는 가산파, 권응상은 어송파, 권응주는 옥금 곡강정파로 분파하였으며, 인량, 가산, 옥금, 관어대, 송천, 거무역 등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 관련문집
- 권득여 시문집 『송천자독오록』
이 책은 1954년 그의 8대손 상묵(相默)이 편집·간행하였다. 시(詩)에는 자신의 여러 가지 갈등과 고민 속에서 내면적 진실을 보여준 생활시가 많다.
그는 가난한 시골 선비로서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시심(詩心)을 불태우며 문학 활동에 전념하였던 것 같다. 「척황전(拓荒田)」·「유의음(有意吟)」·
「처세(處世)」 등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서(序)의 「독오록자서(獨娛錄自序)」에는 관어대(觀魚臺)와 우정(郵亭)을 중심으로 한 그의 시작생활의 배경이 언급되어 있으며, 「유금사문회시서(有金寺文會詩序)」는
유금사 선방(禪房)에서 개최한 시회(詩會)를 기념하는 내용의 글이다.
이 책의 시는 특이한 작품경향을 보이고 있어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의 우리나라 한시를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 『칠우정문집(七友亭文集)』
권대림의 시문집이다. 권대림의 자는 만용(萬容), 호는 칠우정(七友亭),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이 책은 1834년(순조 34) 7대손 진도(進道)가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운격이 고상하고 품위가 있다. 그 중 「차이상기손표종덕승운(次貳相寄孫表從德升韻)」은 세속을 평하고 선비의 신분과 절개를 읊은 것으로 무엇보다 의지가
굳어야 사회와 자기의 앞길을 동시에 개척할 수가 있다는 내용이다. 서(序) 중 「문계시첩서(門契詩帖序)」는 문중의 화목을 도모하고자 계를 모으고 그 경위를 기록한 것이다.
매달 한 번씩 모여 즐겁게 놀면서 시를 짓고 문서를 의논하는 계기가 된다고 설명하여 조상을 숭배하고 일가 간에 화목을 유지하는 것이 곧 인간의 기본행위라고 주장하였다.
「망운대서(望雲臺序)」는 조관(詔館)에 부임하였을 때 지락정(知樂亭) 옆에 빈터를 얻어 망운정을 신축하면서 그 동기와 사연을 밝히고 건축의 구조와 건물의 양식 등을
기록한 글이다.
이밖에 당시 저명인사들을 조상(弔喪)한 제문과 저자의 행적을 기록한 「묘도문(墓道文)」이 있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 관련인물
- 대은 권경(臺隱 權璟, 1604~1666)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경옥(景玉), 호는 대은(臺隱)이며, 취옹정(醉翁亭) 권의협(權宜悏)의 아들이다.
선생은 선조 갑진(1604)에 관어대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지혜가 총명하며 성품이 강기(强氣)하고 재예(才藝)가 비범하니 당시 저명한 하담(荷潭)
김시양(金時讓) 선생의 제자로 문하에서 수업한바 문재가 날로 진전되고 덕성이 더욱 성숙함에 하담선생이 장차 공보(公輔)의 그릇이라며 조카사위로 삼으니 바로
참판 김시열(金時說)의 따님이다.
선생은 명리(名利)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은거하여 학문과 자수(自修)에만 정진하였다. 빙부 참판공이 대가(大加)의 은전을 주려 하였으나 “아내로 인하여 벼슬을 얻는
것은 제가 부끄럽게 여기는 바입니다.”굳이 사양하고 향시(鄕試)로 만족하며 실천궁행(實踐躬行)하는 학문을 바탕으로 효행(孝行)․학행(學行)․덕행(德行)․절의(節義)를
기본으로 후학교육(後學敎育)에 일생을 바쳤다.
혼자 있을 때도 삼가는 군자의 정신을 강조하며 남을 가르칠 때 행실을 우선으로 하고 문예를 뒤로하였다. 후생 중에 빈곤한 자에게 솔선 구제하여 근학케 하고
종족에게는 족의(族誼)를 돈독히 하였다.
행적은 명리를 구하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속세를 벗어난 모습이었다. 행의(行誼)가 돈독하고 덕성이 순수(純粹)하며 고귀한 인품을 지녔다.
행동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며 그 어진 덕(德)과 신의에 전 향중(鄕中)이 존경심을 일으키니 세상의 풍교(風敎)를 바로잡아 주었다.
대은가학(臺隱家學)의 산림처사(山林處士)로서 많은 후학과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유림과 노장들이 향선생(鄕先生)으로 추존하였으며 이조참판 최혜길(崔惠吉)이 영해부사
재임 시 조정에 천거하여 공론이 있었으나 선생이 별세 후 숙종 조에 이르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모친상을 당하여 추운 겨울에 묘지를 구함에 통탄하다 깜빡 조는 사이 신이 “천 척의 어대는 그대의 터전이다” 하였으니, 사람들이 지극 효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외조모 김부인이 후사가 없자 선생이 지극 정성으로 공양하였고 후생 가운데 빈궁하면 사재를 내놓아 양육하니 이웃에 끼니를 잇는 자가 많았다.
