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헌집(慕軒集) 강필신(姜必愼)생년1687년(숙종 13)몰년1756년(영조 32)자사경(思卿)호모헌(慕軒)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채팽윤(蔡彭胤)의 문인.
慕軒集卷之五 / 記 / 松隱窩記
龍門之北。伊水淸漪。循伊而西。巖石奇峭。巖上有亭。亭之額曰素履。素履亭者。吾家松隱公之先代別業也。松隱公仍其舊修餙之。積數十年。山若益以欝。水若益以淸。卉木若益以美。於是乎亭之事。無餘憾矣。循亭左方下石欄數層。又迤北若干跡。水回而山抱。林木淸踈。中有一丘。隱隱如橫雲缺月。掩映隳蔽。公曰是固有異也。今得之矣。因以杖指劃。鋤其茀剔其𡾠。築小窩數間。蔭用白茅。東南北三面。環以小軒。中置密室。取古襺雲之制。方廣不過尋丈而有寬濶之勢。制作不加礱斲而有要妙之用。其室中之觀則矮槎怪石癭瓢竹檠。日本之壺。新羅之琴。翟尾龍腰之帚。庭實則柟梓筠桂松鞠梅碧梧柳菡萏茱萸花藥。東北有甲嶂修善淵嶽鉏巖諸峰。朝夕在眉眼間。益親近可悅。伊水循除。滙爲方澤。泓澄如鏡。微飆吹動。縠紋縐熨。簷桷房櫳。勢若浮空。俯檻而唾則游魚仰而呑吐。釣則含鉤而上者相續也。夫窩之勝。山得其一。水得其二三。卉木又得其一。而特與山水爲容者也。公曰是窩也。吾亭之丙舍也。而其幽靜之趣。瑰詭之觀。亭之所有者悉有之。其所未有者亦有之。此足以輔吾亭之勝也。自是客退事簡。輒休煩息燥。隨意寢處於其中。旣而扁其楣曰松隱。余謂松隱者。公之所自號。而今又名其窩。眞隱者事也。古之人有隱於耕牧。隱於漁樵。隱於麴蘖。公之取義。亦以是歟。公曰否。吾何敢與古之人比。古之人以心隱。吾以形隱。古之人以其所好於中者樂其心。吾以其所惡於外者勞其形耳。何者。吾平生不喜與俗人接。窩之東。有松十數樹。偃蹇老大。可翳而隱。吾常盤桓於其下。見有客來者。吾則旋然趨辟。以背負樹。累跡而立。樹左右不見衣裾。客彷徨良久。轉而東則吾蔽於西。轉而西則吾閃於東。此之謂以形隱也。旣客去。吾亦歸。一室蕭然。貳念俱冥。但聞隔水笙簧之聲。此吾之所以自號而未足。故遂以名吾窩者也。余曰多矣哉。公之隱也。古之人有同之者。吾嘗以祝和父爲樟隱。張牧之爲竹隱。今公又自以爲松隱。其義一也。雖然公之所恃而隱者松而已矣。松亦有時而不能自隱。匠者一顧。爲梁棟爲榱臬爲明堂廣廈之材。物之有用者。猶不足恃。而况君子之進退行藏。關世道之汚隆者乎。方今聖明在上。寤寐賢俊。隱居巖穴之士。彈冠而起。吾恐尺一之書。一日而至。公雖有松樹千章。吾知其隱遁不得也。公笑曰子之言戱也耶。始吾重子之不俗。今子亦俗耳。他日子之來。無亦彷徨於松樹之外乎。吾其隱矣。余聞其言而艶歎之。遂爲記書于窩之壁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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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록 제2권
고일(高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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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시대(戰國時代)의 인재(人才)로서는 마땅히 노중련(魯仲連)을 제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가 진(秦)을 물러가게 하고도 조(趙) 나라의 상(賞)을 받지 않고요성(聊城)을 항복시키고도 제(齊) 나라의 벼슬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세상을 우습게 보고 제뜻대로 행동한 것을 보면, 초연(超然)히 이 세상의 구애에서 벗어나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 후세에서는 오직 이백(李白)만이 그를 알아보았는데 그 시에,
제 나라에 척당한 사람이 있으니 / 齊有倜儻生
고묘한 노중련이라네 / 魯連特高妙
바다에서 솟아오른 명월주처럼 / 明月出海底
하루아침에 광채를 뿌렸다네 / 一朝開光耀
하였고, 또,
하늘과 땅 사이에 홀로 우뚝 서니 / 獨立天地間
맑은 바람이 난설을 씻어내는 듯 / 淸風洒蘭雪
하였으니, 노중련의 신채(神彩)를 제대로 전해주었다고 하겠다. 이백은 본래 그 인품과 기상이 초매(超邁)하여 자신이 노중련과 같은 기상이 있었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알아서 이와 같이 표현했던 것이다. 《장설소췌(藏說小萃)》
한(漢) 나라 말기에는 고사(高士)들이 많았다. 엄광(嚴光)은 만승(萬乘)의 천자(天子)에게조차 거만하게 대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이른바,
맑은 바람 육합(六合)을 씻어내니 / 淸風洒六合
아득한 그 기상 감히 오를 수 없네 / 邈然不可攀
한 것은 거의 그 기상을 안 것이라 하겠다. 그 다음가는 사람으로는 황숙도(黃叔度 숙도는 황헌(黃憲)의 자)와 서유자(徐孺子 유자는 서치(徐穉)의 자)가 그 기풍을 이을 만하다. 이보다 아래로 혜숙야(嵇叔夜 숙야는 혜강(嵇康)의 자)는 향기로운 티끌을 밟는 듯한 기상이 있다고 하겠으나, 때로 세속과 어울리지 못하는 뾰족한 성품이 있어 난세(亂世)에 죽임을 당했으니 애석하다. 진(晉) 나라 이후에는 ‘고사(高士)가 한 사람도 없다.’ 하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다. 《장설소췌》
왕 우군(王右軍 우군장군을 지낸 왕희지(王羲之)를 말한다)은 원래 복식법(服食法 도가(道家)의 양생법(養生法)으로 단약(丹藥)을 복용한다)으로 본성(本性)을 기르기를 즐기고 경사(京師)에 거처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 절강(浙江)에 부임했을 때 문득 그곳에서 한평생을 마칠 뜻을 가졌다. 회계(會稽) 지방은 산수(山水)가 좋은 곳이어서 명사(名士)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때 손작(孫綽)ㆍ이충(李充)ㆍ허순(許詢)ㆍ지둔(支遁) 등은 다 문장과 의리(義理)로 한 시대에 으뜸가는 인물들이었는데, 함께 동토(東土 동중(東中)과 같은 말로, 진(晉) 나라가 남쪽으로 옮긴 뒤에 회계(會稽) 지방을 동중이라고 불렀다)에 집을 짓고 살면서 왕희지와 친숙하게 지냈다. 《하씨어림(何氏語林)》
왕 우군(王右軍)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동토(東土)의 인사들과 산수 사이에 노닐면서 사냥과 낚시질로 소일하였다. 또 도사(道士) 허매(許邁)와 함께 복식법을 닦으며 명약(名藥)을 캐러 다녔다. 천리(千里)도 멀다 하지 않고 동중(東中)의 여러 고을에 있는 명산(名山)을 유람하였는데, 창해(滄海)에 배를 띄워 타고는 말하였다.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여기에서 한평생을 마치리라.” 《소창청기(小窓淸記》
이흠(李廞)은 무증(茂曾)의 다섯째 아들로 청정(淸貞)하고 원대(遠大)한 지조가 있었으나, 어려서부터 몸이 섬약하여 혼인도 하지 않고 벼슬살이도 하지 않았다. 임해(臨海)에 있는 가형(家兄)인 이 시중(李侍中 이식(李式))의 묘 아래에서 살았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승상(丞相)인 왕도(王導)가 그를 승상부의 속관으로 징벽(徵辟)하려 하였다. 이흠이 그 전명(牋命)을 받고 말하였다.
