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1章 潛入 地獄坑 네 명의 거지소년들이 밤바람을 피해 다리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 자리에 빙 둘러앉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나이는 똑같이 십 육칠 세 정도로 보였다. 거지들인 듯 입고 있는 옷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장부의 웅지를 이 시대에서는 펼 수가 없단 말인가?] 돌연 한 소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어찌하겠나? 이렇게 지내다 마는 것이 거지들의 인생이거늘...우라질!] [시끄럽다!] [후후훗... 영웅이 영웅을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이들 네 명의 천애고아들, 한성(寒星)- 이 소년은 침착함과 준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왔고 또한 병법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웅뢰(熊雷)- 구척 거구에 성격이 불같았다. 그의 신력은 이미 당대 제일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우직하기 그지없어 곰이라는 별호를 지니고 있었다. 황보현(皇甫玄)- 태어난 때부터 괴이한 눈을 지녔다. 푸르스름한 청안(靑眼), 그러나 이것이 바로 전설의 청안툼심혜(靑眼透心慧)라는 것을 누가 알랴! 상대의 심성을 헤아리며 악과 선, 그리고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를 훤히 알 수 있는 천안(天眼)이란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냉운기(冷云奇)- 항시 말이 없으며 차갑기 그지없는 성격을 지녔다. 그러나 그가 은밀히 지니고 다니는 두 자루 목도(木刀)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한 가지씩 독특한 기예를 지닌 이들 개개인의 무공을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자신의 무공을 깊숙이 감춘 채 지내온 그들은 남루한 거지 행색을 한 채 강호를 정처없이 떠돌고 있었다. 황보현은 불을 쬐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기(瑞氣)가 다가오고 있다. 그 때를 기다려야 한다. 우리를 거두어 줄 기인은 반드시 나타난다.] 웅뢰가 두 주먹을 휘둘렀다. [언제까지 기다리겠다는거냐? 벌써 몇 년이냐? 우리 네 사람이 합친다면 능히 천하를 굽어볼 수가 있다. 한성의 병법, 황보현의 투심술, 냉운기의냉철함, 그리고 나의 무공 등을 합친다면 가히...]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천하무적(天下無敵)이지.] 돌연 등 뒤에서 청아한 음성이 웅뢰의 말을 받는 것이 아닌가? [헉! 누구...?] 네 소년은 대경실색 했다. 하나, 냉운기만은 두 눈에서 짙은 살기를 폭사시키며 입가에 냉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 인영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놀랍게도 혁사린이었다. 혁사린은 그들 틈에 끼여 들며 다짜고짜 불을 쬐었다. 웅뢰가 고함을 질렀다. [대체 네녀석은 누구냐?] 혁사린은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꾸짖었다. [허허! 객이 불을 쬐고 있는데 말을 시키다니...예의가 없군.] 이때 한성이 천천히 말했다. [친구, 우리의 말을 엿들었나?] [아니...그저 지나다가 흘낏 들었을 뿐이지.] 그러자 냉운기의 차가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흐흣...그것이면 죽을 명분이 충분하지.] [...] 혁사린은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어 그는 어깨를 추스리며 말했다. [자네는 나를 죽일 셈인가?] [물론!] 냉운기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황보현은 지금 혁사린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알 수가 없다. 나의 천안으로도 저 친구의 마음을 뚫어 볼 수가 없다니...이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의 푸른 눈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냉운기, 나를 죽여 비밀을 지키자는 것인가?] 냉운기는 귀찮다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문득,혁사린은 입가에 신비한 미소를 떠올렸다. [무림인들은 모르고 있지. 살수천작이 절대살수이지만 또다른 네 명의 살수이자, 염라대왕도 고개를 흔드는 악동(惡童)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야.] [헉! 