현종 병오(1666) 3월 25일에 졸하니 향년 63세다. 향당(鄕黨)이 애도하고 유림의 공의(公議)로 도계서원(陶溪書院)에 봉향하니 영의정(領議政)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묘갈(墓碣)을 찬하였는데, “집집마다 거문고 타고 글 읽으니 군자의 고을이구나. 높은 산 깊은 바다와 같이 군자란 이름을 지녔구나. 살아서는 산림에서 늙었으니 군자의
운수가 나빴으나 죽어서는 도계정사에 봉향하니, 군자의 도가 빛나도다(戶絃家誦 君子之鄕 嶺巀海豊 君子之名 生而林壑 君子之運否 死而俎 君子之道賁)” 하였으니 유림(儒林)의
종사(宗師)임을 재인식하게 된 것이다.
- 송천자 권득여(松川子 權得輿, 1636~1716)
대은(臺隱)공(公) 권경(權璟)선생의 세 아들 중 2자로 인조 병자(1636)에 관어대(觀魚臺)에서 출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재예가 뛰어나 8세에 글을 지어 어른들을 감탄케 하더니 식견이 접차
넓어지고 조예가 깊어지니 사림(士林)에서 종장(宗匠)으로 추대하였다.
숙종 임술(1682)에 사마(司馬)하고 계유(1693)에는 행의(行誼)로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천거된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공은 작은 역촌인 송천이 지세가 기묘한
것을 발견하고 역을 새터[寧海蓮坪]로 이전케 하고 “前臨百里長川 後有萬枝蒼松”이라는 한 구의 시와 더불어 정착한 다음 자호(自號)를 송천자(松川子)라 하고 독오헌(獨娛軒-松川精舍)을
건립하여 사우(士友)와 시서를 강론하고 후학들을 훈육했다.
또 제방을 보수하고 송천보(松川洑)를 창설함으로써 수백 정의 비옥한 평야를 조성하여 농경문화발전에 공헌하는 등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향 중의 대소 문과 급제자를 결연,
연계소(蓮桂所)를 창립하여 수시로 시주(詩酒)를 즐기며 효친경장(孝親敬長)과 후진양성을 장려하는 중추역할을 하였다.
슬하에 일곱 아들을 두어 그중 세 아들이 대과(大科)에 급제하고 3대(臺隱, 松川子, 七友亭)에 걸쳐 나라에 부름을 받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부사가 내임하여 “형제가 재능이 함께 뛰어난 경우는 세상에 흔히 있으나 양친이 모두 살아 계신데 삼 형제가 급제하는 경우는 고금경향(古今京鄕)에 드문 영광”이라며 감탄하였다.
1716년(숙종42)에 향년 81세로 졸하니, 모든 선비가 애도하고 유고로 독오록(獨娛錄) 2권이 있다. 10여 대에 걸쳐 문한(文翰)이 끊이지않았으며,
송천정사(松川精舍)는 영해 3 · 1의거의 발원지이다.
- 권대림(權大臨, 1659∼1723)
송천자 득여의 7형제 중 장자다. 1659년(효종10)에 관어대에서 출생하여 1683년(숙종9)에 사마시(司馬試) 입격하고 정축(1687)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궁경명리(窮慶明理)하고 재기가 홍위하여 만경군수 재직 시 수의(繡衣)의 포계(褒啓)가 있었고 숙종이 서명전주(書名殿柱)로 내구마(內廐馬)를 특사하였다. 보령현감 재직 시는
선정으로 읍민의 추앙을 받았으며 과체(瓜遞)시 남녀노소가 처처에 길을 막고 일 년이라도 더 체직해 주기를 원하였으며 현을 떠난 뒤 송덕동비(頌德銅碑)를 건립하였다.
1723년(경종3)에 졸하니 향년 65세며 저서로는 『칠우정문집(七友亭文集)』이 있다.
❏ 영덕 >창수병곡권 >병곡면 송천리
- 송천리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에 속한 리이다. 송천1리와 2리로 구분되며 동은 덕천리, 서는 신평리, 남은 송천내를 건너 연평리, 북은 금강들을 지나 원황리, 덕천리가 있다.
7번국도 울진방면의 우측에 위치하며, 동해안을 따라 길게 송천들이 펼쳐지며, 마을은 들 한편 타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송천리 북쪽에 위치한 ‘개양모태’와
서쪽에 위치한 ‘서당모태’가 있다. 개양모태는 “마을에 물구덩이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물구덩이를 영덕에서는 개양이라 부른다. 서당모태는 “마을 내 서당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송천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이 솔안[송내] 들에 있고 또 고장두들[古亭坪] 가운데 소나무가 울창하고 그 앞에는 냇물이 흘러 송천, 송내 또는 솔안이라고도 불렀다.
이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즉, 조선 초기에는 양씨(梁氏), 장씨(張氏)가 거주하였다고 하며, 마을에 작은 역촌(驛村)과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 17세기 즉, 1600년 때인 인조(仁祖) 연간에 송천자(松川子) 권득여(權得輿)가 이곳에 들어와 역촌을 새터(연평리)로 옮기고 동명을 송천이라 하고 이 마을에 정착하였으며
자손이 세거(世居)하고 있다. 이 마을은 풍수지리상 ‘기러기가 알을 품는 형국[雌雁抱卵形]’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에 속했으며, 대한제국(大韓帝國) 때에는 영해군 북초면(北初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폐합할 때
송상동(松上洞), 송하동(松下洞) 일부를 병합하여 송천동이라 하고 영덕군 병곡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송천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송천1,2리로 분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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