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조선에서 조선 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은 남달랐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특히 식기나 변기로 도자기를 사용하는 경향이 강해 이 틈을 이용해 성공한 일본인이 늘어났다고 한다. 평안도 진남포에서 고려청자와 유사한 제품을 만들어 일본에 수출한 도미타 기사쿠(富田儀作·1958~1930)가 그런 사례. 나는 2004년 일본 효고현 이나가와초(猪名川町)에서 그에 대해 처음 알았다. 이나가와초의 향토관 수장고에는 그가 조선에서 만든 요강·유기그릇·제기·식기 등이 보관돼 있었다.
도미타는 16세 때부터 기와 제조업과 광산노동을 하면서 수학·측량학 등을 공부했다. 곡물가공업과 미곡거래를 하는 회사의 조선지점장으로 조선에 온 그는 조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평양 옆 진남포에서 도미타상회를 열어 공예품 생산과 판매에 주력했다. 이나가와초 향토관에 남아 있는 물건은 조잡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통영에 칠기전습소를 만들고, 진남포에 고려청자 재현을 위한 요업공장을 운영한 이유는 조선 공예품에 대한 일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었다. 1차 목표는 장사였던 것이다.
고려청자에 대한 일본인들의 찬사는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이전부터 대단했다. 그래서 도미타처럼 이른바 ‘고라이야키(高麗燒)’, 즉 고려청자의 재흥(再興)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인 중심으로 전개된 고려청자의 재현 의지는 해강 선생에게도 영향을 끼쳤고, 결국 1970년대에 이르러 결실을 보게 됐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이천 도자기의 명성은 일제 때 만들어진 이른바 대방동 요업공장 덕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88년에 나온 지정희의 석사논문 ‘한국전승도자의 현황’은 ‘대방동 가마’가 어떻게 이천 수광리에 모이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1955년, 서울 성북동에 ‘한국조형문화연구소’라는 공방이 문을 연다. 하지만 운영난으로 1년도 안 돼 문을 닫는다. 1956년에는 조각가 윤효중 선생이 ‘우리나라 도자공예의 전통을 이어받아 현실생활에 조화되는 도자기를 만들고자 고려청자·이조백자의 재현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로 ‘한국미술품연구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지를 당시 우리 정부와 사회가 받쳐주지 못했고, 결국 1958년에 문을 닫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대방동 가마’에서 일했던 일급 조선인 장인들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비록 연구소는 문을 닫았지만, 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주목한 곳이 지금의 이천 수광리였다.
모태 배반한 이천 도자기
수광리에는 당시에도 요업공장이 몇 군데 있었다. 지금은 이천 도자기의 전설로 알려진 인물들이 이들 공장으로 옮겨갔다. 이들은 처음에 옹기 굽는 가마를 이용해 분청사기로 된 화분, 화병, 술병 등을 만들었다. 옹기보다 수익이 많다는 판단에서다. 옹기 가마 주인 홍재표는 대방동 가마 출신인 지순탁, 고영재와 함께 ‘수금도요’라는 공방을 1958년 가을에 개업했다. 수금도요에는 이들 외에도 한국미술품연구소에서 처음으로 그릇 굽는 일을 시작한 현무남, 김흥준, 서인수, 이종열과 같은 젊은 도공들이 있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이천 수광리에선 도자기 공방도 하나 둘씩 문을 열었다. 수금도요 공장장 지순탁은 독립해 ‘고려도요’를 설립했고, 고영재 역시 방철주가 설립한 ‘동국요’의 공장장으로 나갔다. 1958년 이후 수금도요는 재일교포 출신인 조소수와 연결돼 일본에 수출을 하면서 제법 호황을 누렸다. 결국 조소수가 수금도요를 인수해 오늘날의 ‘광주요’를 설립했다. 해강 유근형은 1959년에 수광리에 온 이후 옹기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웠다. 그는 1960년에 고승술이란 사람의 옹기 가마를 빌려 아들 유광열과 함께 ‘해강고려청자연구소’라는 공방을 열고 본격적인 청자 제작에 들어갔다.
이렇게 모여든 수광리의 도자기 공방들이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는 1965년의 한일 국교수립. 6·25전쟁 때 미군에 각종 물자를 공급하는 기지 구실을 하면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일본은 다시 조선 도자기에 관심을 쏟았다. 일본인들이 특히 주목한 장소는 이천 수광리. 당연히 대방동 가마 출신 장인들이 일하는 공방에서 만들어내는 이른바 ‘전통적’ 도자기의 수요가 날로 넘쳐났다. 동시에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 등의 새로운 재료로 만든 식기가 나오면서 옹기의 수요는 급감했다. 결국 수광리의 옹기 가마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 이천 수광리에서 만드는 도자기는 예술품에 버금가는 고려청자, 조선백자, 청화백자, 분청사기 등이 주류를 이뤘다. 서양식 도자기를 주로 만드는 대학 도예과 학생들의 실습장도 수광리에 들어섰다. 오늘날 이천 도자기의 명성은 일제 강점기의 대방동 가마에서 출발한다고 봐야 옳지만, 수광리와 대방동 가마 장인들을 연결시켜준 매개물은 이곳에 있던 옹기 가마였다. 식생활에서 없으면 안 되는 옹기를 굽던 가마에서 예술품 도자기가 나온 셈이다. 미학적 입장에서 보면 대단한 변신이라고 하겠지만, 식기로서 도자기 처지에서 보면 오늘날 이천 도자기는 모태(母胎)를 배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렇다고 이천 도자기가 식기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도자기 자체가 원래부터 식기로 쓸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이전까지 차를 일상음료로 마시는 한국인은 매우 적었다. 1990년대 이후 차를 마시는 인구가 점차 늘어나고 있지만, 소위 ‘다도(茶道)’라는 격식을 강조하는 ‘다구(茶具)’에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값비싼 ‘다구’를 선물 받아도 보관해둘 뿐,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왜 이천 도자기는 한국인의 식생활에서 꼭 필요한 도구로 쓰이지 못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