네...네가 그것을 어떻게?] 네 명의 거지소년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혁사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한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한성, 너는 병법에 관한한 으뜸이지. 그러나 벽을 뚫고 들어갈 수는 분체환영술(分體幻影術)은 더욱 뛰어나지.] [너...너는...] 한성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혁사린은 이내 웅뢰에게 시선을 돌렸다. [웅뢰, 너의 신력은 무섭다. 그러나 일신에 칠백육십가지의 암기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무섭지.] 웅뢰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혁사린은 황보현을 가리켰다. [청안투심혜...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에 두려울 정도지! 그러나, 세인들은 모르고 있어. 그 청안투심혜의 공력을 주입시키면 눈빛으로 그 어떠한 물체도 파괴시킬 수 있다는 것을...] [네놈은...누구냐?] 황보현의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혁사린은 마지막으로 냉운기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냉운기, 너의 목도는 정녕 살인적이다. 그러나 더욱 가공할 것은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으며 모습을 바꿀 수 있는 비술이다.] [...!] 냉운기의 두 눈에서 걷잡을 수 없는 살광이 폭사되었다.그의 두 손은 서서히 가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혁사린은 나뭇가지로 볼을 뒤집으며 말했다. [네 명의 악동...그들은 무서운 아이들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그들을 모르고 있어, 오직 나 혁사린만이 알고 있을 뿐이다.] [혁사린...] 네 소년은 그의 이름을 되뇌여 보았다. 이들 네 거지소년은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절대고수들인 것이었다. 또한 살인청부업자들이다. 하나 그들은 대가를 받지도 않으며 청부도 받지 않는다.아니, 누가 청부를 하려고 해도 이들을 모르고 있으니 어찌 부탁할 수가 있겠는가? 이들은 절대 약한 자를 죽이지 않는다. 악인들이나 그밖의 부호들에게 죽을을 내린다. 이들이 만약 마심을 품는다면 천하는 또다른 혈겁에 휩싸이고 말 것이다. [...!] 짙은 침묵이 흘렀다. 혁사린은 여전히 불을 쬐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그의 입가에 기이하기 이룰 데 없는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후후훗...너희들은 어리석다.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음성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단지황(斷地荒)!] [금력금기(大力金氣)-!] [섬(閃)!] 네 소년은 혁사린을 향해 일제히 기습을 가했다. 파파팟---! 츠---츠츠츳---! 하늘은 온통 도광, 암기, 그리고 무시무시한 강기 등으로 가려져 버렸다. 콰아아앙! 혁사린이 앉아 있던 자리는 커다란 구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정녕 불가사의할 정도로 가공할 무공들이었다. 그런데 네 소년은 구덩이를 보는 순간 일제히 뒤로 물러서며 아연한 표정들을 짓는게 아닌가? 혁사린의 신형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것이었다. [어디 갔지? 아예 가루가 되었나?] 웅뢰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찰라 갑자기 허공에서 혁사린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하핫...과연 무섭군. 하나 그 정도로는 나 혁사린을 해칠 수 없지.] [앗!] 네 소녀들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보는 순간 경악성을 발했다. 혁사린은 허공 이십여 장 위에 가부좌를 틀고 두둥실 떠 있었다. (처음 만난 고수다.) 네 소년은 동시에 생각했다. 그들은 한번 재빨리 눈짓을 교환했다. 때를 같이하여 그들의 신형이 섬전같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대력만겁(大力萬劫)!] [천라광천검(天羅光天劍)!] [단심잔수(丹心殘手)!] [멸(滅)-!] 그들 네 소년은 혼신을 다해 자신들이 지닌 최후 절초를 펼쳐냈다. 고---오---오! 천지가 광란하고 사위가 폭풍에 휘감긴 듯 진저리를 쳤다. 그러나 가공하여 천하에 어떠한 고수도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공세 속에서도 혁사린은 허공에 뜬 채 온화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일순 혁사린의 입가에 어리던 미소가 어느 한순간에 사라졌다. (패배! 