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위치한 분지지형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남쪽에서 산지가 현저히 발달하고 있는데 동쪽 방면은 동구 식장산 에서부터 고봉산, 함각산, 개머리 산, 계족산 등의 줄기가 이어지며, 서북쪽으로는 금병산, 우산봉, 도덕봉, 백운봉 등 계룡산을 거쳐 형성된 산계가 논산시 두마면까지 이어지고 있고, 남쪽으로는 보문산이 주봉이 되어 그 사이를 유등천이나 대전천과 갑천이 흐르면서 북쪽의 금강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그 주변에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강과 그 주변에 구릉성 산지를 기반으로 대전지방의 사람들은 선사시대부터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삶을 이어왔다.
우리나라의 구석기문화는 경기도 연천 전곡리 유적을 통하여 약 27만년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전지방의 역사가 구석기시대까지 오를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바로 이웃한 공주 석장리 유적이다. 이 유적의 발굴 결과 12개의 문화층을 포함하고 있다. 그중 6층과 12층 에서 채집한 숯을 분석한 결과 30.690±3.000BP. 20.830±880BP의 절대연대가 나와 신빙성을 더해 주었다. 이로 해서 가까운 금강유역에 인간이 살았던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대전에 서는 2곳에서 유적의 징후가 나왔다.
대전지방의 구석기 유적은 구즉동의 오봉산 남쪽경사면 해발 60m되는 곳과 둔산동 유적이다. 이들 유적의 조사로 적어도 중기 구석기시대 말이나 후기 구석기 초기까지는 대전의 역사를 올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인공의 흔적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거나 유적의 성격이 확실하지 않은 약점은 있으나 지질시대로 3기 홍적세에 형성된 지층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그 시대에 인간이 대전에 살았다는 가능성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는 현상이다.
기원전 1만년 경이 되면 홍적세가 끝나고 충적세로 진입하는데 세계적인 추세로 보면 구 석기시대가 끝나고 중석기 시대를 거쳐 신석기시대로 진입한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기원전 6천년경 이전으로 소급된다. 신석기시대에는 인간의 거 주가 주로 물과 관계있는 냇가나 강가, 호숫가, 바닷가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례적으로 대전과 같은 내륙 지방에서 적지 않은 거주 흔적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둔산동의 유적은 신석기시대 후기(기원전2000∼1000)에 속하는 유적으로 농경과 고기잡이로 생활을 꾸려 나갔던 것을 알 게 해준다. 문화 계통으로 보면 서해안 신석기 유적의 전통을 강하게 갖고 있으면서도 유물의 손잡이 꼭지라든가 일부 무늬 내는 솜씨를 보면 한반도의 동북계통과도 연관이 있어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기원전 1000년경이 되면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무문토기문화가 시작된다. 이 무문토기 문화인들이 청동기를 사용하게 되어 청동기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청동기시대에 오면 좀 더 문화현상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대전지방에서는 전시대에 비하여 자료 가 훨씬 많아지고 그 내용도 풍부해져 비교적 자세히 그 문화양상을 알 수 있게 되는데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집자리를 비롯해서 고인돌, 석관묘 유적이 있다.
대전지방의 청동기 유적으로는 둔산동 유적, 충남대 정문 서쪽의 궁동 유적, 괴정동(현 내 동) 유적, 탄방동 세등선원 부지의 탄방동 유적, 유성구 원내동의 유적, 문화동 까치고개의 유적, 대청댐 수몰지역의 사성동 유적, 보문산 산정의 보문산 유적 등 그 문화유적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 많은 유적 가운데 특히 괴정동(현 내동)의 청동기는 한반도에서 가장 빠른 단계의 한국식청동단검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며 그 문화수준도 대단히 높은 단계이다. 이것은 충남지방, 나아가 대전지방이 청동기시대에는 청동기문화의 중심지 가운데 한곳 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청동기에 보이는 여러 현상은 이 단계의 문화가 요녕지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므로 선사시대에 충남의 서해안과 요녕지방 사이에는 어느 정도 빈번한 교류가 있어 이 통로를 통해 청동기문화가 들어왔다고 할 수 있게 되었다. 또 팽이형 토기문화의 집자리도 발견되어 북에서부터 점진적으로 내려오는 문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청동기시대와 백제시대를 잇는 초기철기시대의 유적으로 오정동과 구성동에서 원삼국 시대 움집터, 송촌동과 대화동의 토광묘 유물 등이 발견되고 있으나 확실한 문화 양상은 앞으로 연구에 의하여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2. 삼국 및 통일 신라 시대의 대전
한반도에 고조선이 성립되고 있을 때, 한강 이남에는 진(辰)이라고 불리는 부족 연맹체가 기원 전 4∼3세기경에 있었다. 그후, 진은 철기문화의 이주민을 받아들이면서 마한, 진한, 변한의 세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이때 대전지방은 마한의 영역에 속하였다. 마한은 54개의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대전지방에 존재한 부족국가로는 신흔국이 자리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족국가는 모두 지금의 유성과 진잠 사이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 시기 대전지방의 역사는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된다. 마한이 백제에 정복되면서 대전지방은 백제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다.
백제는 처음에는 마한의 작은 국가 중의 하나였지만 차차 세력을 키워 그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이어서 여러 세력들을 통합하고 안으로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3세기경 8대 고이왕(234-286) 때에는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4세기경 13대 근초고왕(346-375) 때에 마한의 남은 세력을 정복하여 완전히 통합하고 남해안까지 그 세력을 뻗쳤다. 이 시기에 대전지방도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으로 파악된다. 이때 대전지방은 백제의 군현인 우술군(雨述郡)으로, 그 치지는 회덕 지방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22대 문주왕(475-477) 때 서울을 웅진성(공주)으로 옮 겨 나라를 정비하고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따라서 대전지방은 백제 서울인 웅진의 위성역할을 한 지역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동성왕은 탐라국(제주도)을 복속시켰으며, 무령왕은 고구려의 공격에 대항하면서 국력을 길러 백제의 부흥을 꾀하였다 24대 동성왕 20년(498)에 사정성(沙井城, 지금의 중구 사정동)을 쌓고 한솔 비타(毗抒)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백제 관등에 한솔은 16품 가운데 제5 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 대전지방은 백제의 변경으로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정성은 성왕 때에도 목책을 설치했다.
