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창회 일로 순천시장을 인터뷰한 우리 동창회 일행은 낙안읍성 관광에 나섰다. 30여분 낙안읍성을 둘러본 후 태고종의 총본산인 조계산 선암사로 간다고 했지만 나는 선배 한 분에게 말씀을 드리고 대열에서 빠져나와 다시 순천행 버스를 탔다. 백두대간을 향해 출발이다.
순천 터미널에 도착하니 5시 10분. 여수 광양 방면 버스가 5분에 한 대꼴로 드나들었다. 광주 목포 전주행 버스도 수시로 들락날락, 그러나 경상도 방면 버스는 뜸하다. 진주행은 1시간에 1대꼴이다. 진주에서 7시에 산청행 막차가 있다고 들었다. 진주까지 1시간 20분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하동으로 갈까 했으나 진주에 가면 지리산 입구로 가는 차들이 많을 것 같아 무려 50분을 기다려 진주행 버스를 탔다.
진주에 도착하니 7시 30분이다. 대원사 가는 표를 끊었다. 8시30분 출발이란다. 서울에서 출발한 본대와 다시 통화를 했다. 민박집이 대원사에서 8km 떨어져 있다고 했다. 그 8km는 버스가 다닐 수 없는 길이며 택시를 타야 한다고 하셨다. 대장 일행은 지금 대전을 향하고 있으며 시천면사무소 소재지인 덕산에 도착하여 그곳에 차를 두고 택시를 이용할 계획이라고 하셨다.
`그래, 덕산에서 합류를 하는 것이다` 덕산행으로 표를 바꾸었다. 8시 출발이다. 7시 막차라는 정보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8월에 진주를 거쳐 통영, 거제까지 갔었다. 진주에서 통영은 지도에서 보면 가까운 거리이지만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그 때 남해안은 서해안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서해안은 밋밋한 구릉이나 들판이 펼쳐지다가 바다와 만나고 있지만 남해안은 해안선 바로 옆으로 산들이 있는 것이다.
그 산들을 산경표에서 낙남정맥이라고 이름붙인 사실은 이번에 알게 되엇다. 그래서 진주에서 통영을 가자면 산봉우리들을 헤쳐가며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야 하는 것이다.
산청으로 가는 길은 4차선 도로로 차량통행이 매우 많았다. 산청은 지리산 옆의 오지라는 생각만 해왔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징게맹게 외애밋들` 같은 곳이 오지이다.
단성에서 20번 국도로 빠져나와 덕산(德山)으로 향했다. 천왕봉 바로 아래 중산리가 종점이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덕산에서 1진 당도할 때까지 산천재를 둘러볼 것이여. 그런데 캄캄한 밤중이라 주변 경개를 볼 수가 없으니 참으로 아쉽구만.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천왕봉을 오르는데 단풍이 절정이라고 했지. 아직 가을철에 피는 산국이나 구절초, 쑥부쟁이 같은 야생화도 좀 남았을 것이여.`
2. 산천재(山天齋)에서
훈구파와 사림파
고려말에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지배층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실패하였다. 이 때 나타난 세력이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였다. 이들은 사회개혁을 주장했으나 방법론에 있어서 둘로 갈라졌다. 강경파와 온건개혁파로 나뉜 것이다.
강경파인 정도전 하륜 권근 조준 등은 새로 등장한 무장인 이성계를 내세웠다. 이방원은 반대파를 간단히 제거하여 버렸다.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는 정몽주를 타살한 것이다. 이들은 마침내 이색, 길재 등 온건파를 누르고 역성혁명을 성공시켰다.
권력을 잡은 신흥사대부들은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수많은 공신(功臣)을 양산해내며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이들이 훈구파이다. 한번 공신에 책봉되면 공신전과 노비가 지급되며 자자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이어간다. 또한 과거에 떨어져도 벼슬자리를 해먹을 수 있었다. 이를 조상의 음덕으로 관리에 서용된다 하여 `음서(陰敍)`라고 한다. 이러다 보니 이들 훈구파는 점점 부패해지고 한정된 벼슬자리를 두고 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극렬해졌다.
