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대 수 | 74 세대 |
인 구 | 남자; 67 명. 여자; 75명 (합계) 142 명 |
마을임원 | 이장: 이상문(011-632-6157). 새마을지도자;(남)김홍성윤. (여)김연애 |
◎ 마을의 지명 설명
• 동헌터: 회진리 830번지에 있는 회령진의 동헌터
• 객사터: 회진리 826번지에 있는 회령진의 객사터.
• 장방청터: 진고샅(긴 골목이란 뜻)에 있는 회령진의 장방청터.
• 비석거리: 회령진성의 동문아래에 있는 선정비 등이 쭉 서 있었다.
• 당거리: 진고샅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내는 당이 있었다.
• 박씨자선비: 회진 동쪽에 있는 비로써 참봉 박종우가 자선한 일을 기리어 비를 세웠다.
• 덕도노디/ 십리딸깍다리: 갯벌에 있는 징검다리로써 회진에서 덕도로 넘어가는 노 디. 높고 낮은 돌을 드문드문 놓았는데 꾸불꾸불 길어서 십리가 될 만큼 멀었 다 한다.
• 마장골: 회진과 진목 사이의 골짜기에 군마를 놓아 먹이던 마장이 있었다.
• 거무성골: 간뎃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이씨의 묘가 있는데 풍수설에 거무(거미) 형국이라 한다.
(여기에 거명되지 않는 지명에 대해서는 ‘이회진’을 참조하시기 바람)
◎ 마을의 문화유산
□회령진성(會寧鎭城)
회령진성은 1490년(성종21)에 성을 축조하기 시작하여 15년에 걸쳐 1554년(명종9)에 완공하였는데 회령진성 축조후 해군 전진기지 역할을 하였다.
‣ 회진 서구마을은 회령진성으로 둘러 싸여 있다.
‣ 1530년(중종25) 이행의 ‘동국여지승람’ ‘성곽’편에 성은 돌로 싸여 있으며 둘레가 1960자, 높이가 10자, 샘이 1개 있고 장흥부 남쪽 72리에 있다고 하였다.
‣ 1864(고종1) 김정호 편찬 ‘대동여지’ ‘진보’편에 성은 장흥부의 남쪽 70리 바닷가에 있으며 성의 주위가 1990자, 성문이 3, 수군만호 1, 성내에는 72호, 공청으로는 아사청, 객사, 작청, 군관청, 사령청이 소재했고, 군관 20명, 장교 6인, 방군은 40~80명, 사부 15명, 농노군 50명, 전선 1척, 병선이 1척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회령진성은 방어와 수색을 위하여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나 수군만호(水軍萬戶)들이 수시 병선을 이끌고 왕래하였으나 여기에 군량과 군기를 쌓아두고 유사시 하번선군(下番船軍)이 집결하는 곳으로 특히 충무공 이순신이 이곳에서 장흥의 많은 의병의 후원을 얻어 달량포(達梁浦) 싸움을 승리로 이끌고 명량대첩전에 수군발진기지 역할을 한 역사적인 성이기도 하다.
‣ 회령진성은 마을의 뒷산을 이용하여 쌓은 부정형 성으로 현재는 연륙이 되어 있는 덕도(德島)와 노력도(老力島), 대마도 등의 섬들이 둘러싸여 있다.
‣ 현재 성벽은 폭 1.5~2m, 높이 2.3~2.5m, 석성 150m와 토석으로 쌓은 성 220m가 남아 있으며 북문과 서벽도 잘 남아 있다. 그 외 동헌터와 객사터 그리고 동문지(東門址) 객사터 부근에 거북좌대가 옛 위용을 호위한 흔적 등이 남아 있다.
□교육기관
본 마을은 학교가 없어 4km 떨어진 대덕 소재지까지 다녀야 했다. 거리가 멀고 생활의 어려움으로 학교를 다니지 못한 어린이들을 위하여 1936년께 현 이회진 농장에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입학하였으나 한국동란때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불을 질러 학교는 폐쇄되었다. 그 후 현 객사터로 옮겨 수학하였다.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간이학교를 폐교하고 학생들은 대덕초등학교로 편입하여 수학하였으며 1948년 회진초등학교(당시는 대덕동초등학교) 설립 후 회진초등학교로 입학하였다.
중학교는 대덕에 중학교가 없어 장흥, 여수, 목포 등지로 다녔으나 1949년에 설립한 대덕중학교로 다닌 후 1983년에 회덕중학교가 회진에 개교함에 따라 회덕중학교에서 수학하고 있다.
고등학교는 장흥, 여수, 목포, 순천, 광주권으로 다녔으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관산고등학교, 대덕종합고등학교가 설립됨으로써 병행 이용하고 있다.
□회진성 뒷산
• 높이 : 143m
• 위치 : 회진리 회진성 위에 있는 산
<회진 뒷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