25대 무령왕(501-523)의 뒤를 이은 26대 성왕(523-554)은 서울을 다시 사비성(부여)으로 옮겨 백제의 중흥을 꾀하였다. 성왕 때 백제는, 신라와 동맹하여 고구려를 쳐서, 잃었던 한강 하류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그 땅을 빼앗자 성왕은 신라와 싸우다가 관산성(옥천)에서 전사하였다. 대전지방에 금강을 경계로 한 산줄기에 많이 쌓여진 산성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시대 대전지방의 행정구역은 37군 가운데 하나인 우술군에 영속되어 그 밑에 노사지 현(奴斯只縣, 지금의 유성지방)과 소비포현(所比浦縣, 지금의 유성구 덕진동)이 있었다. 또한 대전 유성구의 진잠지방은 진현현(眞(貞)峴縣)이 있었는데, 지금 연산지방의 황등야산군(黃 等也山郡)에 예속되어 있었다.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고 멸망하였다(660). 백제가 망하자, 옛 영토에서는 부흥운동이 줄기차게 일어났다. 옛 백제 지역에서는 복신, 도침, 흑치상지와 왕자 풍이 부흥운동에 앞장 서 한때 그 세력이 대단하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실패하였다.
백제 부흥 운동은 대전지방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부흥 운동의 초기(660년 7월∼661 년 1월)에 정현(貞峴)에서도 궐기하였다. 이 정현은 바로 진현성으로 구 진잠관내에 속한다. 부흥운동의 제2기(661년 2월∼662년 5월)에는 대전지방에서 웅진도(熊津道)를 차단하는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웅진도는 보은·옥천방면에서 대전·유성을 거쳐 공주에 이르는 신라의 군량 운송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백제 부흥군이 웅진도를 차단하는 것은 공주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과 신라의 본군을 차단하여 당군을 고립시켜 백제의 부흥을 꾀하는 중요 한 일이었다. 백제 부흥군이 내분을 일으키자 당군은 대전지방 부흥군의 거점을 함락하였다. 즉 지라성(질현성), 윤성, 사정, 대산 등 웅진강 동쪽의 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연이어 진현성(흑석동 산성)과 내사지성(월평동 산성)을 함락하여 대전지방에서 활약한 백제운동은 종식을 고하였다.
백제를 정복하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였다. 백제시대의 우술군은 비 풍군(比豊郡), 그 영현인 노사지현은 유성현, 소비포현은 덕진현으로 개칭하였다. 그리고 진현현도 진잠현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3. 고려시대의 대전
후고구려 궁예를 물리친 왕건은 왕위에 올라 고려를 세웠다(918). 이어 경순왕으로부터 신라의 병합을 얻어 내는데 성공하였고(936). 다음 해에는 후백제의 신검을 공멸하는데 성공하여 완전히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고려는 건국과 함께 중앙관제를 정비하였다. 지방관제도 중앙관제가 확립되어 가던 성종 2년(983)부터 정비되기 시작하여 현종 9년(1018)에 일단락되었다. 고려의 지방관제 개편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대체로 명칭의 변화가 주였다. 995년(성종 14년)관제 개정에 따라 전국을 10도로 나누었는데 대전지방이 속한 도는 하남도(河南道)이다. 하남도는 지금의 충청남도 지역에 해당되며 공주(公州)·운주(運州, 지금의 홍성)등 11개 주를 관할하였다. 1106년 (예종 1)에는 관내도·중원도와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칭하였고, 1171년(명종 1)에는 두 도로 나누었으나 1315년에 양광도라 하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비로소 충청도라 하여 지금의 충청남북도의 행정구역이 형성되었다. 대전지방은 공주목에 영속된 군현으로 회덕현, 진잠현, 유성현이 통일신라 때의 행정구역을 그대로 이어왔고, 덕진현은 현종 9년에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의 대전지방은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자료가 적어 이 시대의 연구가 비어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특기할만한 역사적 사건이 있는데, 바로 공주명학소민(公州鳴鶴所民)의 봉기이다.
고려사회에서의 무신정권은 문벌귀족을 타파하여 신분제를 변동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지배층이 문신중심에서 무신으로 바뀐 이외의 피지배층의 관심대상인 수치체제나 지방관 수탈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특히 말단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인 소(所)는 왕실이나 관아에서 필요로 하는 수공업·광업·수산업 부분의 공물(貢物)을 생산하였던 곳인데 국가에 의해 수탈당하는 강도가 가장 높은 편이었다. 이것이 명학소민이 봉기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그들의 목적은 신분해방이었으나 국가가 이에 대하여 확실하게 보장하고 제반 대책을 수립해 주지 않을 때 그들이 바라는 바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로 정부타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명학소민의 봉기가 1년 반이나 계속되면서 충청도 전역을 확보하게 된 배경에는 공주 주변 농민들의 지지와 호응이 절대적인 지지와 호응이 절대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주 명학소는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공주 고적조에, 유성현 동쪽 10리되는 곳에있다 한 것을 보면, 대략 지금의 탄방동·괴정동·갈마동 일대에 해당된다.
1176년(명종 6) 망이(亡伊)·망소이(亡所伊)를 중심으로 명학소민은 가야산 근처의 손청 등과 연합하여 공주·예산·충주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놀란 정 부는 회유책으로 명학소를 충순현(忠順縣)으로 승격시켰으며,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는 조건으로 망이 등과 강화를 맺었다. 정부는 이들을 회유시킨 후, 주위의 반란 세력을 진압시켰고, 한편으로는 명학소민 재봉기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가두는 등 제반 조치를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다시 일어나게 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제 그들은 신분해방도 기존 지배질서체제가 무너지지 않는 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없음을 자각하고 정부 타도를 외쳤다. 그들은 정부 지방관뿐만 아니라 지배층 과 결탁하여 많은 토지와 노비, 그리고 소(所)를 장악하고 있던 사원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드러내어 가야사를 분탕하고 홍경원을 불태웠다. 한때는 청주목을 제외한 지금의 충청도 전 지역을 장악할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지니기도 했지만 손청·이광 등 연합세력의 패배로 인한 고립, 정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에 밀려 난은 진압되었다.
