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햅쌀의 계절. 각지에서 '명품 쌀'이 쏟아진다. 다른 종자는 몰라도 벼에 관한 한 풍족한 예산을 투입해 쉼 없이 품종개량을 한 덕에 한국 쌀은 여느 나라 쌀에 비해 고품질이라는 게 쌀 생산자 및 연구자들의 말이다. 그러나 이웃나라 일본을 다녀온 사람 중 적잖은 사람이 "일본 밥이 더 맛있다"고 한다. 두 주장을 합치면, 쌀은 우수한데, 밥은 맛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과연 그럴까. 그렇다면 왜일까?
▲ 올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심어진 쌀 품종‘호품’. 낟알이 맑고, 밥맛이 차지고 구수하다. 농촌진흥청 국립식량과학원이 2006년 개발한 이 품종은 최고 품질을 자랑한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최고의 밥맛을 내는 쌀? 수확량이 최고지
2009년 현재 정부가 최고품질 품종으로 지정한 쌀은 모두 8종. 호품·삼광·운광·고품·칠보·하이아미·진수미·영호진미가 그것이다. 품질도 일본 벼에 뒤지지 않는다. 2008년 국립식량과학원과 충남 당진기술센터가 실시한 벼품종 식미평가에서 호품이 일본의 대표적 품종 중의 하나인 고시히카리를 밥맛·외관 모두에서 크게 앞질렀는가 하면, 지난해에 평택에서 열린 평가에서는 삼광이 고시히카리를 앞섰다. 쌀맛을 결정하는 단백질 함유량(적을수록 맛이 좋다)에서도 5~6%대 안팎으로 두 나라 품종이 큰 차이가 없다.
대부분의 한국 쌀 농가에서는 고품질로 평가받는 벼 품종을 재배한다. 호품은 15만4000ha에서 경작돼 올해 전국 쌀 재배면적 1위를 기록했고, 2위는 추청(11만3000ha), 3위는 주남(6만9000ha)이 차지했다. 그런데도 우리 쌀로 지은 밥맛은 왜 최고가 되지 못할까.
첫 번째 원인은, 쌀 재배에 있어 질보다 양을 우선시하는 경작방식 때문이다. 일단 많은 양을 수확해야 많은 수입을 얻기 때문이다. 수확량을 높이려면 비료를 많이 줘야 한다. 그런데 질소 비료를 많이 사용할수록 쌀의 단백질 함량이 늘어나 밥맛은 떨어진다. 유전자는 훌륭하지만 양육 환경이 좋지 못한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다비재배'를 막기 위해 300평당 질소비료 사용량을 9㎏으로 제한하는 표준농법을 권장하고 있지만 이를 따르는 농가는 많지 않다. 질 대신 양을 택한다는 얘기다.
뛰어난 밥맛을 내는 최고급 품종에 수확량도 많아 올해 최고 재배면적을 차지한 '호품'만 해도 농민들이 사용한 비료량이 평균 13~15㎏이었다. 호품을 개발한 국립식량과학원 김보경 연구관에 따르면, 호품벼는 질소비료 7㎏을 주었을 때 단백질 함유량이 6.5% 미만이 되어 최상의 맛을 낸다. 하지만 양을 위해 농민들은 비료를 들이부었고, 맛과 질은 떨어졌다. 최상급 품질에 재배하기도 쉬워 '꿈의 벼'라고 극찬받던 호품이 '쌀값 하락의 원흉'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벼는 다르다. 대표적인 육종 품종이 고시히카리·히토메보레·청무. 이 품종들의 질소 비료 사용량은 5㎏대다. 그 이상을 주면 벼가 쓰러지기 때문이다. 비료 사용량이 적으니 단백질 함량이 적고, 밥맛 또한 좋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어지간하면 1등급, 쌀 가격도 거기서 거기
질 높은 쌀이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도 쌀의 고품질화를 막는 원인이다. 유기농법으로 재배한 '한눈에 반한 쌀'이나 '한오로미' 등 몇 개의 제품을 빼고 흔히 '괜찮은 쌀'이라고 평가받는 일반미는 20㎏에 4만~5만원대로 일률적이다. 쌀의 품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과 '기기'가 없기 때문이다. 쌀의 품질을 등급별로 판정·수매하는 전국 262개 미곡종합처리장(RPC) 중 단백질 함량을 분석하는 기기와 완전미(백미 상태에서 흠이 없는 쌀)의 비율을 정확히 확인할 장비를 갖춘 곳은 10%에 불과한 실정. 현재 진행되는 품질 검사도 낟알의 외관·색깔을 육안으로 보는 정도다. 정부가 정한 쌀의 등급은 특등에서 4등까지인데 "1등급 이상이 80%를 넘어갈 만큼 어지간하면 1등급을 준다"는 것이 농민들 얘기다. 