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겸난에 순절한 홍관洪灌의 충의정신
홍영선
담수지, 편집위원장
Ⅰ. 들어가면서
역사는 우리에게 옳은 것은 본받고 그른 것은 지양하는 가치판단의 저울이 된다. 사기의 정의는 준엄한 심판이요 올바른 사회창조의 모태가 아닐 수 없다. 정의구현은 올바른 역사정신에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는 바로 이 정의구현의 역사정신이며 미래의 새로운 사회발전에 대한 지표이다. 임진란에 700의병과 전사한 중봉 조헌趙憲은 1591년[선조 19] 정월 초3일(경자일) 달성의 낙빈서원을 방문하여 평양平陽 박 선생[팽년]의 사당에 참배 하면서 올린 제문에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몸을 바쳐 임금을 섬기는 사람은 억만의 수효로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심으로 임금을 위하여 죽음의 뜻을 변치 않는 자는 오직 옛날 商나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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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경북대퇴계연구소 특별연구원, 국제퇴계학회 대구・경북지부 이사,
남 양홍씨대종중, 중앙종회 부회장, 사간공파 회장, 前 성주부군수. 메일: hong3477@hanmail.net
백이伯夷・숙제叔齊와 晉나라의 난공자欒共子이며, 우리나라에는 고려조에 홍충평[洪灌]과 정문충[鄭夢周] 등 몇 사람 뿐이라 하겠고 그 밖에는 소문난 자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이 이利만 찾고, 의리義理를 잊었기 때문에 어린 임금은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이 어찌 임금의 불행이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기서 고려사 열전 충의전 첫 번째 홍관을 수록함은 인조 때 역적 이자겸李資謙의 반란에 척준경拓俊京에게 순절한 충신이기 때문이다.
고려가 건국한지 200년에 공으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 위해 몸을 희생시킨 경우는 있으나 공의 세대에 와서는 인의仁義를 말하는 자 혹 내세울만한 이는 있으나 한 번의 죽음에는 흠이 다 있다. 군자가 이에 두루 갖추어진 이를 논한다면 마땅히 홍충평공을 동방이 개벽된 이후 제일인자인 이름난 신하라 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공의 절의가 성대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절의가 근본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으니 어찌 공을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조상의 훌륭한 선행이 있음을 알고도 선양宣揚하지 않음은 불인不仁이라 하였으니 자손된 도리로 천학임을 무릅쓰고 조금이라도 널리 알리는데 일익이 되고자 게재하게 되었다.
Ⅱ. 홍충평공의 사적
1. 홍관의 선대가계
홍관의 자는 무당無黨, 호는 정헌靜軒 시호는 충평忠平이다. 그 선조는 중국 강남江南사람이다.
당나라 이전은 알 수 없고, 정관년간貞觀(627~649)에 당나라 팔학사로 동국인 당성唐城:[경기 화성시 남양만]에 세거하여
본으로 삼고 신라에 벼슬하여 그 자손들이 대대로 예악시서禮樂詩書를 전하며 300여 년 동안 이어온 것이다.
목은牧隱[이색李穡]이 말하기를 “신라로 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예악시서에서 군자가 나왔다.”고 하였다.
남양인 당성홍씨의 시조인 홍은열洪殷悅은 고려 태조가 개국(918년)할 때를 맞이하여 홍제공신弘濟功臣에 봉해지고
태사太師의 벼슬에 오르니 태조를 도와 추대해서 충성을 다한 까닭이다.
곧 홍관의 5대조가 된다. 고조는 태부경太府卿인 동주東周이고, 증조는 우복야右僕射 의毅이며, 조는 태자첨사太子詹事인
호灝이고, 아버지는 군기감사軍器監事 덕승德升이다.
어머니는 해주최씨인 사천감사司天監事 최득흥崔得興의 따님과의 사이에서 1076[문종 30년경]년에 태어나서
1126년[인종 4, 丙午] 2월에 순절하였다.
배위는 송림松林[현, 長湍의 屬縣]김씨 태자태사太子太師 김최명金崔命의 따님이다.
외조는 낭중郎中인 평주平州[평산]유씨 유황庾璜이다. 아들 지유至柔는 참지정사 병부상서이고 사위는 지후祗候
최종부崔宗夫, 둘째는 예빈경禮賓卿 김귀부金龜符에게 출가 하였다.
2. 충평공 사적고의 개요
홍관의 사적을 집대성한 문집이 1846년(헌종 12, 丙午) 군위 양천서원에서 목판본으로 개간되었다.
책명은 충평공사적고忠平公事蹟考로 5권 1책으로 간행되었으며 목판과 한적본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되어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첫머리에 매산 홍직필洪直弼(1776~1852)의 서문이 있고, 권1은 선계, 후곤後昆, 권2는 유문遺文으로 재청표再請表가 있고, 고실考實로 삼국사기, 고려사 등 13개 서적에 관련기사가 실려 있다.
