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해설
1920년대 만주에서의 무장 항일 운동에 대해 어려워 하는 분이 많아요. 하지만 출제 비중도 그만큼 높으니, 다음 흐름은 기본적으로 파악해 두셔야 합니다.
봉오동 전투(1920.6.) → 청산리 대첩(1920. 10.) → 간도 참변 →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 조직 →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 → 자유시 참변(1921) → 만주로 돌아와 3부 성립(1923~25년) → 미쓰야 협정(1925)으로 활동 위축 → 3부 통합 운동으로 북만주의 혁신 의회(1928), 남만주의 국민부(1929)로 재편 →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 조직, 혁신 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 조직 → 만주 사변(1931) 후 한·중 연합 작전 전개"
'6일간의 혈전, 10월, 갑산촌, '어랑촌 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의 승리'가 핵심이네요. 이는 우리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던 청산리 대첩(1920. 10.)에 대한 내용입니다.
3·1 운동 이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습니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국내 진공 작전을 펴 국경 지역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압록강 연안의 혜산진을 점령하기도 하였어요.
이에 일제는 독립군들을 토벌하기 위해 정규군 1개 대대의 병력을 동원하여 두만강을 건너 이동해 옵니다. 그러나 이를 미리 파악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이 연합하여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급습하여 157명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봉오동 전투, 1920).
이후 일본군은 만주 군벌과 협상을 맺고 대대적으로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죠. 이 정보를 입수한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 등은 장백산(백두산)의 안전지대로 이동하였어요. 일본군은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일본군의 만주 진출에 대한 명분을 만들어 1만 5천여 명의 군대를 만주 지역에 투입합니다. 일본군은 만주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를 마구 학살하면서 독립군을 포위하여 완전히 제거하려는 작전을 폈습니다.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부근에서 일본군과의 일전을 계획하고, 전투에 유리한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에 맞서 10여 차례의 전투를 벌입니다. 지형을 잘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과 투지, 그리고 이 지역 일대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협력으로 6일 동안의 대전투 끝에 독립군은 60명이 전사하였으나,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는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는데, 이것이 청산리 대첩입니다(1920. 10.).
① 조선 의용군은 중국 관내에서 1942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조선의용군은 중국 공산당군(팔로군)과 함께 태항산 전투, 호가장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습니다.
② 한·중 연합 작전은 일제가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한 이후 이루어졌어요.
이때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이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벌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③ 청산리 대첩은 한인 독립군 부대들만으로 이루어낸 승리였습니다.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은 대표적인 부대는 한국 광복군이었어요.
④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큰 전과를 올렸기에 이를 청산리 대첩이라고 부릅니다.
⑤ 학도병은 1940년대에 동원되었어요.
일제는 국가 총동원법(1938)을 마련해 인적·물적 수탈을 강화하였는데, 학도 지원병제(1943), 징병제(1944) 등을 실시해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습니다.
따라서 학도병들이 탈출하여 참여한 독립군 부대는 당시 활동한 한국 광복군, 조선 의용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920년대의 무장 항일 운동