비료를 적게 줘서 고품질의 쌀을 생산한들 가격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으니 고품질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게다가 전국 미곡종합처리장 중 저온저장고를 갖춘 곳은 28%에 불과하다. 농림수산식품부 홍인기 사무관은 "전국 쌀 생산량 491만여t 중 52만7000t만이 저온저장시설에 보관되었다 출고된다"고 말한다. 지난 6일 찾아간 경기도 파주의 한 미곡종합처리장에도 저온저장실은 없었다. 대신 단열재가 갖춰진 일명 '사일로(silo)'라 불리는 양철 저장고에서 낟알 상태의 완벼를 저장한다. 총 8개의 양철저장고가 수용할 수 있는 완벼는 2400t. 처리장에서 만난 한 직원은 "1년에 이 미곡종합처리장을 거쳐 가는 벼가 1만t이 넘는 데다, 수매량이 넘쳐나는 10~11월에는 처리장 인근의 일반 창고를 대여해 쌓아놓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박동규 박사는 "쌀의 품종도 중요하지만 추수 후 적정온도에서 관리되는지 여부가 쌀의 맛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나쁜 쌀 섞이고, 고급미로 옷 갈아입고
▲ 이제부터 쌀을 살 때 포장지 뒷면에 작은 글씨로 쓰 인‘품종’을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우리 쌀 품종의 수준은 이미 일본 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개발된 상태. 소비자의 인식이 높아지면 재배·도정·보관기 술 또한 발전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얘기다 조선일보 DB
쌀이 섞이는 것도 문제다. 상품과 하품이 섞인 채 하나의 상품으로 판매된다는 얘기다. 호품이면 호품, 삼광이면 삼광 하나로만 포장돼 100% 단일품종으로 상품화되는 것이 어렵다는 것. 설령 같은 품종이어도 상·하품이 섞인다.
재배단계에서부터 농민들이 품종을 섞는 경우도 있고, 미곡종합처리장에서 섞이는 경우도 많다. 국립식량과학원 김연규 답작과장은 "미곡종합처리장에는 마르지 않은 상태의 벼가 3000t씩 모이는 경우도 있는데 그 지역에서 생산된 다양한 품종의 벼가 한 저장고에 모이면 구분하기가 힘들어진다"고 했다. 품종별로 도정도 따로, 포장도 따로 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섞인다는 것이다.
유통과정에서 쌀을 고의로 섞는 일도 적잖게 발생한다. 강원도 양양에서 오대미 5만 평을 경작하는 영농후계자 김동욱씨는 "농민들 사이에 '공장 가서 옷 갈아입는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돈다"고 전했다. 4년씩 묵은 정부미를 햅쌀에 섞은 상품이 아주 싼 가격을 달고 시장에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20㎏에 2만원대의 쌀이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시겠지요? 밥 한 공기 만드는 데 원가가 300원밖에 안 드니 식당들은 당연히 이 쌀들을 쓰지 않겠습니까." 값싼 다른 지역 쌀을 도정 과정에서 섞은 다음 포장지에 원산지를 경기 지역으로 쓰는 '가짜 경기미'가 시중에서 해마다 발각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전문가들은 우리 쌀의 고품질화가 성공하려면 소비자들의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브랜드명이나 가격을 보기 이전에 포장지에 적혀 있는 쌀의 품종과 도정 날짜를 보라는 것. 품종란에 단일품종의 이름이 적혀 있으면 80% 이상 순도를 갖췄다는 의미이고, 일반계나 혼합 또는 빈칸으로 있는 것은 여러 품종이 섞였다는 뜻이다. 정부가 공인한 최상급 브랜드인 '탑라이스' 제품들은 순도 90% 이상이다. 농림수산식품부는 2011년부터 품질등급제를 실시, 품종뿐 아니라 단백질 함량까지 제시하는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김연규 과장은 "좋은 품종을 선호하는 소비 트렌드가 형성되면 농민들도 품질 개선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며 "그렇게 승부하면 결코 일본 밥맛에 뒤질 이유가 없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