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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th. Jun(일)
계속 날이 궂다. 비가 오락가락이다. 모두들 틀어 박혀 있다. 어제 Venice갔다 밤늦게 돌아온 피로들이 있기도 하고 또 그 얘기들로 꽃을 피운다. 13명이 하나의 단체이면서도 행동이 통일되지 않아 고충이 많았다는 2/E의 보고였다. 그런 여행을 나서면 가장 개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배에서 평소 볼 수 없었던 진풍경(?)들이 더러 있음을 알 수 있다. 저녁때 C/O. R/O가 로마를 다녀오겠단다. 다소 먼거리라 염려 된다지만 사람들을 믿을 수 있어 허가를 했다. 밤 10시차를 타면 다음날 아침 8시 로마에 도착, 낮에 구경을 하고 다시 밤차를 타면 익일 아침에 이곳 Teriest에 닿을 수 있단다. 늙은 국장 몸도 불편한데 괜찮겠느냐?니 가고 싶단다. 아마 이걸로서 뱃 생활을 청산할 참인가보다. 가장 왕성한 청년시절부터 뱃길에 일생을 바친 그로서의 소감이 궁금하다. 이번 Las에서 교대라고 마치 어린애처럼 좋아하던 그 순진성, 선물하나를 살 때마다 손수 가져와서 자랑하던 그 천진난만한 점이 꼭 전에 협성의 원목선에서 함께 탔던 황이조 갑판장을 연상케 한다. 배에서 늙은 사람들의 공통된 점이 아닌지 모르겠다. C/O. R/O 떠난 뒤 일찍 잠자리에 들다. 진한 위스키를 Straight로 한잔 들이키고 -. 스스로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위해서 -.
27th. Jun(월)
아침부터 어께의 통증이 심하다 궂은 날씨에 엊저녁의 술 때문인가? 느린 하역, 날씨처럼 우중충한 하루였을 뿐이다. 입항한지 10일째다. 오후 병원에라도 갈까했는데 다소 가라앉는다. 국장영감님의 어께 뼈다구 보던 생각이 나다.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좀 더 견디어 보기로 하다. 꼭 책상에 앉아 있으면 아프다. 그 이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 완전한 것은 이 세상에 과연 없는 것인가? 구입한 녹음기은 본래의 목적과는 달이 연일 구슬픈 유행가 가락만 뽑아내고 있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한결 편하고 좋다. 하루가 바쁘다거나 충실하게 여겨질 때는 더 빨리 저녁이 찾아든다. 그러나 오늘 같은 꾸릿한 날은 더 지겹고 시간이 더디다. 게으런 사람에겐 시간적 여유가 있을수록 더욱 게을러진다는 말이 진실인가 보다.
28th. Jun(월)
아침 8시반경 C/O와 R/O가 ROMA에서 귀선했다. 피로한 기색이 완연하다. 그러나 100여 불 가까운 돈이 들긴 해도 꼭 한 번 가 볼만한 곳이라고 두 사람이 극력 권한다. 그렇잖아도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근간 Owner 측에서 Telex가 잦고 또 선내의 술렁한 분위기만 아니였으면 그제 함께 갔을 것이었다. 오늘 하역 일정을 확인하고 왠만하면 오늘저녁 출발해보자. 낮에 Agent도 거쳤다. 사전 준비지식도 갖췄다. 동행을 찾으니 없다.