▶ 1920년대 초 무장 독립군의 분포
북간도 | ◦ 북로군정서군 : 김좌진 중심, 대종교도 중심, 사관 양성소 ◦ 대한국민회 : 기독교 중심, 국민회군(산하단체) ◦ 대한독립군 : 의병장 출신 홍범도가 이끔 |
서간도 | ◦ 서로군정서 : 신흥 무관 학교 출신 중심 ◦ 대한독립단 : 박장호, 조맹선 등 의병 세력 중심, 국내 진공 작전 ◦ 광복군 총영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직속 독립군 부대 |
▶ 1920년대 무장 독립 운동의 흐름
①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승리 → 간도 참변 → 밀산에서 대한독립군단 조직 →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 →
자유시 참변(1921)
② 자유시 참변 후 만주로 이동해 와 독립군을 통합하여 3부 성립(1923~25년) → 미쓰야 협정(1925)으로 독립 운동 위축,
국내에서의 민족 유일당 운동(신간회, 근우회)의 영향 → 3부 통합 운동 전개
③ 3부의 통합 운동으로 북만주의 혁신 의회(1928), 남만주의 국민부(1929)로 재편 →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
군을 조직, 혁신의회는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을 조직 → 1930년대 만주 사변(1931) 후 한·중 연합 작전 전개
사건 |
시기 |
내용 |
봉오동 전투 |
1920. 6 |
대한 독립군(홍범도) 중심으로 일본군 격파 |
청산리 전투 |
1920. 10 |
1920년 10월 훈춘 사건 조작, 대규모 병력을 만주로 이동, 독립군 토벌 추진 → 북로 군정서군(김좌진) 중심으로 일본군 격파 청산리 대첩(비상교육 한국사 교과서 퍼옴) |
간도 참변 |
1920. 10 |
일본군의 보복, 간도 지역 학살 |
대한 독립군단 조직 |
1920. 12 |
간도 참변으로 독립군 이동, 서일을 총재로 하고 자유시로 이동 |
자유시 참변 |
1921. 6 |
독립군 내부의 분열 및 러시아 적군의 배신, 독립군 무장 해제와 학살 |
3부 성립 |
1923~25 |
◦ 자유시에서 만주로 이동, 정의부․참의부․신민부 결성 ◦ 군정·민정 기관을 갖춘 정부 성격의 독립 운동 단체 |
미쓰야 협정 |
1925 |
일제와 만주 군벌이 독립군 탄압을 위한 협정 체결 미쓰야 협정 ------------------------------------------------------------ 제2조 한국인이 무기를 가지고 다니거나 한국으로 침입하는 것을 엄금하며, 위반자는 검거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제3조 만주에 있는 불령선인(불온한 조선인) 단체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며,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 제4조 일본 관헌에서 지명한 불령한 수령은 중국 관헌에서 신속히 체포해 인도한다. 제5조 중국, 일본의 관부는 불령단 취체(법을 지키도록 통제) 실황을 서로 통지한다. |
3 부 통합 운동 |
1928 |
◦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 ◦ 북만주의 혁신 의회(한국 독립군), 남만주의 국민부(조선 혁명군) |
1920~1940년대 주요 무장 항일 독립군 부대
부대 | 창설 | 위치 | 주도 | 활동 |
대한 독립군 | 1920 | 봉오동 | 홍범도 | 봉오동 전투 |
북로 군정서군 | 1920 | 청산리 | 김좌진 | 청산리 전투 |
대한 독립군단 | 1921 | 밀산부 | 서일 | 간도 참변 후 조직, 자유시로 이동 |
조선 혁명군 | 1929 | 남만주 | 양세봉 | 흥경성, 영릉가 전투 |
한국 독립군 | 1930 | 북만주 | 지청천 | 쌍성보, 대전자령, 사도하자 전투 |
동북 항일 연군 | 1935 | 한·만 국경 | 김일성 | 보천보 전투 |
조선 의용대 | 1938 | 한커우 | 김원봉 | 조선 민족전선연맹(민족 혁명당)의 군사 조직 |
한국 광복군 | 1940 | 충칭 | 지청천 | 임시 정부 산하, 국내 정진군 편성(미군 OSS 지원) |
조선 의용대 화북지대 | 1941 | 화북 | 윤세주 | 호가장 전투 |
조선 의용군 | 1942 | 화북 | 김무정 | 조선 독립 동맹의 군사 조직, 인민군 편입 |
1920년대 항일 무장 독립 운동과 관련 문제를 제시합니다.
유사 기출문제
20회 고급 38번 문제
38. 봉오동 전투(1920.6) 답④
제시된 자료에 나타난 '봉오골 집합', 홍범도, 최진동, 안무' 등을 통해 자료와 관련된 전투가 봉오동 전투임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 봉오동 전투에 대한 내용을 파악하면 되겠네요.
1910년대부터 만주와 연해주 등에는 한인촌이 건설되고 이를 바탕으로 학교와 독립군 기지가 세워졌습니다.
3·1 운동 이후에는 국내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 유입되어 더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습니다.
이들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펴 국내의 일제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는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어요.