이 봉기는 고려 무신정권 이후에 일어난 민란 중 가장 규모가 컸던 것 중의 하나로서 무려 1년 반이나 계속 되었다. 이는 당시 지배층으로 하여금 피지배층을 위한 제반 조치를 강 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하였다. 이에 정부는 탐학한 지방관의 축출·토지 탈점의 방지·공역의 균등 등을 시행케 되었다. 이 정책은 기존 지배세력의 이권을 침범하지 않는 정도에서 한정되어 큰 효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봉기를 계기로 중앙에 특산물을 공납하던 소는 재검토를 요하게 되어 점차 소멸되는 하나의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또한 망이 등의 피지배층에서 봉기의 지도자가 나온 점, 정부 타도를 표방한 점 등은 백성들의 힘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어, 이후 만적의 난·경주민의 봉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고려는 역사적으로 외침이 가장 많은 나라였다. 그러나 대전지방은 한반도의 중남부에 위 치하여 큰 난을 겪지 않았다. 고려후기 왜구가 창성하여 금산지방과 개태사를 노략질 한 것과 유성에 침입한 것을 보면 금강을 따라 내륙 깊숙이 침입했던 왜구에 의해 피해를 본 것으로 보여진다.
대전지방의 고려시대 문화 유적은 큰 내용을 찾아 볼 수 없지만, 보문산의 보문사지와 불 상, 식장산의 고산사 등에서 그 모습을 겨우 찾을 수 있다.
4. 조선시대의 대전
1. 조선전기의 대전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새 왕조는 새로운 국토를 결정하는데 크게 고심하였다. 조선의 새 국토는 대전 근교의 계룡산과 지금 서울의 무악 등이 물망에 올랐다. 이 가운데 계룡산이 가장 유력하였다. 태조는 새 국도로 물망에 올랐던 계룡산을 친히 살펴보기 위하여 태조 2년에 임금의 행차를 계룡산으로 행하였다. 2월 7일 유성에 도착한 왕은 온천에서 하루를 머물렀다. 뒷날 태종이 임실현에 가서 무예를 닦을 때도 이곳에서 온천을 하였다. 왕실에서 온천을 이용한 것은 유성온천이 처음 있었던 일이다.
태조의 계룡산 정도는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계룡산은 풍수상의 신비성과 신도조성 등으로 인하여 이후 정감록을 비롯한 많은 전설을 남겨 신비의 영산으로 이 고장 사람들에 의하여 받들어졌다.
조선은 태종 13년(1413)에 전국의 군현제도를 새롭게 개편하였다. 이 때 대전지방은 고려 후기의 군현이 그대로 존속되어, 공주목의 임내(任內)였던 유성현과 덕진현은 폐현되어 공주목에 속하게 되었고 회덕현과 진잠현은 공주목의 영현이 되었다.
2. 조선후기의 대전
1) 지방행정
조선후기의 지방행정 구조나 행정담당의 계층이 전기에 비해 본질적인 변화를 보인 것은 없다. 조선후기에 지방제도의 개편이 있었으나, 대전지방의 군현은 전기와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외형적인 개편은 없었다 하더라도, 군현의 내적인 변화는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사회 각층에서 변화를 보였다.
조선후기 사회의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였다. 조선사회는 임진왜란과 양호란을 겪은 이후 인구의 증가가 큰 폭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초기 대전지방의 인구가 3,000 여명으로 추산되었는데, 1720년대 간행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나타난 인구를 종합해 보면, 공주목 지역 7,934명, 회덕현 9,994명, 진잠현 5,629명, 도합 23,557명으로 그 증가폭이 숫자상으로 8배에 이른다. 이러한 인구의 증가는 이 지역에서의 여러 측면에서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2) 지방의 교육(향교·서원)
조선은 유교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도 유교적 학식의 수양과 함께, 유교주의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유능한 관료의 양상에 있었다.
초등 교육은 서당이나 가정에서 받았다. 문자를 익히고 유교의 초보적인 지식을 쌓은 후, 서울에서는 4부 학당, 지방에서는 고을마다 설치되었던 향교에 들어가 증등 정도의 유교 교육을 받았다.
조선은 건국하자 한고을에 한학교(一邑一校)를 설치한다는 정책에 따라 대전지방에도 회 덕현과 진잠현에 향교가 설립되었다.
3) 호서사림과 호서학파의 형성
조선중기에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고 성리학도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지방의 유학자로는 조선초기 단종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이 이 지 방(지금의 동구 가양동)에 거주하여 후대에 영향을 주고 있다. 사림파의 등장과 함께 기묘명현으로 이름났던 김정도 이 고장에 성리학의 뿌리를 심어준 분이다. 그러나 대체로 이 시기에 이 지방에서의 사림의 등장은 다소 늦었다.
16세기 후반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에 이황과 이이의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란 양대 산맥이 형성되면서 호서지방은 조선후기 사림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호서사림이 형성되고 호서 학파의 학문적 특색이 적립되었다.
이이의 기호학통은 그 적통이 이 고장에 이웃한 연산의 김장생(1548∼1631)에게 이어지면 서대전지방의 사림들이 그 문하에서 크게 성장하였다.
김장생은 연산에 살면서 송익필과 이이의 문하에서 예학(禮學)과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그 는 이이의 성리학을 재천명하고 이를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적통이 되었고 또한 예학을 대성함으로써 조선 유학의 종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의 문하에서 400여 명의 문인을 배출하였는데 그 문하생의 대부분이 공주목과 그 영현에 거주하던 사림으로 이 들이 호서사림을 형성하였다.
호서사림은 인조반정 이후 정계에 중용되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다.
김장생(연산), 박지계(신창), 강학년(연기) 등 호서사림의 중심적 인물이 산림(山林)으로 중용되면서 김집(연산), 조극선(덕산), 송시열(회덕), 송준길(회덕), 권시(공주), 윤순거·윤선거(노성), 이유태(금산·공주), 이상(전의), 송기택(회덕) 등 호서의 사림은 산림으로 부름을 받아 크게 활약하면서 정치적 세력을 키워 나갔다.