권3은 고려사 <충의전>, 홍성민의 졸옹집의 <충평공전후서> 등 홍구행, 홍수일의 사적설이 있다. 다음은 <청연연강록淸燕宴講錄>에 당시 참여한 학자 21명 명단과, 1126년 <丙午 동란록同難錄>에는 62명의 피살자 명단, 이자겸난을 평정한
<토역복수록討逆復讐錄>에 공훈한자 8명, 반란자 명단인 <丙午 역당부逆黨簿>에는 62인의 이름이 수록되었다. 모두 역사적 중요한 사료들이다.
권4는 연표年表, 홍병철의 사적장事蹟狀, 중봉 조헌 등 감회시, 팔자부결八字符訣 발문, 취의비문取義碑文, 제문 등이 있다.
권5는 규장각 직각 홍석주洪奭周(1774~1842)가 지은 충평공 도적圖蹟은 조천朝天, 시강侍講, 순절도殉節圖 등은 일생의
역사적 기록을 8폭으로 그림과 함께 설명과 찬시贊詩가 수록되어 있다. 끝에는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남학교수南學敎授 홍병철洪秉喆(1767 ~1818)과, 송백당松栢堂 홍우정洪宇正(1769~1849)이 쓴 발문이 있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성암고서박물관, 전남대 등에 소장되어 있다.
3. 중요사적 개요
가. 약관에 과거에 급제
고려 숙종이 즉위하고 첫해인 1096년(숙종 1)에 홍관은 나이 20세로 문과에 입격하였다. 이때 동방급제자로는 문충공
임원후任元厚, 문안공 정항鄭沆, 동지추밀원사 지록연智祿延, 문열공 한안인韓安仁, 평장사 한유충韓惟忠, 참지정사 허경許慶과 같이 충평공 홍관이 과거에 급제한 기록이 고려문과방목에 등재되어 있다.
그리고 홍관의 중부仲父인 병부상서 덕성德成도 1035년(정종 1) 을해과乙亥科에 중추원사 최충崔沖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오세재의 조부 오학린吳學麟과 함께 동방급제 하였다.
나. 보문각 학자로서 시강侍講과 저술활동
문과에 급제하여 1102년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1111년 2월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고, 이듬해 동북면 병마사가 되었다. 1114년 2월에 문덕전文德殿 학사가 되고, 이어 1116년 7월 청연각淸讌閣 학사, 1118년 1월 보문각寶文閣 학사가 되어 청연각에서 <순전舜典>을 시강하였다. 예종睿宗(1105~1122)이 일찍이 편년통재編年通載를 열람한 후 홍관에게 명하여 삼한三韓이래로 사적을 모아 찬집해서 바치게 하였다.
1106년 편년통재속편을 완성하고, 당시의 학자 이궤李軌, 허지기許之奇, 김부수金富修, 윤해尹諧, 그리고 박승중朴昇中 등과 더불어 음양술[도교]에 관한 음양이서陰陽二書를 논변하게 하였다.
1116년(예종 11) 2월에 국자좨주國子祭酒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의 시관이 되어 유승단俞升旦 등 99명을 뽑았고 1123년(인종 1) 동지공거同知貢擧 국자좨주가 되어 박수朴修, 변순부卞純夫 등 30명을 급제 시켰다.
다. 김생金生의 필법을 본 받은 명필가
삼국사기 권제48<열전8> 김생전에 “숭녕崇寧연간에 홍관이 진봉사進奉使을 따라 송에 들어가 변경汴京[開封]의 객관에 들었는데 송나라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황제의 조칙을 받들고 객관에 와서 족자에 글씨를 쓰고 있었다.
홍관이 김생의 행초 한 권을 보이니 두 사람이 모두 놀라 말했다.”
오늘 왕우군王右軍(王羲之:321~379)의 친필을 보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하였다. 이에 홍관이 말하기를 “그게 아니라 이것은
신라사람 김생金生(711~791)이 쓴 것이다.”하니 두 분은 웃으며 말하기를 “천하의 우군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와 같은 신묘한 필법이 있겠는가?” 그들은 홍관이 여러 번 말해도 끝내 믿지 않았다.
위창 오세창이 편저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홍관, 조에 “고려사에 힘써 배우고 글씨를 잘 써서 신라 김생의 필법을
본받았다. 우리나라에 오직 대감국사大鑑國師(탄연坦然, 1070~1159)와 학사 홍관이 글씨로 이름을 날렸으니 모든 보전화루
寶殿畵樓의 액자 및 병풍과 가리개의 명계銘戒는 두 분의 글씨였다고 파한집에 기록되어 있다.