차라리 혼자가 편할 것 같기도 하다. C/E가 또 따라 나선다. 같이 가자. 밤 10시25분발 Roma행 급행열차. 1st. Class에 탔다. 20,600Lire(한화 약 11,400원)다. 보름을 며칠 앞두었는가 달이 유난히 밝다. 바깥 풍경을 볼 수 없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가급적 잠을 자두기로 하다. 어디를 어떻게 달리는 지도 모른다. 다만 잠결에 보니 열차가 앞으로 혹은 뒤로 달리기도 한다. 아마 중간역에서 객차를 다른 열차에 연결해서 가기도 하는가 보다. 마침 같은 칸에 유고스라비아인 선원한 사람이 탔다. 말이 불통이라 불편했으나 술 한 병을 꺼내어 같이 나팔을 불잔다. 포도준가 했더니 알콜 43%의 독주다. 첫 한모금에 목이 콱 막힌다. 그놈은 안주도 없이 몇 모금을 마신다. 더 권하지만 마실 수가 없다. 내일의 일정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무리다. 29일 새벽 5시 날이 샌다. 조용한 농촌의 들판을 지난다. 넓은 목초 재배지엔 Sprinkler가 무지개를 그리며 撒水를 하고 있다. 가끔 산꼭대기에는 이태리식 옛성터가 보인다. 포도원이나 과수원에는 닭을 치고 염소를 키운다. 가정에서 짐승을 치는 우리의 농촌과 다른 점이다. 논농사는 거의 없다. 옥수수 재배, 그리고 목초, 밀 등이다.
07시경 열차 안에서 미리 준비한 삶은 달걀과 빵, 콜라 등으로 아침을 떼웠다. 08시20분 로마역 도착이다. 한 나라의 수도의 종착역이라 그런지 분주하다. 16-17번까지의 프렛트홈에는 오가는 열차와 승객들로 붐빈다. 전부가 전동차다. 디젤기관차는 없다. 역시 개찰구도, 출찰구도 없이 자유로운 내왕이다. 바로 택시로 Vatican City로 향했다. 역 광장에 나서서부터 거대한 성터가 있더니 군데군데 유적 같은 곳이 많이 뵌다. St. Peter 광장을 들어서면서부터 그 웅장함에 절로 탄복이 된다. 유명한 천재건축가 Gian Lorenzo Bernini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이 광장. 284개의 도리아식 원형기둥과 88본의 角柱로 구성, 1656년에 시작 1667년에 완성했단다. 기둥 위에 96명의 聖者, 순교자의 높이 3.2m의 대리석상이 줄지어져 있다. 이들 상은 대부분 Bernini가 디자인하고 그의 문하생들이 만들었단다.
主聖堂인 St. Peter대사원의 Cupola는 유명한 미켈란제로의 작품이기도 하고-. 우측의 로마 법왕청을 보면서 대사원에 들어섰다. 현재의 대성당은 옛날 콘스탄티누스 대제가(324-349) 세운 Basilica와 대체한 것으로 재건시 최초의 토대석은 1506년 4월18일 코리우스2세 법왕의 축복으로 시작, 수많은 건축가들이 동원, 1626년 9월 18일 바루봐노 8세 법왕의 임기 중에 높이 141.5m. 표면면적 150평방미터의 위풍당당한 대성당이 완성되었단다.
