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06년 진나라의 멸망 이후 유방의 한(漢)과 항우의 서초(西楚)가 대립한 끝에 기원전 202년 12월 항우의 패배와 죽음, 그리고 한나라의 승리와 천하 통일로 끝나는 전쟁. 초한쟁패(楚漢争覇)라고도 하며, 중국에서는 '초한상쟁(楚漢相爭)'이라는 표현도 많이 쓰인다.
2. 특징
당대 중국의 모든 세력이 얽혀들어간 대전 중의 대전이며, 진나라 멸망 후 당대 최강자였던 항우는 여러 차례의 괴물 같은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패배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유방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평민 출신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사상 초유의 업적을 이루게 되었다.
워낙 항우와 유방의 존재감이 막대하여 그 두 명이 중국 땅을 갈라놓고 붙은 문자 그대로 2파전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실제로는 항우와 유방 외에도 여러 왕들과 독자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나 조나라나 제나라, 그리고 후반부에 반(半) 독립세력으로 성장한 한신 등은 충분히 삼파전 구도를 시도해 볼 만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러한 군소 세력들도 모두 항우의 세력권에 속했거나 유방과의 협력관계에 놓여 있었으므로, 양대 세력의 결전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중국 역사상 분열기가 많긴 하지만 이렇게 완전하게 양대로 나뉘었던 전쟁사례가 상당히 특이하면서도 납득되는 이유다.[4]
또한 항우와 유방은 출신 계급부터 정책에 대한 관점, 특징되는 능력과 성격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상반되는 상대였다.[5] 이러한 상호간의 강렬한 개성으로 인해 이 전쟁은 인기가 많고, 《삼국지연의》와 마찬가지로 이를 배경으로 한 소설《초한지》가 있다. 또한 이러한 항우와 유방의 강렬한 개성, 그리고 한삼걸(漢三傑) 등의 존재로 인해 전근대 중국사의 전쟁 중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의 《삼국지》 시대 다음으로 많이 회자되고, 미디어화되는 대결이기도 하다.[6] 잘 알려져 있지만, 한국의 장기는 초한전쟁이 배경이다.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에 나타나는 이야기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이제 많이들 알고 있는 데 비하여, 실제 기록상에 나타나는 초한전쟁과 소설인 《초한지》의 내용에 대한 차이점은 모르는 경우가 잦다.
본 항목에서 다루는 내용은 실제 역사 기록상에서 나타나는 초한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소설상의 내용은 《초한지》 항목을 참조.
3. 전개[편집]
3.1. 진나라의 통일, 그리고 붕괴[편집]
춘추시대(春秋時代)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대혼란을 겪은 중국은 마침내 진(秦)나라에 의해 하나로 통일되었다. 법가(法家)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원교근공의 외교 정책을 받아들여 열국을 분열시킨 진나라는 백기, 왕전, 몽염 등의 장수를 앞세워 전쟁에서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 기원전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켰고, 불과 10년밖에 안 되는 사이에 한(韓)나라 · 조(趙)나라 · 위(魏)나라· 초(楚)나라 · 연(燕)나라 · 제(齊)나라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의 통일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업적을 이룬 진시황은 황제로 즉위하며 제국의 시대를 열었고,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 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몽염을 파견하여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임효와 조타를 보내 광둥성(廣東省) ·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해외에서는 중국의 다른 이름을 China, Chine 등 진나라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진나라의 천하 통일은 곧 진나라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시황제의 거대한 대외 정책과 대규모 토목 공사는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말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 정책이 시작되었다. 또한 전국칠웅 중 진을 제외한 다른 여섯 나라는 모두 멸망하였지만, 망국(亡國)의 주민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었고 진나라는 억압만 했지 그들을 보듬어줄 어떠한 정책도 펼치지 않았다.[7]
결국 이러한 온갖 억압과 부담 속에 백성들의 분노와 불만은 한계 수위까지 차오르고 있었는데, 시황제의 뒤를 이어 이세 황제로 즉위한 호해(胡亥)는 아버지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건 전혀 없는 막장이었다. 호해는 정치는 조고(趙高)에게 맡겨둔 채 막장스런 생활만 즐겼는데, 그러는 사이에도 제국은 착실하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야사에 따르면 진시황이 죽기 몇 년전 꿈을 꾸었는데 진시황 앞에 태양이 떨어졌다. 전대미문의 현상에 당황한 진시황제 앞에서 어디선가 나타난 파란 옷을 입은 청의동자가 떨어진 태양을 주워가려고 하자 곧 빨간 옷을 입은 홍의동자가 그 태양을 뺏고자 싸움을 걸었다. 싸움 내내 청의 동자가 일방적으로 홍의동자를 이겼으나 홍의 동자는 계속 일어나서 청의동자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제풀에 지친 청의동자가 태양을 포기한다. 그렇게 태양을 차지한 홍의동자가 떠나려고 하자.
