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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교양 스크랩 조선 달항아리의 미학 / 신현철(申鉉哲 58) 명장
봄비 추천 0 조회 92 14.02.17 09:0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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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한 우윳빛에 풍만한 몸체 … 절정의 원숙미

 

조선 달항아리의 미학

 

 

국보 제309호인 백자대호. 보름달같이 동그란 아름다운 원형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백자 항아리는 사발·접시·병 등과 함께 조선시대에 가장 많이 사용했던 그릇이다. 용도에 따라 일상생활에 쓰는 것과 제사나 잔치 같은 예식에 사용하는 그릇으로 구분된다.

 

예식에 쓰인 항아리는 단정한 형태와 유색으로 엄숙한 느낌을 준다. 탁자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는 거울이라고 생각될 만큼 옆에 두고 보기 위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무늬가 없는 백자 항아리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많이 만들어졌다. 15, 16세기의 항아리는 입이 밖으로 말렸거나 안으로 숙여 세워진 형태에 몸체가 어깨에서 벌어져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다. 17세기에 들어와서는 그 전의 형태를 이은 것과 새로운 둥근 항아리가 크고 작은 형태로 만들어졌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입이 은행알처럼 예각으로 깎이고 몸체가 둥근 달처럼 풍만해 원숙함이 드러난다. 유색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유백색, 설백색을 띠며 둥근 몸태와 함께 조선 조형미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19세기에 이르면 목이 더욱 높이 세워지고 몸체가 길어진 고구마형에 유색은 청백색을 띠게 된다.

 

이 중 18세기 전반 숙종과 영조 연간에 걸쳐 주로 만들어진 달항아리는 흰색과 둥근 맛에 있어 가장 원숙한 느낌을 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충만한 느낌의 달항아리가 나올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일까.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에 이은 병자호란으로 사대부들이 이루었던 모든 것을 전쟁으로 잃어버린 시기였다. 더 큰 충격은 청나라의 등장이었다. 조선의 건국이념인 유학의 가르침을 준 나라는 명이었는데, 주인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중국(명)이 사라지자 “이제 (오랑캐 나라 청이 아닌) 조선이 중국이다”라는 움직임과 함께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다.

 

18세기 전반에 걸친 조선의 회화, 특히 겸재 정선(1676~1759)이 추구했던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을 소재로 한 그림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었다. 실학(實學)도 그런 움직임의 하나로 역사·경제·사회·문화 등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재발견을 추구했다. 춘향전·흥부가 같은 소설과 판소리, 또 목기와 옹기도 이때부터 새로이 만들어진 것으로 오늘날 한국적이라 하는 세계의 뿌리가 발현된 것이다.

 

도자기의 경우 18세기의 중국은 백자 위에 에나멜로 이른바 삼채(三彩), 오채(五彩) 등의 화려한 채색 자기를 만들었다. 일본도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해 만든 채색 자기를 유럽에 수출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것이 모두 오랑캐 짓이라 여기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가장 조선적인 담백한 순백자의 풍만한 항아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제작의 중심은 왕실용 도자기를 만들던 경기도 광주 금사리(金沙里) 가마였다. 숙종 35년(1709)에 분원에 머물며 항아리 제작 과정을 지켜본 담헌 이하곤(1677~1724)이 ?두타초(頭陀草)? 권3에 적은 시의 내용은 이렇다.

 

“…선천토(宣川土) 색상은 눈(雪)과 같아서 어기(御器) 번성(燔成)에는 제일이라…수비(水飛)하여 만든 정교한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도네/ 잠깐 사이 천여 개를 빚어내니 사발·접시·병·항아리 하나같이 둥글다네.”

 

금사리 가마는 1726년께부터 1751년까지 25년간 도자기를 구워냈다. 유백색ㆍ설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둥근 달항아리를 비롯, 굽이 높아진 각종 제기와 면과 각을 다듬은 다양한 항아리와 병이 등장했다. 청화로 간결하게 번초·패랭이·들국화 문양을 그린 청초한 청화백자도 제작됐다.

