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어느 그릇가게에서 서유기를 흉내내다. 쉬울것 같은 이 동작은 '나한절스'라는 동작인데 일명 '귀신잡는 形'으로 유명하다. 어색하기는 해도 오랫만에 십팔기의 한 동작을 흉내 내본다. 하지만 이 품세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숨겨져있다. 우리나라 무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학자들은 東夷民族에서부터 분류를 시작한다.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忠 孝 信 禮 義를 바탕으로 살아왔으며 미래에서도 그렇게 교육하며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와 자신이 살고 있는 터전을 지켜야하며 친구와 선후배, 이웃과 더불어 살아간다.
우리민족은 B.C7197년 한나라(桓國)시대 제1세 환인임금때부터 시작된다. 임금께서는 天山에서 살면서 治身得道하여 無名長壽하였다고 전해지고있다. 한나라때의 天符經의 三一神苦를 B.C3897년 배달나라(培達國) 제1세 환웅천왕이 녹도문(상형문자)으로 기록하여 이를 신라때 최치원이 한자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桓雄天王은 治神得道하여 곰족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B.C2333년 단군조선(古朝鮮) 제1세 王儉 또는 한배검은 제18세 황웅 거불단임금의 아들로서 氣武에 득도하여 蘇塗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문명한 정치를 하였으며 강화도에 塹城檀과 三郞城을 쌓고 耶城에 堂을 세워 무예를 교육 시켰다. 제2세 단군 夫婁임근은 태자때 塗山에서 夏禹에게 五行治水法을 가르쳐는데 이로인해 井田制에서 비롯된 屯田兵制가 중국으로 처음 전해졌다. B.C2137년 제4세 단군 烏斯丘임금이 즉위하여 기린굴에서 제천의식을 행하고 衣(무예의 경지에 이른자에게 검은옷과 관을 씌워주는 의식)의식을 행했다. B.C1891년제11세 단군 島奚임금이 즉위하여 명산마다 國仙蘇塗를 설치하여 大始殿옆에 堂을 세워 三倫九誓와 무예를 가르켰다. B.C1782년 제13세 屹達임금 즉위로 蘇塗를 많이 설치하여 文武를 배운 이들이 밖으로 나갈 때 꽃을 꼿아서 이들을 國子郞 또는 天指花郞이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의 무예는 A.C424년 고구려시대, 고구려의 고분을 보면 삼실총벽화, 무인공성도,조의선인등 무예를 하는 형상을 띠고 있다. 백제는 B.C18년부터 660년까지 642년간의 역사로 의자왕의 끝으로 신라에 멸망했다. 삼국사기 수저81열전 등이 백제조의 백제본기 등에 나타난 것으로 온조왕, 아신왕, 비류왕 등은 무예을 숭상하여 수벽타를 수련했다. 박거세의 신라건국은 고구려 보다 20년 앞선 기원전57년이다. 제왕운기에 신라의 비각술, 수벽타, 탁견술, 화랑선인 등이 무예를 나타내며 고려왕건은 수박희를 국선으로 하도록 명하였다. 고려의11대 문종 때부터 18대 의종에 이르면서 무관은 경시하였다. 조선시대1790년 사도세자의 뜻에 따라 정조대왕의 어명으로 이덕무가 어제무예도보통지를 펴낸다. 태종실록8. 동국여지승람9.등에 보면 조선조에서도 수박이 무예로서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와 무예도보통지를 보더라도 우리의 민족무예가 조직적으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일제침략으로 인하여 우리 고유의 무예의 맥은 끊어지고 말았다. 이제 우리의 무예를 찾고 연구하여 우리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전하는 것이 우리현대 무예인이 숙원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검예도
인간의 올바른 인격을 형성하고 정신적으로는 생사를 초월하여 근원적인 두려움을 없애는 무술로써 삼국시대 궁중무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신라 헌강왕때 왕이 스스로 신하앞에서 춤을 추었다는 기록과 함께 신라의 화랑들이 훈련 또는 전시에 기량과 전력을 쌓기위해 연마한 무술로 황창랑의 쌍검무는 신라인의 자랑거리였다.
검무에서 비롯된 검을 비법과 힘의 원리를 적용하여 실기의 기본들을 만들었고 조선시대 정조대왕때 [무예도보통지]을 응용하여 새로운 검수련법을 장효선이 창안아여[검예도]라 명명하였다.