한편 중소지주층으로 지방에 거점을 둔 온건개혁파들은 향촌에 머물며 후학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사림파이다. 이들이 대거 관직에 나선 것은 성종 때에 와서의 일이다. 성종임금은 깨끗한 사림파로 하여금 훈구파를 견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선조 때에 와서 사림파가 확실하게 권력을 잡게 될 때까지 훈구파와 사림파 간에, 때로는 훈구파간에 피비린내나는 권력투쟁이 있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이 이 기간에 있었다.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이러한 난세에 백두대간 태백산과 지리산에서 발원한 낙동강 줄기 하나씩 곁에 두고 은둔하며 남송의 주자를 철저히 닮으려고 했던 두 도학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다. 그들은 똑같이 신유년(1501년)에 태어난 닭띠 갑장이었다.
김일손은 연산군4년 무오사화 때(1498년) 사형당했으며 정여창은 무오사화 때 귀양을 갔었고 연산군 10년(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김굉필 역시 무오사화 때 귀양을 갔다가 갑자사화 때 사형당하였다. 김안국은 중종 14년 기묘사화 때(1519년) 관직을 삭탈당한 바 있으며, 조광조는 기묘사화 때 뜻을 펴지 못하고 그를 부른 중종에게서 사약을 받았다. 이언적은 명종 년간의 을사사화 때(1545년) 유배 후 사사되었다.
이황과 조식은 한창 공부할 시기인 나이 스물에 기묘사화를 목도하였다. 그리고 스승들의 참혹한 죽음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었겠는가.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던 이황은 을사사화를 보면서 자신의 처세가 옳았음을 확인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명종이 그를 수차례 불렀으나 번번히 출사를 거절하였으며 청량산 아래 도산서당에서 후학들과 함께 공부만 하였다. 조식 또한 중종과 명종이 수차례 불렀으나 단 한 차례도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 관찰사가 만나자고 청하여도 거절할 정도였다. 그는 나이 60이 넘어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산천재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임진란 때의 의병장인 곽재우와 정인홍 훗날 서인 동인으로 나뉘어 붕당정치를 시작한 동인의 영수 김효원 등이 그의 제자들이다.
이들이 추구했던 학문은 성리학이다. 공자 맹자의 고대유학과 구분하여 성리학을 중세 유학이라고도 하는데 그 핵심 철학은 이기이원론이다. 이를 완성한 사람은 남송의 주희였다. 당시 주희가 살던 시대는 참으로 암울했던 시기였다. 요나라와 형제의 연을 맺고 해마다 명주 20만필과 은 10만냥을 바쳐야 했던 송이 요나라를 물리치고자 금나라를 끌여들여 요를 멸망시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번에는 금에게 중원을 내주고 장강 이남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태어난 것이 이기이원론이다. 즉 금나라가 송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은 열등하고 사악한 기가 순수하고 올바른 이를 억압하고 있는 상태로 본 것이며 이가 기를 극복하고 현실로 나타날 때 세상은 바로잡힌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국민들의 자기합리화를 정리한 것이 주희였다. 성리학에서 대의명분을 그토록 중시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을 처음 받아들였던 고려말에 정몽주나 길재도 부패한 권문세족을 기로 보고 자신들 신흥사대부들을 이로 보았다. 이황과 조식도 이러한 관점에서 당시의 어지러운 조선 사회를 바라보았다. 훈구파를 기로 보고 사림파를 이로 본 것이다. `동방주자`라고도 불리는 이황, 그리고 조식의 이러한 이기이원론은 당시 사림세력뿐만 아니라 훗날 붕당정치로 갈려졌을 때에도 동인, 남인들의 사상적 구심점이 되었다.
이들은 똑같이 무릉도원을 이상향으로 보았음인지 다음과 같은 시조 한 수씩을 남겼다.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지지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까 하노라
청량산은 봉화군 낙동강 상류쪽에 있는 산으로 도산서원에서 가깝다. 그곳의 선경을 말 못하는 백구가 소문낼 리 없고 다만 복숭아꽃이 떨어져 흘러나가 외부사람들이 알고 몰려올 것을 걱정한 내용인데 정작 그 자신이 시조를 지어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시조를 읽었음인지 남명 조식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무릉도원이라고 주장한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에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매오 나는 옌가 하노라
영남의 이 두 거유는 은둔의 처세술로 모두 70을 넘게 살았다.
산천재에서
덕산에 이르기 전에 `산천재`를 안내하는 간판이 도로가에서 자동차 불빛에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1킬로쯤 되짚어 내려가 산천재를 찾았다. 밤 9시가 넘었다. 사방이 컴컴하여 어디에 건물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근처 점방으로 갔다. 주인이 없다. 한참을 앉아 있으니 주인 아줌마가 나타났다. 막걸리 한 병을 받았다.