“무홍(茂弘 왕도의 자)이 또 벼슬자리로 사람을 빌리려 한다.” 《세설신어보(世說新語補)》
완 광록(阮光祿 진(晉) 광록(光祿)을 지낸 완유(阮裕)를 말한다)가 동산(東山)에 있을 때 소연무사(蕭然無事)하게 지내면서 항상 자족(自足)한 마음으로 지냈다. 어떤 사람이 그에 대해 왕 우군(王右軍)에게 물으니, 우군이 말하였다.
“이 사람은 거의 총욕(寵辱)에 놀라지 않으니 비록 옛날의 침명(沈冥 고요하여 자취가 없는 것)한 사람이라도 어찌 이에 지날 수 있겠는가.” 《세설신어보》
하 표기(何驃騎 표기장군(驃騎將軍)을 지낸 하충(何充)을 말한다)의 아우인 하준(何準)은 높은 뜻을 품고 세상을 피했는데, 그 형인 하충이 그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다섯째’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이것이 어찌 형님의 표기(驃騎)라는 명칭보다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 《세설신어보》
장목지(張牧之)는 죽계(竹溪)에 은거(隱居)하여 세상과 사귀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님이 찾아오면 대나무 울타리 사이로 어떤 사람인가를 엿보아, 운치 있고 훌륭한 사람인 경우에만 그를 불러서 자기 배에 태우거나 혹 스스로 배를 저으면서 그와 담소하였다. 속된 사람들은 열이면 열 모두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 그에 대한 노여움과 비난이 끊일 날이 없었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다. 《하씨어림》
張牧之 隱於竹溪 不喜與世接 客來 蔽竹窺之 或韻人佳士 則呼船载之 或自刺舟與語 俗子十反 不一見 怒罵相踵 不顧也
강승연(康僧淵)이 예장(豫章)에 있을 때, 성(城)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정사(精舍)를 세웠다. 그 정사는 여러 봉우리와 긴 내를 끼고 있었는데, 뜰 앞에는 향기로운 수풀이 펼쳐 있고 맑은 시내가 집 주위에 흘렀다. 그는 이곳에 유유히 거처하면서 학문을 닦고 현리(玄理)를 찾아 음미했는데, 유량(庾亮)과 같은 여러 명사들이 많이 그곳에 가서, 그가 토납(吐納 도가(道家)의 호흡법(呼吸法))을 운용(運用)하고 풍류(風流)가 도도해지는 것을 구경하였다. 《하씨어림》
묵지(墨池)는 남창현(南昌縣)에 있는데, 수죽(水竹)이 그윽하고 울창하다. 왕 우군(王右軍)이 임천군(臨川郡)을 맡고 있을 때 매양 이곳을 지나면 그 주위를 맴돌면서 떠나지를 못했는데, 그로 인하여 묵지(墨池)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보다 앞서 한(漢) 나라의 매복(梅福)이 꽃나무를 심었는데 못 가운데서 꽃이 피자 탄식하기를,
“생(生)은 나의 괴로움이 되고 몸은 나의 질곡(桎梏)이 되며, 형(形)은 나의 치욕이 되고 아내는 나의 누(累)가 되는구나.”
하고, 드디어 아내를 버리고 홍애산(洪厓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씨어림》
공순지(孔淳之)는 회계(會稽) 섬현(剡縣)에 살았는데,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다. 매양 노니는 곳에서는 반드시 그 그윽하고 험한 곳까지 다 살펴보았는데, 간혹 10일 만에 돌아오기도 하였다. 일찍이 산중에 노닐다가 법숭(法崇)이라는 사문승(沙門僧)을 만나 그와 함께 3년을 머물렀다. 법숭이 감탄하기를,
“내가 인간을 벗어날 생각을 30년이나 하였는데, 이제 이 사람에게 마음이 쏠려서 늙음이 이르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구나.”