 

일제 강점기 시절 ‘민예운동’을 주창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1889~1961)는 일찌감치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을 간파했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 백자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1 조선 백자를 소재로 한국적 고전주의와 아카데미즘을 일군 도천 도상봉의 ‘항아리’(1953). 2 수화 김환기의 유화 ‘항아리와 매화’(1954). 3 다나 에스테이츠의 와인 ‘바소(VASO)’ 레이블. 사진작가 구본창의 달항아리 사진을 활용했다. 바소는 이탈리아어로 항아리란 뜻이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김환기ㆍ도상봉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이 재발견됐다. 특히 수화 김환기 화백은 백자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6·25 때 피란을 가서는 서울에 백자를 두고 온 것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 수필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옆에 놓아둔 크고 잘생긴 백자 항아리 궁둥이를 만지면 글이 저절로 풀린다”고 했을 정도다. 1953년 5월 파리에 있는 건축가 김중업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코리아는 예술의 노다지올시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이제 전 세계 예술은 그 주제가 우리 코리아에 있다는 말이오…르 코르뷔지에 건축 또는 정원에다 우리 조선조 자기를 놓고 보면 얼마나 어울리겠소…”라고도 했다.

 

이뿐이랴. 달항아리는 최순우ㆍ김원룡에 의해 한국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부각됐고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잠실 올림픽 경기장이 달항아리의 선과 같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도자기 작가인 한익환ㆍ박영숙에 의해 재탄생되었다. 2005년 문화재청과 국립고궁박물관이 힘을 합쳐 마련한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은 온 국민이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이 무렵에는 일본에서 들어온 달항아리 세 점이 국보로 지정됨으로써 조선 백자의 원숙함이 재삼 주목받는 계기가 마련됐다.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309호인 ‘백자대호’는 높이가 44.5㎝, 구경이 21.5㎝, 저경이 16.5㎝로 옆에서 보기에 둥근 보름달 같은 아름다운 원형을 자랑한다. 보통 높이가 40㎝가 넘는 것을 달항아리라 부르는데, 몸체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따로 만들어 붙인 다음 높은 온도에서 굽기 때문에 대개 접합 부분이 변형되어 의도된 둥근 형태가 나오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렇게 실제 생활에 쓰기 위한 견실함, 장식이나 기교가 없는 단순함, 우윳빛의 유백색이 주는 담백함이라는 특징을 지닌 조선 백자 항아리의 세계는 보면 볼수록 더욱 가까이 가고 싶은 매력을 지니고 있다.

 

 

 

 

가마에서 꼬박 이틀 … 잘 익은 달을 꺼내자 교향악이 울려퍼졌다

 

달항아리의 탄생

 

신현철 명장이 9일 밤 뜨겁게 달아오르는 망생이 가마를 지키고 있다. 소나무 장작불은 열 시간 동안 열석 점의 달항아리를 익혔다. 최정동 기자

 

 

달의 집을 찾아서 떠난 여행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달을 만드는 장인을 찾아왔다. 달은 시(詩)다. 천상의 음악이며 신화다. 차고 기울며 생장과 퇴조를 반복하는 원융의 노래는 축제와 기원으로 승화된다.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강강술래 원무(圓舞)를 추고 저마다 마음속에 품어온 소원을 빌던 사람들! 달은 한국인의 집단무의식에 가장 깊숙이 스며든 문화 상징이자 문화 원형이다.

 

한국인은 달의 심성을 지녔다. 질박하지만 부드럽고 유약한 듯 보이지만 기운 생동하는 내공이 있다. 아무런 채색이나 문양이 없는 백자대호(白磁大壺), 달항아리는 한국인의 심성을 오롯이 담아낸 가장 한국적인 전통공예품으로 통한다. 달을 보며 풍요를 빌던 농경사회의 전통은 도시화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내면에 흐르고 있다.