독립군들의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던 일본군은 1개 대대의 병력으로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를 맞아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안무의 국민회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등이 연합 부대를 형성하고,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 기습하여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봉오동 전투입니다(1920. 6.).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만주 지역의 독립군과 한인들의 반일 독립 의지는 크게 고양되었습니다.
봉오동에서 패한 일본군은 훈춘 사건(1920. 10)을 조작해 더욱 규모가 큰 부대를 보내어 독립군을 공격하는 한편,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를 마구 학살하면서 독립군을 포위하여 완전히 제거하려는 작전을 폈습니다.
이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에 집결하여 지형을 잘 이용한 효과적인 작전과 투지, 그리고 이 지역 일대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협력으로 6일 동안의 대전투 끝에 일본군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청산리 대첩입니다(1920. 10.).
① 한·중 연합 작전은 일제가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를 침략한 이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은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벌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북만주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항일 중국군과 연합해 쌍성보 전투, 동경성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승리하였어요.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항일 중국군과 힘을 합쳐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승리하였죠.
② 한국 광복군 등에 대한 설명입니다.
일본이 학도병을 전쟁에 동원한 것은 학도 지원병제(1943)를 마련한 이후입니다.
③ 조선 혁명군이 주도한 전투는 한·중 연합 작전으로 승리한 영릉가 전투(1932), 흥경성 전투(1933)가 있어요.
④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공격해 오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을 포함한 여러 독립군
부대가 연합해 일본군을 봉오동으로 유인, 기습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입니다.
⑤ 조국 광복회의 지원을 받으며 전개한 유격전은 보천보 전투(1937)를 들 수 있어요.
1930년대 중반 만주 지역에서는 한·중 항일 유격대가 통합, 동북 인민 혁명군(뒤에 동북 항일 연군)이 편성되었어요.
동북 항일 연군 내 한인 항일 유격대는 국내 진출을 도모하면서 함경도 일대의 공산주의 세력과 천도교도 등 민족주의
세력까지 통합한 조국 광복회를 조직하였습니다(1936).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15회 고급 43번 문제
43. 홍범도의 활동 답②
지도에 표시된 행적은 홍범도 장군에 대한 것입니다.
지도에 표시된 (가)는 봉오동이라는 지명이 표시되어 있으므로 봉오동 전투를 떠올릴 수 있어요.
1920년에 들어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해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몇 개의 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봉오동을 습격해 왔어요. 이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은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기습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봉오동 전투, 1920. 6).
① 한·중 연합군은 1930년대에 결성되었으며, 북만주에서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이
끄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군과 연합해 항일전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어요.
③ 북로 군정서군은 청산리에서 여러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습니다(청산리 대첩, 1920. 10).
④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이 세워진 곳은 북간도 용정입니다.
⑤ 신흥 무관 학교는 남만주 삼원보에 세워졌어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주요 행적
1907년 산포대(山砲隊)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간도로 건너가 포수단(砲手團)을 조직하였다. 이후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으며, 200명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입 작전을 펴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하는 등 여러 차례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20년 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독립군 부대를 보내 종성 삼둔자 부근에서 국경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에 일본군은 대한 독립군을 비롯한 몇 개의 독립군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봉오동을 습격해 오자 이를 미리 알고 대비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봉오동 전투).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 제2연대장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해서 추격해 오자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 밀산에서 대한 독립군단 (大韓獨立軍團)을 조직, 부총재에 선임되었으며, 독립군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해제 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1921).
이후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서 후진 양성에 힘쓰다 1943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14회 고급 30번 문제
30. 만주와 간도, 중국에서의 독립 운동 답④
일제 강점기 국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는 북간도, 남만주(서간도)와 연해주, 중국 내륙, 그리고 미주 지역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지도에 국외 독립 운동의 중심지를 표시하고 각 지역에서 있었던 독립 운동을 고르는 문제네요.
(가)~(라)지역이 어디인지 알 수 있는 특정 도시(하얼빈, 삼원보, 난징)만 주어졌네요.
이런 문제를 푸는 데는 평소에 국외 독립 운동 기지와 관련한 지도를 눈여겨 본 분들이 유리하겠죠?
(가)는 북만주 지역입니다.
이 지역과 관계된 독립 운동으로는 쌍성보 전투(1932)입니다.