하였다. 공순지는 되돌아올 때도 그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하씨어림》
강담(江湛)이 왕경현(王景玄)을 이부랑(吏部郞)으로 천거했더니, 왕경현이 강담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엄군평(嚴君平)이 ‘나의 명성을 내는 것은 내 몸을 죽이는 것이다.’ 하였는데, 천작(天爵)은 명성이 없도록 해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이부랑(吏部郞)이 되겠는가. 그 천거가 비루하다 하겠고 그 하는 일이 정당하지 못하니, 비단 진신(搢紳)들만 그르게 여길 뿐 아니라 복첩(僕妾)들까지도 다 비웃을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강담과 절교(絶交)하였다. 10여 년 이상 그 문턱을 넘어선 일이 없었으므로, 담장으로 둘러친 집에는 이끼와 풀이 뜨락을 덮을 정도였다. 《하씨어림》
장경원(章敬遠)은 지상(志尙)이 평이하고 간솔(簡率)하여 영리(榮利)에 담백하였다. 거처하는 집이 임천(林泉)을 끼고 있고 금서(琴書)를 즐기면서 고고(孤高)하게 지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거사(居士)라고 불렀다. 그때 그의 한가하고 소박함을 사모하던 사람들이 술을 싣고 그를 따르니, 장경원은 그들을 위해 즐거이 마시고 서로 어울려 싫증을 내지 않았다. 《사문유취(事文類聚)》
풍영통(馮靈通 영통은 풍량(馮亮)의 자)은 본디 산수(山水)를 즐길 뿐 아니라 생각이 몹시 정교(精巧)하였는데, 그가 암림(巖林) 사이에 얽은 집이 거처하고 노닐기에 매우 적합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명성이 퍼졌다. 세조(世祖)가 그 비용을 제공하고 사문승통(沙門僧統)인 승섬(僧暹)ㆍ하남윤(河南尹) 견침(甄琛)과 함께 높은 산의 형승지(形勝地)를 두루 살펴서 한거(閒居)할 절을 짓도록 하였다. 그가 지은 절은 임천(林泉)이 기이하고 또 건축술도 훌륭하여 산거(山居)의 묘미를 완벽하게 드러냈다. 《소창청기(小窓淸記)》
왕무공(王無功 무공은 왕적(王績)의 자)이 하수(河水) 가에 밭 16경(頃)이 있었는데, 노비(奴婢) 몇 사람에게 기장을 심게 하였다. 그래서 봄ㆍ가을로 술을 빚게 하고, 오리와 기러기를 기르고 약초(藥草)를 모종하여 자공(自供)을 삼았다. 중장자광(仲長子光)이란 은자(隱者)와 함께 복식법(服食法)으로 본성을 길렀으며, 형제(兄弟)가 보고 싶으면 즉시 하수를 건너서 집에 돌아가곤 하였다. 북산 동고(北山東皐)에 노닐었는데, 저서를 짓고는 스스로《동고자(東皐子)》라고 이름붙였다. 《유후당서(劉昫唐書)》
무유서(武攸緖)는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조카이다. 성품이 담백하고 욕심이 적어 매일 《주역(周易)》과 노장서(老莊書)를 읽으면서 기껍게 지냈다. 용문(龍門)과 소실봉(少室峯) 사이에 은거(隱居)하였으며, 겨울에는 띠와 산초로 집을 짓고 여름에는 석실(石室)에 거처하였다. 만년(晩年)에도 피부에 윤기(潤氣)가 충만하였으며, 눈동자에서 자광(紫光)이 쏟아져 나와 낮에도 별을 볼 수 있었다. 《유후당서》
이태백(李太白)이 말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선대인(先大人)이 나에게 사마상여(司馬相如)의 자허부(子虛賦)를 읊도록 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마음속으로 사모하였다. 그래서 장성한 뒤에 남쪽으로 운몽(雲夢)을 유람하고 칠택(七澤)의 장관(壯觀)을 보았으며, 안륙(安陸) 지방에서 술로 지내며 10여 년이나 은거하였다.” 《이한림집(李翰林集)》
원덕수(元德秀)의 호는 노산(魯山)인데, 방관(房琯)이 탄복하기를,
“자지(紫芝 원덕수의 호)의 미목(眉目)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명리(名利)에 대한 마음을 모두 사라지게 만든다.”
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행실을 높게 여겼는데, 서권(書卷)은 시렁에 가득했으나 벼슬에서 떠날 때는 짐수레를 타고 갔다. 죽은 뒤에는 오직 침리(枕履)와 단표(簞瓢)뿐이었다. 60평생에 여색(女色)을 가까이한 일이 없었다. 《유후당서》
장자동(張子同 자동은 장지화(張志和)의 자)은 부모의 상(喪)을 마친 뒤에는 다시 벼슬 하지 않고 강호(江湖)에 살면서 연파조도(煙波釣徒)라고 자칭(自稱)하였다. 또《현진자(玄眞子)》라는 책을 지었는데, 그 제목으로 자호(自號)를 삼았다. 그 형인 장학령(張鶴㱓)이 그가 세상을 피해서 은거해 버릴 것을 걱정해서 월주(越州)의 동곽(東郭)에 집을 지어주었는데, 생초(生草)로 이엉을 하고 들보와 서까래는 다듬지 않은 생나무를 썼다. 항상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으나 미끼를 쓰지 않았으니, 그 뜻이 고기에 있지 않았던 것이다. 황제(皇帝)가 노비(奴婢)를 각각 한 사람씩 내려주었는데, 장지화는 그들을 부부(夫婦)로 짝지워주고 각각 어동(漁童)과 초청(樵靑)이라고 이름붙여 주었다. 은사(隱士)인 육우(陸羽)가 묻기를,
“자네와 왕래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태허(太虛)가 집이 되고 명월(明月)이 촛불이 되어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살아 일찍이 잠시라도 이별한 일이 없는데, 어찌 왕래하는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안진경(顔眞卿)이 호주 자사(湖州刺史)가 되었을 때 장지화가 가서 뵈니, 안진경은 그의 배[舟]가 낡아 새는 것을 보고 고쳐주려고 하였다. 그러자 장지화가 말하기를,
“제 소원이 바로 부가 범택(浮家泛宅)하여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사이를 오가는 것입니다.”
하였다. 이덕유(李德裕)가 장지화를 칭송하였다.
“은거하고 있으면서도 명성이 있고 현저(顯著)하면서도 무사(無事)하여 궁(窮)한 것도 아니고 달(達)한 것도 아니니, 한(漢)의 엄광(嚴光)에 비길 수 있겠다.” 《유후당서》
이 병부(李兵部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낸 이약(李約)을 말한다)는 본디 현기(玄機)를 헤아릴 줄 알아 그 기상이 심원하고 엄숙하였다. 또 덕행(德行)이 높을 뿐 아니라 산수(山水)의 운치(韻致)가 있었으며, 금주(琴酒)와 도덕(道德)이 다 한 시대에 빼어났다. 여색(女色)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성품이 다른 사람과 사귀기를 즐겼으나 세속의 이야기를 즐기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머리를 싸매고 손님과 축융(蹙融)을 하면 한 달이 금방 지나가곤 하였다. 고기(古器)를 많이 비축하였는데, 호주(湖州)에 있을 때 고철(古鐵) 한 조각을 얻었다. 그것을 치면 소리가 몹시 청아(淸雅)하였다. 또 원숭이를 한 마리 길렀는데 산공(山公)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항상 그것을 데리고 다녔다. 달밤에 강에 배를 띄우고 금산(金山)에 올라 쇳조각을 두드리고 거문고를 타면 원숭이가 반드시 휘파람으로 화답하였다. 새벽에 이르도록 술잔을 기울이는데 꼭 손님이 있어야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씨어림》
백부(白傅 태부(太傅)를 지낸 백거이(白居易)를 말한다)는 동도(東都)에서 분사(分司)하고 있을 때 나날이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상서(尙書) 노간사(盧簡辭)의 별장이 이수(伊水) 근처에 있었는데, 정자와 누각이 매우 훌륭하였다. 그가 한겨울에 여러 자질(子姪)들을 데리고 그곳에 올라 숭산(嵩山)과 낙수(洛水)를 멀리 조망(眺望)하였는데, 얼마 뒤에 잔 눈송이가 약간 내리자 전에 금릉(金陵)을 진수(鎭守)하던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였다.