격투기
격투기의 격(格)자는 인격과 무술을 함께 갖춘다는 뜻이요 투(鬪)자는 경기에 임하되 비굴하지 않고 정정당당한 무적의 왕자를 의미하며 기(技)자는 심오한 무술의 원천을 간파한 고도의 기술을 뜻한다.
충(忠)과 효(孝)를 바탕으로 하여 승공통일과 한국무술의 선진화에 기여하였으며 숭고한 조상의 얼이 담긴 씨름, 당수, 권투등을 총망라한 과학적인 종합무술로 1979년 김귀진에의하여 창립되었다.
경호무술
경호무술이란 경호원이 경호대상자의 신변보호 업무를 수행합에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모든 위해요소로 부터 경호대상자를 격리시켜 위험지역을 신속히 회피하여 효과적으로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최후수단으로 위해 요소에 공격을 가하는 실전무술이다.
다른 무술은 호신술 즉 자기자신을 위해요소로 부터 방어하는 무술인에 비해 경호무술은 자기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까지 지켜주는 무술로 경호 및 경비에 적합하여 우리 나라에서는 1995년 사설경호단체가 설립된 무술이다.
공권도
공권도는 움직임에 무리가 없다. 권, 장뿐만아니라 손목과 팔꿈치도 무기가되며, 쌍절곤, 삼절곤, 창등의 무기를 도입함으로 인간의 기술적 능력을 발달시킴과 동시에 무기가 갖는 파괴력을 이용한 실질적인 무술이다.
공권도의 大文學 三郎은 1943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의 진언밀교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좌선, 탁발, 검도, 오키나와데 및 중국형의권을 융합시켜 실전무술인 공권도를 창시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차정극에 의하여 사단법인 공권도 협회를 창설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공수도
고대 인도에서 발상하여 일찍이 중국에 들어가 당(唐)시대에 手국이라는 명칭으로 각국에 전해진 무술의 일종으로 오끼나와 가라데가 1920년 후 나고시 기찐에 의해 일본에 소개된 후 당수(當手)에서 공수(空手)로 변경되어 각국에 보급되었다.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세계공수도 연맹에는 156개국의 회원국이 있고 I.O.C. 승인후 아시안게임에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11개의 금매달이 걸려있는 무술이다.
국자랑
국자랑이란 크게는 우주와 자연에 대한 공부요, 작게는 인체에 대한 탐구와 인간본연의 모습을 살피고자 함이다. 또한 심신단련의 선도수련법이며 우리민족 고유의 무술이다.
국자랑무예는 산중에 기인으로부터 박대양 문주에게 전수되었고 1990년 박성대에 의해 대중보급되고 이으며 단학, 무학, 예학으로 구분된다. 단학은 정적·동적 수련이며, 무학은 권법·검법으로 이루어지고 예학은 춤사이와 같이 부드러운 원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무예다.
궁중무술
조선 정조 14년 (1790년) 무예도보통지 24번기를 근본으로 하여 고유무술을 현대사회에 적합한 무예로 체계적으로 정립한 21세기의 종합무술로 발전한 무예이다.
궁중무술은 총 24단계의 기법으로 분류하여 건강기법, 호흡기법, 건장체조, 록기술, 경락기법, 유술, 공방, 평수, 타격, 포박술, 특수호신술, 특수무기방어술 궁중무형, 정신통일법으로 체계적인 수련법으로 수련하고 있다.
권격도
권격도는 투기종목의 종합체로 고대올림픽의 판크라티온과 우리 고유 화랑도 정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동양적 무술을 융합하여 인격도야에 목적을 두고 건강, 호신미를 추구하는 경기 이벤트에 적합한 무술로 만들었다.
1962년 정도모에 의하여 무술인의 어려운 경제여건을 안타깝게 여겨 6기 이벤트를 활성화시켜 현대 격기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유술
우주의 본질인 기를 운용하는 법을 공이라 하고 이런 기공의 수련을 바탕으로 체계화 한것이 기공무술이며 인자무적을 근본정신으로 하고 있다.
불가에서 전해내려오던 무술로서 달마대사, 원효, 서산, 사명대사로 맥을 이어 왔으며, 임진 왜란과 한국동란을 격으며서사산에 비장되자었다가 호산거사로부터 장만철이 사사받았다.