들어서니 훈훈한 향내와 함께 엄숙한 기분이 꽉찼다. 우측부터 돌았다. Michelangelo작의 La Pieta의 조각은 실로 감명 깊은 것이기도 했다. 흰 대리석을 마치 떡 주무르듯 만든, 돌로 깎은 천이 마치 마음대로 구겨진 것 같은 느낌이다. 이것은 France의 추기경 데이 라구라우스가 자신의 묘에 쓸려고 1498년에 미켈란제로에게 제작을 의뢰한 것으로 미켈란제로가 25세때의 작품이란다. 역시 그의 천재성을 증명한다. 성모마리아가 젊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를 무릎 위에 놓고 슬픔을 참고 있는 조용한 표정을 한참 보았다. 예수의 손등과 발등에는 십자가에서 박혔던 못 자국까지 파여져 조각되어 있다. 수많은 제단과 그 밑에 안치한 성자들의 시체모형, 조각, 천장의 벽화들, 바닥의 대리석 무늬, 어느 한구석을 그냥 남겨 둔 곳이 없다. 마침 주성당에서 미사가 올려지고 있었다. 붉은 천에 붉은 모자를 쓴 神父들이 경건하게 단상에서 집전을 한다. 양쪽에서는 따로 합창단이 있어 한 지휘자에 따라 은은한 Pipe Organ소리와 함께 성가가 퍼진다. 많은 교황들과 성직자들이 영원히 잠들고 있고, 지금도 세계의 수많은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는 지하실. 그리고 역시 미켈란제로의 작품이라는 직경 42m의 원형지붕(돔)에도 올라갔다. 아무런 기둥 없이 그 원형을 따라 한사람이 겨우 오르내리도록 만든 계단은 거의 250개다. 둥근 지붕을 따라 뱅글뱅글 돌면서 올라가는 것이 다소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았다. 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낙서가 그려져 있다. 한국 사람의 이름도 두어 개 보인다. 내 이름 석자도 써두고 싶었으니 차마 이 경건한 자리를 더럽히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 원형지붕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로마시내 또한 장관이다. 각 성당마다 붙은 커다란 벽화와 대리석 조각은 아무리 보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좀 더 많은 설명을 듣고 읽을 수 있었다면 -. 부설 기념품 상에는 수녀들의 작품인가 우리 한국 수녀아가씨들의 수놓은 병풍과 동양화 자수가 몇 폭 걸려있다.
바디칸시티에서 곧 이어져 있는 Castel San't Angelo(聖天使의 城)의 음침하면서도 견고한 구조. 그리고 전시된 칼, 갑옷, 총들의 무기 유물전은 실로 보기 드문 것이리라. 135년에서 39년에 걸쳐 지었으니 큰 1800년의 역사가 엉켜있다. 황제가 바뀔 때마다 성으로서 政敵을 가둔 감옥으로서, 또한 침략을 받을 시엔 피난처로서 쓰여져 왔다는 이성의 이름은 성 꼭대기에 있는 천사가 두 날개를 편 체 칼을 칼집에 꽂고 있는 像에서 유래하는데 이것은 로마에 패스터병이 창궐했을 때 크레코리오대 법왕의 꿈이 한 사람의 천사가 성의 꼭대기에 서서 칼을 꽂으며 ‘이제 화가 끝났오’라고 한 것을 보았다는 종교적인 전설에서 불리워지고 있다고 한다. 겨우 두 곳을 마쳤는데 12시가 넘었다. 갈 길은 바쁘고 볼 것을 많고 -.
우선 여기서 Roma의 역사를 간략히 옮겨 보자, 학설에 의하면 로마의 기원은 BC900년경 다치오의 땅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테베르강의 강안에 있는 작은 7개의 언덕에 당시의 지방들 지배하고 있던 에도루스인의 문화의 영향을 깊게 받아 살고 있던 일종의 라틴민족이 그 시조라고 한다. 그래서 로마시의 건국은 BC753년 4월21일 토모로의 발자취를 따라 그것도 파라디노의 언덕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로마라고 하는 명칭은 라틴어 혹은 에도루스크에서 나온 것으로 ‘강의 도시’란 의미라 전해진다. 그 당시 Latin민족을 에도루스크민족과 종교, 경제, 법률, 군사행동, 관리 등은 모두 동일체제였다. 그것이 후에 Latin민족이 에도루스크 민족을 지배하고부터는 시민이 2개의 계급 즉 귀족계급과 평민(시민과 농민)으로 나뉘고 그들이 지도자 護民官에 의해 양자간에 펑등한 정치가 행해졌다. 