“그때 강남(江南)에는 산수가 좋아 매양 그곳 사람과 일엽편주(一葉片舟)를 띄우고 고채(菰采)와 농어로 식사를 하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홀연히 두 사람이 사립을 쓰고 물가를 따라 내려오기에 배를 이끌어 가까이 가보니, 그 배 앞에 푸른 장막이 쳐 있고 그 가운데 백의(白衣)를 입은 사람이 승려와 함께 앉아 있었다. 또 배의 뒷전에는 작은 자라가 있고 구리로 만든 시루에 불을 피우고 있었다. 어린 동자가 고기를 삶고 차를 끓이고 있는데 뱃전에 물결이 부서지고 있었다. 배 안에서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바야흐로 진진하기에, 내가 그들의 고일(高逸)함에 탄복하여 어떤 사람인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은 백공(白公)이 불광(佛光)이라는 중과 함께 건춘문(建春門)에서 나와 향산정사(香山精舍)로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태평광기(太平廣記)》
백낙천(白樂天 낙천은 백거이(白居易)의 자)이 동도(東都)에 있을 때 이도리(履道里)에 살았다. 그 집에 못이 있어 배를 띄울 만했는데, 백낙천은 매양 빈객(賓客)을 모아 배에 앉히고 수십 수백의 유낭(油囊)에 고기구이를 매달아 물 속에 잠기게 한 뒤에 배를 타고 놀다가 하나씩 그걸 다 먹고나면 좌우(左右)에서 차례대로 유낭을 치운 뒤 연석(筵席)이 끝나면 잔치도구를 도로 물 속에 저장해 두었다. 《하씨어림》
최당신(崔唐臣)은 민중(閩中) 사람인데, 소자용(蘇子容 자용은 소송(蘇頌)의 자)ㆍ여진숙(呂晉叔)과 동학(同學)하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소자용ㆍ여진숙만 과거에 합격하자 최당신은 무연(憮然)히 과거의 뜻을 버렸다. 그 뒤 소ㆍ여 두 사람이 삼관(三館)에 들어가 함께 말을 타고 나와 변수(汴水)의 둑을 따라가다가, 한 선비가 조그마한 배의 창(窓) 아래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바로 최당신이었다. 급히 그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하고 이별한 뒤 어떻게 지냈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처음에 행랑꾸러미를 뒤집어보니 돈이 천백(千百)은 되기에 그 반으로 이 배를 사서 강호(江湖)를 왕래하며 나머지 반으로 시중에서 잡화(雜貨)를 사서 일용으로 하고 있네. 비록 노를 젓는 대로 쑥대처럼 떠다니고 있지만, 과거를 보아 벼슬을 구하던 때보다 오히려 낫네.”
하였다. 두 사람이 그를 함께 데리고 가려고 하였으나 듣지 않으면서 단지 관직과 거처하는 곳만을 물었다. 다음날 다시 관청에서 나와 보니 최당신이 집에다 명함을 두고 갔으므로 다시 그가 있던 곳을 찾아갔다. 그러나 그 배는 이미 떠나가고 없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와 그가 두고 간 명함을 살펴보니, 이름 밑에 세서(細書)로 절구 1수(首)가 씌어 있기를,
집선전(集仙殿)의 선객이 생애를 물으니 / 集仙仙客問生涯
어주를 사서 세월을 보낸다네 / 買得漁舟度歲華
책상엔 황정경(黃庭經)이 있고 술통엔 술이 있으니 / 案有黃庭尊有酒
바람 따라 흐르는 곳이 바로 내 집이라네 / 少風波處便爲家
하였다. 《용재수필(容齋隨筆)》
양적(陽翟)의 신군(辛君)은 선배들 가운데 어진 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의 덕으로 벼슬을 얻었으나 은거(隱居)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는 소자용(蘇子容) 승상(丞相)의 처남(妻男)이고 이정(二程 정호(程顥)ㆍ정이(程頤)) 선생의 외숙(外叔)이다. 당시 소 승상이 한창 성할 때여서 자주 그를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천(伊川 정이(程頤)) 선생이 원풍(元豐) 연간에 해마다 낙중(洛中)으로부터 와서 영창(潁昌)에 있는 한지국(韓持國 지국은 한유(韓維)의 자)을 방문했는데, 양적을 지날 때는 반드시 신군의 집에서 10여 일씩 머무르곤 하였다. 그의 집에는 7칸짜리 대옥(大屋)이 있었는데, 집 뒤에는 온통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피어 있어 평생토록 자락(自樂)하였다. 《와유록(臥遊錄)》
전승군(田承君 전주(田晝)의 자)은 강개자수(剛介自守)한 성품이었다. 그 형제 다섯이 모두 기절(氣節)이 있고 박학능문(博學能文)하였으며, 형제가 함께 살면서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 최안 덕부(崔鶠德符 덕부는 최안의 자)와 진염 숙이(陳恬叔易 숙이는 진염의 자)와 벗으로 사귀었다. 여러 전씨 형제들이 양적현(陽翟縣) 남쪽 10리에 있는 죽림점(竹林店)이라는 곳에 살았는데, 그곳에 대나무가 많아서 죽림점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이다. 10여 칸의 집이 있어 문사(文史)의 일로 지내기가 넉넉하였다. 수재(秀才)인 양적 사람 장종문(張宗文)은 전씨와 친척 사이였는데,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난해 어느 달밤에 성중(城中)에서부터 걸어서 전씨들을 찾아갔더니, 마침 술이 익고 꽃이 만발했으므로 10여 일을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서로 문장을 짓고 어울리다가 즐거운 뜻이 충족된 뒤에 돌아왔다.” 《와유록》
난산(亂山) 가운데 전승군의 초가집이 있었는데, 앞에는 대나무가 있고 옆에는 시내가 흘렀다. 그 시냇가에 큰 돌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앞뒤에 배나무와 대추나무를 심었다. 매일 두 아우들과 함께 대숲을 지나 시내를 건너다니다가 피로하면 그 돌 위에 앉거나 풀 위에서 쉬었다. 갈건(葛巾)과 짚신으로 시를 읊조리면서 돌아왔는데, 그 흥취가 족히 늙어감과 근심을 잊어버릴 만하였다. 《소창청기(小窓淸記)》
소양직(蘇養直 양직은 소상(蘇庠)의 자)은 경구(京口)와 소흥(紹興) 사이에 은거하였다. 서사천(徐師川 사천은 서부(徐俯)의 자)과 함께 징소(徵召)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서사천이 조정에 나아갈 때 소양직이 사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머물러 여러 날을 함께 술을 마시면서 즐겼다. 두 사람은 평소에 서로 바둑 상대였는데 서사천의 수가 소양직보다 높았었다. 그런데 이날은 소양직이 한 알을 놓으면서 서사천을 보고 말하기를,
“자네가 오늘은 노부(老夫)의 이 한 점에 모름지기 양보해야 할 것이네.”
