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정복시 국제 정세(김의원)
출애굽 이후 다윗 왕국이 건립될 때가지의 팔레스타인의 상황은 앞선 시
대와는 다른 양상을 취하였다. 가나안 땅은 오랫동안 이집트에 의하여 다스
려졌으나, 여호수아가 이 땅에 들어온 이후로 이집트는 소아시아의 헷 왕국
의 전쟁에서 지쳐 있었다. 같은 역량과 기량을 가진 두 권투 선수가 서로 힘
을 겨루는 것처럼, 이 두 나라도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잇는 교량과 같은 이
땅덩어리를 빼앗기 위해 힘에 겨운 전쟁을 수행하였다. 19왕조의 람세스2세
재위 중(1285년경) 일어난 이 전쟁으로 인하여 이집트는 전승국일지 모르나,
이 싸움으로 이집트는 매우 무력하게 되었다. 또 다른 어려움이 이집트에 주
어지는데 "해양민족"으로 알려진 일단의 무리들이 그리스 지역에서 이집트로
침입해 들어온 사건이다.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르넵타는 이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 이집트는 빠른 속도로 멸망해 갔다. 메르넵
타는 전승 기록 가운데 이스라엘을기록하고 있다. 이집트에서 쫓겨난 "해양
민족"은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가나안 땅 남쪽 해안에 정착하였다. 이집트,
소아시아의 헷 왕국, 메소포타미아의 앗시리아가 12세기의 가나안 땅을 간섭
하기에는 너무 약한 시기여서 이스라엘의 주된 어려움은 당시 세계 강대국
이 아닌 그 땅의 주민들과의 전쟁이었다.
①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가 헷 왕국의 무르실리스 1세에게 1595년 멸망당하자, 중부와
하부 메소포타미아에 생긴 정치적 공백을 동편 산지에서 기원한 카스족이
점령하여 그때부터 1150년까지 이 지역을 다스렸다. 카스족은 예전에 이해된
대로 야만족은 아니지만 그들의 통치는 다른 시대에 비하여 암흑기에 속하
며, 상대적으로 전지역에 후퇴와 퇴보의 시간을 가져다 주었다. 다행하게도
이 시기에 하부로부터 어떤 위협도 없었으나 북쪽에는 앗시리아가 점점 강
성하여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앗시리아는 남쪽의 카스족과 서편에 있
는 미타니 왕국을 건설한 후리족에 상당한 두려움을 가져 가나안으로 나아
갈 염두도 두지 않았다. 앗시리아가 미타니 왕국의 정치,문화적 통치를 떨쳐
버리고 강성케 된 때는 아슈르우발릿(Asshur-uballit,1365-1330)때였다. 그는
여호수아의 정복 기간이 끝나고 사사 시대가 시작할 무렵에 앗시리아의 재
위에 올라, 서쪽으로 후리족의 미타니 왕국을, 남쪽으로 카스족이 다스리는
바빌론을 누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정치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적어도 이같은 상황은 이스라엘의 사사기 마지막 시기쯤에 살았던 앗시리아
의 디글랏빌레셀1세(1115-1077)의 통치까지 지속되었다. 물론 이 기간 동안에
인접 국가 간에 심판 정치적 굴곡이 있었지만, 우리의 관심 영역밖에 있다.
다만, 이 기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우리의 관심 지역인 가
나안에 관하여 주변 국가들이 간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②미타니 왕국
미타니 왕국은 후리족이 세운 왕국으로 동쪽의 앗시리아와 서쪽의 헷 왕
국 사이에 끼었다. 상부 유프라케스 강의 발릭과 하볼 지류를 따라 놓여진
미타니 왕국은 강력한 통치력을 아마르나 시대(약1400-1350년) 곧 이스라엘
의 정복 시기에 떨쳤다. 그러나, 방비할 수 없는 지형학적 위치 때문에 계속
하여 주변 강대국에게 차례로 먹히웠던 미타니 왕국은 어떤 위협적인 존재
는 되지 못했다.
③헷 왕국
상당 시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헷 제국의 창시자인 수필룰리우마
스(Suppiluliumas,1380-1346) 때에 이르러 세계적 국가로 성장하였다. 여호수
아가 죽기까지 그는 시리아를 공격하고 구블라(Gubla)에 이르기까지 점령하
였다. 그는 이스라엘 정복 시기에 헷 왕국을 근동 세계에게서 탁월한 국가로
세운 자이다. 이같은 성취는 군사적 수단과 더불어 쌍방 조약과 봉신 조약
형태의 국제 조약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상당 기간 동안 그는 이집트의 능
력을 알지 못했고, 또 미타니와 앗시리아에 괴롭힘을 받은 관계로 가나안의
북쪽에 머물고 말았다. 그러다가 아멘호텝이 이집트를 통치함과 동시에 종교
개혁을 주도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돌보지 못하였을 때 헷 왕국은 이집
트를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이집트의 영토라고 여겼던
가나안 땅에 정치적 큰 공백이 생겨, 이를 정복하는데 매우 자유롭게 되어
적어도 헷 왕국은 이집트의 19왕조와 대적하기 시작한 무와탈리스(Muwatallis
1320-1294)때까지 시리아를 계속하여 통치할 수 있었다.
1300년경 이집트의 람세스 2세는 오론테스의 가데스에서 헷 왕국을 공격
하나 패배하여 물러섰으며, 헷 왕국도 동쪽에 있는 앗시리아의 위협 때문에
이집트를 쫓아가 일격을 가하지 않았다. 헷 왕국의 하투실리스(Hattusilis,1286
-1265) 때 가서는 이집트의 람세스 2세와 쌍방 조역을 맺어 서로 영토를 침
범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1284년). 하투실리스가 죽은 후 헷 왕국은 약화되
어 더 이상 이스라엘 지역까지 침임할 수 없었으나 적어도 1200년경 해양
민족에게 갑자기 멸망당하기 전가지 시리아의 대부분을 통치하였다. 이후 헷
왕국은 후기 사사 시대에 전혀 역할을 하지 못했다.