시의 위치가 바다에 가깝다는 것과 테베르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곧 군사방비와 경제번영을 이룩하게 되었고 이것은 후에 전세계의 문명과 복리의 중심이 된 로마시의 급속한 발전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 발전은 이미 ‘7대의 왕’시대에 벌써 그 징조가 나타났다. 이 왕정시대(BC 753-509)는 7인의 국왕이 세습제에 의해 통치해 왔다고 한다. ‘세루비오의 성벽’이 만들어진 것도 이때이고 왕정기 후반에 조직적인 정치기구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 원로원제도도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다음의 공화정(BC508-27년)에는 원로원에 의해 유지된 2명의 통령에 의해 정치가 행해졌으나 귀족과 명문의 세력이 강했던 이 시대에는 평민과의 싸움이 끊이질 않아 다시 시민과 농민에서 뽑힌 호민관에 의해 양자간의 조정이 이뤄져 다소 분쟁은 해결됐지만 이 형태는 오늘날의 Democrasy의 조직에는 도입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변화는 지배자 계급과 시민이 집회에 내보낸 원로원의 선출에 경의를 나타낸 관심이 취해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시의 확장, 경제유통의 번영은 더한층 로마인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그들의 진정한 자유와 지배력을 낳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BC 4세기 중반경 로마는 코루 민족의 침입을 받음과 동시에 전 라치오 지방을 지배했다. 최초 에도루크스 민족, 다음에 코르민족 더욱이 당시 남이타리아에 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그리시아 민족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 사실은 로마의 군사력이 이미 확고한 실력을 나타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력은 BC 270년 초에 전 이태리반도를 완전히 그들의 지배하에 넣었다. 이 군사적 승리는 그들의 종래의 문명, 사회를 더한층 고도로 끌어올리고 테배르강 언덕에 찬란한 하나의 정치적 체제를 갖추었다. 약 BC250년경 로마는 최초의 해외원정을 실시. 북아프리카의 강국 카르타고와 지중해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 전쟁이 터졌다. 이것이 포에니전쟁(BC264-241)이다. 3회에 걸친 전쟁에서 로마는 압도적 승리로 끝을 맺었다. 2회 때는 위대한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장군이 로마의 스키피오와 회전, 참담한 패전을 당하고 스스로 자결한 것 같기도 하다. 이 결과 해외통치권에 성공, 로마제국의 기초를 굳게 다짐으로서 미래에 있어서 문명, 정치의 전세계 중심지가 될 것을 분명히 했다. 공화정 시대의 끝에 역사적 인물 시이져가 등장. 그는 위대한 군인일 뿐만 아니고 위대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시이져는 그리시아 세계를 로마에 합병시키고 로마국위를 크게 상승시켰으나 44년 3월15일 그의 부하였던 부르투스, 앗시우수 등 모반자들의 ‘공화정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원로원에 들어오다가 피습당했다. 57세였다고 한다. 여기서 일단 공화정 시대가 끝나고 사실상 帝政로마가 시작된다.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는 모든 면에서 일단 평화가 확립되었다. 이 시대의 각지에는 장대한 대리석의 건물이나 조각이 만들어지고 로마시민은 우아한 귀족적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쇠퇴를 초래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쾌락취미는 곧 제국에 그늘을 끼치기 시작했고 여기에 따라 정치의 부패, 인구의 감소, 문명예술의 정체 등은 당연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얼마 안 되어 1C에 들자 그리스토교의 유래, 그리고 313년의 미라노칙령에 의한 콘스탄티누스대제의 크리스토교 공인후로 급속히 발전, 퇴폐해가는 사회의 공기를 그리스토교의 사랑과 덕으로 일소했지만 뒤이은 만족의 침입에 의해 한동안은 