뫄한뭐루
뫄한뭐루란 '얼맘몸의 나를 떠나 우리와 무리 및 누리로 돌아가는 겨레의 살길' 이라는 뜻의 순수한글 말씨이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학익열진법' 무술로서 총동작군 8,192 돌굼을 가진 입체대련, 전투, 극기 , 활연의 예술력을 가진 무술이다.
1957년에 10년동안 맨발고행 강산순례과정에서 하정효가 충무공별세 제 369주일을 맞아 임란승첩의 전승지인 경남 충무시시에서 발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선도
선과 무가 주체가 되어, 무림인구의 저변 확대로 국민체위 향상과 국위선양은 물론 세계 인류평화와 복지 향상에 기여하는데 목적을 두고 석가가 출가 하기전 태자시절에 강,류,원의 3대 원칙에 따라 '범신기' 와 '특기기' 등 무예를 수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까지 불문의 신비무예로 비전되어온 기법으로 동양무예계의 원로 이동구에 의하여 현대에 맞게 집대성화 하여 다시 무림이란 이름을 묶어 전통무예로 세상에 빛을 보기에 이르렀다.
선무도
선무도의 본래명칭은 불교금강영관이라고 하며 부처님으로부터 2500년을 면면히 이어온 승가의 전통적인 수행법으로 몸과 마음과 호홉의 조화로 작게는 심신의 평화로운 안정과 크게는 깨달음을 향한 구도적 수행법이다.
수련과정은 선체조, 선요가, 선기공, 선무술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불교와 함께 전래되어 1960년대에 부산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스님이 전승하여 그 제자인 설기준 스님이 1985년 대중에게 보급하면서 선무도라는 이름을 갖게되었다.
세계해동검도
고구려 사무랑을 바탕으로한 무도로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여 국가의 초석을 다졌으며 해동검도는 검법, 베기, 찌르기, 격검, 기법등으로 구성된 우리나라의 전통무예다.
근세에는 장백산으로부터 김정호에 의하여 계승되어 왔으며 초·중·고등학교와 대학, 직장인동아리등 3,000여개의 국내도장과 세계 30개국에 협회를 창립 국내·외 활동을 하고 있다.
택견
택견은 고구려의 선비와 신라의 화랑도를 통한 삼국시대의 호연지기가 고려무인들의 기백으로 이루어지고 조선시대 선비정신으로 전해져 오늘의 [참정신]을 구현하는 국내 유일의 중요무현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된 전통무예이다. 택견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사]와 조선[태종실록]에 기록이 있으며 AD3세기경 고구려 벽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구한말 고종 19년(1882년) 택견의 명인인
임호를 태두로 그의 제자 송덕기로 신한승으로 계승되었으며 1983년 송덕기와 신한승이 초대 기능보유자로 동시 지정되었으며, 그 후 1995.6.1 현 예능보유자인 정경화로 계승 발전되어 오고 있다.
원화도
“원화도”란 원(圓), 또는 구(球)가 한데 어우러져 그 흐름을 따라서 이루어내는 무도인바, 원의 흐름은 “정원-타원-태극 원”으로 풀어져 (1)하늘을 아는 무도(巫道), (2)땅을 아는 무도(武道), (3)사람을 아는 무도(舞道)가 되나 그 기본은 “비손(비는 손)이다.
“비손”은 옛 우리의 조상들이 하늘에 치성(致誠)을 드릴 때 행한 제행(祭行)으로 이에서 풀어져 나오는 동작들이 더러는 춤사위로, 더러는 공방(공격과 방어)으로 펼쳐지니 원의 흐름으로 빚어지지 않는 것 무엇이랴!
한국우슈(武術)
우슈란 무술의 중국 발음이며 그 종목이 매우 다양 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쿵푸(功夫), 십팔기(十八技), 국술(國術)이라고도 부르며 약 50여년 전인 6,25동란 직후부터 보급 되었다. 현대의 우슈는 전통우슈를 바탕으로 1990년 제11회 중국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우슈경기 7종목(장권, 남권, 태극권, 도술, 검술, 창술, 곤술)이 채택되어 국제 스포츠계에 공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슈(武術)는 크게 나누어 중국 북방무술이라 할 수 있는 장권(長拳)과 남방무술이라 할 수 있는 남권(南拳)과 양생 술인 태극권(太極拳)의 권법부분과 단 병기인 도술(刀術), 검술(劍術)과 장병기인 곤술(棍術), 창술(槍術)의 무기술 부분의 표연 경기와 동급체급선수간의 자유대련으로 승부를 겨루는 산타(散打)가 있다
한국해동검도
칼쓰기 무예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 정리한 해동검도의 수련체계와 자연친화적인 독특한 한국적인 선과 단전호흡과의 결합방식으로 공동체 개념속에서 생명존중사상을 일깨우는 심과 신의 생활무예로써 [무예도보통지]의 검법들의 고증을 통하여 새롭게 정립시킨 전통 검무예다.