호서사림의 학문적 연원은 이이에서 이어지므로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이이·성혼·송익필 등 기호의 학문적 바탕은 이이로 대표되어 김장생으로 이어졌지만, 이 학통은 호서에 자리를 옮기면서 그 특성이 심화되었다. 예학은 김장생으로 대표되었고, 성리학은 그의 적통을 잇는 송시열에게 이어지면서 정통성리학의 큰 맥락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기호학파는 호서에 옮겨지면서 호서학파를 형성하여 학통을 이어갔다고 보아야 하겠다.
대전지방에는 송시열, 송준길 등을 비롯한 김장생의 문인이 크게 활약하기도 했지만 권시 (공주), 윤휴(공주) 등 학문적 성격을 달리하는 다양한 학문의 전개를 보였다. 이같은 현상은 17세기 후반 대전지방이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핵심지로 주목되고 이후 이러한 학문 성향이 대전지방에 이어졌다.
4) 향촌의 자치조직과 동족마을
조선조의 중·후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기여한 것이 향약(鄕約)이었다. 중종때 조광조 일파가 처음 시행한 향약은 보수세력의 반발을 받아 조광조 일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명종·선조 때에는 사림이 다시 득세하는 추세에 맞춰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향약이 만들어져 군현이나 작은 마을을 단위로 하여 시행되었다. 향약의 시행과 병행하여 지방 양반의 명부인 향안(鄕案)을 만들고, 양반의 자치기구인 향회(鄕會)를 조직하여 공론(公論)을 모으고 유향소(儒鄕所)의 향권을 장악하였다.
대전지방에서는 회덕향약과 회덕향안이 함께 전하여 오고 있다.
회덕향약이 성립된 것은 1672년(현종13)이지만, 회덕향안은 그 서문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 이전에 구향안이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회덕의 구향안은 16세기 이전의 이 지방의 재지사족의 명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족에 의한 향촌사회의 지배권 확립은 16세기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한 차례 큰 진통을 초래하였다. 임진왜란기의 사회적 혼란은 재지사족들로 하여금 그들이 임진왜란 이전에 확보했던 치향지인(治鄕之人)으로서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원적인 방법을 취하였다. 첫째 현실을 인정하여 하층민들과 협력하는 방법, 둘째 사족들의 이념적 무기였던 성리학적 윤리강령을 앞세워 명분론을 더욱 강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덕향안은 후자의 경우였다. 17세기 회덕의 송씨문중에서 송준길·송시열 등 정치·학 문·사상적으로 위대한 인물의 출현으로 은진송씨는 재지사족으로서의 지위가 명문거족으로 성장케 되었다. 그리하여 송씨는 호서지방의 연산김씨(광산), 니산(노성)윤씨(파평)와 함께 3대 족성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던 회덕에서는 남송북강이라 하여 강씨가 두번째 그 외 김시, 이씨, 정씨, 박씨, 황씨, 한씨, 연씨, 변씨, 노씨, 양씨 등이 재지사족으로 회덕의 향권을 지배하였다.
조선후기 시족중심의 향촌지배체제가 이완되면서, 사족들은 과거의 향안·향규·향약 등을 통한 일향(一鄕)의 지배보다는 혈연적인 족계를 만들어 문중의 결속력을 다져 나갔다. 이 같은 현상은 16세기 이후에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으나 대전지방에서 그 시기가 17세기 이 후에나 나타나고 있다.
대전지방의 재지사족의 동족마을 형성은 어떠했을까? 동족마을의 형성은 문중활동이 보편화되는 시기와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지만, 이는 17세기 중엽이후에 나타나는 가부장적인 친족관념의 폭 넓은 정착과 진전의 결과로 그 형성시기는 지역에 따라 시차를 두고 있다. 조선후기 문중의식이 일반화되고 이에 따라 여러 부수적인 친족체계상의 변화가 이루어지면서 향촌사회 내에서는 문중의 조직이 활성화되어 족계의 조직이나 족보의 편찬, 동족마을의 형성발달, 문중서원·사우의 건립 등 다양한 문중 활동들이 나타난다. 대전지방에서는 은진송씨·충주박씨·안동권씨 등에서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으며, 이외의 재지사족들에게서도 그 자료가 있을 것으로 보이나 보고 된 것은 없다(대전지방의 동족마을의 상세한 내용은 대전시사 제1권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생략한다).
5)대전지방의 사회
19세기의 조선사회는 척족의 세도정치로 인하여 왕권이 쇠약해졌고, 관료체제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세도정치기에는 설상가상 격으로 자연재해가 잇달아 일어나서 기근과 질병이 만연하고 인구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총액제(總額制)에 의하여 각종 세금을 거두어 들이고 있어서 삼정(三政 : 전정·군정·환곡) 이 문란하고 농촌사회의 불만이 극에 달하였다.
농민들의 불만은 18세기 중엽부터 조직된 무장집단의 형태로도 나타났다. 19세기에 들어 와 민중의 불만은 조직적인 형태로 확산되었다. 대전지방에서도 이같은 민란인 민중의 항쟁이 있었다.
◆ 회덕민란
1862년(철종 13) 5월 12일에 일어났다. 이해 삼남지방의 민란에 영향을 받아 봉기한 농민군은 억울한 일을 호소한다는 명목으로 관아에 몰려가 현감 김낙균을 욕보였으며, 평소에 증오의 대상이 되어온 부정한 이서(吏胥)와 부호의 집을 불태웠다. 그뿐 아니라 청주목으로 침입하여 지탄을 받던 사람들의 집을 습격 불태웠다. 이 봉기에 연루되어 전 관찰사 조헌영은 유배되고, 현감 김낙균이 파직되었으며, 주동자 김진옥은 효수되고 그밖에 송만길·송일원도 처형되었다.
◆ 진잠민란
회덕민란과 같은 해 5월 18일에 발생하였는데 그 양상은 회덕민란과 거의 일치한 민중의 항쟁이었다.
5. 근대의 대전
1. 근대사회의 성장
19세기 중엽의 조선사회는 농민들의 저항운동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서향세력이 위협을 가해 오는 등 안팎으로 어려움을 맞았다. 이러한 때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재확립을 꾀하는 등 과감한 개혁정치를 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어려웠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적 접근에 대응하여 강경하게 맞섰으나 국내 외 정세의 변동에 따라 개항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랜 유교적 전통사회에서 새로운 근대사회로의 전환이 촉진되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적 침투가 계속되면서 조선의 농촌사회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외세의 침투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농민들은 정치의 개혁을 주장하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대규모의 동학 농민운동을 일으켰다(1894).