`가입시다`
아줌마 인사를 받고 다시 돌아와 주위를 살펴보니 `남명학연구소`라는 간판을 단 건물이 한 채 보였다. 문창호지는 낡고 마루는 먼지가 푸석하게 쌓여 있다.
어슴푸레 건물이 50여미터쯤 떨어져 보였다. 다가가보니 해우소이다. 해우소에서 20여미터 떨어진 곳으로 대문이 보였다. 다행히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건물에 `山天齋`라고 쓴 현판이 어둠 속에서 간신히 눈에 보인다. 현판 옆에 소부와 허유의 그림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두워서 확인할 길이 없다. 옆으로 별채가 있고 뒤안으로 창고로 보이는 작은 건물 하나가 있다. 바로 마당 앞으로는 냇물이 흐르는데 어둠 속에서 볼 수가 없다.
별채 마루에 앉아 집에서 싸온 감을 안주로 막걸리를 자작하였다. 남명 선생도 한 잔 하시라고 한 잔 따라 두었다. 긴 세월을 뛰어넘어 그가 살던 시대나 지금이나 정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다만 그에게는 복이 있어 이런 멋진 곳에서 은거할 수 있었구나.
조선의 유생들은 거의 대부분 고대 중국 요순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고 있다.
요임금 때의 일이다. 허유 (許由)라는 사람이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해 말을 끌고 시냇가로 갔더니 웬 놈이 귀를 씻고 있었다. 어째서 귀를 씻냐고 물어봤더니,
아주 더러운 얘기를 들어서 귀를 씻고 있는 중이라고 하였다. 그 자의 이름은 소부 (巢父)였다.
무슨 더러운 얘기이기에 그러냐고 물었더니
임금이란 자가 찾아와서는 임금자리를 물려줄테니 해먹으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야그를 들은 허유는 말을 상류 쪽으로 끌고 갔다.
소부는 왜 여기서 먹이지 씰데없이 위로 끌고 가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허유 왈
`당신이 씻어낸 그 더러운 이야기를 어떻게 내 말에게 먹인단 말이오`
하였더란다.
흔히 이 요순시절을 태평성세의 대명사처럼 얘기하는데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얼마나 정치가 혼탁하고 피비린내가 났으면 왕을 준다고 하는데도 마다 했을까 하고 생각한다.
이 시절에 함포고복하면서 격양가를 불렀다는데, 격양가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밭갈아서 농사짓어 먹고 내 손으로 우물파서 마시는데 임금의 은혜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요임금이 너무나 정치를 잘 해서 임금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다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위 격양가만 해도 그렇다. 임금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용도 정치권의 착취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이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땅을 친다는 것은 통곡할 때 하는 몸부림이지 기뻐서 하는 짓이 아니다.
하여튼 남명 조식선생은 이 소부와 허유가 문답하는 광경을 산천재 현판 옆에 그림으로 그려놓고 조석으로 이를 보면서 닮아가려 하였다. 이는 바로 노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다. <노자>에 이런 글귀가 있다.
`外其身而身存(외기신이신존)`
더러운 정치판에서 몸을 빼 제 몸 하나 잘 간수하라는 가르침이다. 남명 조식은 선비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당시 정치판에서 이를 철저히 따른 사람이다. 그래서 다음 시를 산천재 기둥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 시를 직역해 본다.
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鐘 천석이 들어가는 종을 보기를 청하노라
非大구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안난다.(칠구;손수변에 입구)
爭似頭流山 지리산을 닮기 위해 다투어서(지리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
즉 너희들이 아무리 찾아와서 현실정치에 참여하라고 집적대도 나의 종은 보통 크게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저 지리산 천왕봉처럼 하늘이 울어도 꿈쩍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닐까.
10시 20분에 산천재에서 나와 일행을 기다리기 위해 길 건너로 갔더니 어둠 속에 남명 선생의 대리석 입상이 서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묘소도 이곳에 있고 유허비각도 보이는데 이 일대를 성역으로 만드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10시30분에 서울에서 봉고차로 내려 온 일행과 반갑게 합류하였다.
3. 천왕봉에서 맞은 첫눈(2002년 10월 27일)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새재마을 민박집. 아침 5시에 일어났다. 새벽 3시에 2진으로 도착한 7명을 합쳐 모두 13명이다. 각자 준비를 마치고 한 방에 모였다. 서로 초면인 사람들을 위해 간략한 자기 소개를 하였다. 대장님의 한말씀을 듣고 모두 밖으로 나섰다.
