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사방이 고요한 새벽녘, 창을 넘어 들려오는 나지막한 빗소리에 설핏 눈이 떠졌다. 비가 오는구나, 그래 이게 봄비 소리지. 후두둑 요란스레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이 아닌 부드럽고 촉촉하게 젖어 드는 빗방울 소리, 이게 봄비지. 여느 때 같으면 포근한 이불속에서 한참을 꾸물거리다가 일어날 텐데 오늘은 망설임 없이 일어났다. 얼른 창들을 열고 촉촉이 젖은 풍경들을 한참을 내다 보았다. 깊이 들여 마시는 숨 속으로 봄비가 그대로 들어오는 듯하다. 이런 날이면 어느 호젓한 카페 창가에 앉아 혼자 즐기는 진한 커피 향도 잘 어울릴 것이다. 서둘러 아침 루틴을 정리하고 정말 오랜만에 내리는 봄비 속으로 우산을 펼쳐 나섰다. 이 시간대에 딱히 필요한 외출은 아니었지만 우산에 떨어지는 부드럽고 촉촉한 빗소리라도 들을 요량으로 쓰레기봉투 구입을 핑계로 나선 길이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들려오는 빗소리와 젖은 발밑의 촉감을 느끼며 들이마시는 숨은 그동안 건조했던 내 기관지의 묵은 때를 씻어 내는 것 같았다.
며칠 전에도 비는 잠깐 내렸었다. 오전에는 햇살이 따뜻하던 날이어서 그동안 움츠렸던 꽃잎들이 이제는 피겠구나 했었는데 별안간 하늘이 어두워 오더니 후두둑 빗줄기가 쏟아지고 우박이 되어 내렸다, 다시 맑아진 하늘을 보며 하루 낮 동안에도 변덕스러운 날씨가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의 성정같다고 생각했었다.
올해는 봄이 오는 즈음에 유난히 비가 잦은 듯했다. 따뜻한 기운을 품고 부드럽게 젖어드는 봄비가 아니라 멀어져 가는 겨울의 끝자락을 놓지 못하는 차가운 빗줄기였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아 다시 두꺼운 옷을 걸쳐야 했었다. 나도 아직 봄옷으로 옷장 정리를 하지 못했다. 성주에서 참외 농사를 짓는 지인의 푸념도 들린다. 일조량이 부족해서 일찍 출하해야 하는 참외의 결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번에는 소득의 절반이 줄어들 것 같다는 하소연이다. 지난 주말 시골 가는 길옆 벚나무들을 보며 언제쯤 꽃이 피려나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마당의 벚꽃은 어제 하루 활짝 피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주변에서 봄이면 곳곳이 벚꽃 축제장이라 할 수 있을 만큼 벚나무가 흔하다. 그저께 오후 손주들이 학교 간 시간 동안 딸 아이와 수성못을 갔었다. 평일 오후였는데 주말 못지않게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루 이틀 따뜻해진 햇살 가운데 우박일지라도 잠깐 내린 봄비를 맞고 하루 사이에 수성못 벚나무들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젊은 연인들이며 아기를 안고 걷고 있는 젊은 부부들, 나이가 지긋한 노년의 부부들과 아마도 그 친구들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혼자 꽃길을 맨발로 걷는 중년의 아낙들, 강아지 산책길에 동행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의 얼굴들이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해거름 조명을 받아 붉고 푸르게 빛나는 벚꽃을 배경으로 다들 사진찍기에도 여념이 없었다. 아마 이번 주말쯤이면 환한 꽃비가 내릴 것이다.