쌍성보 전투는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과 중국군이 연합(한·중 연합군)하여 일본군에게 승리한 전투입니다.
이 두 연합군은 북만주에서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나)는 북간도 지역입니다.
이 지역 근처에 있는 용정에는 명동 학교, 서전서숙 등의 민족 학교가 세워졌던 곳입니다.
(나) 지역에서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이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청산
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승리하였습니다(1920).
청산리 대첩은 항일 독립 전투사에서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나) 지역보다 조금 오른쪽 위에 있는 봉오동에서는 청산리 전투 직전,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승
리한 곳입니다(봉오동 전투).
(다)는 남만주 지역(서간도라고도 함)입니다.
삼원보는 신민회가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던 곳입니다.
이 지역에는 경학사, 신흥 무관 학교가 세워졌었습니다.
(다) 지역에서는 1930년대 들어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활동하였습니다.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한·중 연합군)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죠.
(라)는 상하이입니다.
상하이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세워진 곳이라는 거 잘 아시죠.
만주 사변(1931) 이후 일본은 상하이까지 침략합니다(상하이 사변, 1932).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상하이 사변 승리 기념식이 열렸을 때,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의 윤봉길 의사는 기념식 단
상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장교와 고관을 처단합니다(훙커우 공원 의거)
이 의거에 감동한 중국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후원합니다. 이는 한국 광복군 탄생의 밑거름이 됩니다.
ㄱ - 청산리 대첩 이후 일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의 한인 동포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과 학교, 교회 등을 불태웠는
데, 이를 간도 참변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을 피해 독립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약 4,000명에 이르는 독립군 주력 부대들은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
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소련령으로 이동하였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다시 만주로 돌아옵니다.
대한 독립군단을 결성한 곳은 지도에 중국과 소련 국경에 호수가 표시되어 있는 곳에 있던 밀산부입니다.
ㄷ - 지청천의 한국 독립군은 (가) 지역인 북만주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같은 시기의 (다) 지역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활동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ㄴ, ㄹ로 묶인 ④번입니다.
13회 고급 11번 문제
11. 1920~30년대 항일 독립 운동 답③
많은 분들이 어려워하는 항일 독립 운동에 대한 문제네요.
사료를 통해 시기를 파악해야 하는 문제라 더욱 어렵게 느끼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리 어렵지 않은 문제입니다.
반복적으로 하는 문제풀이 조언이지만, 사료 파악 문제는 사료에서 핵심적인 개념들을 잡아내면 파악하기가 무척 쉬워집니다.
이 문제도 마찬가지니 한번 파악해 보죠.
(가)의 핵심 개념은 '백운평...6일간 치열한 전투'입니다.
백운평은 청산리 대첩의 첫 전투가 시작된 곳입니다.
청산리 대첩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그리고 여러 독립군 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 동안 첫 전투인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어랑촌 전투 등 10여 차례
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찔렀던 독립 전쟁사상 가장 큰 전투였습니다.
(나)의 핵심 개념은 '미쓰야'입니다.
일제는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만주 군벌과 문제에 주어진 내용을 골자로 하는 미쓰야 협정을 체결합니다(1925).
이로 인해 만주와 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 군경뿐만 아니라 현상금을 노리는 만주 군벌 경찰의
감시와 탄압도 피해야만 했기 때문에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의 사료를 보면 한국군과 중국군이 연합하여 대일 항전을 한다는 한·중 연합 작전의 내용임을 알 수 있어요.
제시된 사료는 한국 독립군과 항일 중국군의 합의 내용의 일부입니다(1931).
만주에서는 1920년대 말 전개된 3부 통합 운동의 결과로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이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이 편성되었습니다. 일제가 만주 사변(1931)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우자, 두 독
립군 부대는 항일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북만주의 한국 독립군은 지청천의 지휘 아래 중국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
본군을 격파하였습니다.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이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에서 항일 중국군과 힘을 합쳐 일본군을 격퇴
하였습니다.
(라)의 핵심 개념은 '대한 독립군단 조직', '적색군(소련 공산당 군대)의 공격으로 큰 피해'입니다.
