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명량대첩 전라우수영(全羅 右水營)
이순신 장군의 명언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14년동안 변방오지의 말단 수비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 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말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 세번 싸워 스물 세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 갖지말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말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12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말라.
나는 스무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까지 최선을 다 했노라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사당은 쓸쓸했지만 돌계단이 이뻐서 한컷!
계사년 7월16일 충무공께서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서신중 "만약 호남이 없었더라면 역시 나라도 없었을것이다"
(선조 30년) 9월 16일(음력) 진도와 해남 사이 좁은 해협인 ‘울돌목’에서 치러진 명량대첩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전선만으로 서해에 진출하려는 일본군133척를 분쇄하고 해상권을 다시 장악한 역사적인 해전이다. 울돌목의 빠른 물길을 이용해 열세에 몰린 전선수로 월등히 많은 일본 전선을 격파한 충무공의 전술이 과학적으로규명됐다 |
난중일기 일부
9월 초1일 [양력 10월 14일]<병자> 맑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촛불을 밝힌 채 이리 저리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병세를 점쳐보니, 중이 환속하는 것과 같고, 다시 쳤더니, 의심이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아주 좋다. 또 병세가 덜해질지 어떤지를 점쳤더니, 귀양 땅에서 친척을 만난 것과 같다는 괘가 나왔다.
이 역시 오늘 중에 좋은 소식을 들을 조짐이었다. 순무 사서성 (1558-1631)의 공문과 장계초고가 들어왔다.
9월 초2일 [양력 10월 15일]<정축> 맑다.
아침에 웅천현감․소비포권관이 와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낙안군수가 와서 봤다. 저녁에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좀 나아졌다고 하나, 원기가 몹시 약하다고 하니 염려스럽다.
9월 초3일 [양력 10월 16일]<무인> 비가 조금 내렸다.
새벽에 임금의 비밀분부(有旨)가 들어왔는데, "수군과 육군의 여러 장병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
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세 해 동안이나 바다에 나와 있는데 그럴 리가 만무하다.
여러 장수들과 맹세하여 죽음으로써 원수를 갚을 뜻을 결심하고 나날을 보내지마는, 적이 험고한 곳에 웅거하여
있으니, 경솔히 나아가 칠 수도 없다. 하물며 나를 알고 적을 알아야만 백 번 싸워도 위태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초저녁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스스로 생각하니 나라 일은 어지럽건만
안으로 건질 길이 없으니, 이를 어찌하랴! 밤 열시쯤에 흥양현감이 내가 혼자 앉아 있음을 알고 들어와서
자정까지 이야기하고 헤어졌다.
9월 초4일 [양력 10월 17일]<기묘> 맑다.
아침에 흥양현감이 와서 봤다. 밥을 먹은 뒤에 소비포권관도 왔다. 저녁나절에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와서 이야기하자고 했 다. 그래서 활터 정자로 내려가 앉아 활을 쏘았다.
원균(元均) 수사가 아홉 푼을 져 술이 취해서 갔다. 피리를 불게하다가 밤이 깊어 헤어졌다.
또 미안한 일이 있었다. 우습다. 여도만호가 들어왔다.
9월 초5일 [양력 10월 18일]<경진> 맑다.
닭이 운 뒤에 머리가 가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람을 시켜 이 를 긁게 했다. 바람이
고르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9월 초6일 [양력 10월 19일]<신사> 맑고 바람이 잔잔하다.