같은 해 3월 하순 동학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휩쓸자 북접의 충청도 동학교도 수천명이보은 청산을 떠나 공주목과 진잠현의 경계인 성전평(星田坪, 지금의 유성구 성전동)을 점거하고, 5월 13일에는 황토현 전투의 승전보를 듣고 회덕을 습격한 다음 다시 진잠에 모였다. 이때 모인 동학교도는 충청도의 교인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가운데 공주목, 회덕현, 진잠현 등지의 동학교도도 이에 합세하였다.
진잠에 모였던 동학 농민군은 일단 해산한 다음, 동학 농민군이 제2차로 궐기하여 북상할 때 우금치(공주)전투에 다시 참여했지만 일본군에 의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농민이 주축이 되어 외세에 대항하고 근대사회로 전진하는 계기를 만든 대규모의 근대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정부는 갑오개혁을 추진하여 근대국가로의 발전을 지향하였다. 갑오개혁에 이어 을미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일본의 침략적 간섭이 심했으므로 국민들의 반발이 컸다. 특히 명성황후가 시해된 데 대해 크게 분개하고 있던 국민들은 단발령이 공포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러한 국민들의 움직임은 일본의 침략세력을 막아, 나라와 민족을 지키려는 항일의병운동으로 나타났다.
항일의병은 을미사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을미의병의 최초 진원지는 대전의 유성·회덕 지방이다. 공주·진잠·회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잠현감을 지낸 문석봉(文錫鳳)이다.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의 장대(지금의 유성구 장대동)에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선봉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에 오형덕(吳亨德), 군향에 송도순(宋道淳) 등 지휘부를 조직하고 대전지방에서 의병을 모았다. 이때 좌의정을 지낸 회덕의 사족 송근수는 진잠에 거주하던 신응조와 함께 의병항쟁을 지원하였다.
유성의병의 공격 목표는 공주목 이었다. 이에 따라서 유성의병은 먼저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명의 의병은 유성 장대리로 돌아와 주민들의 의병참여를 독려하였다. 10월 21일에는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에게 동참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같은 달 28일 공주의 공암을 거쳐 공주목으로 진격하였다. 유성의 병은 공주의 와야동(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서 관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무장이 열세했던 의병진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유성·회덕·진잠 등 대전지방의 사민들에 의하여 전개된 항일투쟁이다. 이 사실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이 지방에서 반침략 의병투쟁이 있었음을 최초로 알려 주는 사실이다.
서양의 근대 문물이 들어오고 열강의 세력이 침투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의 근대시설이 갖추어져 갔다. 근대적인 통신·교통·의료시설이 마련되면서부터 우리의 문화 수준이 향상되어 갔다. 그러나 근대 시설이 우리의 자주적인 의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서 또 그들의 필요에 따라 마련되어 갔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일본은 대륙을 침략하기 위하여 부산에서 신의주를 잇는 간선인 경부철도를 부설하기 위하여 1898년 9월에 경부철도의 부설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1900년 3월에 노선이 확정되고 다음 해 6월에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공사를 착수했다. 대전은 경부철도의 중요한 통과지점이었고 공사를 진행하는 중요한 기지이기도 하였다.
1904년 6월에 대전역이 세워지고 같은 해 11월 10일 경부철도가 준공되어 다음 해 5월 25 일에 개통되었다.
1900년대 초 경부철도의 부설로, 대전은 오랜 전통을 지닌 한가한 농촌의 모습에서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신흥도시로의 발전이 약속되었다.
2. 일제 강점하의 대전
1904년 초 경부철도의 공사가 시작되면서 이 공사에 참여하는 일본인이 대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에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수비대의 설치, 한성 영사관 경찰대전순사 주재소, 대전역, 대전 심상소학교(1906년, 구 원동학교의 전신) 등 낯선 시설이 들어서고, 일본인 거류민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 살지 않는 원동, 중동, 정동 등 대전천의 낮은 지역에 주거지를 형성하였다. 대전은 경부철도의 개통에 따라 점점 도시로 그 모습이 변하여 갔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자 신흥도시로 발돋움하던 대전지방은 오랜 동안 공주·회덕·진잠 등의 지역을 포괄하는 몇 개의 군현 지역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일본인에 의해 추진된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대전군의 탄생을 보았다. 1932년에는 충남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지고 1935년에는 대전부로 승격되어 이에 따르는 각종의 관청과 시설이 설치되어 급속한 도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한민족은 일제의 무단통치로 말미암아 심한 탄압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빼앗긴 주 권을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로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하였고 이를 계기로 마침내 1919년 거족적인 3·1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대전지방에서 3·1만세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은 대전장(지금의 인동시장)터다. 산내에 살던 양정길(梁正吉)은 김로원(金魯源)과 함께 3월 6일 인동 장터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용두동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문화동에 있던 보병대가 출동하여 무차별로 사격을 가하였다. 이로 인하여 군중은 사상자가 나타나 해산되었다. 대전의 3·1만세운동은 그 뒤에도 인동시장을 비롯하여 가수원, 유성등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6. 현대의 대전
국내 외에서 줄기차게 펼쳐졌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민족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게 되었다(1945. 8. 15). 그러나 우리민족은 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여러 나라는 민주, 공산 양대 진영으로 갈라졌고 그 날카로운 대립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38도선을 경계로 국토가 분단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은 자유민주 국가체제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였다.(1948. 8. 15).
광복 후 대전지방의 행정구역은 일제 때의 제도를 이어오다가 1949년에 대전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 6·25전란으로 정부가 대전으로 임시천도(1950. 6. 28∼7. 14)를 하였다.
6·25전란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던 대전은 전후의 복구와 급속한 인구의 증가로 중부 지방의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도시의 확장에 따라 대전을 둘러쌓던 대덕군이 대전으로 편입되고 1988년에는 직할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995년 지방 자치제의 실시에 따라 대전광역시로 개칭되었다.