진시황 : 홍의를 입은 아이야 너는 누구냐?
홍의동자 : 이 몸은 천명을 받들어 요순의 시대를 재현하는 400년 왕조를 만들 몸이시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잠에서 깨어나 홍의 동자를 찾고자 곧바로 전국순행을 떠났으나 홍의 동자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하였다.
3.2. 진승·오광의 난[편집]
"'진승이 왕이 되어 초나라는 크게 일어날 것이다.(大興楚, 陳勝王)"'
"공(公) 등은 모두 기한을 넘겼으니 참수를 당할 것이고, 가령 참수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戍) 자리 서면서 죽는 자가 열 명 가운데 진실로 여섯 일곱 명일 것이다. 또 장사(壯士)란 죽지 않는다면 그만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드러내야 할 뿐이다. 왕(王), 후(侯), 장(將), 상(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단 말이냐!"[8][9]
상앙(商鞅) 이래 진나라의 법치주의는 진시황의 시대에 이사(李斯)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법률은 무엇보다도 가장 위였고, 이는 지나치게 가혹한 면이 많았다.
시황제가 죽은 이듬해인 기원전 209년, 하남성 출신인 진승(陳勝)은 자신의 동료인 오광(吳廣) 등 징용된 900여명과 함께 현재의 베이징 부근인 어양(漁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행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를 무렵, 마침 큰비가 내려 도로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별수 없이 발이 묶이게 되었는데, 당시 진나라의 법률로는 목적지까지 정해진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하면 무조건 목을 베어버리게 되어 있었으니, 어차피 도망쳐도 죽고 늦게 가도 죽게 되는 상황이 되자 진승과 오광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인부들을 선동하기 시작했고 인부들도 동조하여 인솔하던 관리들을 모두 죽여버린다음 반란을 일으킨다. 진승은 장초(長楚)라는 국호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
만일 그렇게 가혹한 법률이 없었다면 진승·오광의 난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10][11] 또한, 진나라의 지배력이 강고하다면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났다고 해도 모기가 물어대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진승과 오광이 들고 일어서자 전국에서 이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퍼져 나갔다. 특히 당시 진나라 36개 군과 그 밑의 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있었는데, 혹독한 관리들에게 고통받던 백성들은 불만이 폭발하여 모두 들고 일어나 그들을 죽이고 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반란군은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규모로 불어났다. 호해가 상황 파악이 늦기도 했지만 계포의 평가에 따르면 진시황이 흉노 원정 등으로 국력을 축내놓은 탓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면도 있었던 듯. 장한만 해도 수도에서 당장 동원할 군대는 형벌부대밖에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승은 결국 일개 농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수한 반군 세력을 통합하여 하나로 통솔할 수 있는 권위가 없었다.[12] 육국의 후손들은 진승에게 굳이 복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부하들도 점점 진승을 이탈하게 된다.[13] 이 와중에 나중에도 사고를 치는 괴철은 무신이란 장수가 성 수십개를 함락시키자 '이 기회에 진승의 군사를 훔쳐서 독립해버리자'며 꼬드겼고, 무신은 진짜로 독립했다가 자기도 똑같은 수법으로 군사를 도둑맞은 후 어이없이 부하에게 죽는 등 장초 세력은 개판 오분전이 된다.
결정적으로,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는 주문(周文)의 병력을 진나라의 명장 장한(章邯)이 격파하면서 진승의 지위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기세를 탄 장한은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3.3. 패왕 항우[편집]
진승과 오광의 난은 결과적으로 진승의 죽음으로 좌절됐다. 하지만 이미 지방들에서 반란들이 계속해서 일어났기에 진 제국은 중국 전국의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리고 항우가 이끄는 초(楚)의 부흥군이 거록대전에서 장한의 군대를 격파하면서(BCE 207) 진은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그 사이 패현에서 거병했던 초한대전의 또다른 주역 유방은 함양 남쪽 무관(武關)을 넘어 진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나라의 수도 함양을 제후들 중 가장 먼저 함락시켰고 진나라 왕 자영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곧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항우는 함곡관을 뚫고 유방을 치려했다. 위기에 처한 유방은 연회를 가장한 암살위기였던 홍문연에서 탈출, 서촉땅으로 물러났다. 이후 항우는 함양을 재차 함락시키고 진왕 자영을 비롯, 모든 왕족을 멸족시키고 대학살을 벌이며 함양을 불태웠다.