④이집트
정복 시기에 제일 큰 변수를 가져다 준 나라는 이집트이다. 출애굽 시기의
바로였던 아멘호텝2세(1450-1425)는 팔레스타인에 관심도 없었거나 혹은 재
위 5년째, 곧 출애굽하던 해에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아
들 투드모세 4세(1425-1417)도 단 한번 아람-나하라임에 이르는 북방 원정을
한 것 같다. 이 시간은 이스라엘이 시내 광야에 있을 때 일어난 것이어서 이
스라엘 정복 사건과는 무관하다. 아멘호텝3세(1417-1379)는 이스라엘이 가나
안을 침공하고 점령하던 시대에 통치하였으나, 그의 관심은 가나안을 방어하
려는 데 있지 않고 사냥과 예술에 있었다. 그가 군사적인 원정을 한 거은 남
쪽 누비아에 대한 것뿐이다.
이러한 이집트의 정책은 아멘호텝4세(1379-1362)의 등극으로 바뀌지 않았
다. 그는 모든 관심을 정치와 군사적인 영역이 아닌 종교적인 곳에 둠으로써
외적인 모든 문제를 등한시하게 된다. 그는 새로운 제의에 맞추어 이크나콘
으로 바구고 새로운 수도 아케타톤(el-armarna)을 건설하였다. 이곳에서 발견
된 아마르나 문서에 가나안 방백들이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청하지만, 이
크나톤은 자신의 종교적인 환희에 몰두하여 이런 요청을 무시해 버렸다. 아
멘호텝3세와 이크나톤의 연대는 전통적인 정복 연대와 일치하고 있음에 주
의할 필요가 있다. 이집트가 이 당시 가나안에 보였던 무관심의 다른 배후는
확실히 여호와의 손길이며, 이로 인하여 그의 백성이 약속의 땅을 소유할 수
있도록 정확한 상황을 만드셨다.
19왕조의 세티1세(1318-1304)에 이르러서야 가나안 정복을 다시 이행할 수
있었다. 벧산에 세웠던 비문에 그는 이스르엘까지 원정하였다고 한다. 그는
랍바와 가사를 취하고 남쪽 지중해 연안을 따라 벧산,아고, 두로, 그리고 더
북쪽까지 취했다고 한다. 벧산에서 그는 '아피루'를 만났다고 하는데 출애굽
후기 연대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 '아피루'를 이스라엘로 보려 한다. 세티 1세
는 해안 지역과 이스르엘 골짜기를 제외한 가나안의 어느 부분도 접촉하지
않았고, 이 두 지역도 이스라엘 점령 지역 밖의 지점들이었다. 두 번째 원정
에서 그는 북쪽으로 가데스와 아무루를 격파하였고, 4번째 원정에서 그는 가
데스를 빼앗기고 헷 왕국의 무와탈리스와 조약을 맺었다.
람세스2세(1304-1236)는 출애굽의 바로일 수 없으면, 그가 살았던 시대는
성경 역사상 사상 시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놀라게도 그는 사사기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고 그의 연감에도 이스라엘은 언급되지 않았다. 람세스의 맨
처음 주된 외국 원정은 재위 4년째에 레바논에서 헷 왕국과의 전투였다. 다
음해에(1300)그는 가데스에서 후퇴를 한 뒤, 이 작은 지역에 별 관심을 쏟지
않았고, 그로 인하여 가나안 봉신들이 그를 반역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다. 1284년 그는 히투실리스와의 조약을 맺고 1270년에는 헷 왕국의 딸과 정
략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는 간접적으로 하투실리스에 종속됨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가나안 내부 지역, 곧 이스라엘이 점령한 지역에 대해
서는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이 외에 그가 가나안 지역을 간섭한 것은
모압,에돔,네게브이다. 그러나 이 지역은 이스라엘 점령 지역이 아니므로 그
는 이스라엘과 분명한 접촉을 한 사살이 없었다. 메르넵타(1236-1223)는 적어
도 한 번 팔레스타인에 원정(재위5년)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격퇴
하였다고 말하지만, 아마 이 단어는 이스르엘 지역에만 한정된 것 같다. 이
같은 추측은 성경의 이스라엘이 가나안 수중의 게셀을 점령하지 않았다는
성경 기록(수16:1)에서 엿볼 수 있는데 당시 게셀이 이집트 지배하에 있었음
을 암시한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이 비문의 이스라엘 언급은 출애굽의 정
복과 정복의 후기 연대를 주창하는데 자료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약 후
기 연대 주창자들을 따라 출애굽이 그의 통치 초반에 일어났다고 하면 어떻
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메르넵타를 대적할 만큼 주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겠는가?
메르넵타 사후 22왕조의 쇼셍크(Shoshenq,945-9824)의 통치 때까지 이집트
는 시리아-팔레스타인에는 다시 개입하지 않게 된다. 심지어는 리비아와 해
양민족을 격파할 수 있었던 람세스3세(1198-1166)도 팔레스타인에 원정하였
지만 에돔에 한정하고 있다. 메르넵타가 죽은 후로 이집트는 시리아-팔레스
타인의 모든 지역을 잃은 것이다. 20왕조의 남은 기간엔(약1085년까지) 이집
트는 이스라엘과 어떤 관련도 갖기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