해동검도는 시공을 초월한 동양무예의 칼쓰기 진술을 함축한 한국전통 검무예로서 국내에 진검수련문화의 지평을 열어 대중화를 이루는데 성공하였고, 한국 칼쓰기 무예의 세계화를 향한 생활검무에 활성화에 노력하고 있는 이 땅에서 자생된 신토불이 무예다.
합기도
삼국시대 이전부터 궁사, 기사등과 함께 체술로 시작하여 고구려의 조의선도, 백제의 삼랑도, 수벽타, 국선등으로 계승 발전되어 왔으나 조선시대에는 무예를 경시하여 승려나 도가등 일부계층에 의해 전파되었다.
근대에 와서 새로이 합기도로 정착 호흡양생법을 통해 호흡력을 그대화시켜 기를 기르고 그 기를
활용하여 힘을 한곳에 모아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나라 전통 무술이며 미국을 비롯한 48개국에 지도자 파견과 국내 20개 시·도지부사무국을 두고 있다.
화랑도법
화랑도법 검도는 전통적인 얼과 슬기가 깃든 화랑무예로 전수되어 통일신라의 문화와 전신으로 발전시켰으며 세속오계를 바탕으로 무와 예를 가르치고 보급해온 선인들의 정신이 깃든 도법이다.
무예도보통지를 근거삼아 조선세법, 본국검, 예도, 제독검, 쌍검등으로 실전에 응용토록 체계화시켰으며 기(氣), 검(劍),체(體)를 기본으로 바른마음(正心),바른자세(正勢),바른 몸가짐(正體),바른칼(正刀),바른생활(正活),바른도(正道)를 통해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도법이다.
회전무술
회전무술은 손과 발 무기등을 사용하는 무술로 전통무예의 하나인 돌개술에서 발전되어 왔다. 돌개술이란 고려태조 왕건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원(圓)의 운동 원리를 이용한 무술이다.
돌개무술을 전수받은 명재옥이 1975년에 전통보법과 기법을 정립하여 분심법, 분력법, 동화법등 3대원리를 체계화시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아래의 틀별한 무술의 탁월한 장군들이 그 깊이를 더하고 에너지를 보태의 무술은 그 정도를 지키고 지금까지 계승되어 왔다. 아래의 선구자가 북벌을 효종과 함께 꿈꾸어 온 나의 직계 조상이시다.
-.우리 무예의 발달 과정 1.고대 시대 우리 나라에서 출토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대 유물 중 석부, 석창, 석검, 골검, 골부등은 일찍부터 어로 수렵 등 생활 수단으로서 뿐만 아니라 무기로 사용되었으며 이에 수반하여 이들을 전투에 이용하는 무예도 일찍부터 발달해 왔다.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 단검 등은 고대 시대에 이미 부족간의 전투등의 필요에 의해서 무예의 발달을 추측케 하고 있으며 기원전 109년 한의 침공을 1년간이나 끈질긴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금속 문명의 발달에 따르는 무기 및 기예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2.삼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 끊임없이 전개된 중국 및 3국간의 정복전쟁으로 무예의 진흥을 촉진하였다. 삼국의 무사들은 하오(下午)들의 생산 활동에 힘입어 오직 무예만 닦고 전투에 참가하여 주임무로 삼는 독립된 계급으로 존재하였으며 삼국 모두 고구려의 경당과 같은 교육기관을 두어 청소년들을 훈련하였다.