이것은 어쩌면 그들에게 좋은 교훈을 줄지도 모른다.) 뒤이어 그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가 무시무시한 강기를 폭사시키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으...윽!] [크---으윽!] 네 소년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오며 일제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두 눈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의 빛이 뭉클뭉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똑같이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정확히 심장 부위의 옷자락이 열십 자로 깨끗하게 베어져 나가 있었다. 혁사린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면 옷이 아닌 심장이 열십자로 찢어졌을 것이다. (으흑! 귀신같은 솜씨다. 천하에 이토록 빠르고 정확한 검초가 존재한단 말인가?) 혁사린은 천천히 그들 면전에 내려섰다. 네 소년은 서서히 시선을 들어 그를 응시했다. 혁사린은 지극히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무서운 솜씨였다. 그러나 생명이 없다. 그것은 곧 상대방에게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 혁사린은 재차 말했다. [한 번 더 시험해 보고 싶은가?] [필요없다. 너는 분명 우리 보다 강하니까...] 혁사린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다. [자네들은 뜻이 있는 자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가르쳐 줄까?] [...?] 네 소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혁사린은 서서히 말했다. [너희들을 이끌어 나갈 사람은 천하에 드물다. 그러나 단 한 사람만이 너희들을 거둘 수 있다.] [누...누구냐?] 네 소년은 동시에 물었다. 혁사린은 문득 하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천하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 [가장 완벽한 인간, 하나, 그런 인물은 없다.] 황보현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혁사린은 네 소년을 차례를 응시했다. [분명히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제마신협이다.] [제마신협!] 네 소년은 전신이 극심하게 떨렸다. [그렇다, 제마신협, 그만이 너희들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하하핫! 그를 찾아라!] 스스스스! 혁사린의 신형이 서서히 엷어지기 시작했다. [혁사린, 기다려라! 제마신협을 대체 어떻게 찾는단 말이냐?] 웅뢰가 급히 물었다. [하하핫! 제마신협은 반드시 강호에 나타난다. 반드시...] 파파팟---! 혁사린의 신형은 이내 분산하듯 사라져 버렸다. [...!] 네 소년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황보현이 입을 열었다. [제마신협! 그를 찾아야 한다. 그만이 우리 환비사영(幻秘四影)을 거둘 수 있다. 가자, 그를 찾으러...] 환비사영(幻秘四影)- 네 소년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유령처럼 사라졌다. * * * 사존궁(邪尊宮)- 이십만 사도무림인들의 하늘이며 사도대종사인 사존 염화웅이 이룩한 위대한 사(邪)의 절대역(絶代域)이 이곳 사존궁이다.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어둠에 파묻힌 사존궁의 거대한 괴물같은 성채 한쪽에 어둠을 사르는 불빛이 하나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곳은 사존궁주인 사존 염화웅의 거처인 혈웅전(血雄殿)이었다. 지금 혈웅전 안에는 무겁다 못해 심장이 짖눌러질 듯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사존(邪尊) 염화웅(廉火雄). 그는 뒷짐을 쥔 채 대전 중앙에 우뚝 서 있었다. 준수한 용모를 지닌 그는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었으며 온몸으로 발산되는 패기와 정기가 하늘을 찌를 것만 같았다. 부리부리한 두 눈은 고요하기만 했다. 그의 시선은 지금 탁자에 놓인 한 장의 서찰에 머물러 있었다. 그 서찰은 놀랍게도 소림사 장문인 혜원대선사가 보낸 것이었다. 사존 염화웅은 서서히 시선을 정면으로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창노하기 이룰 데 없는 두 노인이 시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존궁의 양대봉공(兩大奉公)인 패천이성(覇天二聖)이었다. 