아침에 충청수사 및 우후․마량첨사와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저녁나절에 활터정자로 옮겨
앉아 활을 쏘았다. 이 날 저녁 종 효대(孝代)․개남(介南)이 어머니의 평안하시다는 편지를
가지고 왔다. 기쁘고 다행함을 어디다 비기랴! 방필순(方必淳)이 세상을 떠나고 방필순이
그 가족을 데리고 우리집으로 온다고 한 말을 들었다. 우습다. 밤 열시쯤에
복춘(福春)이 왔다. 저물녘에 김경 로(金敬老)가 우도(右道)에 이르렀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9월 7일 [양력 10월 20일]<임오>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의 편지가 왔는데, 순찰사(홍세공)가 초열흘쯤에 본부(순천)에 도착된다고 했다. 좌의정(윤두수:1533-1661)도 도착된다고 했다 심히 불행한 일이다. 순천부사가 진에 있을 때 거제로 사냥을 보냈던 바, 그들은 남김없이 다 잡았다는데, 그 사정을 전혀 보고하지 않은 것이 몹시 해괴하다. 그래서 편지를 보낼 때에 그것을 지적하여 보냈다.
9월 8일 [양력 10월 21일]<계미> 맑다.
장흥부사(황세득)을 헌관(獻官)으로 삼고, 흥양현감(배흥립)을 전 사(典祀)로 삼아서
초아흐레 날 둑제를 지내려고 입재(入齋) 시켰다. 첨지 김경로가 여기 왔다.
9월 초9일 [양력 10월 22일]<갑신> 맑다. 저물녘에 비가 오다가 그쳤다.
여러 장수들이 활을 쏘았다. 삼도가 아울러 모였는데, 원균(元均) 수사는 병으로 오지
않았다. 첨지 김경로도 같이 쏘고서 경상으로 돌아가 잤다.
9월 초10일 [양력 10월 23일]<을유> 맑고 바람도 잔잔하다.
사도첨사가 활쏘기 대회를 열었는데, 우수사도 모였다. 김경숙(金 敬叔)이 창신도로
되돌아갔다.
9월 11일 [양력 10월 24일]<병술> 맑다.
일찌기 수루 위로 나갔다. 남평(南平)의 색리와 순천의 격군으로서 세 번이나 양식을 훔친
자를 처형했다. 각 고을과 포구에 공문을 처리하여 보냈다.
저녁나절에 충청 수사가 와서 봤다. 소비포권관은 달빛을 따라 본포로 돌아갔는데,
까닭은 원 수사가 몹시 모함하려는 때문이었다.
9월 12일 [양력 10월 25일]<정해> 맑다.
일찌기 김암(金岩)이 방에 왔다. 조방장 정응운(丁應運)의 종놈 이 돌아가는 길에 편지답장
을 써 보냈다. 우수사․충청수사가 함께 왔다. 장흥부사가 술을 내어 함께 이야기하다가
몹시 취해서 헤어졌다.
9월 13일 [양력 10월 26일]<무자> 맑고 따뜻하다.
어제 취한 술이 깨지 않아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아침에 충 청우후가 와서 봤다.
또 조도어사 윤경립(尹敬立)의 장계 두 통 을 보니, 하나는 진도군수를 파면해 달라는
것이고, 하나는 수륙 양군이 서로 침해하지 말라는 것과 수령들을 전쟁에 보내지 말라 는
것이니, 그 뜻은 자못 임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저녁 에 하천수가 장계 회답과 홍패(과거 합격자 명단) 아흔일곱 장을 가지고 왔다.
영의정 편지도 가져 왔다.
9월 14일 [양력 10월 27일]<기축> 맑다.
흥양현감이 술을 바쳤다. 우수사․충청수사가 같이 활을 쏘았다. 방답첨사가 공사례를 했다.
9월 15일 [양력 10월 28일]<경인> 맑다.
일찌기 충청수사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망궐례를 했다. 우수사는 약속을 하고도 병을
핑게하니 한탄스럽다. 새로 합격한 사람들에게 홍패를 나누어 주었다. 남원 도병방과
향소 등을 잡아 가두었다. 충청우후(원유남)가 본도로 돌아갔다. 종 경(京)이 들어왔다.
9월 16일 [양력 10월 29일]<신묘> 맑다.
충청수사 및 순천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 날 밤 꿈에 아들을 보았는데, 경의 어미가
아들을 낳을 징조다.
9월 17일 [양력 10월 30일]<임진> 맑고 따뜻하다.