이제 백두대간 종주의 첫걸음을 떼는 것이다.
새벽 6시, 아직 칠흑같은 어둠이다. 가벼운 눈발이 가로등 불빛에 흩어진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었다. 손전등으로 길을 밝혀 가며 앞서가는 사람 뒷꿈치만 바라보고 걸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바람이 계곡을 사납게 훑고 내려간다. 뼈에 스미는 찬바람은 아니다.
1시간쯤 지나서야 날이 훤히 밝았다. 그러나 짙은 운무가 사방을 덮고 있다. 선두에 나선 대원들이 계곡을 건넌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아무렇게나 솟아있는 바위틈을 지나가고 있다. 간신히 계곡을 건넜는데 길이 안보인다.
`여기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노란 리본을 발견하였다. 다시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는데 무슨 표지판 같은 것이 눈을 뒤집어쓴 채 서있다. 눈을 헤치고 글을 보니 `조개골아지트` 안내판이다. 남부군 경남 도당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근처에서 석축 구조물을 확인하였다.
한참을 올라가다 다시 길이 없어졌다. 산봉우리는 여전히 운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어젯밤 마을로 들어오는 차 안에서 현지인 기사에게 `가랑잎초등학교` 안부까지 물으며 이 부근 능선과 봉우리 이름을 줄줄 꿰시던 대장님도 당황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심총무와 내가 앞장서서 좌측 능선을 바라보고 올라채기 시작했다. 마침내 능선에 올랐다. 사나운 바람이 눈발과 함께 귓전을 때린다. 모자를 뒤집어썼다. 쉐터 소매를 길게 늘여 손을 덮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절정에 이른 지리산의 단풍을 상상했었다. 또한 추위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길도 없는 능선의 잡목을 헤치고 나아가다 잠시 다리쉼을 하려고 주저앉았다. 작은 단풍나무 한 그루가 옆에 서 있다. 이미 갈색으로 말라버린 잎은 하얀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 장렬한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숙살지기가 이미 오래 전에 이곳 지리산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9시나 되었을까.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잔 데다가 다들 허기와 추위에 지쳐 있다. 대장님이 라면을 끓여먹고 가자고 하신다. 산등성이 바위 밑 옹색한 지형에 버너를 피웠다. 심총무의 강력한 휘발유 버너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훌륭하게 라면을 끓여냈다. 김밥과 떡을 꺼내 모두들 허기를 면했다.
오르막 능선을 따라 행진을 계속했다. 사방은 온통 눈꽃세상, 무채색의 향연이다. 늘푸른 소나무도 흰눈으로 칠갑을 한 채 서있다. 절경을 카메라에 담으려 했으나 손이 시려워 카메라 셔터도 누를 수 없다. 앞서가던 심총무가 외친다.
`치밭목 산장이다`
이 깊은 산 속에 건물 한채가 오롯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온다. 길을 잘못 온 것이다. 본래 우리의 예정 코스는 하봉-중봉-천왕봉 코스라 치밭목 산장은 거치지 않는 코스이다. 2시간은 허비했다는 대장님의 말씀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이젠 살았다. 대원사 쪽에서 올라온 등산객들, 벌써 하산하는 등산객들로 어두컴컴한 산장 안은 꽉 들어차 있다. 오랜만에 보는 호롱불을 앞에 두고 산장주인이 끓여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몸을 녹였다.
두터운 등산용 양말로 갈아 신고 자켓을 더 껴입었다. 그리고 목장갑 한 켤레를 얻었다. 대장은 목적지를 세석평전에서 장터목으로 바꾸었다.
치밭목 산장에서 천왕봉까지는 4km이다. 그러나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길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다. 설경을 카메라에 담으며 천천히 가는데 맞은편 봉우리에서 누가 부른다. 심총무이다. 짙은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봉우리에 서있는 심총무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는 다시 맨 뒤로 처지면서 동료들을 보살폈다. 그의 갸륵한 마음을 읽었다.
`이렇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걸 보니 여기가 써리봉인 모양이여`
논을 고르는 써레처럼 봉우리가 솟아있어서 써리봉이라 한다는 말을 어제 대장님한테서 들었다.