이를 통해 자료가 자유시 참변(1921)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패배한 직후인 1920년 10월 말부터 일본군은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간도의 한인 동
포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집과 학교 등을 불태우는 반인륜적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이를 간도 참변이라 합니다.
간도 참변으로 활동이 어려워지고, 동포 사회에 피해를 주는 것을 피하기 위해 소련·만주 국경 지대인 밀산부에 집결
하여 독립군은 부대를 재정비해 1921년 4월 대한 독립 군단을 결성한 후 소련령으로 이동합니다.
독립군은 헤이룽 강 연안의 자유시로 이동하였으나, 독립군 내부의 군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 과정에서 소련군의 공격
을 받아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당하였습니다(1921. 6)
이를 시기 순으로 연결하면 (가)-(라)-(나)-(다)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3회 2급 34번 문제
34. 대한 독립단의 활동 답④
문두에 문제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체가 '대한 독립단'이라고 나와 있으니 문제에 힌트가 되죠.
그리고 문제에 주어진 자료를 읽어보면 결정적 힌트를 파악할 수 있어요.
'지나 유하현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평안북도 강안 일대에 출몰 횡행하여'라는 내용을 통해 서간도 지역인 유하현(위에 지시된 1920년대 초 무장 독립군의 분포 지도 참고)에 위치한 이 독립군 부대(대한 독립단)가 국내인 평안북도 강안 일대로 진입하여 활동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네요.
이것만 파악하면 답은 그냥 찾아지죠.
대한독립단(1919~1922)은 서간도 지역인 유하현 삼원보에서 결성된 독립 운동 단체입니다.
3·1 운동 후 만주로 망명한 독립 운동가 박장호·조맹선 등 각 단체 대표와 의병 계열의 인사 560여 명이 1919년 4월에 분립된 단체를 해체하고 단일 기관으로 대한 독립단을 조직합니다.
대한 독립단은 수시로 압록강 국경을 넘어 서북 지역의 일제 관공서를 습격하였습니다.
대한독립단은 대한제국의 재건을 주장하는 복벽주의 계열의 세력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1919년 말경에는 단군기원 또는 대한제국의 연호인 융희를 주장하는 박장호·백삼규·전덕원·이웅해·김평식 등의 기원독립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호 사용을 주장한 신우현·변창근 등의 민국독립단으로 대립하기도 하였습니다. 1920년 12월에는 한족회·청년단연합회와 통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사령부에 통합되고, 1922년 2월 류허현에서 한족회·광한단 등 독립 운동단체들과 회합, 대한통군부를 조직하고 발전적인 해체를 하였습니다.
① 중국군과의 연합 작전은 1930년대 전반의 조선 혁명군, 한국 독립군, 1930년대 후반의 조선 의용대, 1940년대 한국 광
복군 등을 들 수 있습니다.
② 이 단체는 관공서 파괴, 모군(募軍)·모금 사업 등의 활동을 하였으므로 실력 양성론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③ 구성원 대다수가 대한제국 재건이라는 복벽주의를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사회주의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④ 주어진 자료에도 나와 있지만 이들은 수시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⑤ 이들은 복벽주의를 추구하였으므로, 공화정을 주장한 안창호, 이승만과 연결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3회 2급 35번 문제
35. 간도 참변의 배경과 독립군 부대의 이동 답⑤
주어진 내용을 읽어보면,
'일본군이 용정과 가까운 장암동이라는 조선인 마을에서 조선인들을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고 마구 사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이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 지역의 조선인을 마구 학살하였던 간도 참변의 처참한 모습을 기록한 글입니다.
이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볼까요?
1910년대부터 만주 지역에서는 조선인 집단 거주지가 건설되고 항일 독립 부대나 단체, 학교 등이 세워졌습니다.
3 ·1 운동을 계기로 이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수많은 독립군 양성 기관이 설립되고 무장한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었습니다.
이들 독립군 부대들이 여러 번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공하여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자, 일제는 위협 반 회유 반으로 만주의 중국 군벌까지 그들 편으로 끌어들여 합동으로 독립군 토벌작전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만주 거주 조선 민중의 은밀한 저항과 중국 군대의 비협조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독립군을 추격하던 일본군이 봉오동 전투(1920. 6)에서 엄청난 타격을 입자, 일제는 이 지역의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대부대를 만주에 직접 투입할 계획을 짭니다.