충청수사․순천부사․사도첨사가 와서 활을 쏘았다. 우후 이몽구가 둔전에 마당질하는
일로 나갔다. 효대(孝代) 등이 나갔다.
9월 18일 [양력 10월 31일]<계사> 맑고 지나치도록 따뜻하다.
충청수사 및 흥양현감과 함께 종일 활을 쏘고서 헤어졌다. 저물 무렵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왔다. 이수원(李壽元) 및 담화(曇花)가 들어왔다. 복춘(福春)이 들어왔다.
이 날 밤 이리저리 뒤척이다 잠을 못 이루었다.
9월 19일 [양력 11월 1일]<갑오> 종일 비가 내렸다.
흥양현감․순천부사가 와서 이야기했다. 해남현감도 왔다가 곧 돌아갔다. 흥양현감․
순천부사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9월 20일 [양력 11월 2일]<을미> 새벽에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비가 잠깐 들었다.
홀로 앉아 간밤의 꿈을 기억해 봤다. 꿈에 바다 가운데 외딴 섬이 달려오다가 눈앞에 와서
주춤 섰는데, 소리가 우레 같아 사방에서는 모두들 놀라 달아나고, 나만은 우뚝 서서 끝내
그것을 구경하니, 참으로 장쾌하였다. 이 징조는 곧 왜놈이 화친을 애걸하고 스스로
멸망할 징조다. 또 나는 준마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었다. 이것은 임금의 부르심을 받아 올
라갈 징조다. 충청수사와 흥양현감이 왔다. 거제현령도 와서 보고 곧 돌아갔다. 체찰사의
공문에 수군에게 군량을 받아 들여 계속 대라고 했다. 잡아 가두었던 친족과 이웃을
다 풀어 주었다고 했다.
9월 21일 [양력 11월 3일]<병신> 맑다.
아침에 활터정자에 나가 앉아 공문을 처리하여 주고, 저녁나절 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
순천부사․충청수사가 종일 이야기 했다. 어둘 무렵 여러 장수들이 뛰어넘기를 하게하고,
또 사병들로 하여금 씨름을 하게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헤어졌다.
9월 22일 [양력 11월 4일]<정유>
아침에 활터 정자에 앉았다. 우수사․장흥부사․경상우후가 와 서 명령을 듣고서 갔다.
원수의 비밀서류가 왔는데, 27일에는 꼭 군사들을 출동시키라는 것이었다.
9월 23일 [양력 11월 5일]<무술> 맑으나 바람이 사나왔다.
아침에 활터 정자에 올라가 공문을 써 보냈다. 경상수사 원균 (元均)이 군사기밀을 논의하고
갔다. 낙안의 군사 열한 명과 방답의 수군 마흔다섯 명을 점고했다. 고성 사람들이 연명으로
하소연하였다. 진주 강운(姜雲)의 죄를 다스렸다. 보성에서 데려온 소관(召官) 황천석(黃千錫)을 끝까지 추궁했다. 광주에 가두었던 창평현 색리 김의동(金義同)을 사형하라는 전령을
내보냈다. 저녁에 충청수사와 마량첨사가 와서 봤다. 깊은 방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초저녁에 복춘(復春)이 와서 사사로운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운 뒤에야 돌아갔다.
9월 24일 [양력 11월 6일]<기해> 맑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아침에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아침식사를 하는데 충청수사와 같이 먹었다.
오늘 더그레(號衣: 각 영문의 군사와 馬上才의 軍이 입는 세 자 락 난 웃옷)을 나누는데,
전라좌도는 누른 옷 아홉 벌, 전라우 도는 붉은 옷 열 벌, 경상도에는 검은 옷 네 벌이었다.
9월 25일 [양력 11월 7일]<경자> 맑으며, 바람이 조금 잤다.
첨지 김경로는 군사 일흔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저녁에 첨지 박종남(朴宗男)은 군사 육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왔다. 조붕(趙 鵬)도 와서 같이 자면서 밤에 모여 앉아 이야기했다.