이후 항우는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을 자칭하며 팽성에 도읍을 두고 초 회왕 미심을 황제인 의제로 높였으나 진을 멸한 후에는 침현으로 추방 후 살해하였다. 항우는 각지의 유력자들이 세운 나라들을 초나라 아래에 편입하고 자신을 따라 함께 진나라를 멸한 장군들을 각지에 봉건하여 봉건제를 부활시켰는데, 봉건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세부 사항에서 보다시피 문제가 많은 조치였다. 항우는 주로 자신에 협력한 세력에 좋은 땅을 분봉했고,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은 세력은 그 지방의 중심지에서 벽지로 쫒아냈기 때문에 봉건으로 인한 분쟁이 수없이 발생했다.
18
한왕(漢王) 유방(劉邦): 한중, 파, 촉 일대. 수도는 남정.
옹왕(雍王) 장한(章邯): 함양 이서. 수도는 폐구(지금의 싱핑 시 소재).
새왕(塞王) 사마흔(司馬欣): 함양 동쪽에서 황하 사이. 수도는 약양.
적왕(翟王) 동예(董翳): 상군(上郡) 전역. 수도는 고노(지금의 옌안 시 소재).
이상은 옛 진(秦)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대왕(代王) 조헐(趙歇)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원래 장이는 진여(陳餘)와 함께 조헐을 조왕(趙王)으로 옹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는 장이가 자신과 함께 진을 공격한 공적이 있다 하여 조헐을 대왕으로 쫓아내고 장이에게 조나라 땅의 대부분을 주어 상산왕에 봉했다. 후(侯)로 격하된 진여는 이에 분노하여 장이를 공격하고 조헐을 다시 조왕으로 옹립한다. 결국 갈 곳 없던 장이는 유방에게 붙어버려서 유방의 패업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상은 옛 조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구강왕(九江王) 영포(英布): 구강, 형산, 임강은 오초(吳楚) 지역이다.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영포의 장인.
임강왕(臨江王) 공오(共傲): 영포의 부하.
이상은 서초패왕 항우와 함께 옛 초나라의 영역을 갈라 받은 제후들이다.
"항우는 현능한 사람들은 시기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미워하며, 능력 있는 사람들은 의심하여, 싸움에서 승리했음에도 그 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고, 땅을 얻어도 나누지 않아 그 이익을 같이 누리지 않음으로 인해, 항우는 천하를 잃은 것인가 합니다."
왕릉
"참으로 애통하구나! 어린아이와 함께 일을 도모했으니 일이 이루어 질 수 있겠는가? 항왕으로부터 천하를 뺏어갈 자는 필시 패공(沛公)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여기 있는 우리들은 그의 포로가 되고 말리라!"
범증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마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초가 해하(垓下)에서 패하여 바야흐로 죽게 되었는데, 말하기를 '하늘아!' 라고 하였다니, 믿겠습니까?" 이에 대답하였다. "한은 여러 정책을 다하였고, 여러 정책은 여러 명의 힘을 다하게 하였지만, 초는 여러 정책을 싫어하고 스스로 그 자신의 힘을 다하였던 것이오. 다른 사람을 다하게 하는 사람은 이기고, 스스로 다하는 사람은 지는 것인데, 하늘이 무슨 까닭이겠소."
양웅[27]
5. 영향[편집]
5.1. 중국[편집]
기나긴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것은 진나라였지만 가혹한 통치로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는 단명왕조가 되어버렸고, 이후에 건국된 한나라가 400년 가까이 중국을 통치하면서 한나라가 실질적인 중국의 첫 번째 통일왕조로 기능하게 되었다.[28]
이후 왕망이 황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건국했지만 광무제가 왕망을 물리치고 후한을 건국하면서 황제는 오로지 유(劉)씨만이 할 수 있다는 관념이 성립되었고 이러한 믿음은 유비가 건국한 촉한의 멸망 때까지 이어졌다.