특히 중국과의 전쟁으로 무예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고구려에서는 고분 벽화의 기마 전투도, 사냥 그림, 수박도 등에서 보여지듯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무예를 갖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고, 신라에서는 특수한 장창대를 개발하여 삼국통일을 달성 했으며 검무가 뛰어났다고 한다. 통일 신라 시대에 무오 병서가 편찬되었다고 전해지나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3.고려 시대, 조선 초기 고려 초에는 장거리 병기인 석노등이 개발 배치되었지만 단병 접전용 무예 또한 중시한 것도 변방에 24반 병기를 배치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고려말 화약 병기가 출현하면서 결정적으로 장병기가 중시되면서 단병기 무예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특히 단병기의 무시 경향은 진영이 최우선으로 중요하고 기예는 중요성이 가볍다라는 이른바 선진후기(先陳後技)의 관념 때문에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진법 훈련이 강화되면서 전투대형 훈련은 성행하였으나 각개 병사의 무예 훈련은 경시되거나 혹은 억압되었으며 때문에 무과의 시취에있어서 步射,騎射,騎槍 등의 무예와 주력등 기초 체력을 시험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단명의 기예는 발달하지 못하고 초기 임진왜란에서 패배하게 된다.
4.개 발 조선 전기 이전의 우리 무예는 전해지는 문헌 자료가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이나 벽화 전설등을 통해서 볼 때 상당한 수준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산악이 많은 조건에서 궁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하며 동양의 어떤 민족보다 우수한 궁술을 자랑한 것은 동이(東夷)라는 -夷은 大弓을 의미- 말에서도 알 수 있지만 궁술 외에도 단병 또한 우수하였다. 고구려 무용총 벽화의 수박도, 기마 전투도는 과호세, 안시측시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는 중국과 비슷한 시기 혹은 그 이전의 시기에 우수한 권법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조선 전기에도 비록 각 개인의 기예를 경시하였지만 단병의 병장 기예가 끊어지지 않고 흘러 내려 왔다.
임진왜란때 사명 대사가 월도를 사용하여 왜병과 맞선 것이나 의병장 곽재우가 전투에서 조총을 방어하기 위해 솥뚜껑 -등패가 창, 검이나 궁시에는 강하나 조총에는 약하기 때문에 솥뚜껑으로 대용한 것으로 추측됨- 을 사용한 것을 볼 때 조선 전기에도 단병의 병장 기예는 전해지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무예와 역사 '무예'란 엄격한 자기관리를 통하여 강건한 신체와 올바른 심성을 기르고, 이를 바탕으로 건전한 역사관과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한 수양방식이다. 따라서, '무예'의 형식은 민족의 역사이고, 민족의 자존심과 기상은 그 내용이 된다.
우리 '무예'는 흥망성쇠의 반만년 역사와 호흡을 같이하며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듯 당당하게 오늘 이곳에 우뚝 서 있다. 이것은 곧 우리민족 우리역사의 자존심이다. 한국 '무예'가 밟고 온 자취를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신라'에는 각각 '선배제도'와 '화랑도'가 있어서 무술과 정신수양을 도모하고 '호연지기'의 기상을 배양하였다. 이 시대의 병서로는 '무오명법'이 있었으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 항쟁역사는 어떠한 시련에도 꺾이지 않는 민족의 힘찬 기상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으며, 병서로는 '김해병서'가 있다. 오령권이라하여 포가권, 맹호권, 후권, 학권, 칠성권 등의 권법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명에 따라 훈국랑 한교가 만든 '무예제보'에 무예6기가 수록되어 있고, 병자호란 이후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을 받들어 6기에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만들었다.
'무예십팔기'의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정조에 이르러 당대의 실학자 박제가,이덕부,백동수 등에 의하여, '무예도보통지'가 편찬되어졌다. 여기에는 사도세자의 십팔기에 마상 6기가 더하여 24반 무예가 수록되어 졌다. 이것은 단순한 첨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무예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의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포옹성이 빚어낸 걸작이며, 찬란한 민족문화의 결집인 것이다. 한국무예의 근간을 '무예도보통지'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통무예의 판단기준 어떤 운동이든 간에 나름대로의 장단점은 있으나 꾸준히, 규칙적으로 한다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운동들 중에서도 스포츠라 불리는 것들은 대다수가 미국을 비롯한 구미 각국에서 들어온 것이기에 그 연원이 분명하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운동들을 '외국에서 들여온 것'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고 오늘날의 우리 실정이나 몸에 알맞게 변화시켜 행하고 있으므로 일반인들은 스포츠에 대해 그다지 이질감은 느끼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유독 '우리의 것'임을 강조하는 운동들에 대해 도리어 이질감을 느끼며 쉽게 접근하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전통무예'임을 내세우는 운동들 중에서 일반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운동들 모두가 진정한 '전통무예'인지 한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문제점은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전통무예'임을 주장하는 것이든 아니든 간에 운동으로서의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적어도 완력은 길러질 테니까). 그리고 운동으로서의 가치, 즉 몸을 튼튼히 하고 건전한 정신을 가질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전통이 어쩌구~' 하는 식으로 따질 필요 없이 우리 몸에 알맞은 것을 골라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가치를 말하기보다 '전통무예인지 아닌지'를 먼저 내세우려는 오늘날의 현실은 문제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왜 운동으로서의 합리성, 과학성을 알리기에 앞서 '전통무예인지'에 대한 논쟁에 더 열을 올리는가? '전통무예'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불필요한 논쟁이 될 것이다.