동국제현서결평론東國諸賢書訣評論의 신품神品, 묘품妙品, 절품絶品의 차례에 홍관이 가장 위에 기록되었다.
동국이상국집 또 패문재서화보佩文齋書畫譜에 보문각과 청연각에 송나라 황제의 조칙과 서화를 모셨는데 홍관이 그
기문을 썼다. <해동역사>
신라 김생의 필법을 본받은 것으로 직사관으로 재직시 왕명으로 신축된 왕의 정전인 집상전集祥殿의 편액도
홍관의 글씨라고 한다.
1117년(예종 12) 6월, 김인존金仁存(초명, 金緣)이 지은 청연각 기문을 홍관이 왕명으로 쓰서 돌에 각자 하게 하였다. 그리고
회경전會慶殿 병풍에 서경의 무일편無逸篇도 썼다고 전한다.
라. 외교가外交家로의 활동
1104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파견될 때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山東省]를 거쳐 만리길에 송나라 변경汴京[開封]에 도착하여 객관을 정하니 이는 주자朱子가 말한바 “고려의 충忠인 것이다.”
다음해 1105년 여름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니 숙종은 승하하고 예종이 즉위 하였다.
1113년(예종 8) 8월 예부상서가 되고 그해 겨울에 또 사친으로 정사正使가 되어 부사인 형부시랑 김의원金義元과 함께
다녀왔다. 이때는 명의태후明懿太后의 상喪에 조문을 한데 대한 사례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 홍관이 임금께 바친 재청표再請表
현재 유일하게 전해지는 유문遺文인 재청표는 충평공사적고에는 <청어정전청정재상표請御正殿聽政再上表>로
되어있고 동문선 권41에는 <재청표再請表>로 싣려있다.
이 재청표는 초상표初上表는 문안공 정항鄭沆(1080~1136)이 첫 번째로 올렸고, 두 번째 재상표는 충평공 홍관이 올렸다.
삼청표는 문간공 김부일金富佾(1071~1132)이 지어 올렸다.
<재청표 내용>
요즈음에 글을 올려 임금님께서 정전正殿에 나오시어 모든 정사에 결재해 주실 것을 청하였으나 교서敎書[왕이 내리는
명령서]를 내려 윤허允許치 않으시니 한 번 올린 글이 높으신 뜻을 번의翻意[본디의 생각을 뒤바꿈]치 못하였으므로 다시
성상聖上[임금]의 고명高明 하심을 믿고 두 번째로 정성을 다하나이다.
<중략中略> 조용히 생각하여 보오니 한漢나라 이후[BC 206년] 당唐나라에 거쳐 내려온 후로 복服[喪服제도]은 기한이 되면
벗는 것이고, 예禮는 풍속에 따라 변합니다.
그리된 지 오래이오니 억지로 한갓 정의로만 치우치는 것은 실정에 맞지 아니 합니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사시四時[八節日변화]를 몸으로 맡으시고 총명하신 기질氣質로 임금이 되셔서 역대로 내려오는
법도法度를 지키시니 비록 최마衰麻[상복]을 벗었으나 오히려 미진한 효심孝心으로 정저正宁[임금이 조회朝會를 받기 위해
마련한 자리]에 나오시지 않으시니 성상의 뜻은 효심이 지극하신 생각이시나 대중의 여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온즉
바라옵건대 법궁法宮[임금의 자리]에 나오시어 옛과 같이 법도에 따라 온 영토領土 안에 덕정德政의 유신維新[제도를 아주
새롭게 고쳐 더 잘 되게 함]함을 복종服從[기대에 맞게 따름]케 하시옵소서
<재청표 원문>
近上表하여 恭請聖上陞下의 御正殿聽政이러니, 特降敎書不允者라, 奏章을 輒貢에, 睿聽을 未廻일세. 更冒高明하고, 再敷誠款하나이다,
<中略> 竊以自漢而下, 由唐以來로, 服以易月而除하고, 禮有隨時而變하여, 其行且久하니, 苟反則乖라, 恭惟聖上은 曆數在躬하고, 聰明作后하야, 旣循舊典하시니, 雖已釋於衰麻이나, 尙執小謙하메, 未卽臨於正宁하시니, 在聖情에 宜其有未忍이오나, 而輿意를 獨不可無從이로니, 伏望誕御法宮하사, 遵彛儀之若古하시고, 遄令率土로, 服德政之惟新케 하소서.
위의 내용은 인조 임금이 상을 당하여 복제기간을 마쳤으니 정사에 나와달라는 것이다. 상복은 벗었으나 미진한 효심으로
정사에 나오지 않으시니 대중의 여론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오니 법궁에 나오시어 덕정을 베풀어 유신惟新을 펼쳐
달라는 신하의 소회所懷를 진술하여 임금께 올리는 글이다.