게르만 용병대장 오트마겔이나 데오도리우스가 로마를 다스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래도 퇴폐의 절정은 20년간 계속된 코도민족과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설령 로마의 역사를 표면적으로 밖에 관찰하자 않았다 하더라도 이 시대에 이미 로마제국의 멸망과 그 결과로서 일어난 시의 쇠퇴는 최고조에 달했다고 해도 좋다. 550년경 로마는 비잔틴제국의 한 시가 되고 한때는 라벤나에 그 이태리국왕이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로마시에 후랑크카로링 제국에 의한 이태리개혁의 실현이 보이기 시작하고 실제 카로대제는 8세기말까지 로마법왕에 의해서 황제의 왕관을 받아왔다. 후세의 황제들도 전례에 따랐다. 이 결과 로마는 잃었던 위엄을 되찾긴 했지만 뒤에 교회와 황제의 대립이 표면화하여 법왕과 분리파의 황제들에 의한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후에 이태리가 도시국가가 되고 나서도 다른 대립세력이 끊임없이 오랜 도시를 선동했다. 그러나 법왕과 황제의 대립은 로마 귀족세력에 의해서 일단 협조하기에 이르렀다. 또 국내 내란기에는 법왕이 프랑스의 아비욘에 감금 당하기도 했지만 1377년 재차 로마에 되돌아오고 나서는 사회도 일단 질서를 찾았고 귀족들의 세력다툼도 15C경까지에는 끝나고 여기서부터 로마법왕 중심의 그리스도문화의 최성기를 맞아 로마는 다시 이태리, 나아가 넓은 유럽의 예술과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바로크예술의 최성기는 법왕의 권력을 최고로 나타냈다. 그러나 정치적 관점에서는 아무런 탐욕도 욕심도 없었다. 제2의 부흥기는 1815년 피오7세에 의해서 시작됐다. 그래서 1830년까지 승려의 정치체제에 의한 최초의 조용한 애국심의 감화가 끓어올랐다. 피오9세(1846년)의 치세에는 통일운동이 최고조에 달해 1861년 드디어 이태리는 통일에 성공했다. 그래서 사실상 로마는 1871년 7월에 이태리왕국의 수도로 된 것이다. 1927년 이태리정부와 로마법왕과의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일단 해결을 봤다. 그 후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하여 1944년에 종전을 맞고 금일에 이르고 있다. 그것도 종전 후 1946년에는 사보이아 국왕을 폐하고 이태리공화국을 선언했다. (로마안내서에서).
Pizza Venezia를 중심으로 한 Roman Forum의 남은 돌기둥과 그 자취들! 바로 그 옆에 서 있는 Colosseum의 웅장함에는 쉬이 발길이 돌아서지질 않는다. 딩구는 한덩이의 대리석에도 비록 풍우에 짖겨 닳았으나 정교한 조각이 남아있다. 고대 로마인들은 조각을 곧 생활화 했는 듯도 싶다. 또한 그들의 전설 속에서도 항상 인간이 주역을 했던가 모든 조각과 그림은 사람을 위조로 했다. 흰 대리석을 쪼아 만든 여신들의 상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팽팽한 탄력을 보인다. 옛날 귀여운 소녀가 목마른 병사에게 샘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어서 ‘처녀의 샘’이라 불리는 Trevi의 힘찬 물줄기와 맑은 물. 모인 사람들이 자리를 뜰 줄 모르는 이상한 마력 같은 것이 있다. 그 분수를 둥지고 동전을 던져 넣으면 다시 로마를 찾게 된다는 전설에 따라 많은 동전이 물 속에 잠겨있다. 저 맑은 물은 BC19년 전에 아그립파가 로마의 교외에서 끌어들인 것으로 수도관의 길이가 20Km에 이른단다. 로마의 상징으로 되어있다는 She-walf상(늑대동상)은 그리 크지는 않으나 인상이 깊다. 로마의 건설자로서 쌍둥이(Romulus와 Remus)가 늑대에게 양육되어 최초의 왕이 되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각 박물관, 미술관의 소장품들을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지만 발이 부릅터도록 다녔다. C/E는 주저 앉는다. 부득이 극장엘 들여보내고 혼자서 몇 군데를 더 들리기로 했다. 가는 시간이 아쉽다. 너무나 안타까움이 컸기에 Camera를 하나 쌌다. 이미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으나 몇 장 남겨두고 싶은 일념에서-.