'전통무예'에 대한 개념을 말하기 전에, '전통'과 '무예'에 대한 각각의 개념을 파악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다.
'전통'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있어서의 전통이어야 하며, 특정한 시대에 존재했던 돌발적인 현상이 아니라 세대간의 계승을 바탕으로 한 지속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이 과거로부터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의 문제, 즉 계승과 발전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전통'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이해는 일반적으로 위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으리라 생각된다. 문제는 '무예'라는 말이다.
-.무예 제보 조선 전기에 담병의 병장기예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나 이는 몇 몇 무장에 한한 것이고 일반 병사들은 전혀 수련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장 기예에 대한 체계도 잡혀 있지 않았고 뛰어난 전래의 기예는 거의 사장되어 가고 있는 상태에서 오랜 전국 시대를 거쳐 실전 위주의 검술을 전개하는 왜병들의 침입에 무방비 상태로 임란 초기 대패하게 된다. 이는 '왜병과 대전함에 있어서 왜병이 재빨리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해 오면 아군은 비록 창을 갖고 검을 차고 있으면서도 검은 칼집에서 나올 틈이 없고 창은 적의 그것과 교봉해 보지도 못하고 속수 무책으로 적의 흉도에 당하고 만다. 이러한 까닭은 전혀 창, 검의 습법이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선조 26년에 순변사 이일이 지휘하는 조선군과 이여송의 휘하의 명군은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하고 그 승리의 비결이 척계광의 '기효 신서'에 따라 싸웠기 때문이라는 명 진영의 판단에 따라 선조이하 조선의 군신들은 이의 강해를 위해 노력한다.
이 과정은 조국을 보위하기 위해서 펼치는 눈물겨운 과정으로써 종사관 이시발과 훈국랑 한교등이 명 진영에서 책을 구하고 그 기법을 두루 물어서 해득한 것이다.
훈국랑 한교는 그 당시 조선에서 전래의 무술 기예를 두루 갖춘 뛰어난 무사였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무술을 바탕으로 '기효 신서'를 강해 할 수 있었으며 조선 병사들에게 체계적으로 살수의 기예를 가르치기 위해 수련법을 도보화 시키는 작엽을 할 수 있었다.
정유재란이 한창 진행지던 선조 31년(1598) 그는 곤봉, 등패, 낭선, 당파, 쌍수도의 6기를 체계화 시키고 도보를 만들어 마침내 '무예 제보'를 편찬케 한다.
'무예 제보'는 현재 프랑스에 있어 그 내용을 잘 알수는 없지만 '무예 도보 통지' 의 原에 실린 내용으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무예 제보'를 편찬하는 과정은 단순히 척계광의 '기효 신서'의 내용을 옮겨온 것이 아니다.
-.무예 신보 '무예 제보'가 편찬된 지 160여년이 지난 영조35년(1751)에 이르러'무예 신보'가 간행되었다. '무예 제보' 이후 오랫동안 살수의 기예에 관한 병서가 간행되지 않았던 것은 단병의 병장 기예에 대한 경시와 양란 이후의 평화 분위기 속에서 단병 무예 진흥의 긴박도가 약하였기 때문이다.
'무예 신보'가 간행되는 데는 사도세자의 걸출한 기예와 안목이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어릴 때부터 살수 기예를 익히고 당시 시정 잡배라고 깔보던 무도인과 어울리면서 살수의 기예에 대한 필요성과 그 기예 자체를 익히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가 대리 청정하게 되면서 살수 기예를 정리하기 시작하여 영조 35년(1759) 왕명을 받들어 '무예 신보'를 편찬하게 된 것이다.