충평공사적고 유문 서문에 “충평공의 문장은 세상에 크게 떨쳤고, 또한 문덕전・보문각 이학사二學士로 그 저술이 반드시
많았을 것이다. 삼한사실속편을 편찬하여 올렸으나 세월이 멀고 모두 산일散逸되었으나 본 표문만 동문선에 수록되어
이를 여러 후손들이 등사하여 가보로 보장寶藏하여 오고 있어, 이 유문을 이 책에 싣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도 대방가大方家 이외는 보기가 어려우므로 여기 원문과 번역문을 함께 싣는 것이다.
Ⅲ. 이자겸의 반란에 순절한 충신 홍관
1. 고려시대 문벌귀족 가문의 형성
고려사회가 안정을 찾으면서 최고 지배층인 문벌귀족이 형성되었다.
경원(인천)이씨・경주김씨・파평윤씨・철원최씨・해주최씨・남평문씨・강릉김씨・평산박씨 등은 대표적인 문벌 귀족 가문이었다.
그 가운데 인주(인천)이씨는 문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 80여 년 동안 5명의 왕에게 9명의 왕비를 들여 외척으로 당대 최고
가문으로 득세하였다,
나아가 왕위 계승에도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치권력을 독차지 함으로써 왕실이나 다른 귀족들과 충돌이 잦았다. 국왕의 권위가 약해지자 예종(1105~1122 재위)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힘썼다.
그 일환으로 사학을 누르고 관학을 키우기 위해 양현고養賢庫(장학재단)을 세워 학비를 보조하고 청연각을 세워 경서經書를 강론하였다.
그리고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함으로서 인주이씨를 비롯한 문벌 귀족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화 되도록 노력하였다.
2. 인천이씨 이자겸의 가문
고려는 가문의 명망을 숭상하여 나라의 재상을 대부분 훈척을 임명했다.
문종 때부터 인천이씨를 왕비로 맞이하였는데 예종도 세자 때에 이씨의 딸을 왕비로 삼았다.
이자겸의 형 이자의李資義는 전대前代에 이미 재상이 되었다가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이일 때문에 이자겸은 형의 일을 경계삼아 조심하였으므로 예종이 신임하고 중용하여 세자의 스승이자 벗으로 삼았다.
이때 인종이 어렸으므로 이자겸은 박식있는 선비 8인을 선발하여 보좌하도록 했다. 1122년(예종 17) 4월에 장남인 예종이
죽으니 여러 아우들이 서로 즉위 하려고 다투었다 자겸이 인종을 세운 후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인 왕보王俌[숙종의 아들,
예종의 아우]가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였다.
문하시랑 한교여韓繳如(韓安仁의 옛이름) 추밀사 문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반역을 도모하고 예부상서 이영李永 이부시랑 정극영鄭克永 병부시랑 임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통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어 사로잡혀 투옥되었다.
이에 이자겸이 왕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잔당 수백인을 잡아 들였다.
이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에 책봉되었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받았고 지위가 상서령祥瑞令에 이르렀다. 이자겸은 전답이 주어졌고 저택은 사치스러웠으며 집안에는 썩는 고기가 수만 근이었는데 다른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3. 이자겸의 난[척준경拓俊京의 난亂]
인종이 즉위하면서 인주[인천]이씨는 인종의 외척가문으로 왕위을 옹립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왕이 즉위한 1122년 12월 이자겸 일당은 예종 때 등용한 대방공을 경산부[성주]에 귀양보내고, 평장사 한안인을 해도海島로
유배하였다가 죽였으며, 최홍재・문공미・이영・정극영 등 50여 명을 살해하거나 유배하였다.
인종은 이자겸을 대우하여 조선국공朝鮮國公으로 책봉하고 식읍 8,000호 식실봉 2,000호를 내렸으며, 숭덕부崇德府를 설치하고 궁을 의친懿親이라 하였다. 전지田地와 의대衣帶를 내려 주었고 권위와 총애가 날로 융성해져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자는 계책을 세워 헐뜯었다. 다른 귀족들은 이를 견제하려고 무장武將들이 주도하여 왕권 수호를 내세우고 이자겸을 유배시키고자 하였다. 내시 김찬金粲・녹사 안보린安甫麟・추밀원사 지록연智祿延・상장군 최탁崔卓・오탁吳卓・대장군 권수權秀・장군 고석高碩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자겸의 세력인 병부상서 척준신拓俊臣・내시 척순拓純・지후祗候 김정분金鼎芬・녹사 전기상田其上・최영崔英 등의 무리를 죽였다. 척준경이 “기미를 알고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가만히 않아서 기다릴 수 없다.”
하고 윤한尹翰을 시켜 도성을 넘어가 자물쇠를 부수고 빗장을 열고 들어가 신봉문神鳳門 밖에 이르니 척준경의 무리들이 궁궐에 불을 지르기 까지 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자겸이 사람을 시켜 최탁・오탁・권수・고석의 집에 불을 지르고 처자와 노복들을 잡아 가두었다. 이때 참여했던 무장들과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먼 지방으로 유배되고 재물은 몰수 되었다.