신기검성(神奇劒聖) 막여홍(幕如洪)- 그의 검술을 이미 등봉조극의 경지를 훨신 넘어서고 있었다. 그의 검에서 쏟아져 나오는 잔인함과 무자비함은 그를 일대마검(一代魔劒)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혈심광성(血心狂聖) 유운(兪殞)- 평소에는 지극히 냉철하지만 일단 무공을 전개하면 광인으로 변한다. 죽음과 피를 위해 무공을 전개하는 무서운 마인이 바로 그다. 사존 염화웅은 서서히 입을 열었다. [두 분은 이번 서찰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혈심광성이 말했다. [예로부터 정과 사는 세불양립(勢不兩立)이었습니다. 어찌 그들과 손을 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사존 염화웅은 길게 신음을 내쉬었다. [하나...지금의 형세로서는 정과 사를 논할 때가 아니라고 보오. 이미 백마도(百魔島)가 대륙에 나타나 피를 뿌리고 있고 그들에겐 정이니 사니 하는 개념이 없소. 오직 대륙에 군림하고자 하는 야망 뿐이오.] 신기검성이 차분하게 입술을 떼었다. [사존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정사가 단합할 시기가 아니라고 사료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 혈심광성이 말했다. [좀더 기다려 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 사존 염화웅은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그는 그들을 물리쳤다. [알겠소. 그만 물러들 가시오.] [예!] 패천이성이 조심스럽게 물러갔다. 혼자 남은 사존 염화웅은 뒷짐을 쥔 채 서성거리기만 했다. (어쩌면 이것은 내가 바랬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과 사를 융합, 무림에는 정과 사가 양립되어서는 안된다. 염화웅...내가 사도에 들어선 이유가 무엇이냐? 정과 사를 규합하기 위해서가 아니더냐?) 그렇다. 정사융합(正邪融合)이란 엄청난 포부를 사존 염화웅은 지니고 있었다. (뜻을 펼치리라. 내가 꿈꿔 온 포부인 정사수호맹을 만들어야 한다.) 사존 염화웅의 두 눈에서 굳은 결의가 쏘아져 나왔다. (아! 그렇다. 그 아이와 상의하면 되겠구나.) 사존 염화웅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 * 자향루(紫香樓)- 사존궁에서 유일한 금역이었다. 아름답기는 천하 으뜸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며 섬세하게 꾸며져 있었다. 일월문(日月門)은 자향루 안에 자리한 조그만 월동문이었다. 여기에 사존 염화웅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러자 안에서 급히 한 시녀가 달려나왔다. [사존님을 뵈옵니다.] [용매(蓉妹)는 안에 있느냐?] [예.] 사존 염화웅은 고개를 끄덕인 뒤에 일월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여인의 규방(閨房)에 당도했다. 여인 특유의 향이 방 안 구석구석에서 숨쉬고 있었다. 창문 쪽에는 한 소녀가 밖의 화원을 내다보고 있었다. 궁장형의 머리모양은 우아하며 섬세했다. 몸매는 약간 나약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묘한 미를 풍기고 있었다. [용매!] 사존 염화웅은 조심스럽게 소녀를 불렀다. 소녀는 그제서야 사존 염화웅이 들어온 것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헌데 소녀의 용모를 보라!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옳단 말인가? 이슬에 젖은 듯 촉촉한 눈동자,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오똑 솟은 아름다운 콧날, 금시라도 향긋한 내음을 물신 풍길 듯한 앵두같은 보조개는 슬프기까지 했다. -병서시(病西施) 제갈용(諸葛蓉). 그녀는 방안에서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 본적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안색은 흡사 백납처럼 새하얗다. 아니, 얼핏 보면 무슨 병에라도 시달리고 있는 것과 같았다. 사존 염화웅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몹시 지쳐 보이는구나.] 병서시는 아름답게 웃었다. [항시 그렇죠 뭐.] 그들을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오빠, 하실 말씀이 있는가 보군요.] 사존 염화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와 상의할 일이 있다.] 그는 말을 하며 품 속에서 서찰을 꺼냈다. [소림의 혜원대선사가 이것을 보내왔다.] 