하니, 서사천은 부끄러운 낯이 되었다. 《학림옥로(鶴林玉露)》
주희진(朱希眞 희진은 주돈유(周敦儒)의 자)은 가화(嘉禾) 지방에 살았는데,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연파(煙波) 사이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를 들었다. 어떤 행자(行者)에게 물으니 그가,
“이것은 우리 선생님이 부는 피리소리입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그 피리 분 사람이 작은 배를 저어 왔으므로, 모두 함께 그가 사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의 집에 금축(琴筑)과 완함(阮咸) 같은 악기들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주희진이 평소에 마음에 두었던 것들이었다. 처마 사이에는 진기한 새들을 기르고 있었는데 일찍이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들이었으며, 방 안의 청자(靑瓷)에는 과일과 음식들이 담겨 있었는데 손님이 오면 그것을 집어서 대접하였다. 그의 시에,
청라로 상투를 싸고 발에는 흰 행전 / 靑羅包髻白行纏
이는 범인도 아니고 신선도 아니라네 / 不是凡人不是仙
집은 낙양성 안에 있는데 / 家在洛陽城裏在
누워서 동적을 불며 이천을 지나네 / 臥吹銅笛過伊川
하였다. 《옥호빙(玉壺氷)》
예운림(倪雲林 운림은 예찬(倪瓚)의 별호)의 집에 청비각(淸閟閣)이 있었는데, 깊고 아늑하여 속세의 티끌이 없었다. 그 안에 수천 권의 서책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손수 교정(校正)한 것이었고, 경사 제자(經史諸子)로부터 석로(釋老)의 글까지 모든 서책을 매일 읊조리곤 하였다. 그 집안에는 옛날 정이(鼎彝)와 명금(名琴)이 좌우에 널려 있고, 송계난죽(松桂蘭竹)이 집 주위에 빙 둘러 있었다. 집 밖에는 높은 나무와 긴 대나무들이 울창하게 깊은 숲을 이루고 있었는데, 비가 그치고 바람이 자면 그는 지팡이와 신발을 끌고 그 주위를 마음대로 산보하면서 때로 시구를 읊조리며 즐겼다. 그래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그가 세속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씨어림》
고중영(顧仲瑛 중영은 고덕휘(顧德輝)의 자)은 재산이 많았으나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손[客]을 좋아하였다. 옛날의 법서(法書 명필(名筆)의 글씨)와 명화(名畫)와 정이(鼎彝) 등의 비기(祕器)를 사서 모으고, 서경(茜涇)이라는 곳의 서쪽의 별장을 짓고는 ‘옥산가처(玉山佳處)’라고 현판을 달았다. 그리고 밤낮으로 손님과 더불어 그 안에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다. 그래서 하동(河東)의 장저(張翥), 회계(會稽)의 양유정(楊維楨), 천태(天台)의 가구사(柯九思), 영가(永嘉)의 이효광(李孝光) 등과 같은 사방의 문학(文學)하는 선비들과 장백우(張伯雨 백우는 장우(張雨)의 자)ㆍ우언성(于彦成 언성은 우립(于立)의 자)ㆍ기원박(琦元樸)과 같은 방외(方外)의 인사와 당시의 명사(名士)들이 모두 그의 집에 모이곤 하였다. 그 원지(園池)의 화려함과 도서(圖書)의 풍부함은 음식과 건물과 성기(聲伎) 등과 함께 모두 당시 제일이었다. 더욱이 그의 재주와 정감이 묘려(妙麗)하여 앞의 여러 사람들과 대략 서로 수작(酬酌)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의 풍류(風流)와 문아(文雅)함이 사방에 유명하였다. 《하씨어림》
왕면(王冕)은 배를 사서 동오(東吳)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대강(大江)을 건너 초회(楚淮) 지방으로 가서 유명한 산천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러다가 혹 기재(奇才)나 협객(俠客)으로 옛날의 호걸(豪傑)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그를 불러서 함께 술을 마시며 강개한 뜻을 시로 읊조리곤 하였다. 북으로 당시 원(元)의 수도인 연도(燕都)를 유람하고서는,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곳은 여우와 토끼가 노는 벌판이 되리라.”
하였다. 구리산(九里山)에 은거하였는데, 콩은 3묘(畝)를 심고 밤나무는 그 배를 심었으며, 매화(梅花)는 1천 그루 심고 복숭아와 살구는 5백 그루씩 심었으며, 토란 한 구획(區劃)과 해채(薤菜)와 부추를 각기 1백 본(本)씩 심었다. 또 물을 끌어서 못을 만들고 물고기를 1천여 마리 길렀으며 모옥(茅屋) 3칸을 짓고는 스스로 ‘매화옥(梅花屋)’이라 이름붙였다. 《명야사휘(明野史彙)》
왕공(王恭)이 나이 60여 세에 천거되어 경사(京師)에 가게 되었는데, 같은 고을에 사는 왕칭(王偁)이 우스갯소리로 말하기를,
“자네는 회계 태수(會稽太守)의 인끈을 숨겨가지고 오는 일이 없도록 하게.”
하니, 왕공이 웃으며 대답하였다.
“산중(山中)의 도끼자루가 다행히 별탈이 없네.” 《명세설신어(明世說新語)》
상숙(常熟)에 사는 부자 서홍(徐洪)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유간(諭幹) 사람 반규(潘珪)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의 재산이 많으니 자네가 대신 맡아서 처리하게. 나는 이제 이것을 내버리고 떠나겠네.”