이자겸의 일파인 척준경은 김정황・조순거・문중경 등과 군졸들을 불러모아 군기고의 병장기를 가지고 나와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하였으며, 자겸의 아들 의장義莊은 현화사玄化寺 승병 300여 명을 거느리고 궁성에 도착했다.
왕이 친히 신봉문에 나아가 척준경의 군졸을 불러 모아서, “너희들은 왜 병기를 가지고 있는가?”하니, “도적이 궁중에 들어와 사직社稷을 지키려 왔습니다”고 대답 하였다.
왕은 “그런 일이 없으니 갑옷을 벗고 해산하라.”하고 내탕內帑의 은폐銀幣를 군졸에게 하사한 다음 시어사 이중李仲과・기거사인 호종단胡宗旦을 시켜 군졸들이 병기를 버리도록 종용하였다.
이에 척준경이 칼을 빼어들고 이중・호종단을 쫓아버린 뒤 다시 군졸들을 무장시키고 활을 쏘게 하니 화살이 왕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때 인종은 해를 입을까 두려워 이자겸에게 임금자리를 물려받기를 청하였다.
이때 이수가 좌중에서 큰소리로 “왕이 비록 조서를 내렸으나 이공[자겸]이 어찌 감히 그렇게 할 수 있겠소”하니 자겸이 결국
뜻을 꺾어 울면서 조서를 돌려주고 “신은 반역할 마음은 없사오니 성상께서 이를 밝게 헤아려 주소서”라고 했다.
그러나 인종의 의중을 헤아린 내의감內醫監 최사전崔思全이 척준경을 이자겸에게 떼어 놓는데 성공하여 이자겸을 사로잡아 몰아냈다. 1127년 3월에는 척준경 마저 암태도巖泰島로 유배되고, 인천이씨의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다. 또 다른 문벌 귀족세력인 김부일・김부식으로 대표되는 경주김씨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고, 신진세력 지배층 출신은 역시 진출하기는 쉽지 않았다.
4. 이척李拓의 란에 서화문에서 순절한 홍관
어린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공훈功勳을 앞세워 국권을 거머쥐고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장군 최탁・오탁이 병사를 소집하여 왕권을 바로 세우려고 도모 하였는데 왕의王毅가 이자겸에게 누설하여 이자겸의 심복
척준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봉문의 자물쇠를 절단하고 천지가 진동토록 떠들었다.
홍관이 이때 좌복야로 상서성에서 숙직하다가 변이 일어났음을 듣고 탄식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어찌 편안히 있으랴?”[主辱臣死 吾可自安]하고, 달려 나갔다.
이때가 2월 26일 새벽에 서화문西華門으로 나아가니 문이 닫혀 큰 소리쳐 입시入侍 하기를 자청하니 지록연이 공의 뜻을
알아차리고 사람을 시켜 밧줄을 문밖으로 드리우니 공은 비로소 성을 넘어 들어가 왕의 좌우에서 시위侍衛하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척준경이 궁궐에 불을 지르니 동화문東華門에서 발화되어 순식간에 내전으로 번졌다.
왕은 걸어서 산호정山呼亭・경령전景靈殿에 이르니 시종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홍관과 임경청林景淸 등 10여 인 만이 남아
있었다.
다음날 새벽, 화염이 가까워지자 이자겸이 왕을 몰아쳐 정덕궁廷德宮으로 나가게 했다.
홍관은 늙고 병들어 걸을 수 없었으므로 뒤에 쳐졌다가 서화문 밖에 도착하니 척준경은 낭장 장성張成을 시켜 앞선 장군
오탁의 목을 베고, 그 칼로 척준경이 공을 만나자 또 살해하니 때는 2월 27일 이었다. 이때 최탁・안보린 등을 마구 죽이니
역사서에 말하는 소위 ‘숙위宿衛 홍관 등 17인’이며, 마구 죽인 자도 많았다.
이자겸이 자택으로 왕을 옮기고 여러번 독약을 올렸으나 이루지 못하고 ‘十八子[李]의 도참설에 고려의 왕통을 바꾸려 하니
왕은 비밀히 내의內醫 최사전崔思全을 시켜 척준경을 설득하여 5월에 충성하게 하였다. 이달 이자겸이 왕의 침전에 병사를
보내 시해弑害하려 하자 최사전 등이 척준경을 불러 군사를 동원 이자겸을 포박하자 거리에는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5. 홍관의 관작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감에서 사업司業, 어사대에서 잡단雜端으로 정사를 논한 관원이 되었다. 1111년(예종 6) 1월 삭방도朔方道 병마부사兵馬副使로 나갔다가 그해 12월에 돌아와 어사중승御史中丞과 문덕전・보문각
이학사二學士를 역임하였다.