이 근처 봉우리 하나가 지리산 제 2봉 중봉(1875m)일 터인데 사방이 구름 속에 덮여 있어 알 수가 없다. 강한 바람이 눈을 몰고와 능선에 늘어선 나무에 사정없이 갖다 붙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그 모진 눈분배를 다 맞으며 서 있다.
동료가 쵸콜렛을 듬뿍 입힌 과자를 꺼내준다. 그러고 보니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그냥 따라나선 것 아닌가.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만든 강아지처럼 대한다(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는 노자의 말씀을 실감하면서 팍팍한 발걸음을 옮기다보니 마침내 천왕봉에 도달했다.
정상부근은 온통 바위로 되어있다. 정상에 오르다가 미끄러져 왼쪽 무릎을 세게 바위에 부딪혔다. 하도 아파서 한참을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천왕봉 동쪽 모퉁이에 감, 떡, 고구마 등을 진설하고 우리의 대간 종주를 알리며 무사산행을 비는 고유제를 지냈다. 소주 한 잔을 따라올리고 대장님이 축문을 외고 소지를 하였다. 소주 한잔씩 음복을 하였다. 다시 정상에 올라 빗돌을 둘러싸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천왕봉에서 장터목까지는 1.7km이다. 천왕봉이 출발점이니 첫날 대간이어가기는 1.7km 진행하는 셈이다. 사진을 찍느라 장갑을 끼었다 벗었다를 반복하다보니 손가락이 아리다. 총무의 두툼한 장갑과 바꾸었다. 장터목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내리막길이다. 통천문을 지나 곧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발전기가 가동되고 있었다. 이 악천후에도 산장은 등산객들로 붐빈다. 다시 라면을 끓여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였다.
4시에 하산을 시작했다. 중산리로 내려가기로 했다. 오늘 산행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이 여기서부터 시작되고 있음을 미처 몰랐다. 중산리까지 2시간 30분 소요된다는 팻말이 있다.
`여섯 시면 어두워질텐데...... `
울퉁불퉁 바위가 솟은 가파른 길에 눈이 살짝 덮여있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디면 그대로 꼬꾸라진다. 온 신경을 발바닥에 집중하면서 조심조심 내려갔다. 저 아래로 스노우 라인이 보였다.
`저 눈이 없는 곳까지만 가면 좀 속도가 빨라지겠지.` 그런데 가도가도 길은 눈에 덮여 있다. 팍팍해진 무르팍을 달래기 위해 털썩 주저앉아 쉬기를 수 차례, 마침내 눈이 쌓이지 않은 지점에 도달했다. 100m내려갈 때마다 기온은 0.6도씩 높아진다. 이를 감안해 보면 천왕봉 정상은 영하 7~8도 정도되지 않나 싶었다.
서둘러 하산을 계속하는데 6시도 안되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곧 칠흑같은 어둠이 우리를 둘러쌌다. 대장님을 비롯해 4명이 앞서 내려갔고 우리 일행 5명, 뒤에 4명이 내려오고 있다.
손전등의 불빛도 가물가물하다. 마침 배낭에 밧데리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카메라 밧데리가 다 닳아질 것을 대비해 4개를 사서 배낭에 넣어 둔 것이다. 손전등 2개를 새 밧데리로 교체했다. 그동안 동료들에게 진 빚을 일거에 갚는 듯 했다.
갑자기 뒤에 오는 사람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어두워지기 전에 `형 같이 가요`하고 외치던 심총무의 목소리를 듣고도 그냥 내려왔었다.
`만약 이들도 밧데리가 다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면 어찌 되는 건가`
휴대전화도 연결이 안된다. 긴급 회의를 열고 두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 4명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2시간 30분 소요된다는 구간을 3시간 30분 걸려서 내려왔다. 중산리에 도달할 무렵 일행이 내려오고 있지 않다면서 다시 올라가는 사람들을 만났다. 30분을 기다려 8시가 되자 우리 일행이 모두 안전하게 하산하였다. 맨 뒤 4명은 어둠 속에서 전등이 없어 조난당한 2명을 구조하여 내려왔다고 한다.
생필품 보급이란 제목으로 숱하게 습격을 당하던 함안 산청 구례 하동의 연고지마을들..빨치산 아들이 눈을 피해들어올때 짖으면 큰일이라고 갑자기 기르던 복실이를 잡던 가족들.묘사되던 피아골의 능선들..겨울의 지리산..아직 가보지못한 백두대간에 대한 목마른 설레임과 그리움을 담고 너의 종주기 연재를 기다린다.