'무예 신보'는 '무예 제보' 의 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의 6기외에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등의 12기를 추가하여 18기의 무에를 그림으로 설명하는데 이로써 18기가 정립하게 된다.
'무예 신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무예 도보 통지'의 [增]에 새로 추가한 것과 함께 실려서 그 내용의 편린을 알 수 있고 '무예 도보 통지'의 구보적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다.
-.무예 도보 통지 1.의 미 "무예"는 창, 검, 도 등 병장기의 기예를 통칭하고 [도보]는 어떠한 사물을 실물의 그림을 통하여 설명하므로써 계통을 세워 분류하는 것을 의미하며 [통지]란 모든 것을 총망라한 종합서임을 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책명만 보아도 무술 기예를 그림을 통하여 설명한 종합서임을 알 수 있다.
2.무예 도보 통지의 전체적 이해 사도세자가 당파 싸움의 희생물이 되면서 무예 진흥이 한때 침체되지만 그의 아들인 정조의 즉위로 또 다른 전기를 맞게 된다.
정조는 척족세력을 제압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방안으로 군부를 통일하였고 "태평 시대에 우용한 서적을 편찬하여 유사시에 대비하고 적의 내습을 막아야 한다.'는 혜안을 갖고 규장각 검서관인 박제가, 이덕무와 정용영의 초관(지금의 장교)이었던 백동수에게 명하여 '무예 도보 통지'를 편찬하게 하였다.
정조의 무예 진흥책으로 '무예 신보'의 18기외에 마상 6기가 추가되어 24반 무예가 장여되어 체계화되어 가고 있는 중에 박제가 이하 실학자들에 의해 정리 체계화되고 언해본까지 완성 간행된 것이다.
'무예 도보 통지'는 '무예 제보', '무예 신보'와 그 이후에 추가된 마상 6기 등 이미 장용영등 병사들에게 실제 훈련되고 있던 내용을 정리 한 것으로 내용 중 [原]은 '무예 제보'에 실린 내용을 [增]은 '무예 신보'외 당시 추가된 내용을 싣고 있고 [案]은 지금의 주와 같은 것으로 상세한 설명을 싣고 있는 것이다.
병장기의 제작법은 주로 척계광의 '기효 신서'를 참고하는데 화식, 금식, 왜식이 다른 경우 그 차이를 설명하고 그 우수한 점을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본래 중국에서는 병장기가 발달한 곳으로 "오늘날 보다 나은 것은 중국식을 그리고 그 다음에 금식을 또 왜식이 있으면 금식 다음에 그려서 모든 방식을 대조해 보아서 개조하도록 구비한 것이다."라는 '무예 도보 통지'상의 범례에서 보듯이 뛰어난 중국의 병장기를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병장기 개발에 노력한 결과 장창의 경우 중국식보다 더욱 우수하게 개발시키고 있다.
3.무예 도보 통지의 구성 내용 '무예 도보 통지'는 4권 4책의 한문과 1책의 언해본으로 구성되었다. 卷首. 에----범례, 병기 총서, 척-모사실, 기예 질의, 인용서 목록 卷之一에----장창, 죽장창, 기창, 당파, 기창(騎槍), 낭서 卷之二에----쌍수도, 예도, 왜검(교전?) 卷之三에----제독검, 본곡검, 쌍검, 마상 쌍검, 월도, 협도, 등패(요도, 표창 附) 卷之四에----권법, 곤봉, 편곤, 격구, 마상재, 관복도설, 고이표를 싣고 있다.
4.무예 도보 통지의 편찬 의의 '무예 도보 통지'는 무예 관련 서적 225종과 동양 3국의 무예가 총망라되었으며 우리의 체질과 기후, 풍토, 지형 등에 맞게 새로이 정립된 자주 정신의 정화이다.
임진왜란 이후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그 동안 잊혀지고 사장되어 온 전래의 무술기예를 정리하고 잊혀진 것을 찾아내고 주변국의 우수한 바를 받아 들여서 만든 '무예 도보 통지'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전래 무예를 재정립하고 중국, 일본 무예를 연구 분석하여 우리의 무예로 재창조했다는 점일 것이다. 또한 어제 서문에서 밝히듯이 평화시에 큰 일을 대비하여 서적을 편찬하는 유비무환의 정신, 자주 국방의 정신은 귀중한 정신적 유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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