인종대에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벼슬을 받았다.
후에 순절을 기려 추성보국공신推誠報國功臣・삼중대광三重大匡・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수태위守太尉・문하시랑, 동,
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 同, 中書門下, 平章事・판예부사判禮部事・상주국上柱國을 추증하고 시호를 충평忠平아라고 하였다.
1126년 10월 홍관의 자제와 사위에게 일 계급의 관작이 내려졌고, 1127년 5월에 증직이 내려졌다.
송나라 서긍徐兢(1091~1153)은 국신사國信使 일행으로 1123년(인종 1) 6월 고려에 도착하여 3개월간 고려방문 일정을 소상히 기록하였다. 1124년(선화 6) 8월 6일 송, 휘종에게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하, 고려도경 약칭]을 지어
40권을 바쳤다.
휘종은 크게 기쁘하고 서긍을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현재 남은 고려도경은 그림은 없어지고, 글[經]만 전해지고 있다. 고려도경 권3 <성읍城邑>조에 ‘누관樓觀’편에 ‘연영전각延英殿閣’의 기문이 실려 있다. 기문을 지은이는 강릉군 개국 후 김연金緣[金仁存의 초명]이고, 홍관이 비문과 전액篆額을 쓴 직함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통봉대부通奉大夫・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상호군上護軍・당성군唐城郡・개국남開國男・식읍 300호
食邑三百戶・사, 자금어대賜, 紫金魚袋라고 하였다.
생존 시 관직은 고려사에서 일일히 모두 기록하기가 번거로워서 생략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문집이나 제가의 기록에 있는 ‘검교태보檢校太保’가 누락된 것 같다.
다만 고려도경 저술당시는 생존시대이므로 상세히 기록된 것으로 <통봉대부>, <좌산기상시>, <상호군>의 관직이 보이고, <당성군>, <개국남>이란 관직과 <식읍 300호>, <자금어대>는 관직이 아닌 것도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고려도경 기록은 당시 보기가 어려웠을 것으로 조선측 고려사 기록에는 누락 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충평>이란 시호는 ‘임금을 받들기를 절도있게 극진히 하였고, 지조가 있어 기강을 법도에 맞게 세워 나라를 잘 다스렸다’
[事君盡節曰忠, 有剛治紀曰平]는 것이다. 관직이 모두 정3품 벼슬에 물고기 모양의 장식이 붙어있는 주머니인 ‘자금어대
紫金魚袋’가 내려져서, 정복[公服]의 띠에 매달아 관직의 귀천을 구분하였음을 볼 때 정3품의 관직인 것이다.
6. 고려충신 수위首位로 평가
고려사 권121, <열전> 권34 ‘충의忠義’조에 충신 6명이 수록되었는데 첫 번째로 ‘홍관’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조에 중봉重峯 조헌趙憲(1544~1592) 선생은 “역대 충신을 들어 말하기를 고려조에 홍충평[홍관의 시호]이 앞에서 창도
唱導하고, 문충공[정몽주의 시호]이 뒤를 이어서 고려 500년의 활발한 가운데 힘입어 죽지 않게 하여온 신하의 표준이
되었다고 하였다.” 후대의 학자들이 “중봉의 한 말씀이 100대를 징험할 수 있다.”고 했다.
충평공이 ‘서화西華’에서 죽음으로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대체로 공이 서화에서 순절로 인한 것이다.
이것은 ‘땅이 사람으로 하여금 유명해 진다’는 옛 말은 이를 두고 일컬음이 아니던가? 충평공사적고에 <사적설>에 의하면 정수재靜修齋 홍구행洪九行(1688~1752)이 성주 한강寒岡선생[鄭逑, 1543~1620] 무흘재武屹齋에서 삼강행실도에 충평공의 사적이 상세히 등재 되었는데, 정덕正德 무인년戊寅年[1518년, 중종 13] 경상도 관찰사 김안국金安國(1517~1518 재임)에 의해 제작된 구본舊本에 있는 시가 삭제된 것으로 110인이 금본今本에는 35인이 남아 10에 7~8개가 삭거削去되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동국신속삼강행실충신도 권1에 고려충신조에 <홍관위주洪灌衛主> 제목 하에 “이자겸의 난에 도성에 변란을 듣고
탄식하여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마땅히 죽어야하니 내가 가히 편안할 수 있느냐?’[主辱臣死 吾可自安]하고 들어가
왕을[인종] 곁에서 모시다가 척준경에게 해를 입었다”고 기록과 함께 순절도적[그림]을 그려 놓았다.
홍성민洪聖民(1536~1594)의 졸옹집에 <충평공전후>에는 “세상사람들은 절의에 죽은 이로서 옛날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 안고경顏杲卿 보다 충평공이 났다는 사실을 모른다.