9월 26일 [양력 11월 8일]<신축> 맑다.
새벽에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이 견내량(거제시 사등면 덕호리)에 이르렀으므로
박춘양(朴春陽)을 보내어 건너온 까닭을 물었더니, 수군과 합세할 일로 원수(권율)가
전령하였다고 하였다.
9월 27일 [양력 11월 9일]<임인> 아침에 맑더니 저물녘에
잠깐 비가 내렸다.
아침에 출항하여 포구에 나가자 여러 배들도 일제히 출항하여 적 도(거제시 둔덕면)
앞바다에 대었다.
그러니 첨지 곽재우(郭再祐) ․충용 김덕령(金德齡)․
별장 한명련(韓明璉)․주몽룡(朱夢龍)
등 이 와서 약속하고 각각 원하는 곳으로 갈라 보냈다.
저녁에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배에 이르렀으므로 본영의 배를 타게 했다.
저물무렵 체찰사의 군관 이천문(李天文)․ 림득의(林得義)․ 이홍사(李弘嗣)․ 이충길(李忠吉)․
강중룡(姜仲龍)․ 최여해(崔汝諧)․ 한덕비(韓德備)․ 이안겸(李安謙)․ 박진남(朴振男)
등이 왔다. 밤에 잠깐 비가 내렸다.
9월 28일 [양력 11월 10일]<계묘> 흐리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
첫 점은 활이 살을 얻은 것과 같고, 다 시 치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았다. 바람이
고르지 않았다. 흉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 잤다.
9월 29일 [양력 11월 11일]<갑진> 맑다.
출항하여 장문포(거제시 장목면 장목리) 앞바다로 마구 쳐들어가니, 적의 무리는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는다. 누각을 높이 양쪽 봉우리에는 진지를 쌓고서 항전하러
나오지 않는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무찔렀더니, 뭍으로 내려가 도망가 버렸다.
빈 배들만 쳐부수고 불태웠다. 칠천량에서 밤을 지냈다.
갑오년 10월 (1594년 10월)
10월 초1일 [양력 11월 12일]<을사>
새벽에 출항하여 장문포에 이르렀다. 경상우수사와 잔라우수사가 장문포 앞바다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충청수사와 및 선봉의 여러 장수들과 함께 곧장 영등포로 들어가니, 흉악한
적들은 바닷가에 배를 대어 놓고 한 놈도 나와서 항전하지 않았다. 해질 무렵에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와서, 사도의 2호선이 뭍에 배를 매려할 즈음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지는데, 불은 일어나지 않고 꺼졌지만, 매우 분통하다. 우수사의
군관 및 경상우수사의 군관은 그들의 실수를 간단히 꾸짖었지만, 사도의 군관에게는 그
죄를 무겁게 시행했다. 밤 열시쯤에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2일 [양력 11월 13일]<병오> 맑다.
다만 선봉선 서른 척으로 하여금 장문포의 적정을 가서 보고 오게 했다.
10월 초3일 [양력 11월 14일]<정미> 맑다.
몸소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일찌감치 장문포로 가서 종일 싸우려는데, 적의 무리들은
두려워 항전하러 나오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와서 밤을 지냈다.
10월 초4일 [양력 11월 15일]<무신> 맑다.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과 함께 약속하고서, 군사 수 백 명을 뽑아 뭍에 내려, 산을 오르게 하고,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어 들락날락 하면서 싸움을 걸게 했다. 저녁나절에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수륙이 서로 호응하니, 적의 무리들은 갈팡질팡하며 기세를 잃고 동서로 바삐 달아났다. 육군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는 곧 배로 내려왔다. 돌아와 칠천량에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李繼命)이 표신과 선유교서를 가지고 왔다. 안에는 임금님이 하사하신 잘(貂皮: 담비의 털가죽)이 있었다.
10월 초5일 [양력 11월 16일]<기유>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다.
장계초고를 초 잡았다.
10월 초6일 [양력 11월 17일]<경술> 맑다.