그런데, 병서시는 마치 알고 있기라도 하듯 생긋 웃는 것이 아닌가? [혜원대선사가 정사를 단합하는데 오빠의 힘을 빌려려 하는군요.] (아!) 사존 염화웅은 내심 감탄했다. 병서시를 대할 때마다 매번 감탄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총명은 사헤를 뒤덮고 팔황을 뒤흔들 정도였다. 천하제일지(天下第一智)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사존 염화웅이 사존궁을 세우고 사도에 들어선 것도 병서시의 안배였던 것이다. 사마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마가 되어라! 이것이 그녀의 계책이었다. 사존궁은 그녀의 두뇌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사존 염화웅은 그녀를 어렸을 때 길에서 주워 친동생처럼 보살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몸이 워낙 약해서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는다. 때문인지 그녀는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면 경련을 일으키는 괴질(怪疾)을 갖게 되었다. 어처구니없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위지자형은 천천히 서찰을 읽었다. -사존에게 전하고자 하오. 빈승은 당금 무림의 풍운혈겁에 무림의 한 사람으로써 책임을 통감하오. 이에 감히 정사를 단합하고자 협조를 청하는 바이오. 정사수호맹(正邪守護盟)! 바로 그것이오. 빠른 시일내에 소림으로 왕림을 바라오. 병서시의 입가에 뜻모를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때가?] 사존 염화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병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비로소 오빠가 기다리던 때가 온 거예요. 정사수호맹...이것은 필경 천룡대성승이 창설하고자 했을 거예요.혜원대선사는 그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거구요. ] 사존 염화웅은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렇다면 정사수호맹주는 천룡대성승이...] 병서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가 비록 가공할 고승이기는 하지만 정사수호맹을 이끌어 갈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누가?] 병서시은 입가에 뜻모를 미소가 번졌다. [단 한 사람, 정사수호맹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요.그는 바로 제마신협이에요.] [제마신협!] 사존 염화웅은 크게 의아한 눈치였다. 그로서는 현 강호상에 그와 같은 인물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서시는 문득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기며 하늘을 응시했다. [지옥갱, 백마도, 혈무연의 세력을 막을 사람은 오직 그 사람 뿐이예요.] [으음...!] 사존 염화웅은 길게 신음을 토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사존은 귀에도 담지 앉았을 것이다. 하나 그 말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병서시이기에 그는 저으기 놀라고 있었다. (제마신협, 대체 그가 누구란 말인가?) 이때 병서시가 말을 이었다. [오빠 이제 때가 되었어요. 제마신협을 중심으로 정사가 한데 뭉쳐야 해요. 그것만이 무림을 위하는 길이예요.] 사존 염화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나 염화웅,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겠다던 나였지만 제마신협에게는 무릎을 꿇을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사존 염화웅은 병서시를 바라보았다. [보아하니 용매는 제마신협이 누구인지 아는 눈치인데 그에 대해서 말을 해 줄 수 없느냐?] 병서시는 사존 염화웅의 눈을 똑바로 직시하다가 생글 웃었다. [오빠, 소녀를 믿으시나요?] [물론 널 믿는다.] [그럼 그것으로 그 사람에 대한 믿음을 대신할 수는 없나요?] [음....그 정도냐?] [죄송해요.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예요. 때가 되면 저절로 그 사람이 우리 곁에 나타날 거예요. 제마신협, 그는 하늘이 내정한 천인이예요. 누구도 그에게 굴복하지 않을수 없을거예요.] 문득, 사존 염화웅이 미묘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그러나 그도 한 사람에게는 굴복당하고 말 것이다.] [...?] 병서시는 의아한 시선으로 사존 염화웅을 직시했다. 사존 염화웅은 짖궂게 말했다. [후후후 제마신협을 굴복시킬 인물에 대해 궁금하냐?