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고백으로 세워져가는 자여공동체
2023. 3. 12(교회설립 44주년) 사도행전 4:24-31
산토끼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으로 하는 IQ테스트가 있다. 산토끼의 반대말이 무엇인가?는 말에 키토산 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IQ 30이라고 한다. 그리고 집토끼라고 하면 IQ 60이고, 죽은 토끼라고 대답하면 IQ 80이다. IQ 100은 바다토끼, 들토끼, 강토끼 물토끼, IQ 150은 판토끼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IQ 200인 사람은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알칼리토끼, 염기토끼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IQ가 200인 사람은 사람들이 산토끼 반대말을 왜 키토산이라 하는지, 판토끼라 하는지 다 안다. 그런데 IQ 30인 사람은 왜 알칼리토끼라고 대답하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IQ가 높을수록 남들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똑똑한 사람인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외로움과 괴로움 중 어느 것이 힘들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람은 혼자일 때 외로움을 가진다. 그래서 사람들과 함께하면 괴로움이 쌓여가는 것이다. 마치 고슴도치가 외로움을 이기기 위하여 친구를 찾으면 친구의 가시에 상처를 받는 것처럼 우리는 혼자일 때 외로와하고, 함께할 때 괴로움을 가지는 것이다.
여러분은 외로움과 괴로움 중에 어느 것이 더 힘들어 보이는가? 창세기를 보면 천지만물을 지으시는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한다. 빛이 있으라고 하신 하나님은 좋았더라고 하고, 궁창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는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 처음으로 좋지 못하였다는 단어가 나온다.
언제 하나님이 좋지 못하다는 말을 제일 먼저 하였겠는가? 하나님이 좋지 못하였다고 말씀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이후가 아니었다.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감탄하시는 하나님이 아담이 독처하는 것을 보시고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한다고 말씀하신다. 그 부분을 함께 읽기 바란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혼자 있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각자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혼자 유튜브로 내가 원하는 설교듣고, 구제까지 하면 완전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혼자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함께의 삶을 살고 있는가? MBC 김민석PD는 가정폭력을 옹호하는 듯한 칼럼을 올렸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던 김민석PD는 사과문을 올렸지만, 분노한 사람들의 댓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래서 김민석PD는 자신에게 벌을 주기로 하였는데, 그 벌이 격리였다. 김민석PD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천주교에서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주는 최고의 벌은 출교이다. 천주교에서부터 떠나가서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제일 무서운 벌이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지으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서 감옥에 넣는다. 그런데 감옥에서도 죄를 지으면 감옥에서도 격리하여서 독방에 넣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김민석PD는 자신에게 내린 벌을 내려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또 세상과 소통하였던 SNS도 끊었다. 그리고 철저하게 세상과 격리된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반성한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과 격리된 삶이 얼마나 외롭게 힘들었겠는가? 그런데 아직 죄를 알지 못하는 아담이 혼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돕는 배필(에제르 케네그도)을 주었다. 여기서 돕는 배필은 서로 사랑하여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아껴주는 지원자를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는 심히 좋은 상태이다.
그런데 범죄한 이후 이 세상은 이상한 형태로 변하기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관계를 끊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실 때 범죄한 아담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여기에 숨었나이다(창 3:10)하고 대답한다. 아니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은 에녹성을 쌓고 그 안에 숨어서 세상과 단절시키고 스스로 격리된 삶을 살아갔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이다. 죄인은 함께가 아니라, 혼자, 끼리의 모습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된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악이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들이 모여서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있게 되었는데, 그 교제의 공동체가 교회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여교회는 이런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고 있는가? 유튜브 방송에서 노년기에 하지 말아야 3가지로 따삐빠를 말하였다. 연세가 드셔서 누가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하면 따지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내 말을 따지면 나는 따지지 않았는데, 저 사람은 왜 내 말을 따지는가?하는 생각에 삐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세 번째인데, 세 번째는 빠지지 말아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람들이 내 말을 따지고, 또 나를 삐지게 해도 내가 가야야 곳은 반드시 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 한번두번 빠지게 되면 결국 외롭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튜브 방송에서 나이들어 외롭지 않으려면 따삐빠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이 따삐빠를 지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다.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 갈라지는 듯한 역사로 성령이 임하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왔는데, 베드로는 그들에게 설교하였다. 그래서 3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렇게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함께 있어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모습이 본문의 배경인 3장-4장에도 기록되어져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기도로 갔다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을 만났다. 그때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고쳐주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나온다. 그래서 베드로가 솔로몬 행각에서 설교했을 때 5천명이 예수를 믿는 역사가 나타났다. 그리고 4장 32절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고 기록한다. 베드로가 설교하였고, 이를 통하여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아 자신의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런데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이키고 5천명이 회개하여 한공동체가 되는 이 놀라운 사건 다음에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과 성전맡은 자와 사두개인에 의하여 잡혀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위협을 받고 놓임을 받았다.
그렇게 교회가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행 4:23-24)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여기서 한마음이라는 단어는 사도행전 1장 14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120문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기도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할 때의 모습을 마음을 같이하여(행 1:14)라고 기록한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직 기도에 힘쓸 때에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위협을 받게 되었을 때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높여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왜 그들은 위협 속에서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부르짖었겠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27-28절을 읽기 바란다.
(행 4:27-28)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고치시고 선포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증거하였다. 그런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온 백성과 합세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 아마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승리의 기쁨을 노래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의 악한 힘을 통하여 하나님의 힘과 권세를 나타내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 성도들이 위협함 속에서 한마음으로 모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의 위협함 속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뜻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위협과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뜻이 나타날 것을 믿었기 때문에 한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교회공동체의 모습이다. 교회공동체는 얼마나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얼마나 인정받으며 할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협과 고통이 다가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이 나타날 것을 믿는 믿음의 공동체인 것이다. 그래서 위협함 속에 있는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위협함을 감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들은 무엇을 구하였는가? 이제 29-30절을 읽기 바란다.
(행 4:29-30)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그들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우리의 위협함을 보시옵소서. 그리고 이 위협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하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초대교회는 위협함 속에서 한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겠는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그 뜻을 온전히 이루시는 능력임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위협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온전히 선포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자여교회의 모습이 되어져야 하지 않는가? 내 삶에 어려움이 다가올 때 우리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하는 공동체로 세워져 가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체험하고 증거하는 교회로 세워져 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저와 여러분이 가진 신앙의 고백은 무엇인가? 세상이 알 수 없는 신앙고백으로 하나님의 권능과 뜻을 온전히 이루고 사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