일찍 선봉으로 하여금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그 글은,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할 것이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놈 한 명이 칠천도 산기스락에서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잡아 배 에 싣고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 왜적이었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10월 초7일 [양력 11월 18일]<신해> 맑다.
병사 선거이(宣居怡)․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이 나 갔다. 띠풀 백여든세동을 베었다.
10월 초8일 [양력 11월 19일]<임자> 맑고 바람조차 없다.
아침에 출항하여 장문포 적의 소굴에 이르니, 적들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군대의 위세만 보인 뒤에 흉도로 되돌아왔다가 그 대로 출항하여 한산도에 일제히 이르니, 밤은 벌써 자정이 되었다. 흉도에서 띠풀 이백예순 동을 베었다.
10월 초9일 [양력 11월 20일]<계축> 맑다.
아침에 정자로 내려오니 첨지 김경로․첨지 박종남․조방장 김응함․조방장 한명달(韓命達)․진주목사 배설(裵楔)․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이 아울러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김과 박은 종 일 활을 쏘았다. 박자윤(朴子胤)은 마룻방에서 자고 춘복(春福)이 함께 잤다. 김성숙(金惺叔)은 배로 내려가 잤다. 남해현령․하동현감․사천현감․고성현령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10일 [양력 11월 21일]<갑인> 맑다.
아침에 나가 장계초고를 수정했다. 박자윤(朴子胤)과 곤양군수는 그대로 머물고 떠나지 않았으며, 흥양현감․보성군수․장흥부 사는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울(蔚)과 변존서(卞存緖)․유헌(有憲?) 및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10월 11일 [양력 11월 22일]<을묘> 맑다.
아침에 몸이 불편했다. 아침에 충청수사가 와서 봤다. 공문을 처리하였다. 일찍 잘 방으로
들어갔다.
10월 12일 [양력 11월 23일]<병진> 맑다.
아침에 장계초고를 수정하였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여기에 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이 적을 토벌한 일을 스스로 직접 장계를 올리고자 했다.
그래서 공문을 만들어 와서 주었다. 비변사의 공문에 따르면, 원수가 쥐 가죽으로 만든
남바위 (耳掩: 귀가리개)를 전라좌도에 열다섯 개, 전라우도에 열 개, 경상도에 열 개,
충청도에 다섯 개를 나누어 보냈다.
10월13일 [양력11월24일]<정사>맑다.
아침에 아전을 불러 장계초안을 지었다. 저녁나절에 충청수사를 내보냈다. 본도우수사가 충청수사를 와서 보고도 나를 보지 않고 돌아갔다. 술이 몹시 취한 까닭이었다. 종사관(정경달)이 벌써 사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천 1호선을 내어 보냈다.
10월 14일 [양력 11월 25일]<무오> 맑다.
새벽꿈에, 왜적들이 항복하여 육혈포(六穴砲) 다섯 자루를 바치고, 환도도 바치며, 말을 전하는 자는 김서신(金書信)이라고 하는 데, 왜놈들의 항복을 모두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10월 15일 [양력 11월 26일]<기미> 맑다.
박춘양(朴春陽)이 장계를 가지고 나갔다.
10월 16일 [양력 11월 27일]<경신> 맑다.
순무사 서성이 해질 무렵에 이곳에 왔다. 우수사․원균(元均) 수사와 함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10월 17일 [양력 11월 28일]<신유> 맑다.
아침에 사람을 어사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아침을 먹은 뒤에 당도한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우수사가 왔다. 어사도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데, 경상수사 원균(元均)의 속이 는 말을 많이 했다. 몹시도 해괴하다. 원균(元均)도 왔다. 그 흉악 하고도 패악한 꼴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아침에 종사관이 들어왔다.
10월 18일 [양력 11월 29일]<임술> 맑다.
아침에 바람이 세게 불다가 저녁나절에 그쳤다. 어사에게로 갔더니, 이미 원 수사에게 갔다고 했다. 그곳에 갔더니 조금 있다가 술이 나왔다. 날이 저물어서 돌아왔다. 종사관이 교서에 숙배례를 행하고서, 서로 인사했다.