내가 퇴직 전 마지막으로 근무하던 곳이 청도와 경산이었다. 그곳으로 갈 수 있는 길들이 여러 갈래가 있어서 나는 봄이면 조금 천천히 가더라도 산을 넘어 논과 밭 옆으로 돌아가는 길들을 택하곤 했다. 촉촉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주변의 나무와 땅들이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가끔은 길에 핀 들꽃이 눈에 들어서, 때로는 나뭇가지 끝까지 물오르는 모습이 보이곤 해서 잠시 멈추어 그들의 소리를 듣곤 했었다. 밤새 살짝 왔다 간 봄비였을지라도 다음날 출근길 자연이 보여주는 모습은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들이 한발을 떼려고 부단히 다리에 힘을 올리는 것처럼 나무들과 풀잎들이 힘을 내는 모습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그때쯤이면 아이들의 모습에서도 생기가 느껴진다.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한껏 높아지고 빨라짐은 물론이거니와 움직임도 빨라진다. 세상의 모든 시곗바늘이 빠르게 돌아가는 듯하다. 나 또한 이맘때가 되면 자연의 일부임을 몸과 마음으로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삶이 팍팍하고 건조하며 각자의 이익에 따라 파도처럼 몰려가는 세상살이 속에서도 부드럽게 내리는 촉촉한 봄비를 시작으로 어김없이 제 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계절의 모습은 우리에게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다시 시작되는 계절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는 비를 애타게 기다릴지도 모른다. 찌는 듯이 무더운 여름날, 기다림 끝에 만날 수 있는 더위를 식혀주는 한줄기 소나기의 시원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논바닥이 말라 쩍쩍 갈라지고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목이 말라 허덕이는 날,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빗줄기의 고마움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봄비만큼 설레이며 간절하고 가슴 저리는 비가 있을까. 봄비는 곧 돋아날 새싹이고 화사하고 향기 넘치는 꽃이며 달콤하고 풍성한 열매이다. 봄비는 사랑이고 즐거움이며 가슴 아픈 이별이고 생이 다할 때까지 간직할 낭만이며 추억이다. 때로는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소리 없이 흐느끼는 날들로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맘때가 되면 자연스레 봄비를 기다린다. 비록 예상치 못한 크기로 잠시 다가올지라도 내 몸속의 봄비는 포근했고 따스했으며 부드럽고 그 촉촉함으로 겨우내 움츠렸던 내 삶의 온기를 되돌려 주었던 것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펼쳐 든 우산 위로 떨어지는 나지막한 빗소리에 내 몸을 맡기고 천천히 하루를 준비해 봐야겠다.
첫댓글 봄비로 시작한 하루에 많은 일들이 소소하게 이루어졌네요 봄의 감성이 고스라니 느껴집니다. 글 흐름이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많은 작품 기다리겠습니다.
읽어 주셔 감사해요
"봄비는 사랑이고 즐거움이며 가슴 아픈 이별이고 생이 다할 때까지 간직할 낭만이며 추억이다."
봄비는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는 고마운 선물입니다. 글을 잘 풀었습니다. 계속 글을 읽고 쓰시어 훌륭한 작가가 되시기 바랍니다.
초임지가 수성못 부근이라 꽃비를 맞으며 뽕뽕이 신발을 신은 아들 손을 잡고 걸어가던 생각이 나네요. 따뜻한 그리움이 올라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봄비를 심도 있게 그려 내셨습니다.
누구에게는 기다림과 그리움, 어느이 에게는 이별의 서러움 또는 기쁨과 환희로 다양하게 느껴집니다. 옛 글에 춘우여고나 행인은 오기이녕 이라 했습니다.즉 봄비는 기름 같으나 행인은 진흑탕을 싫어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지금은 모두 포장도로이나 신발이 부실하던 옛 사람들에게는 진흑탕길이
고역이듯 봄비도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명숙님, 봄비에 관한 글 잘 읽었습니다.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봄비에 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기도 하는 것 같구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합니다.
커피를 맛으로 마시느냐, 향으로 즐기느냐. 봄비를 농사의 반려자로 보느냐 자연의 축복으로 느끼느냐. 글을 읽다보니 자문을 하게 됩니다. 커피향 같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