광복 이후 대전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6·25 한국동란이다. 전란이 일어나자 대전은 북한의 남침이 계속되어 대구로 옮겨질 때까지 임시수도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금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한·미 양군은 전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대전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또한 북한군의 주요 목표도 대전 공략이었다. 대전 방어를 맡은 미24사단은 북한의 4개 사단에 포위되어 용전하다가 「딘」소장이 행방 불명되고 미군은 후퇴하였다. 「딘」장군의 대전방어에서 얻은 며칠동안이 없었던들 부산의 최종 방어가 위급하였을 정도로 대전전투는 6·25전사에 길이 새겨지는 전투였다.
대전은 6·25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북 5도의 피난민이 이곳에 정착하고 곧 전후의 복구사업으로 전국에서 대전으로 모여 살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전은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골고루 모인 새로운 도시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은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로, 그리고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광역시로 중부지방의 중핵 도시로 모든 분야에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특히 1974년부터 건설하여 자리잡은 대덕연구단지는 한국과학기술의 중심으로 대전이 과학도시로 터전하게 하였다. 이와같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대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급속하게 성장한 도시이다.
자료 : 최근묵(충남대 교수)
[유적자료]
* 고인돌 - 지석묘(支石墓)
•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돌을 덮은 청동기시대의 무덤으로 거
석 문화의 일종
- 축조시기가 기원전 15세기까지 올라가지만,
- 우리나라는 기원전 3백년에서 기원후 1년으로 추정
• 탁자식 바둑판식 무지석식
• 한국과 일본에서는 지석묘(支石墓)
•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또는 대석개묘
• 영어로 돌맨(DOLMEN)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과 영국과 스위스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의 유럽 지역, 중동지역, 북아프리카지역, 인도 남부 지역, 자바,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지역등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한반도 전역의 고인돌은 북한 지역의 1만 4천기를 비롯하여 모두 4만여 기 세계적으로는 약 7만여 기로 추정되므로 4만여 기라면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을 훨씬 웃도는 숫자이다. 특히 전라남도에서는 2,200여 곳에서 무려 2만여 기가 발견되어, 단일 면적에 대한 밀집도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게다가 지난 2000년 11월 말, 우리나라 고창․화순․강화 지역의 고인돌 유적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충북 제천군 청풍면 황석리 고인돌
* 교촌동 칠성당지석묘군
시 문화재자료 32호 / 대전광역시 유성구 교촌동 산7-1
• 남방식(바둑판식) 고인돌(蓋石式)
• 표고 70m의 낮은 야산에 위치에 7개로 구성
• 크기는 일정치 않으며 2.1m×1.6m에 달하는것도있다
• 칠성 신앙과 결부되어 숭배 대상 - 부인을 중심으로 칠석날에 마을 우물에
서 용왕제와 고인돌 지역에서 칠성제를 지낸다.
• 갑천 유역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표고 70m의 낮은 야산에 위치해 있는 바위들이 칠성당 지석묘이다. 7기의 지석묘는 15 × 20m의 지역 안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이 지석묘들의 길이는 작은 것은 1m정도, 큰 것은 크기는 일정치 않으며 2.1m×1.6m에 달하는것도있다 . 주변은 소나무들이 들어차 있다. 마치 소규모 공원에 커다란 의자를 마련해 놓고 휴식처를 조성해 놓은 것처럼 아담한 풍경이다.
몇 개의 돌을 아래에 놓고 그 위에 큰 돌을 올려놓은 남방식 계통의 이 지석묘들 중 일부는 지석이 지상에 노출돼 있다. 이 지석묘군은 반경 2~3km안에 있는 원내동 및 대정동 일원의 지석묘들과 연계해볼 때 우리지역의 청동기 시대 묘제 및 문화양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한편 이 지석묘군 과 그에 관련돼 전설에서 "칠성댕이"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옛날에 아기를 못 낳는 한 여인이 이산에 올라갔다 북두칠성의 형상을 한 7개의 바위들을 발견한 이 여인은 바위 앞에 엎드려 백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들 낳기를 빌었다. 얼마 후에 이 여인은 아들을 낳아 소원성취를 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들이 대단한 영험을 지닌 것으로 믿게 됐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이 바위들을 칠성바위라고 불렀으며 마을 이름을 자연스럽게 칠성댕이로 불리게 됐다. 또 주민들은 칠성바위를 대상으로 당제를 지내며 해마다 마을의 무사태평과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 내동리(원내동) 고인돌
시 기념물 3호 / 유성구 원내동 1번지
• 남방식 3기와 북 방식 1기 등 모두 4기.
• 암소바위' 라고 불리던 이 고인돌이 처음 알려진 것은 1962년
• 충남방직 정문에서 현재위치로 이전
• 부락민들은 고인돌을 암소바위. 독 바위. 거북바위 등으로 호칭
'내동리 고인돌' 이란 본래 위치(옛 대덕군 진잠면 내동리 산 9-1번지)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 '암소바위' 라고 불리던 이 고인돌이 학계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62년이다. 그러나 충남방적공장 조성으로 1977년 8월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현 위치 옮겨졌다.
모두 4기로 구성된 고인돌군은 본래 80m 높이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었다. 1, 2, 3호는 각각 2-2.5m 정도 간격을 두고 거의 한 줄로 놓여 있었고, 4호는 이들로부터 서남쪽으로 15m 가량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발굴당시 기록에 의하면 1호 고인돌 뚜껑돌(개석)의 크기는 길이가 3.25m, 너비 1.86m, 최대두께 0.48m이다. 1호의 동쪽 2m 지점에 위치한 2호 고인돌은 길이 2.42m, 너비 1.7m, 최대두께 0.48m 로 1호와 비슷하게 동북으로 기울어 있다. 이들은 뚜껑돌의 윗부분만이 땅위에 나와 있었다. 뚜껑돌 바보 밑은 생땅(생토층)으로 지하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1호와 2호 고인돌은 본래 하나이던 돌이 둘로 나누어진 것으로 1호 고인돌에는 돌을 자르기 위해 파놓은 홈이 일정한 간격으로 남아 있다. 3호 고인돌은 2호의 동쪽으로 2.5m 가량 떨어진 채 뚜껑돌이 지상에 나와 있었다. 크기는 길이 3.5m, 너비 1.6m, 최대두께 0.7m로 역시 돌 아래 지하구조는 남아있지 않았다. 주위에서 삼각형의 간 돌화살촉과 무문토기편 약간이 발견되었다. 15m 떨어져 있는 4호 고인돌의 뚜껑돌 밑에서는 굄돌(지석)로 보이는 두 개의 돌이 발견되었다. 1, 2, 3호가 '변형고인돌' 혹은 '개석식(盖石式)고인돌' 인데 비해 4호는 이른바 '탁자식 고인돌' 혹은 '북방식 고인돌'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덮개돌은 길이 3.5m, 너비 3.5m, 최대두께 0.95m로 앞의 고인돌보다 크다.