밤 10시15분 로마발 급행열차로 다시 귀선 길에 올랐다. 쉬이 잠이 들지 않은 체 낮에 본 그 아름다운 조각들에 미련이 남음을 느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현대의 조각, 철사나 구리조각으로 뜯어 붙인 의미 모를 것들 보담 얼마나 생동감이 있고 정교한 것인지. 기념으로 미케란제로의 Pieta모형을 하나 샀다. 아무래도 마음에 차지 않는다. ‘로마여 다시 한 번 기회가 있으면 며칠 머물면서 알뜰히 살펴주마. 그걸 빌며 무려 100L짜리 동전을 그 Trevi에 던져 넣었으니 꼭 다시 한번 기회가 올 것이다’ . 그렇군 오늘이 29일이다
30th.(목) Jul. 1977
오전 7시 45분 Trieste역에 도착. 바로 택시로 귀선하다. 크게 피곤한 줄은 모르겠으나 양 다리가 뻐근하다. 발바닥이 아릴뿐이다. 잘 하면 내일쯤은 출항이 될 것도 같다. Owner측에서 ETD를 연락해달란다. 기관실 Transformer 때문에 여러분 Telex가 오갔는데 다시 연락이 왔다. 뭔가 잘못이 있는 듯 하다.
저녁때 사진을 찍으러 국장, 일항사, 1기사 등 4사람이 나갔다. 공원에 있는 성터 그리고 수녀원, UNITA광장 등을 거쳤다. 도심지 한복판에 사방 어디에서나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공원이 참 좋다. 우거진 녹음 속에 젊은 남녀들이 사랑을 속삭이고, 가끔은 직접 입으로도 사랑을 나누기도 하며 노인들이 밴취에 앉아 있는 모습하며, 아기를 데린 중년부부들의 모습과 꼬마들이 뛰노는 모습 등 각색이다만 중년부부들의 모습과 꼬마들의 풍경이 가장 멋이 있어 보인다.
옛성터엔 입장료가 필요하단다. 마감시간이 임박하여 포기하다. 내려오는 골목길에 아주 오래된듯한 아파트. 우중충해 보인다. 아마 100년은 되었으리라. 현대식 건물에도 틈만 있으면 붙여둔 조각들. 이태리의 문화에서 조각을 떼어 내면 도시 전체가 무너진다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 같다. 창가를 내려다보는 늙은 노인들의 모습이 처량해 뵈기도 한다. 아마 종일 방안에 있다가 창을 열고 오가는 사람과 눈인사라도 나누면서 시름을 달래는 지도 모른다. 입항한지 보름 가까이 과연 무엇을 했던가? 내일 다시 출항하면 새로운 달 7월이 시작된다. 10여일간의 항해가 우선 시작된다. 空船인데 기상과 해상에 신경이 쓰인다. Laspalmas에서 Docking작업도 귀찮으리라. 낡은 배를 완전히 손보려면 새 배를 만드는 것보다 더 일이 많을 테고, 이왕 팔기로 작정한 배, 적당히 검사요건을 갖추는 중도에서 그치려 하겠지. 그러나 우리로서는 최대한의 수리를 실시토록 해야 한다. 바로 우리의 생명이 달려있다. 그리고 그 다음 항차의 일정은 또 어찌 되려는지? Charterer(용선자)의 행방도 아직 미정이지 않는가? 다시 서부 Africa로 갈 것인지? 그 더위! 지저분한 주위, 질서 없는 행정관청과 Agent, 예측을 불허하는 대기상태, Malaria의 피해 등등. 한동안 지중해를 다니는 동안 그런 것은 잊을 수 있었다. 천재적인 자연변화를 제외하고는 방임하다 싶이 해도 누구하나 손대는 사람이 없던 곳들이었다. 겨우 4개월 2일이 흘렀다. 빠르다면 실상 빠른 세월이다. 그간 아무런 대과없이 잘 보냈다. 6개월 계약연장자들의 귀국이 곧 닥칠 것 같다. 아마 지금부터 마음들이 들뜨고 있을 것이다. 8월에 교대 시킬 것인지 9월로 미룰 것인지 회사에서 어떤 지시나 연락이 Las에는 와 있을 것이다. 집에서 편지도 와 있을라나.