하고는 그의 전택(田宅)을 모두 반규에게 주었다. 그는 처자를 데리고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 베옷에 나물밥을 먹으며 외인과 교제를 사양하고 스스로 도원 ……(원문 1자 빠짐)…… 은(桃源□隱)이라 하였다. 《장설소췌(藏說小萃)》
고소(姑蘇)에 사는 왕빈(王賓)은 누항(陋巷)에 혼자 살고 있었는데, 군수(郡守)인 요선(姚善)이 그를 찾아가 보았다. 요선이 수레를 버리고 몸소 그 집 문앞에 이르니, 왕빈이 누구냐고 물었다. 요선이라고 대답하자 그제야 문을 열고 맞아들여 서로 담소하였다. 다음날 왕빈이 부문(府門) 앞에 가서 두 번 절하고 돌아오려 하니, 요선이 몸소 나와서 맞아들이려 했다. 그러자 왕빈이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공사(公事)가 아니므로 감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명세설신어》
화여덕(華汝德)에게 상고루(尙古樓)라는 집이 있었는데, 그는 관(冠)과 신, 반우(盤盂)와 궤탑(几榻) 등을 모두 옛사람들의 제도를 모방하였다. 특히 옛 명필ㆍ명화와 정이(鼎彝) 등을 좋아하여 현상을 걸고 열심히 모았다. 또 진품(眞品)과 모조품 및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할 줄 알았기 때문에 그가 모은 것들은 모두 을품(乙品) 이하로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당시 오(吳) 지방에 심주(沈周)라는 선생이 옛 물건을 잘 감별할 줄 안다는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상고(尙古 화여덕)는 때때로 작은 배에 골동품을 싣고 심주 선생을 찾아가 교제하며, 서로 자기의 소장품(所藏品)을 내놓고 감평(鑑評)을 하면서 어느 때는 수십일 동안 돌아오지 않기도 하였다. 명(明) 나라 성화(成化 명 헌종(明憲宗)의 연호)ㆍ홍치(弘治 명 효종(明孝宗)의 연호) 연간에 중국 동남(東南) 지방의 호고박아(好古博雅)한 선비들은 심주 선생을 제일로 치고 상고를 그 다음으로 쳤다. 《미공십부집(眉公十部集)》
관중(關中)의 태백산인(太白山人) 손일원(孫一元)은 구기산인(九杞山人) 허상경(許相卿)과 친했다. 어느 날 남병산(南屛山)을 지나는데 학(鶴) 한 마리가 따라오므로, 구기산인이 그 학을 위해 학전(鶴田)을 사고 해마다 곡식을 깊은 산중에 날라다 주도록 하였다. 그 문서를 만들어 비장했는데 거기에,
“태백산인의 학전은 구기산(九杞山) 서원(書院)의 남쪽에 있는데, 산을 끼고 호수를 앞에 두고 왼쪽은 숲이고 오른쪽은 길이다. 밭의 면적과 길이는 각기 1백 보(步)로 한 해에 곡식 3석(石)의 수입이 있다. 만약 나머지가 있으면 곡식을 나르는 비용으로 쓰고, 3석의 곡식은 항주(杭州)의 서호(西湖)에 있는 남병산으로 보낸다. 또 흉년이 들면 그 반으로 줄이되 나머지는 구기산인이 윤필(潤筆 다른 사람에게 글씨나 그림을 주고서 그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을 말한다)한 비용으로 충당한다. 그 밭을 경작하는 사람은 주인(主人)의 이웃사람인 이인(李仁)이요, 그것을 나르는 사람은 주인의 노복인 귀의(歸義)요, 보증인은 주인의 아우 허장경 주중(許檣卿舟仲 주중은 허장경의 자)이다. 주인은 누구인가 하면, 태백산인의 벗으로 기천자(杞泉子)라고 하는 허중보(許仲甫)이다.”
하였는데, 이것을 ‘학전권(鶴田卷)’이라고 했다. 《미공십부집》
문형산(文衡山 형산은 문징명(文徵明)의 별호)은 부모가 돌아간 뒤에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한림대조(翰林待詔)로 징빙(徵聘)했는데, 반 년을 넘기지 못하고 떠나버렸다. 영서인(寧庶人 명 태조(明太祖)의 열일곱째 아들인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이 그의 이름을 사모하여 초청했으나 나가지 않고 나날이 한묵(翰墨)으로 소일하였다. 평생 동안 외간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성시(城市)에 드나들지 않았다. 권귀(權貴)한 사람들이 그의 서화(書畫)를 바라면 절대로 주지 않았으나 민간의 소민(小民)들이 과일과 떡을 가져와서 서화를 얻으려 하면 흔쾌하게 붓을 휘둘러 그려주었다. 92세에 아무런 병 없이 죽었다. 《명야사휘》
왕이길(王履吉 이길은 왕총(王寵)의 자)은 손으로 경서(經書)를 모두 두 번이나 베껴 썼다. 속된 말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으며, 풍의(風儀)가 의젓하고 행동이 헌걸찼다. 그러나 항상 겸손하여 비록 그의 명성이 자자했지만 중후(重厚)한 태도를 지녔다. 따라서 다른 사람과 상대할 때에 학문에 대해서 말한 일이 없었으니, 대개 자기의 능기(能技)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보이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성품이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동정호(洞庭湖)에서 3년을 살았으며, 뒤에는 석호(石湖)에서 20년을 독서로 보내면서 세시(歲時)나 부모를 문안(問安)할 경우가 아니면 성중(城中)에 드나들지 않았다. 산수(山水)가 훌륭한 곳에 이르면 문득 즐거운 마음이 생겨 떠날 줄을 몰라, 혹 무성한 숲이나 풀이 무성한 곳에 비스듬히 누워 쉬면서 향기를 맡고 시를 읊으며 자리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면서 아득히 천년(千年)을 사모하는 풍취가 있었다. 《명야사휘》
웅제화(熊隮華)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길수현(吉水縣) 추남고리(鄒南皐里)를 지나다보니 그 석수(石水)가 청량(淸涼)하여 참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탐렴 유립(貪廉懦立)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또 거기에서 어떤 선생을 만났는데, 한 마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미 음풍 농월(吟風弄月)하면서 돌아오는 흥취가 있었다.” 《명세설신어》
진 무제(晉武帝) 태강(太康) 연간에 전선(田宣)이라는 사람이 명석암(鳴石巖)에 은거하였다. 서리가 바람에 날리고 낙엽이 지면, 그는 항상 그 돌을 어루만지면서 혼자 즐거워하였다. 그런데 매양 흰 초의(草衣)를 입은 사람이 나타나 바위 위를 배회(徘徊)하다가 새벽이 되면 사라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왕중륜(王中倫)이란 사람으로 주 선왕(周宣王) 때 사람인데, 이 돌에서 나는 소리가 맑고 우렁차서 자주 여기에 와서 듣고는 한다.” 《소창청기》
야인(野人)이 나부산(羅浮山)을 노닐면서 긴 휘파람을 불면 그 소리가 온 숲을 빙 돌아 울려퍼진다. 송(宋) 나라 함순(咸淳 송 도종(宋度宗)의 연호) 연간에 어떤 사람이 오방모(烏方帽)를 쓰고 신을 신고 나부산을 왕래하였는데, 사람만 보면 크게 웃으면서 도망치곤 하였다. 3년이 지나도록 그 이름을 밝히지 않았는데, 어느 날 크게 취하여 돌아가다가 문득 숯검정을 들어서 벽에다 글씨를 썼다. 그 글에,