어찌 중국에는 충렬이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들을 수 없단 말인가?”라고 한탄하였다.
Ⅳ. 충평공의 유적과 찬시讚詩
1. 개경 만월대 서화문에 순절한 유허지에 취의비取義碑
1809년(순조 9) 만월대 서화문에 <有宋高麗忠臣左僕射忠平公洪灌取義碑>는 좌의정겸 규장각제학 해석海石 김재찬金載瓚이 비문을 짓고, 평안도관찰사겸 평양부윤 서영보徐榮輔가 비문을 쓰고, 시독관겸 춘추관기주관인 후손 의영儀泳이 예서隸書로 써서 세웠다.
송경지松京誌 권7 <고적古蹟>조에 “西華門”에 북신교 서쪽에 있다[在北辰橋西]하고, 김재찬이 지은 ‘홍충평공취의비’에
중요한 부분을 기록하였다. 현재 취의비는 북한의 ‘국가 지정문화재 보존급 제1543호’로 개성시 송학동 만월대에 있는데 옛
고려 궁전 서화문터에 세운 고려충신 홍관의 추모비이다고 기록하였으며, 국가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2. 군위 양천서원 주향主享 및 신도비神道碑
군위읍 양천서원良川書院에 충평공을 수위로, 문정공 홍언박洪彦博(1309~ 1363)과 서담 홍위洪瑋(1559~1624)와 같이 제향하고 있다. 신도비는 <靜軒先生洪公神道碑>로 상덕사尙德祠 사당 동쪽 비각 내에 있으며, 비문은 용궁현감 이종상李鍾祥이 짓고, 후손 택주宅疇가 썼으며 1858년(철종 9) 4월에 세웠다. 매년 전국의 후손들이 행공行公하여 춘향에 향화를 올리고 있다.
3. 진주 광제서원廣濟書院 배향 및 취의비
광제산 아래 있는 이 서원은 1747년부터 홍지사洪池祠로 시조의 손자인 복야공僕射公 홍의洪毅의 유택幽宅이 있어 향사
하다가 1976년 영남유림에서 ‘광제서원’으로 격상하여 향사하고 있다. 이서원에는 경충사景忠祠 사당에 복야공과 손자인 충평공 두 분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경남서부, 전라, 경상도 유림들이 향사를 받들고 있다.
충평공취의비는 북한에 있어 1983년 서화문에 있는 취의비 탁본을 집자集字하여 서원 진입로 북쪽에 새로 중건하였다. 추기문追記文은 진산 하동근河東根 유림이 지었다.
4. 충북 미원에 남양사南陽祠 배향
청원군 미원면 수산리에 있는 남양사는 시조인 태사공(휘, 殷悅), 6세인 충평공(휘, 灌), 11세 충정공(휘, 子藩), 광정공(휘, 奎) 네 분의 위패를 모신 사우祠宇이다.
오래전부터 매년 설단設壇으로 향사해 오다가 1971년 6월 사우祠宇가 건립되면서 시조묘소가 황해도에 있고, 충평공취의비가 개성 만월대 서쪽 서화문에 있어 사당문 앞에 취의비를 개수하고 추기문을 기록하였다.
이곳에는 매년 전국 남양홍씨 후손들이 참석하여 가을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5. 충평공에 대한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감탄시感歎詩
忠平大節海東瀕(충평대절해동빈) 충평공은 해동[조선]에 큰 충절이요
主辱何曾念我身(주욕하증염아신) 임금이 욕을 보면 내 어찌 편안이 있겠는가?
一死義明宋孔父(일사의명송공보) 한 번 죽어 의리를 밝혔으니 송나라의 공자요
先登勇決潁封人(선등용결영봉인) 먼저 도성에 올라 용기있게 결정 했으니 영고숙이라.
求仁早抱夷齊志(구인조포이제지) 어진이를 구했으니 일찍이 백이・숙제의 뜻을 간직했고,
食德常生桓武倫(식덕상생환무륜) 덕을 품었기에 항상 환공과 무왕의 윤리 이였네.
不待名垂太史傳(부대명수태사전) 이름이 사기에 수록되지 않았지만
家聲赫赫照千春(가성혁혁조천춘) 가문의 명성이 혁혁하게 천추토록 전해진다.
이 詩는 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1536~1594)이 선대 먼 조상[15代祖]인 홍충평공洪忠平公[洪灌]의 행장行狀을 보여주고, 중봉이 세 번 반복하여 읽고, 감탄感歎한 이후에 제목하여 1591년(선조 24, 辛卯) 정조正朝에 지은 시이다.
이 시는 중봉집 2권과, 충평공사적고 권4에도 함께 싣려있다.