나오는 지명 하나하나가 모두 정겹고 좋은 까닭은...그저 좋아서 떠난 나홀로 여행에서..풀한포기 나무 한 그루..천천히 음미 하듯 걸어간 바로 그길 그이름 이었기에....진주 통영 그길은 내고향 가는길..가장 존경하는 처사 남명의 산천재 앞에서 자못 감개로워 혼자 소주한잔 따루었던 길..산청 함양~!
첫댓글 대단한 일을 해냈군.. 축하허이
균아..기다렸던 종주기 첫회를 감동스레 읽었다. 산청과 하동 구례,함안 이란 지명은 늘 내가슴을 뛰게 만든다, "지리산"9권을 마지막으로 읽엇던 그때가 서른 한둘 때였던가? 아마 그랫을까/ 본질을 두고 볼때 사상이 오류이긴 하다만 책속의 이규와 박태영,이태,그리고 순이와 이현상,은 초겨울 하늘처럼 각자가 청량햇다
생필품 보급이란 제목으로 숱하게 습격을 당하던 함안 산청 구례 하동의 연고지마을들..빨치산 아들이 눈을 피해들어올때 짖으면 큰일이라고 갑자기 기르던 복실이를 잡던 가족들.묘사되던 피아골의 능선들..겨울의 지리산..아직 가보지못한 백두대간에 대한 목마른 설레임과 그리움을 담고 너의 종주기 연재를 기다린다.
규니... 어디에서 그런 에너지가 분출하는 걸까... 규리는 기억력두 참 좋다.. 서른 한둘 때 읽은 책 내용을 바루 읽은 듯 기억해 낼 수 있다는 것이 ...
파르티잔 ....아름다운 이름 같지 않아? 빨치산 해보면 너무 가혹해 보이고. 천왕봉 서릿발 아드득 한 곳에서도 내 이름을 불러주었네! 눈속에 남아있는 꽃 그 아름다움을 나는 기억하지! 마지막 저 한장의 사진이 가슴 저리게 한다.
파르티잔,,,,! 쟁이야? 맞네 네말처럼 그렇구나 아름다운 이름이다 .아드득 서럿발 투명한 옷을 입은 천왕봉에서 불러주는 이름...그렇지 가슴이 참말 저려지고 말고지..쟁이야 여긴 가을이 잔행중, 들녘마다 여름을 이긴 대궁에 보랏빛 꽃을 단..쑥부쟁이도 구절초도 아주 지천이다 .조용히 깊어지는 강물도 진초록
균이~대단한..........신념이다. 이념을 안고 쓰러져간 그들도 대단하다...
"징게 멩게 외애밋들?" 균아 먼소리가? 긴가민가 "여기가 거긴가 거기가 여긴가 그 소리가?" 하하~ 반가워서~..내도 가보고접다. 희야 란아 수나 배낭메고 우리도 함류하자 어잉~? 손바닥 붉은단풍이 온통 지천이더니 대원사 마당이.. 아고고~ 스러진다뤼이~~~.
징게 맹게 외애밋들=김제 만경 들판은 이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한 배미 (외배미>외애미)로 툭 터져 있다는 뜻
하~ 글쿤아.. ㅎ~
자못 엄숙 하기까지 한 멋진 그대들의 대간 종주기는...마치.지고한 신앙심에서 발원된 정열적인 순례자의 성지순례 같기도 하지만..그곳엔.경외심과 더불어 내강산 내국토를 깊이깊이 흠모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음이니...., 앎이란 사랑이 있으므로 그 빛이 더욱 빛난다.
나오는 지명 하나하나가 모두 정겹고 좋은 까닭은...그저 좋아서 떠난 나홀로 여행에서..풀한포기 나무 한 그루..천천히 음미 하듯 걸어간 바로 그길 그이름 이었기에....진주 통영 그길은 내고향 가는길..가장 존경하는 처사 남명의 산천재 앞에서 자못 감개로워 혼자 소주한잔 따루었던 길..산청 함양~!
그저 좋아라 하면서 눈먼채 지나친 그 길을 이토록 세세한 설명과 주석 까지 곁들여 다시 걷게 되다니...,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즐거워라~! 고마우이~~~ 허균 선생님~!
늦게 보았다...역시...ㅎㅎㅎ... 나는 낚시군이라서 언젠가는 섬진강 종주기를 써 봤으면 하는데... 무척 부럽고...얼른 가서 다음 편을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