한편 한무제 때 국력이 완전히 회복되자 한나라는 본격적인 주변국 원정에 나서 북쪽의 흉노를 제압하고 남쪽의 남월, 동쪽의 고조선까지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주변국들이 통일중국의 국력을 실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2. 한국[편집]
초한전쟁은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연나라 땅에 거주하던 위만이 진한교체기의 혼란을 틈타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 준왕에게 복속하였고 이후 고조선의 서쪽 국경을 지키다 반란을 일으켜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우게 된다.
위만조선은 한나라가 내전의 상처와 흉노의 압박으로 약해진 틈을 타서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실시하는 동시에 한나라와 진국 사이에 중계무역으로 많은 이득을 누린다. 또한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철기가 도입된 것도 위만조선 시기이다.
하지만 한나라 무제가 즉위하고 나서 무역문제로 고조선을 압박하였고 협상이 결렬되자 한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결국 위만조선은 멸망하고 만다.
이후 한나라는 고조선의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해 지배하려 했으나 토착민들의 저항으로 점차 밀려나 고구려와 같은 소국들이 성장하였고 마지막 남은 낙랑군이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면서 한사군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문화적인 영향으로는 한국의 전통 보드게임인 장기가 이 전쟁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6. 사건 목록[편집]
진승·오광의 난
거록대전
신안대학살
홍문연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팽성대전
경색 전투
한신의 북벌
안읍 전투
정형 전투
유수 전투
형양 · 성고 전역 ─ 형양전투, 성고전투, 팽월의 유격전, 사수전투
광무 대치
해하 전투
번외 백등산 포위전
7. 같이보기[편집]
내전
초한지
[A] 1.1 1.2 1.3 양 쪽에 전부 속함.
[4] 다른 예를 찾자면 남북조시대와 국공내전이 있다. 실제로 마오쩌둥이나 장제스를 유방이나 항우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국공 내전도 만주국을 비롯한 일제의 존재가 중국사 다른 시대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삼파전의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5] 진시황의 행렬을 보았을 때 태도 차이가 이를 보여준다. 유방은 "대장부라면 실로 저래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호탕한 한탄(?)을 했다면 항우의 반응은 "저 자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겠다"였다.
[6] 보통 세번째는 전국시대 말 진시황의 통일전쟁, 네번째는 칭기즈칸의 중국 정복전쟁
[7] 실제 진승·오광의 봉기 이후 이들에게서 독립한, 혹은 자립한 6국의 후예들은 불과 1년도 안되는기간 옛 근거지를 확보하고, 망국(亡國)을 그리워하는 수많은 민중을 끌어모았다. 6국 중 가장 강했던 초나라 민중들의 진나라에 대한 적개심은 특히 강했다. 진승, 오광도 초기에 초나라의 장수 항연의 이름을 앞세웠다.
[8] 권중달의 자치통감 1권. pp403
[9] 이 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문장은 일반 민중에게, 특히 난을 일으키는 민중에겐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작용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고려 무신정권 때의 만적의 난에서도 이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한반도로도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0] 하지만 반대되는 자료도 존재하는 것이, 당시에 살았던 진 하급 관료의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에 수록된 것은 이렇다. "부역에 징발된 인원이 도착하지 않으면 담당자에게는 2갑의 벌금. 3일에서 5일까지 늦으면 견책. 6일부터 10일까지는 1순의 벌금. 10일을 넘기면 1갑의 벌금." 참고로 갑이 순보다 높은 단위다. 이상을 볼때, 보통 알려진 것처럼 진의 법률은 수틀리면 사형이라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나름 고도의 체계를 갖춘 것으로, 후대의 곡가필을 감안한다면 죽지는 않아도 높은 벌금을 물수밖에 없었든가, 분위기를 보아하니 반란이 되겠다는 진승 오광의 판단이 앞섰다는 가능성도 열어둘 수 있겠다.
[11] 아래 주석에도 언급하지만, 한대의 법률은 진의 그것을 큰 차이 없이 계승한 것으로, 단지 법가 대신 도가를 표방한 무위지치의 통치로 진보다 좀 더 느슨한 적용을 행한 것이다. 진의 멸망 원인은 단순히 가혹한 법률과 그에 대항한 민중이 아니라, 고대 국가의 제한된 통치력과 고작 15년의 기간으로는 분리되었었던 전국 400년의 세풍을 수습할 수 없었으며 이를 보듬어줄 정책 또한 미비했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설령 진나라의 가혹한 법률이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다 한들, 명백히 저런 죽간같은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겐 그런 뻔한 프로파간다를 고칠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를 거치며 진나라=가혹한 법률로 내려왔음을 보면 진나라에 대한 증오가 상상초월이었음을 알 수 있는것이다.