발굴조사 결과 이 고인돌 묘역에서는 또 다른 석관묘가 1기 더 확인되었다. 후대의 훼손 및 자연파괴 등으로 인해 출토 유물은 매우 적지만, 송국리형 토기편과 비교적 늦은 시기의 화살촉들이 확인되었다.
* 대정동 고인돌 - 한우물
• 구석기시대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복합적인 성격
•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더불어 3기의 지석묘가 조사되었는데, 모두 북방식
• 청동기 시대 유물로 세형동검과 무문토기 출토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주거지, 토광 분묘, 요지와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구체적으로 청동기 유구는 주거지 5기, 석관묘 1기, 지석묘 3기가 조사되었으며 원삼국시대 유구는 주거지 7기, 토광 27기, 토광묘 1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백제시대 유구로는 토기요지 1기와 통일신라시대 기와요지 1기가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탄요 3기가 조사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주거지 15기, 민묘 18기가 확인되었으며, 정확한 성격을 파악할 수 없는 불명유구 12기와 시기미상 유구 10기가 조사되었다.
이 유적은 현재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한우물 동계(洞契)
- 300여 년 전 임효생(林孝生)이 전 재산을 마을에 기부 하고 돌아가시자 그 뜻 을 기리기 위하여 비석을 세우고(1724년(영조원년) 마을 공동재산으로 관리하면 서 여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마을의 경로사업, 효자, 효부표창, 마을 청소년들 의 장학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 매년 시월에 마을 사람 모두가 모여 한해의 결산 보고와 새로이 해야 할 일을 논의 결정한다.
* 임효생 이후에도 신상하와 조대장(조씨 성의 대장간)이라는 분도 전 재산
을 마을에 기증하는 선례가 이어졌다한다.
* 진잠향교
문화재자료 6호 / 대전시 유성구 교촌동 151
• 조선창건의 이념인 성리학 확산을 위해 태종 5년 1405년에 창건
• 회덕 향교와 함께 대전 인근 유학의 산실
• 향교의 기본인 대성전과 명륜당, 동서양재 등의 건물로 구성
• 대성전 내에 중국의 공자이외 사성(四聖)과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를
배향. 봄, 가을에 석전제를 올리고 있다
• 흥학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중앙간을 누각으로 만들어 아래로 통행
• 명륜당과 동서 양제와 대성전(大成殿)이 배치되어 있어서 전당후묘(前堂
後廟)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 동국 18현
배 향 시 기
배 향 인 물
비 고
고려
현종11년(1020년)
최치원. 설총
설총 : 현종 13년)
충숙왕 6년(1319년)
안향
1289년 주자서 도입
조
선
중종 12년(1517년)
정몽주
태종5년 복권 추증
광해군 3년(1611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숙종 6년(1680년) 배향
이 이. 성혼
경신환국 →남인축출. 서인집권
숙종 15년 출향
기사환국 →서인축출. 남인집권
숙종 20년 복향
갑술환국 →남인축출. 서인집권
숙종 43년(1717년)
김장생
중종이후 문묘종사 운동은 사림
주도하에 추진
영조 32년()1756년)
송준길. 송시열
영조 40년(1764년)
박세채
정조 20년(1796년)
김인후
고종 20년(1883년)
김 집. 조 헌
* 공자. 안자. 자사. 증자. 맹자
진잠향교는 조선 태종 5년(1405)에 창건되었으나 그 후 몇 차례 중수(重修)가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향교의 배치는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하여 입구 쪽으로 면하여 외삼칸(外三間)을 소슬삼문형으로 만들었는데, 흥학루(興學樓)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층(重層)의 누각(樓閣)으로 만들어 아래로 통행하고 위에는 누(樓)로 사용하였다.
이 외삼문을 들어서면 강학처였던 명륜당(明倫堂)이 있는데 그 앞 양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맞배지붕으로 된 동서양재(東西兩齋)가 서로 마주보며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명륜당 공간 후면의 높은 대지에 사괴석(四塊石) 담장을 두르고 여기에 내삼문(內三門)과 대성전(大成殿)이 배치되어 있어서 진잠향교는 전체적으로 명륜당과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하는 전당후묘(前堂後廟) 배치법을 따르고 있다.
1. 대성전
대성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획하였는데, 전면 반칸통(半間通)을 개방하여 전퇴(前退)를 두고 있는 개방형 평면이다. 창호(窓戶)는 정면 3칸중 양협칸(兩夾間)에는 채광을 위하여 정자살무늬의 교창을 달았고, 중앙칸에는 사분합(四分閤) 정자살문을 달았는데 사분합 문 가운데 중앙 2짝은 들어열개로, 양측 1짝은 여닫이로 각각 만들었다.
구조는 가공된 장대석을 갖고 2벌대로 합은 기단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주경(柱徑) 40㎝의 굵은 원형주를 세웠다. 공포는 무출목(無出目) 초익공(初翼工) 계통이나 판재로 된 익공의 끝을 장식화 하여 마치 이익공(二翼工)처럼 보이며, 창방(昌枋)으로 결구되어 있는 주간(柱間)에는 각간에 3개의 소루(小累)를 배치하여 주심도리(柱心道里) 장설(長舌)을 받쳐주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平柱) 사이에 내고주(內高柱)를 세우고 대량(大樑)과 퇴량(退樑)을 결구하였는데, 대량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량(宗樑)을 받고 다시 종량 중앙에 파련대공(波蓮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宗道里)와 함께 지붕 하중을 받고 있는 2중량5가연(이(二重樑五架椽) 가구로써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2 명륜당(明倫堂)
명륜당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획되었는데, 정면 3칸중 좌측 2칸에는 우물마루된 통칸(通間)의 넓은 대청을 들여서 강학(講學) 공간을 만들고 우측 1칸에는 온돌방을 들였다. 그리고 대청의 전면에는 사분합(四分閤)띠살문을, 측면은 외여닫이 판장문을, 후면에는 쌍여닫이 판장문을 각각 달았고 온돌방에는 외여닫이와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았다.