그 사람은 바로 너다!] [무슨 소리죠?] [그가 그만큼 위대하다면 나 염화웅은 사존이란 이름을 걸고 그와 널 맺어줄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자는 남자일지 몰라도 그 남자를 다스리는 자는 여자인 법, 특히 너라면 제마신협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어멋!] 귀를 기울이고 있던 병서시는 아연실색을 했다. [하하핫...] 사존 염화웅은 행여 꼬집힐세라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오빠! 미워요!] 병서시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두 눈은 꿈꾸듯 아련히 변해갔다. (제마신협! 그분은 대체 어떻게 생긴 분일까?) 웬지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사존 염화웅은 이튼날 소림사로 떠났다. 정사수호맹(正邪守護盟)! 이제 무림사상 전무후무한 맹이 탄생될 것이다. 제 일대 맹주로 제마신협을 내정해 놓은 채 이렇게 천하무림의 웅지는 타오르기 시작했다. * * * 금정산(金頂山)- 만엽홍산(萬葉紅山)의 만추(晩秋)에 젖은 금정산은 온통 붉고노란 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사천(四川) 아미산맥(峨嵋山脈)의 주봉인 금정산의 낙엽은 절경을 이룬지라 여기저기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관광객이 눈에 띠었다. 그들 무리에 섞여 준수한 용모를 지닌 청년 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는 본래의 준수한 용모로 돌아온 혁사린이었다. [아름답다. 과연 사천제일의 비경이구나.] 한데 바로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어깨로 떨어지는 하나의 낙엽을 발견했다. 팔랑... 이번에는 또 다른 어깨로 똑같은 낙엽이 떨어져 얹혔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혁사린의 두 눈에서 일순 짙은 광채가 발산되었다. 또한 입가에 신비로운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일개 낙엽 속에 짙은 살기가 드리워져 있다. 누가 날 노리는 것일까?) 팔랑팔랑! 이때 무수한 낙엽이 허공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후후훗! 드디어 시작인가?) 혁사린의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파파팟! 돌연 허공을 어지럽게 날던 낙엽들이 번개같이 혁사린을 향해 덮쳐드는 것이 아닌가? (왔다!) 혁사린은 급히 신형을 낮추며 쌍장을 교묘하게 휘둘렀다.동시에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랐다. 한데 그것도 잠시 뿐 그의 신형이 허공에서 유령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스스스스... [엇!]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놀라움에 찬 경악성이 들려왔다. 때를 같이하여 허공에 맴돌던 낙엽들이 분산하듯 어디론가 흩어졌다. 휘리링... 뒤이어 장내에 한 인영이 소리없이 나타났다. 나이가 족히 백여 세가 넘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일신에는 괴이한 옷을 입고 있었다. 옷 전체에 낙엽(落葉)이 가득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낙엽무늬의 옷을 걸친 괴노인의 두 눈에서는 간사하며 흉악하기 이룰 데 없는 광채가 연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한 전신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사기가 은연 중에 흐르고 있어 노인의 무공은 이미 극(極)을 뛰어넘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른 듯했다. [흐흐흣...그녀석 제법 쓸만하군.] 노인의 목소리는 심야의 악귀가 울부짖는 괴이하며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괴악했다. [어린 놈. 네놈의 은신술이 비교적 뛰어나구나. 그러나 본마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썩 나오지 못할까?] 괴노인의 흉험한 눈은 좌측의 고송 위에 못박혀 있었다. 순간 숨어있던 혁사린은 흠칫했다. (무서운 늙은이다. 내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간파해 내다니...) 혁사린은 내심 경악하면서도 가볍게 신형을 날려 괴뇌인 앞에 내려섰다. 은신이 들킨 이상 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안 때문이다. [크크큽! 감히 본마의 초식을 피하다니 놀랍구나.]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귀하는 누구요?] [크흐흐! 