 

“내 마음속에 뜬 달을 빚어내고 익혀내려고 합니다. 나 역시 현대인이지만 원시의 생명력을 부단히 이어왔고 자연스럽게 그 숨결을 표현합니다. 수년 전, 본격적으로 달항아리를 빚어내기 전에도 내 손에는 늘 달이 여물어 있었고 그걸 찻그릇이나 항아리 형태로 다채롭게 녹여왔던 거죠. 어머니의 배 속에서 자라고 나온 태생부터가 달에서 멀 수가 없는 겁니다. 개체는 전체를 반복한다잖아요. 지금의 내가 조상의 후예이듯 여러 도예가들이 각자 빚어낸 달항아리 역시 천상에 있는 달의 정령입니다. 조건은 단 하나, 늘 자연스러울 것!”

 

전통 가마인 ‘망생이’ 앞에서 연파도예 수월(秀月) 신현철(申鉉哲 58) 명장이 소박한 달항아리 작품론을 펼쳤다. 훤칠한 키, 동곳 없이 묶어 올린 상투머리와 자연스럽게 기른 수염이 압권이다. 조선 도공의 현신(顯身) 같기만 하다. 비스듬한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기다란 망생이 가마는 오늘, 명장이 달을 구워내는 달의 집이다. 볼록한 가마의 지붕을 만져본다.

지난 여름내 텅 비어 있던 달의 집은 습기를 머금어 눅눅했다. 올가을 들어 처음으로 봉통(아궁이)에 불이 들어가는 날이다. 도공에게 이 가마는 자신이 공들여 빚어낸 그릇의 운명이 결정되는 심판대다. 망생이 가마를 주관하는 절대자, 불의 혼이 숨어있다. 현자의 돌이 있다는 연금술사의 비밀의 방이 연상된다. 정성과 염원의 기운이 뭉친 곳은 어디나 지성소(至聖所)다.

 

 

전통 방식의 대형 달항아리는 위·아래 몸통을 따로 만들어 합체한다. 반구형을 두 개 빚어 반건조 상태에서 붙이고 다시 깎아 형태를 완성한다(사진 왼쪽부터).

 

 

흙의 장(章)

 

흙은 생명의 모태다. 목숨이 있는 모든 존재는 흙에 의존한다. 그 흙에 장인이 정성과 혼을 불어넣으면 한 줌의 흙일지라도 빛나는 보석이 된다. 이제 불의 심판을 기다려온 흙의 자손들을 만나보자. 명장의 작업실로 올라갔다. 수많은 토기들이 성형되어 건조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초벌구이 해서 모아 놓은 달항아리들도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장인은 초벌구이 달항아리 13점에 유약을 입혔다.

 

유약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전기 물레 앞에 앉은 장인은 태토(胎土:토기를 빚을 수 있도록 손질한 흙)를 올려놓고 물레질을 한다.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길쭉한 태토에 구멍을 뚫는다. 그릇을 벌린 후 아래쪽부터 서서히 위로 끌어올린다. 능숙한 손놀림에 따라 어느새 반구형이 되었다. 달항아리의 윗부분 반쪽이 빚어진 것이다.

 

달항아리는 위아래 동체를 반반씩 만들어 반건조 상태에서 붙이고 전(입술)과 굽을 깎아 완성한다. 따라서 완전한 구형체가 아니라 은행 알처럼 다소 길쭉하게 생기고 좌우 비대칭이 된다. 회전속도가 느린 발 물레로 성형하다 보니 기술적인 문제가 있어서 생긴 전통 방식이다. 요즘은 전기 물레를 사용하고 태토도 정제돼 기술적으로는 한번에 말끔히 통으로 빚어낼 수 있지만 미학을 고려해 전통 방식을 따른다.

 

완전한 구형체보다 한쪽으로 약간 비뚤어진 달이 더 운치 있고 멋스럽다. 달도 꽉 차면 오히려 기운이 덜해 보인다. 탱글탱글한 십오야 보름달보다 열나흘 달, 거의 다 차가는 기망(幾望)이 더 기운차고 길하다는 걸 옛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 시름에 겨울 때, 자기를 알아주는 벗과 더불어 술 한잔을 기울이기에 좋은 달밤은 언제일까. 절창 ‘적벽부(赤壁賦)’를 읊은 소동파는 7월 16일, 기망(旣望)에 벗과 뱃놀이를 하며 술을 마셨다. 기울기 시작한 달은 인생무상의 소회가 담길 수밖에 없다.