1920년 10월 일제는 중국 마적을 사주하여 훈춘현 일본 영사관을 고의로 습격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을 대거 만주로 출병시켰습니다(훈춘 사건).
대규모의 일본군이 이 지역에 들어오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일본군이 공격해 오기 힘든 산 속으로 유인하여 공격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이 청산리 대첩(1920.10)입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한국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를 간도 참변이라고 합니다.
만주(간도)에서의 무장 활동이 힘들게 된 독립군 부대들은 서일을 총재로 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밀산부로 이동하여 소련령 자유시로 이동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공산당 내부에서의 갈등으로 독립군들이 무장 해제 당하며,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생을 낳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되죠(1921). 이후 독립군 부대들은 만주로 다시 돌아와 3부를 조직하게 되죠.
⑤ 대한 광복군 정부(1914)는 이상설이 연해주에서 조직한 정부로, 간도 참변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9회 고급 42번 문제
42.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 운동 답②
프로그램 내용을 보면, 서전서숙, 청산리 대첩, 경신참변(간도참변)이 나타나 있는데, 이들과 공통으로 관련된 지역은 만주, 그 중에서도 북간도입니다.
만주 지역에서의 시기별 민족 운동을 간략하게 살펴보죠.
1910년대 | 독립 운동 기지 건설 → 무장 항일 운동 준비, 삼원보에 신흥 학교, 용정-명동학교, 서전서숙 설립 |
1920년대 | 무장 독립 전쟁(봉오동, 청산리 대첩) 전개 → 간도 참변과 미쓰야 협정으로 희생 많음, 3부 성립과 통합 운동 |
1930년대 |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 약화, 길림성 만보산 사건 발생(1931), 한·중 엽합 작전 전개 |
① 이상설은 간도의 용정에 서전서숙이라는 학교로 세웠습니다.
서전서숙은 김약연이 세운 명동 학교와 함께 간도의 대표적인 학교였습니다.
② 해조신문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민회에서 1908년에 발행한 신문이었습니다.
③ 북간도 지역으로 망명한 대종교인 서일은 대종교를 중심으로 중광단을 조직(1911)하였고,
이것이 모태가 되어 1919년 북로군정서로 발전하였습니다.
④ 훈춘 사건(1920. 10)은 일제가 봉오동 전투(1920. 6) 패배 이후 독립군 부대의 활동 근거지인 간도로 대규모 일본군을
파병할 목적으로 조작한 사건입니다.
일제는 중국 마적단을 사주하여 훈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여 방화를 저지르게 한 뒤, 이 사건을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 불량한 조선인 )이 저질렀다고 주장하며 재만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즉각 군대와 경찰을
출동시켰습니다.
⑤ 북로 군정서의 김좌진 장군과 대한독립군을 이끄는 홍범도 장군과 여러 독립군 부대들이 연합하여 간도 지역의 청산
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는데, 이것이 청산리 대첩(1920. 10)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효율적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부법
카페에서 추천하는 부담 없는 [한권으로 끝내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교재로 중요내용을 공부하고
마지막으로 카페에 올려진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출문제해설을 꼼꼼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국사사랑방/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국사능력검정시험기출문제/한국사기출문제해설/
한국사능력검정시험난이도/한국사능력검정시험합격률/한권으로끝내는한국사능력검정시험
첫댓글 1920년대 무장독립운동의 흐름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사이에 훈춘사건조작도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보라색칸부분
넵....추가할게요...^^
위에서 3번째 그림
해설 감사합니다.
해설 감사합니다~~
자세한 해설 감사드립니다^^
설명 감사드립니다.
자세한 설명감사드립니다
독립군 활동에 대해 복잡해 했는데 비슷한 문제를 통해 잘 정리해 주시니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해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 기억하길!!!
감사합니당^^
멋진해설 감사합니다..^^
잊지 말아야하죠~ㅋ
이부분 너무 어려워요 ㅠㅠ 자세한설명감사드립니다
이게 가장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