워낙 소식을 접할 수 없어 더욱 오래된 기분이 든다. 무척 고달프고 어려운 일도, 때도 많으리라. 학교 일에, 집안 일에 -. 우선은 건강하게 사고 없이 보내는 게 가장 바라는 바다. 의외의 사고는 예기치 못한다. 늘 마음의 긴장을 강요하기도 하리라. 우선 한 푼의 수입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실은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는 것인지? 앞으로 몇 년을 더 계속하는 약속은 하고 또 그런 계획 하에 뭔가 이루어 보려고는 하고 있지만 막상 쉬운 일은 아니다. 내 자신부터 차츰 자신이 서지 않는다. 당장 어느 만큼의 자본이 마련됀다 해도 현재의 나로서는 무슨 일에 선뜻 손을 델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그렇다고 뚜렷한 목적이나 Blue Plan을 꾸며 가진 것도 아닌데-. 그러나 현재로서 어쩔 수 없다. 객지에서 몸이나 건강하게 소기의 시간을 마친다는 것이다. 아내 역시 그렇게 알고 해줄 것이다. 우리가 늘 주고받는 말. ‘자신을 위하는 것이 곧 서로를 위하는 것’. 지금의 이 간절한 마음들이 무엇으로 보답되어질런지는 미지의 것이지만 분명히 대가는 있을 것이다. 청수, 주부식, 연료, 기타 출항을 Count Down을 하다. 너무 輕吃水라 염려가 되나 기상에 따라 Oil Tank에 Sea Water를 채우는 방법도 강구해 두자.
1st. July (금)
새로운 7월이 열린다. 기분과는 달리 흐리고 잔뜩 찌푸린 날씨다. 곧 빗방울이라도 떨어지려는 기세다. 만약 오늘 단 1시간이라도 비가 오면 오늘 출항은 어려워진다. 엊저녁 야간 작업을 한다고 했으나 늦게 온 비 때문에 얼마 하지를 못했다. 아침부터 Agent를 거쳐 일정을 협의했다. 가급적이면 오늘 출항하게 하라니, 최선을 다 하겠단다. 주머니에 2,000L가 남았다. 크라식 테잎이나 하나 살까 싶어 나갔더니 그나마 3,000L란다. 확실히 비싸다. Roma에서 36매짜리 Kodak Filim 한통에 1,400L였는데 여기서는 20매짜리가 2,400L이라니 -. 마침 Slide가 있어 하나 샀다. 15일간 머물던 이곳! Venice와 Roma 관광을 할 수 있었던 것이 가정 큰 기념이고 수확이었던 이곳이다. 막상 떠나기가 서운한 느낌이 남는다. 다시 한 번 공원 꼭대기에서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선원들에게는 이런 곳이 적합하지 않는 곳이다. 물가다 비싸고 여자가 없고 비싸고 -. 그러나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안성 마침이다. 우선 선원들을 안심할 수 있어 좋고, 부근의 명승지를 가 볼 수 있어 좋고, 도둑이 없어 좋고,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는 아늑한 부두의 부근에는 무료 해수욕장이 있어 늘씬하고 미끈한 여체들을 감상할 수 있어 좋다. 운 좋은 여자는 넘어져도 가지밭에 넘어지듯 다시 한 번 더 올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선원들의 소비도 많았다.
밤 10시 출항키로 했으나 Pilot와 Tug Boat의 수배가 늦어 11시경에 방파제를 벗어나다. 좁은 방파제, 2척의 예인선이 앞뒤에서 겨우 해냈다. 보름달이 둥실하게 떴다. 잔잔한 수면 위에 허연 달빛이 부서진다. 찬란한 도시의 불빛을 뒤로하며 항로에 올랐다. Las까지 10여일, 2,414Mile의 여정에 안전항해를 빈다. 대구의 영철군 앞으로 안부 띄우다. 경산의 영감님, 광안리 형님은 Las에서 띄우자. 집 소식부터 접한 뒤에 -.