 

“흙은 내 몸, 내 자신입니다. 나는 우주의 4원소 가운데 으뜸인 흙에서 왔지요. 흙에서 온 내가 흙을 주무르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을 주물러서 그릇의 형체로 빚어냅니다. 그렇게 나의 현재를 거짓 없이 드러내면, 그것도 즐겁게 드러내면 세상 사람들이 함께 즐겨주더군요. 흙이 준 선물이지요.”

 

아내의 도움을 받으며 도예가의 길을 잘 걸어왔다는 그는 원효대사와 아들 설총의 이야기를 꺼냈다. 원효가 열반에 들자,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 경주 분황사에 안치하고 예배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절을 하자, 그 소상이 돌아보았다는 ?삼국유사? 출전의 이야기였다. 공감의 미학을 표현하려는 듯했다. 공감하면 통하고, 통하면 즐길 수 있게 된단다. 무엇이든 억지로 만드는 건 오래가지 못할 뿐더러 창의성이 없다고 했다.

 

“도예가는 대물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도예와 관련 없는 집에서 자유분방하게 자랐고 전문대에서 전기기술을 배웠어요. 1977년 대구에서 고려자기 전시회가 있었죠. 무심코 들어가서 ‘야, 이 조선백자 멋지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건장한 골동상인이 옆에서 ‘야, 이 무식한 녀석아. 그건 고려백자야’ 하는 것이었어요. 얼마나 부끄럽던지. 그런데 그분이 그 귀한 고려백자를 입술에 가져다 대보라는 거예요. 그때 느꼈던 첫 감촉은 충격이었습니다. 아기와 뽀뽀할 때의 감촉 같은 것, 그 감촉이 저를 운명적으로 도예가가 되게 만들었어요. 지금도 그 감촉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는 동력이죠.”

 

고려백자를 입술에 갖다 대 보라던 이는 서울 장안평 ‘백제당’의 주인 묵초 박재옥이라는 골동상인이었다. 예인의 인연법이란 이렇듯 우연하고 찰나적이다.

 

수월은 지금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그의 2세들도 그처럼 자연스럽게 도예인의 길을 가기 바란다. 그가 반쯤 건조된 큰 사발 두 개를 가져와 접촉 부위에 물을 바르고 붙인 다음, 이음매에 흙을 붙이고 돌려 깎아냈다. 전과 굽을 마저 깎자 푸근한 달항아리가 성형되었다.

 

물의 장

 

해가 불의 아버지라면 달은 물의 어머니다. 천상의 달에 설령 물 한 방울 없다 해도, 달은 물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왔다. 바닷물의 사리와 조금뿐만 아니라 여인들의 달거리조차 달의 영향으로 여긴다.

 

“물은 보살이며 마리아입니다. 도우미이고 매개자죠. 흙으로 그릇 모양을 성형할 때 물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태토의 고운 입자 틈에 고루 스며들어 있다가 마르면 대기로 날아가죠. 가마 속에서 불의 세례를 받고 나면 물의 성분은 거의 다 사라져버립니다. 얼마나 거룩한 생명의 원소입니까?

사라진 물은 대기를 순환하다가 태토로 다시 환원합니다. 물은 도인입니다. 노자가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한 까닭이 거기에 있겠지요. 달항아리는 물을 담았던 그릇이고 물은 달의 정기를 담은 존재니까 동기감응입니다.”

 

드디어 유약이 마른 달항아리들을 가마에 넣을 때가 되었다. 봉통과 접한 첫 번째 연실을 비워둔 채 두 번째, 세 번째 연실에 13점의 달항아리를 들여 세웠다. 불의 심판을 받기 위해 나란히 서 있는 달항아리들은 아무 죄가 없는데도 다소곳하게만 보인다. 그래서 망생이 가마 속은 도예의 법정처럼 보였다.

연실 입구를 벽돌과 흙으로 막았다. 이제 불을 들일 때다. 예전에는 불을 들이기 전에 떡이나 차를 올리며 재를 지냈다고 한다. 스님이 독경을 한 적도 있었는데 결과는 그런 의식과 무관했다고 한다.