구름의 뜻 창해를 ……(원문 1자 빠짐)…… 하지 않고 / 雲意不□滄海
춘광은 산봉우리로 오르려 하네 / 春光欲上翠微
인간에 한 번 떨어진 지 천 겁이 지났지만 / 人間一墮千劫
오히려 매화를 사랑하여 돌아가지 못하네 / 猶愛梅花未歸
하였으니, 대개 그는 야인의 무리라고 하겠다. 《소창청기》
주진촌(朱陳村)이라는 마을은 서주(徐州) 풍현(豐縣)에서 동남으로 1백리쯤 되는 깊은 산중에 있다. 그곳 민속이 매우 순박한데 고을에는 오직 주씨(朱氏)와 진씨(陳氏) 두 성씨만이 살아 대대로 혼인을 한다. 백낙천(白樂天)의 주진촌시(朱陳村詩) 34운(韻)이 있는데, 그 대략에,
고을이 멀어 관사가 적고 / 縣遠官事少
사는 곳이 깊숙해 풍속이 순후하네 / 土深民俗淳
재물이 있어도 장사를 하지 않고 / 有財不行商
장정이 있어도 군대에 들어가지 않네 / 有丁不入軍
집집마다 촌업을 지켜 / 家家守村業
머리가 희도록 밖으로 나가지 않네 / 頭白不出門
살아서는 주진촌 사람이요 / 生爲陳村人
죽어서도 주진촌 진토라네 / 死爲陳村塵
밭 가운데 있는 노인과 어린이들 / 田中老與幼
서로 쳐다보며 어찌 그리 즐거운가 / 相見何欣欣
한 마을에 오직 두 성씨가 살아 / 一村唯兩姓
대대로 서로 혼인을 한다네 / 世世爲婚姻
친척은 서로서로 모여서 살고 / 親屬居有族
노인과 젊은이가 함께 노닌다네 / 少長游有群
황계와 백주로 / 黃鷄與白酒
열흘이 멀다하고 모여 즐기네 / 歡會不隔旬
살아서는 멀리 이별하는 일이 없고 / 生者不遠別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이웃에서 고르네 / 嫁娶先近隣
죽어서도 먼 곳에 장사하지 않아 / 死者不遠葬
옹기종기 무덤들이 마을을 둘렀네 / 墳墓多繞村
이미 삶과 죽음이 편안하고 / 旣安生與死
몸도 마음도 괴롭히지 않네 / 不苦形與神
이런 까닭에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 所以多壽考
때로는 현손을 보는 사람도 있다네 / 往往見玄孫
하였다. 내가 이 시를 읊을 때마다 속된 마음이 단번에 씻어지는 듯하여, 그곳에서 태어나지 못함을 유감으로 여겼다. 뒤에 파옹(坡翁 소식(蘇軾))의 주진촌가취도시(朱陳村嫁娶圖詩)를 보니, 거기에,
내 지난날 주진촌(朱陳村)의 관리가 되어 / 我是朱陳舊使君
농사를 권하러 행화촌을 찾았더니 / 勸農曾入杏花村
요즈음의 그곳 풍물 어찌 차마 그리랴 / 而今風物那堪畫
고을 아전들 돈 내라고 한밤중에도 문 두드리네 / 縣吏催錢夜打門
하였으니, 송 나라 때의 주진촌은 당 나라 때의 주진촌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에 가서 본다면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비록(知非錄)》
석만경(石曼卿 만경은 석연년(石延年)의 자)이 채하(蔡河)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그 이웃의 한 부호(富豪) 집에서 날마다 노래와 악기 소리가 들렸다. 그 집의 종복(從僕) 수십 명이 항상 석만경의 문앞을 왕래하였으므로, 석만경이 그 부호가 어떤 사람인가를 묻고서 한번 만나보려고 하였더니, 그 하인이 대답하기를,
“우리 낭군(郎君)께서는 본디 사대부(士大夫)와 서로 교제하지를 않으나, 다만 술을 마시기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학사(學士)께서 술을 잘 마신다는 소문을 자주 들어서 한번 만나보실 뜻이 있는 듯하니, 시험삼아 제가 뜻을 물어보겠습니다.”
하였다. 하루는 과연 사람을 시켜 석만경을 초청하였으므로, 만경이 그 집에 가서 당상(堂上)에 앉아 있었다. 한참 뒤에 주인이라는 사람이 나왔는데 두건(頭巾)을 허리띠에 매달았고 의관(衣冠)을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않았다. 상견(相見)할 때도 공수읍례(拱手揖禮)를 하지 않고, 문득 그를 어떤 별관(別館)으로 데려갔는데 휘장 등속이 매우 현란하였다. 비녀(婢女) 두 사람이 각각 작은 쟁반을 하나씩 들고서 석만경의 앞으로 왔는데, 한 쟁반에는 홍아패(紅牙牌)가 있었고 다른 한 쟁반에는 무릇 10여 가지나 되는 술이 있었다. 그가 석만경에게 패를 하나 고르도록 했는데, 거기에는 한 상의 반찬 이름이 씌어 있었다. 또 술 다섯 가지를 고르도록 하였다. 잠시 뒤에 두 비녀가 물러가자 기생 10여 인이 제각기 안주와 과일과 악기(樂器)를 받들고 들어오는데, 그 옷차림과 얼굴이 모두 염려(艶麗)하고 찬란하였다. 그 중에 한 기생이 앞으로 나와서 술을 따르는데 술이 한 차례 끝나면 음악이 시작되었다. 과일과 안주를 든 여러 기생들은 그 앞에 모여서서 있다가 술이 끝날 때는 다시 좌우로 늘어서곤 하였다. 이처럼 다섯 차례 술을 하더니 여러 기생들이 다 물러가고 주인도 안으로 들어가면서, 손님에게는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석만경이 혼자 걸어서 밖으로 나왔다. 만경은,
“그 부자의 모습이 흐리멍덩한 듯한데 이처럼 호사를 누리니 매우 괴이한 일이다.”
하고는 훗날 다시 사람을 시켜서 정중하게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문을 닫아걸고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문에서 대꾸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러자 그 이웃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그는 일찍이 사람들과 교제한 일이 없어서 이웃사람조차 그의 얼굴을 모릅니다.” 《몽계필담(夢溪筆談)》
장운수(張芸叟 운수는 장순민(張舜民)의 자)의 《남천록(南遷錄)》에,
“심양(潯陽)의 맹씨(孟氏)는 대대로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집의 문은 어딘지 비상한 기운이 돌고 대나무 울타리로 가려져 있었다. 맹생(孟生)이 나와서 뵈는데 갈삼(葛衫)의 짚신을 신었고, 그 행동거지와 말투가 강가의 어부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한주먹밖에 되지 않는 조그만 띳집으로 안내를 하는데 좌우(左右)에는 모두 고기잡는 도구들뿐으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조금 들어가 대청에 다다르자 온통 부귀한 사람의 집과 같았다. 잠시 뒤에 중당(中堂)이라고 편액을 단 곳에 이르니 그 기둥과 서까래는 모두 적흑색으로 칠을 했고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조각하고 수놓은 여러 기복(器服)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찬란하였다. 또 술과 음식도 모두 진미가 아닌 것이 없었다. 얼마 뒤에 기녀(妓女) 3~4인이 나오는데 모두 백금(百金)을 주고 꾸민 사복(士服)을 입었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다 경사(京師)에서 새로 전해진 것이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온종일 황홀경을 헤매게 했다.”