[12] 역사학자 공원국은 이 부분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는데, 핏줄도 핏줄이지만 전투에 있어 농민출신이었던 진승은 말도 전차도 몰 수 없었고, 이는 장군으로서의 권위를 세울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음을 의미한다는 해석이 그것. 등자가 없던 시절이기도 하고 등자가 발명된 이후로도 동서양을 불문하고 농경사회에서 승마는 귀사족들의 특권이었음을 생각해본다면 설득력이 있는 부분이다.
[13]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장이와 진여는 먼저 진을 쳐서 쓰러뜨릴 것을 권했으나 일개 농민에 불과했던 진승은 그보다는 왕 자리에 오르는 것을 우선시했다.
[14] 한왕 신의 숙부
[15] 초한전쟁 동안의 오창은 교통도 뛰어나서 온갖 군수물품이 모였고 365일 마차행렬이 끓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한나라군의 보급기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당연히 한군도 여기가 점령당하면 전세가 힘들어 질 것을 알기에 경계가 삼엄했는데 만약 항우가 이곳을 점령해 보급을 끓었다면 전세가 급변했을수 있다.
[16] 사실 개인적인 감정을 자처하더라도 이 당시의 강동은 개발이 진행되기는 했어도 중원의 생산력에는 영 미치지 못했던지라 정신차리고 권토중래를 하기가 까다로웠다.
[17] 정확히는 진희의 반란에 연루되었다기보다는 그 때 팽월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오라는 황명을 씹었다. 거기다 팽월의 미움을 샀던 아랫사람이 죽기 싫어서 선수를 쳐 팽월을 음해하는 바람에 잡혀가게 되었고 이후 여후가 다시 고제에게 팽월을 참소해서 처형되었던 것. 물론 갑자기 벌어진 건 아니고 팽월이 이전에도 몇 번이나 황명을 씹었다는 말이 있었던 만큼 유방으로서도 꽤 벼르고 있던 참에 팽월이 제버릇 못 고치고 눈치없이 군 게 문제가 되었다.
[18] 다른 하나는 서초 측의 2대 임강왕 공위.
[19] 유방을 옹립할 당시에는 항우에게 형산왕의 자리를 빼앗겼다.
[20] 한 행동만 따져보면 후의 수양제 등과 비교될만한 세계사 내에서도 역대급 폭군이였다. 한국의 연산군 등은 애교로 보일 수준.
[21] 그래도 요동까지는 수복을 못했다는게 학계의 정설이다.
[22] 조선으로만 흘러간게 아니라 삼한 지역까지 유민들이 흘러드러가서 당시 개발이 덜 되어있던 한반도 남부가 여러 연맹왕국들이 생기고 삼한이 정립되는 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23] 그나마 백기는 장평대전의 고고학적 유물 발굴 결과 전사자를 학살자로 부풀려 과장했거나, 혹은 학살이 있었더라도 수십만에 달하는 학살은 없었으리라고 보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24] 물론 진나라처럼 폭정을 일으키거나 항우처럼 작정하고 학살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유방도 팽월을 이용해 전쟁 내내 초나라 후방 지역을 공격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으며 지속적으로 곡식을 약탈했다. 하지만 대규모로 유랑민을 만든 책임은 대부분 진나라와 항우에게 많이 있다.
[25] 1.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2. 상해를 입힌 자와 3. 재물을 훔친 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행한다.
[26] 초한전쟁 도중에는 기존의 세금 제도는 거의 동결했고 산부라는 제도를 따로 만들어서 운용했다. 이것도 전쟁을 시작한지 2년 후부터나 거두기 시작했다고. 노약자나 청소년을 징집하다보니 대신 유방이 입대자가 나온 집에서는 세금을 거두지 않겠다고 약조했기 때문.
[27] 양웅은 한나라 시대의 인물로 당시에 박학하다고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이 평론은 양웅의 저서인 법언(法言)에 실려 있다.
[28] 중국의 민족을 한족(漢族), 의복을 한푸(漢服)라고 부르는 것도 한나라가 중국의 정체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진나라도 중국의 영어명 China(차이나)에 영향을 주고 법가 사상과 군현제라는 선진적인 제도를 남겼고 무엇보다 통일중국이라는 원형을 제공한 국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