10월 19일 [양력 11월 30일]<계해> 바람이 고르지 못했다.
대청으로 나가 앉았다가 저녁나절에 돌아와 수루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사가 우수사한테 가서 종일 술 마시며 이야기했다고 하였 다. 아침에 종사관과 이야기했다. 저녁에 종 억지(億只) 등을 좨쳐서 왔다. 박언춘(朴彦春)도 왔다.
10월 20일 [양력 12월 1일]<갑자> 아침에 흐렸다.
저녁나절에 순무어사가 나갔다. 작별한 뒤에 대청으로 올라 앉아있으니 우수사가 와서 아뢰고 돌아갔다. 공문 작성 때문에 나갔다고 생각된다. 밤 열시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1일 [양력 12월 2일]<을축> 맑다가 조금 흐렸다.
종사관․우후․발포만호가 나갔다. 투항해 온 왜놈 세 명이 원균 (元均) 수사에게서 왔기로 문초하였다. 영등포만호가 왔다가 밤 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그에게 어린 아이가 있다고 했다. 데려 오도록 일러 보냈다. 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10월 22일 [양력 12월 3일]<병인> 흐렸다.
의능(宜能)․이적(李迪)이 나갔다. 초저녁에 영등포만호가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 심부름이나 시키고자 머물러 두었다.
10월 23일 [양력 12월 4일]<정묘> 맑다.
그 아이가 아프다고 했다. 종 억(億)의 죄와 애환(愛還)․정말동 (丁唜同)의 죄를 다스렸다. 저녁에 그 아이를 본디 있던 곳으로 보냈다.
10월 24일 [양력 12월 5일]<무진> 맑다.
우우후를 불러서 활을 쏘았다. 금갑도만호도 왔다.
10월 25일 [양력 12월 6일]<기사> 맑으며 하늬바람이 세게 일었다.
저녁나절에 그쳤다. 몸이 불편하여 방을 나가지 않았다. 남도 포만호(강응표)․거제현령이 왔다. 영등포만호(조계종)도 와서 한참 이야기하는 적에, 전 낙안군수 첨지 신호(申浩)가 와서, 체찰사(윤두수)의 공문․목화․벙거지 및 정목(正木) 한 동을 가지고 왔다. 그와 같이 이야기하다가 밤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순천부사 권준이 잡혀 갈 때에도 보러 왔다.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10월 26일 [양력 12월 7일]<경오> 맑다.
빙부(方震)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첨지 신호(申浩)에 게서 들으니, 김상용(金尙容)이 이랑(吏郞)이 되어 서울로 갈 때 에 남원부내에 들어가자면서 체찰사를 보지 않고 갔다고 했다. 시절이 이러하니 참으로 해괴하다. 체찰사가 밤에 순변사의 숙소로 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와 그의 숙소로 왔다고 했다. 체모가 이럴 수가 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종 한경(漢京)이 본영으로 갔다. 오후 여섯 시께 비가 오더니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10월 27일 [양력 12월 8일]<신미> 아침에 비오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미조항첨사(성윤문)가 와서 교서에 숙배하고, 그대로 그와 함께 이야기하다가 날이 저물어 아뢰고 돌아갔다.
10월 28일 [양력 12월 9일]<임신> 맑다.
대청에 앉아서 공무를 봤다. 금갑만호․이진만호가 와서 봤다. 식사를 한 뒤에 우우후․경상우후가 와서 목화를 받아 갔다. 저 물 무렵에 잠자는 방에 들어갔다.
10월 29일 [양력 12월 10일]<계유> 맑다.
하늬바람이 몹시도 살을 에 듯이 차갑다.
10월 30일 [양력 12월 11일]<갑술> 맑다.
적을 수색하여 토벌하라고 군사를 들여보내고 싶었으나, 경상도엔 전선이 없어서 다른 배들이 모이기를 기다렸다. 자정에 아들 회가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활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