하였으니, 이는 대개 임협(任俠)으로 몸을 숨기고 부유하게 사는 사람이다. 《문기유림(問奇類林)》
어렸을 때 동파(東坡 소식(蘇軾)의 호)를 뵈니,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세상에는 호걸(豪傑)스러운 선비로서 은거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 고향에 어떤 사람이 대대로 미산(眉山)에 살고 있었는데, 우리 선군(先君)을 장사지낼 때 기일이 임박하도록 묘지에 쓸 벽돌이 모자랐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들이 ‘이 사람을 가서 보면 즉시 해결해 줄 것이다. 다만 그는 사냥을 하며 떠도는 날이 많고 또 그가 사는 곳이 세상과 멀리 떨어진 깊은 산 속이라 어떨지 모르겠지만, 시험삼아 한번 가보라.’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무릇 이틀을 걸려서야 그 집에 이르렀는데, 그 집에 이르러 해가 기울도록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저녁에야 비로소 종자(從者) 수기(數騎)를 거느리고 어떤 사람이 왔는데, 그 주인은 젊은 소년이었다. 명함을 들이니 그 소년이 옷을 바꿔 입고 나와 앉아서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그래서 내가 사실대로 자세히 얘기를 하자, 그 소년이 ‘쉬운 일입니다. 잠시 식사를 하시고 이 집에서 쉬십시오. 기한 내에 필요하신 것을 갖다드리도록 말하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비녀(婢女) 몇 사람이 무릎을 꿇고 식사를 올리는데, 그것은 모두 그날 잡은 신선한 것이었다. 술을 몇 잔 주는데 식사가 끝난 뒤에야 조용히 서로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다음날 그 사람이 종과 말을 보내서 나를 산 아래까지 호송하게 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일을 시작해서 땅을 파는데 그날 저녁이 다 되도록 벽돌 한 장도 오지 않았으므로 내가 크게 후회하였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묘지(墓地) 옆을 가보니 벽돌이 5만 장이나 촘촘히 쌓여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크게 경탄(驚嘆)을 하였는데, 일을 마친 뒤에 다시 그를 찾아가 사례를 하려 하였으나 만날 수가 없었고, 후일 그 벽돌 값을 가지고 간 사람도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단연록(丹鉛錄)》
[주-D001] 진(秦)을……받지 않고 : 노중련(魯仲連)이 조(趙)에 있을 때 진(秦) 나라가 조 나라를 포위했는데, 제후들이 진 나라의 위세를 겁내어 진 나라를 황제로 추대하려 하였다. 이에 노중련은 평원군(平原君)을 도와 그 일을 막고 진 나라 군사가 물러나도록 하였다. 평원군이 그 일에 대한 사례로 그에게 봉지(封地)를 주려 하였으나, 노중련은 세 번이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史記 卷83》[주-D002] 요성(聊城)을……않으면서 : 연(燕) 나라가 제(齊) 나라의 요성을 공격하여 취하였는데, 전단(田單)이 그 성을 공격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하였다. 그러자 노중련이 연 나라 장수에게 보내는 편지를 화살에 매달아 성중으로 쏘아보내니, 연 나라 장수는 그 편지를 보고 사흘을 울다가 자살(自殺)하였으므로 제 나라가 그 성을 취하였다. 전단이 그의 공을 높이 여겨 벼슬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바닷가로 은거해 버렸다. 《史記 卷83》[주-D003] 엄광(嚴光)은……소일하였다 : 엄광은 어려서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와 함께 수학한 친구였다. 광무제가 즉위한 뒤에 은거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광무제가 그를 널리 찾아서 벼슬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광무제는 그를 어질게 여겨 친구로 대하여 머물러 두려 하였으나 그는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낚시질로 한평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113》[주-D004] 난세에……당했으니 : 혜강은 위(魏) 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인데, 종회(鍾會)와 사사로운 원한이 있어 그의 참소를 받아 죽임을 당했다. 《晉書 卷39》[주-D005] 총욕(寵辱)에……않으니 : 벼슬이나 명예의 득실(得失)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노자》에 “총욕(寵辱)에 항상 두려운 듯이 하라.” 하였다.[주-D006] ‘다섯째’라는……붙었으니 : 중국에서는 같은 항렬(行列)의 친족 형제간에 나이순으로 ‘첫째’ㆍ‘둘째’라는 칭호를 붙이는데, 여기서는 하준이 다섯째라는 말이다. 즉 사람들이 ‘하씨네 다섯째’라고 불러주는 것을 표기(驃騎)라는 벼슬 이름을 붙여서 불러주는 것만 못하지 않다는 말이다.[주-D007] 장목지(張牧之) : 목지(牧之)는 자(字)인 듯하나 어떤 사람인지 미상(未詳).[주-D008] 늙음이……정도 : 마음과 정신을 한 일에 몰두하는 것을 말한다. 섭공(葉公)이 자로(子路)에게 “공자(孔子)는 어떤 분인가?”하고 물었으나, 자로는 대답을 못하였다. 그러자 공자가 자로에게 “너는 어째서 ‘그분의 사람됨이 발분 망식(發憤忘食)하고 즐거움에 근심을 잊어 장차 늙음이 이르는 것조차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하지 않았느냐.”하였다. 《論語 述而》[주-D009] 소계(苕溪)와 삽계(霅溪) : 둘 다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시내이다.[주-D010] 집선전(集仙殿) : 집현전(集賢殿)의 별칭(別稱).[주-D011] 황정경(黃庭經) : 도가(道家)의 경서(經書)이다.[주-D012] 회계 태수(會稽太守)의……오는 일 : 한 나라의 주매신(朱買臣)이 늙어서 크게 출세를 하였다. 그가 회계 태수가 되어 올 처음에 그 인끈을 내보이지 않았으므로 그의 옛친구들이 그가 태수라는 것을 몰랐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한다. 《漢書 卷64》[주-D013] 산중(山中)의……없네 : 주매신이 벼슬하기 전에는 그 아내와 함께 산에서 나무를 해서 생계를 이어갔는데, 여기서는 왕공 자신은 비록 벼슬을 못해도 산중의 도끼자루가 아직 무사하니 생계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대꾸한 것이다.[주-D014] 공사(公事)가……없습니다 : 그가 찾은 것은 어제 찾아준 데 대한 개인적인 답례(答禮)라는 뜻이다. 자유(子游)가 무성 재(武城宰)가 되었는데, 공자(孔子)가 “네가 어떤 인재를 얻었느냐?”하고 물었다. 그러자 자유가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이 있어 다닐 때는 지름길로 다니지 않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제 집에 오는 일이 없습니다.” 하였다. 《論語 雍也》[주-D015] 탐렴 유립(貪廉懦立) : 탐욕스러운 사람이 청렴하게 되고 겁이 많은 사람이 능히 자립(自立)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맹자》 만장 하에 “백이(伯夷)의 풍도(風度)에 대해서 들은 사람은, 비록 완악한 자라도 청렴해지고 겁 많은 사람이라도 큰 뜻을 세워 자립한다.” 하였다.[주-D016] 음풍 농월(吟風弄月)하면서……흥취 : 세상의 출세나 사무보다는 자연(自然)과 함께 하는 기상(氣像)을 말한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의 뜻을 물었을 때,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다가 노래를 읊조리면서 돌아오고 싶습니다.” 하였다. 《論語 先進》
ⓒ 한국고전번역원 | 김주희 정태현 이동희 임정기 이재수 정기태 (공역) |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