이 당시는 <행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일실하여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이 시를 차운次韻하여 동종同宗[후손]들이 화답和答한 여러 시가 충평공사적고에 수록되어 있다. 같은해 신묘년 정월 초3일, 달성에 있는 낙빈서원에 “祭平陽朴先生[彭年]文”에서 “충신으로 고려조에 홍충평과 정문충 뿐이라”고 하신 것으로 보아 이때 같이 지은 것으로 보여진다.
Ⅴ. 마무리[결론]
성대한 충평공의 순절은 청연각에서 순절한 것이 아니라 <역학力學> 두 글자에 순국한 것이다.
공의 외모와 품성은 상상할 수 없으나 자사子思가 뜻하는 바는 음식을 가져온 사자使者에게 손을 들어 도로 가져가게 한
사실에서 주자朱子는 그 마음이 굳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지금의 공은 ‘팔자부결八字符訣’과 ‘구자난행九字難行’을 보면 품성이 굳세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충평공의 순절은 숙위宿衛의 직책도 아니며, 적에게 대항할 무기도 가지지 않고, 성 밖에 있었으니 적을 만날 우려도 없고,
명을 받을만한 일도 없었다. 나아가면 죽을 것이오 물러선다 해도 목숨을 도둑질 했다는 비난도 없을 것임에도 오직 주욕신사 오가자안(主辱臣死, 吾可自安) 8자로 의義를 취한 것이다.
어려운 가운데 9가지 행동을 실천한 것은 생보다 의가 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팔자구난八子九難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① 변란에 선을 택하기가 어렵고,
② 팔자부결을 실천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③ 노병老病으로 적에게 대적하기 어려운데 달려듦은 더욱 어렵고,
④ 깊은 밤중에 수레 명예를 지울 겨를도 없이 달려감도 어렵지만,
⑤ 적의 기세에 무장武將도 몸을 사리는데 갑옷과 화살도 없이 돌이 날아드는 곳을 가기란 또한 어려울 뿐 아니라,
⑥ 대궐문이 닫혀 물러서지 아니함도 어려운 일이지만,
⑦ 성城의 치첩雉堞을 버티며 손에 밧줄을 거머쥐고 들어가 임금을 모신다는 것은 노병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다.
⑧ 신봉문神鳳門에서 산호정山呼亭과 경령전景靈殿을 거쳐 서화문西華門까지 시종侍從들은 모두 흩어졌으나, 왕의 곁을
떠나지 않음은 신하로서 정말 어려운 일이다.
⑨ 임금의 수레를 인도하던 장군이 임금 앞에서 사지四肢가 찢어지고,
살아 나오는 자가 없음에도 죽을 때까지 곁을 떠나지 않았으니 이를 구난九難이라 한다. 이것은 마음이 지성至誠에서
우러나온 충평공의 도리道理야 말로 모두 공과 같이 실천한다면, 작은 등滕나라라고 하더라도 거대한 진秦나라나,
초楚나라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生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요, 義도 또한 내가 하고자 하는 바이나 두 가지를 가히 얻어 겸하지
못할진대, 生을 버리고 義를 취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사람이 누가 죽음을 싫어하지 아니하리오마는 충신忠臣과 의사
義士는 한 번 변고를 만나면 비록 정확鼎鑊[죄인을 삶아 죽이는 큰 솥]이 앞에 있고, 도거刀鋸[정강이뼈를 자르는 톱처럼 된
刑具]가 뒤에 있어도 피하지 않는 것은, 하고자 함이 사는 것보다 심함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는 인종으로부터 왕실에
환난患難이 많았으므로 절의節義에 죽은 사람이 많으나 그중에 홍공이 으뜸이다. 우리 모두 지금까지 몰랐던 고려충신 충평공忠平公 홍관洪灌이란 인물을 새삼 알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면 관계상 반역신叛逆臣 역괴逆魁 이자겸과 적수賊帥 척준경의 무리 62명과, 병오[1126년] 동난록丙午同難錄에 62명이
피살된 명단을 싣지 못했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宣和奉使高麗圖經, 木齋家塾彙纂麗史, 孟子, 書經, 東文選, 槿域書畫徵, 新增東國輿地勝覽, 東國新續三綱行實圖, 東國李相國集, 海東繹史, 破閑集, 牧隱集, 忠平公事蹟考, 重峰集, 拙翁集, 松京誌, 海石集, 海東名跡, 慶尙道先生案, 高麗崇義殿史, 高麗時代史(朴龍雲. 著), 韓國人物大事典, 文科榜目, 朝鮮鄕土大百科(平和問題硏究所, 刊), 뿌리깊은 韓國史(高麗), 南陽洪氏世譜, 唐城志, 南陽洪氏大觀, 南陽文獻錄, 南陽洪氏溯源錄, 良川書院誌, 仁川李氏世譜동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