2nd. Jul(토) 1977
워낙 배에 실린 게 없어 해상이나 기상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마침 뒷바람(順風)이다. 아침에 Deck Washing시 Separate용 그물을 버리다 그물이 Screw에 걸린 듯 했다. 선회하면서 했는데도 풍향과 그물자체의 중량 때문인 듯 했다. 급히 기관을 정지하고 Full Astern(전속후진)을 했더니 다행이 벗겨진 모양이다 만 등어리에 땀이 날만큼 앗찔하다. 만약 저게 심하게 감겼을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나마 도로 Trieste까지 회항 할 수 있다면 Claim을 물더래도 잠수부를 불러 벗긴다지만 계속 Eng.를 쓰지 못할 경우에는 -. 70년도 이던가 북태평양상에서 No.51 동방호에서의 쓰라린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도 天運이었다. 조용한 바닷가 아니였더라면 S.O.S를 날렸을 것이다. 매서운 밤바람. 뼛속까지 파고들던 零下의 해수온도, 콧물이 줄줄 흘러도 자신이 알지를 못했다. 金龍泰군의 필사적인 잠수할동, 유난이 많던 갈매기 떼가 아직도 선하다. 계속 뜨거운 물을 끓였고 두 사람은 계속 칼을 갈아데고, 셋이서는 연신 Pump질을 했었다. 그래도 손이 얼지 않았고 오히려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맺혔다. 추운데서 잠수할 땐 간장을 마신다고 했는데 그때 그걸 마시게 한 기억은 없다. 한 번 자멱질을 하고 올라 올 때마다. 어찌됐냐고 묻던 그 초조함, 마지막 한 가닥 Wire Rope를 톱으로 반쯤 설고 양쪽 Winch로 잡아당겨 터지게 했을 때의 그 기쁨과 성취감! 그것은 곧 살았다는 안도감을 주는 극적인 것이었다. 인상이 험악하다고 처음 승선을 꺼려했던 김 군의 공적으로 그를 다시 보게 된 姜 船長이기도 했다.
물론 대형선이라 해서 대양을 항해 중 이러한 사고가 쉬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예측은 할 수 없다. 아마 Screw의 Blade 한 개에 잠깐 결렸다 기관정지함과 동시에 벗겨진 모양이다. 후진할 때 아무런 이상이 없는 걸 보면 -. 바다위에선 무서운 폭풍우보다 잔잔한 속에 짙은 안개가 한층 더 위험하고 덩치 큰 원목덩이 보다 가는 실로 된 그물이 더 어렵게 하는 경우를 만든다.
배 천체에 녹이 너무 쓸었다. 특히 外板은 더하다. 그 놈의 Docking을 내일내일 하다가 이 꼴이 됐다. 보름동안 쌓였던 먼지를 털고 씻어내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개운하고 배 같은 느낌도 든다. 流出防止를 위해 갑판상의 Scupper들을 막았더니 구석구석에 썩은 물들이 고였다.
저녁에 전원을 모아 간단히 한잔을 했다. 별 의미는 없으나 새로운 한 항해를 마치고 그간의 노고를 위로 할겸. 뱃사람이 모이면 뱃 이야기 이상의 것이 나오지 않은데 다소 실망을 가진다. 그나마 현실을 떠난 꿈같은 얘기들이 싫다. 어쩌면 그것은 항시 그들의 마음속에 잠재하고 쌓여 덩어리 진 하나의 염원들인지도 모르겠다. 10년 세월이 지나면 그런 시절이 우리들에도 올까? 통상 육상의 임금이 선원들과 큰 차이가 없다면 과연 승선을 원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아직은 화려한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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