 

“중앙일보와 중앙SUNDAY 독자들을 위해 마음 비우고 재연하는 거니까 그냥 불을 들이겠습니다.”

 

불의 장

 

불 들인 시간을 기록한다. 9월 9일 오후 2시 반이다. 불이 탄다. 습한 봉통을 삽시에 장악한 불은 기세 차게 타들어 간다. 망생이 가마 안에서의 불은 절대자다. 인정사정 없는 심판관이다. 장인은 가마의 불을 잘 관찰하고 불기운을 제때에 잘 다스려야 도자기의 소성(燒成:가열하여 경화시킴)이 원활하다.

 

저녁 8시 반, 유약이 녹으면서 그릇이 익기 시작했다. 돋움불이 필요했다. 비워두었던 첫 번째 연실, 그 빈칸에도 장작을 넣었다. 두 시간 동안 불을 넣자 두 번째 연실로 불이 건너갔다. 두 번째 연실에 한 시간 반가량 불을 땠다. 세 번째 연실에서 한시간10분쯤 불을 더 때자 가마 속 벽이 벌겋게 달궈지면서 투명한 고열을 뿜어내놓기 시작했다. 이 복사열로 그릇을 익힌다. 봉통과 연실 입구를 막았다.

가마 안의 달항아리들이 불의 뼈처럼 보였다. 그랬다. 불에도 뼈가 있었다. 달궈진 불 속에서는 흙도 뼈가 된다. 그 뼈들은 지금 환골탈태를 하고 있었다.

 

바람의 장

 

바람은 에너지다. 가만 두면 고요하지만 건드리면 성을 낸다. 가마 주변에 바람이 불면 불기운이 흩어진다. 바람이 세면 가마 온도가 잘 안 올라간다. 열을 빼앗아가고 때로는 요변(窯變:가마 안에서 예기치 않은 형체나 색깔로 변함)이 일어나기도 한다. 오늘은 바람이 잠 잔다. 연실 입구에 벽돌을 쌓고 흙을 발라 막았다. 밤이 깊어갔다. 달항아리들은 밤새 불의 심판을 받았다. 잔인한 시간이다. 달항아리는 신현철 장인이 빚어내고 정성과 혼을 담았는데 결정은 불이 한다.

 

이틀이 지난 9월 11일 오후 3시. 다시 가마를 찾았다. 추적추적 내린 가을비가 또 하나의 변수였다. 망생이 가마 지붕에 손을 얹었다.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가마 안은 아직도 뜨거울 것 같았다. 오후 4시, 드디어 두 번째 연실 입구를 헐기 시작했다.

 

“신혼 초야, 새색시의 옷고름을 푸는 느낌이지요. 하지만 오늘은 큰 기대와 설렘이 없습니다.”

 

역시 전 과정의 재연에 의미를 두기 때문이리라. 내심 걱정이었다. 그런데 탱글탱글 잘 익은 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흙집에서 나온 달들은 하나같이 불의 심판을 잘 받고 명품으로 거듭나 있었다.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달님! 올가을에는 하는 일마다 융성하게 해주세요!”

 

때마침 다기를 구입하러 온 한 무리의 다인(茶人)들이 가마로 몰려오면서 기원했다. 뜨끈뜨끈한 달항아리를 보듬고 생기를 받는 이도 있었다.

 

태에엥 탱∼ 쓰르릉∼.

 

그때였다. 달의 무리에서 정말 음악소리가 울려 나왔다. 빙렬(氷裂) 소리다. 열이 식자, 유약을 바른 표면이 얼음처럼 갈라지면서 고혹적인 음향을 발한다. 표면과 태토의 수축계수가 달라서 실금이 터지는 것이다. 달의 교향악에 귀 기울이는데 장인이 허허롭게 말한다.

 

“차면 비우고 차면 또 비우는 달에서 많은 걸 배우네요. 해는 우리를 다그치고 뛰게 하고 달구지만, 달은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고 차분하게 치유하잖아요. 실은 오늘이 아버지의 49재 날입니다. 6?25 때 참전했다 부상이 깊어 평생 고생하셨지만 늘 인자하셨죠. 국가 유공자여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했는데 부디 극락왕생하셨으면 합니다.”