말을 해도 모를 것이다. 왜냐면 본마는 백 년 만에 처음으로 강호에 나왔으니까!] (백 년 만에?) 괴노인은 혁사린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흐흐흣! 보면 볼수록 쓸만하군. 이번 길은 큰 수확을 얻었어. 동주(洞主)께서 크게 기뻐하실 게야.] (동주?) 혁사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흐흣! 본동에서는 칠십이철혈마동(七十二鐵血魔童)을 키우고 있다. 하나같이 절세기재들이다. 네놈을 데리고 가서 칠십이철혈마동을 삼을 것이다.] [칠십이철혈마동?] 혁사린의 두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번뜩였다. [그렇다. 그 아이들은 명실공히 천하무적이다. 동주께서 직접 키우시니까! 크크큽... 가히 우리 지옥갱(地獄坑)의 자랑이야.] [지옥갱...!] 혁사린은 대경실색하며 뒤로 주르르 물러섰다. [크흐흐흣! 어린 놈이 지옥갱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군.] 괴노인의 두 눈에서 흉광이 폭사되었다. (이 괴노인이 지옥갱의 인물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지옥갱은 이미 무림에 독수를 뻗치지 시작했다는 결론이 아닌가?) 혁사린은 생각에 잠기며 입을 열었다. [귀하가 정말 지옥갱의 인물이오?] 괴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크큽! 그렇다. 지옥갱의 수라십이마(修羅十二魔) 중 여섯번째인 엽마(葉魔)다.] (수라십이마중의 엽마?) 혁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옥갱에는 마두가 겨우 열 두 명 밖에 없단 말인가?] [크크큽 가소롭구나. 수라십이마는 단지 본갱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대체 얼마의 고수가 그곳에 있단 말인가? 엽마란 노인만 해도 절정에 달한 고수이거늘.... 지옥갱. 정녕 악마의 쉼터란 말인가?) 이때 엽마가 음흉하게 말했다. [흐흐흣! 잠시 후면 강호 정세를 살피러 나갔던 나머지 삼마가 당도할 것이다. 네놈은 본마 등과 함께 지옥갱으로 가게 될 것이다. 네놈에게는 더할 수 없는 영광이다. 네놈은 무적이 되니까!] (그렇다면 수라십이마 중 네 명이 일단 강호의 정세를 살피기 위해 나온 것이구나. 지옥갱은 곧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혁사린은 지옥갱이 아직 마수를 뻗지 않았음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문득 엽마는 득의의 표정을 지었다. [당금 무림은 썩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진다. 이제 지옥갱은 천하를 통일할 것이다. 크하하하!]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클클클! 엽마, 꿈도 꾸지마라. 본마가 있는 한 어림없는 일이다.] 돌연 엽마와 똑같은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헛!] 엽마는 대경실색을 하며 급히 소리가 들린 쪽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곧 그는 멍청해졌다. 그 자리에는 혁사린 외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방금 들린 내 음성은?) 엽마는 어리둥절 하며 주위를 둘러보려는 순간 재차 자신과 똑같은 음성이 들려왔다. [클클클! 엽마, 나는 여기에 있다.] 놀랍게도 그 음성은 혁사린이 발한 것이었다. [허억! 네놈이 어떻게 내 목소리와 똑같이?] [클클클! 목소리 뿐인가? 얼굴도 똑같지.] 혁사린은 자신의 얼굴을 쓰윽 문질렀다. 찰나 그의 얼굴이 삽시에 엽마와 같아졌다. [이...이것은...!] 엽마는 혼비백산 하며 뒤로 주르르 물러섰다. 하지만 곧 얼굴 가득 살기를 드러내며 흉흉한 눈빛을 발했다. [크카카캇! 찢어 죽일 놈, 감히 본마를 기만하다니...!] 엽마는 놀라움과 분노의 굉소를 토했다. 혁사린은 괴이하게 웃었다. [후후훗 엽마, 너는 실수했다. 나는 너를 대신해 지옥갱에 들어갈 것이다. 너의 분신이 되어...!] 엽마는 대노했다. [크하하하 귀엽구나. 또한 놀라운 잔재주를 지녔고...!] 그는 광소를 토하며 두 눈에서 엄청난 살광을 폭사시켰다. 그 순간, 휘리링... 돌연 어디선가 낙엽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것은 엽마의 특기인 낙엽기공(落葉奇功)이다. 엽마가 되기위해서는 저것을 반드시 익혀둬야만 한다.) 혁사린의 두 눈에서 보이지 않는 자광이 뻗어나오기 시작했다. [크크큽 애송이 녀석, 맛을 봐라.] 엽마의 두 손이 빠르게 허공에 한바퀴 원을 그렸다. 휘리리---파파팟! 순간 엄청난 기세를 동반한 낙엽들이 암기처럼 혁사린의 전신을 노려갔다. (바로 저것이다.) 어느 순간 혁사린의 입가에 괴이한 미소가 번졌다. [엽마, 너의 실수다!] 휘리리...파츠츠츳! 혁사린을 향해 덮쳐들던 낙엽들이 일순 방향을 엽마에게 번개같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