 

?주역? 겸괘(謙卦)에 천도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뜨리고 겸손한 것을 채운다(天道虧盈而益謙)고 했던가. 번뜩이는 창의성과 천재성을 누그러뜨리고 작업에 몰입하는 수월 신현철은 연잎 다기나 참새 다기, 무궁화 다기 등을 처음으로 선보여 다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그런 그가 달항아리까지 빚기 시작한 것은 꼬박 3년간 달을 관찰한 후였다고 한다. 그는 달의 변화무쌍한 선에 이내 매료된다. 상현, 하현이 다 다르고 초승달, 반달의 선이 다 달랐다. 한쪽만 풍만할 때면, 다른 면을 자기 마음대로 빈 하늘에 그려보았다. 동이처럼 길쭉해지기도 했고 옆으로 펑퍼짐해지기도 했다. 물속에 잠긴 달은 바람결에 떨려 허리가 굽이쳤다. 호수나 바다 위로 떠오르는 달은 밑이 쳐졌다. 마음으로 담아낸 달을 표현하자면 모든 것이 달 아닌 게 없었다.

 

도예가는 그릇의 형태를 빚지만 사람들이 쓰는 건 그릇의 빈 공간이다. 텅 비어서 충만한 달항아리는 영·정조 시대 문예부흥기가 태동시킨 문화유산이다. 한 아름드리 백자 달항아리는 조선의 얼이다. 흰옷 입은 조선인들의 혼이다. 같은 시대, 중국이나 일본은 화려한 채색자기를 뽐냈지만, 그저 소박하고 밋밋한 순백의 우리 달항아리는 기교를 부리지 않아서 자연스럽고 더 당당하며 알차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해 환히 웃어주는 달관의 경지마저 엿보인다. 순백의 달을 집안으로 불러들인 사람들! 그 사람들의 온축된 내공이 바야흐로 우리 시대에 세계 속의 문화국가로 발돋움할 때가 왔는가.

 

9월 13일 저녁 무렵, 수월 신현철 선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경기도 광주시 도예 명장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기운 생동하는 달항아리를 마음 비우고 구워내더니 금시발복했노라’고 필자는 덕담했다. 신현철 명장이 귀띔해준 달항아리 감상법. 창문으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들어올 때 그 빛으로 달항아리를 보라. 매화 꽃가지에 걸린 달을 감상할 때보다 더 깊고 그윽한 맛이 서린다….

 

 

 

 

[Wide Shot] ‘불의 심판’을 기다리며

 

 

 

 

흙을 주물러 성형을 하고 초벌구이를 한 다음 유약을 입힐 때까지는 모두 엇비슷하다. 그러나 송진을 머금은 육송(陸松)이 섭씨 1300도가 넘는 불길로 ‘마지막 심판’을 내리면 흙그릇의 운명은 확연하게 갈린다.

우연에 의해 독특한 색상과 감촉, 분위기를 띤 명품이 탄생하지만, 대부분은 평범한 항아리가 된다. 불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앉거나 터져 버리는 것도 있다. 그러니 유약을 입힌 항아리를 가마에 들일 때 도공은 기도하는 자세가 된다.

지난 9일 신현철 명장이 달항아리를 가마에 안치하고 있다.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눈은 긴장과 설렘으로 빛난다.

 

 

 

 

한가위 보름달 닮은 달항아리

 

 

 

 

달이 떴다. 한가위를 앞두고 밤하늘 보름달보다 먼저 뜬 낮달들이 가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풍성했다. 어떤 달은 옥같이 푸른 듯 희었고 또 어떤 달은 젖빛이 감돌았다. 달 속에 달을 머금은 달도 나왔다.

활짝 웃는 명장의 얼굴에도 달이 떴다. 불기운을 머금은 달항아리들은 따사롭고 넉넉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 보름달만 같아라. 한국적인 미(美)의 결정체라는 달항아리의 탄생을 보기 위해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방도리 연파도예(蓮波陶藝)를 찾았다.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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