구조는 자연석으로 4벌대로 쌓은 기단위에 덤벙 주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는데 공포는 무출목(無出目) 초익공계통(初翼工系統)으로 구성하였고 창방(昌枋)위에는 각칸에 3개의 소루(小累)를 놓아 주심도리(柱心道里 ) 장설(長舌)을 받치고 있다.
가구는 전후 평주(平柱) 사이에 대들보를 걸고 그 위 양편에 동자(童子)기둥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치고 있는 2중량5가구연(二重樑五架椽) 가구로써 종량 위에 제형대공(梯形臺工)을 설치하여 종도리(宗道里)와 함께 지붕 하중을 받고 있으며,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석전제 (진잠향교)
‣춘,추향제(숭현서원)
종류
시대
관 학
사 학
고 등
중 등
중 등
초 등
삼국
시대
고구려
태학
경당
신 라
국학
고려 시대
국자감
학당, 향교
12 문도
서당
조선 시대
성균관
四학, 향교
서원
서당
시대별 교육기관
* 수운교 천단
• 조선 말기 이상룡(李象龍)이 창시한 동학 계통의 한 종교.
• 이상룡은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부처의 후신이라 하여 그를 교조로
삼아 교를 창립
• 1923년 본관을 서울에 두었으나 천도교와 교조문제로 대립하여 현
추목동(秋木洞)으로 옮겨졌다
• 교의는 유(儒)·불(佛)·선(仙) 삼교합일(三敎合一)의 동학사상을 근본으로 한
다 - 人 乃 天 [사람이 곳 하늘이라 하늘이 듣는 것은 백성이 듣는 것이
요 백성이 보는 것은 하늘이 보는 것]
• 주요 경전으로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통훈가사(通訓歌
詞) 훈법대전(訓法大典) 등
* 崔濟愚, 1824(순조 24) ~ 1864(고종 1)]: 1907년 신원
• 도솔천, 광덕문, 종각 등 3동으로 구분
• 1929년 4월 15일 창건된 목조건물로 경복궁을 중건한 최원식이 건축
• 앞면 3칸, 옆면2칸의 팔작지봉 다포계(多包系 )
• 천단 내에는
- 중앙에 하날님을 중심으로 해(나옹선사)와 달(수운천사)
- 동쪽에는 금강탑, 서쪽에는 무량수탑을 배치 ,목조6층으로 금박. 중앙 아미타탑은 일본인이 반출 - 東本願寺에서 보관타 반환
- 천단 앞에 단군, 석가. 노자. 공자의 위패를 모심
수운교는 이상룡(李象龍)이 창립한 종교로, 그의 스승이었던 동학 창시자 수운 최재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하여 하느님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한때 그 교세가 왕성하여 본부가 서울에 있었으나 교조문제로 천도교와 의견 차이가 생기자 이곳으로 옮겨와 1923년도에 창건하였다.
이 천단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계의 건물로 설계는 교주인 이상룡이 직접하고, 경복궁을 지은 최원식이 맡아서 지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도솔천(桃率天)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경내에는 천단 외에 광덕문(출입문)과 종각이 있는데, 종각은 높은 화강암 기단 위에 육각모양의 다포계 건물로 지어졌다.
수운교의 상징적 존재인 천단은 단순하게 꾸며진 정원 안의 높은 단위에 위치해 있다.
정원 주변에는 야트막한 담이 둘러 처져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문이 나있다. 정면에 있는 제일 큰 문이 광덕문이다. 57 평 규모의 천단 건물에는 12마리의 큰 용과 44마리의 작은용,88 개의 봉황산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북벽에 일월성신 조각과 동쪽에는 금강탑, 서쪽에는 무량수탑이 각각 목조6층으로 금박되어 있다.
또 4면에 불보살, 선관, 성군, 사천왕 조각이 있으며 서벽에는 동진보살의 탱화를 배치해 종교적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또 문살에 조각된 도깨비 문양과 처마 밑의 오색단청은 사찰건물과 많이 닮았다. 지붕에는 궁궐과 왕실 건축물 등에만 이용하던 2지 신상을 배치해 이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다. 수운교 천단을 비롯한 다른 건물도 6.20사업당시 다른 곳으로 이전될 위기에 처했으나 신도들의 노력으로 현재 자리에 남게 됐다.
천단은 건물 자체뿐 아니라 주변경치도 수려한데 병풍을 두른 듯한 금병산과 울창한 소나무 숲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면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 도솔천: 불교의 우주관에서 네번째 하늘로, 미륵보살이 지상에 강림하기위해 머물고 있는 천상의 정토세계임.
-수운교 석종(石鐘)
지정번호 :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 13호
이 석종은 두드리면 맑은 종소리가 나는 와우형(臥牛形 )의 큰 돌로, 쇠북소리와 같으므로 석고(石鼓 )라고도 한다. 수운교 천단 서편 화강암 석고 좌대에 안치되어 있다.(반대편 동쪽에 이와 자웅을 이루는 또 하나의 석종이 있다.)
이 돌은 보령군 청라면 황룡리에서 인근에 살던 교인 석호(石虎 ) 송종덕(宋鍾德)이 발견하였는데, 3일간 꿈에 석종이 나타나 수운교로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런 내용을 수운천사님께 고하니 「석고」라 하시며 수운교로 옮기라 말씀하셨다. 이때 옮기던 중 보령경찰서에서 압수하기도 했으나, 수운교 보령지부장 조용기가 1926년 겨울에 이곳으로 옮겼다. 석종의 신비스런 소리가 자연히 울리는 날에 후천개벽의 새 세상이 열린다고 한다.
* 김반, 김익겸의 묘 및 비
문화재 자료 7호 / 유성구 전민동 산 18-1
• 김반은 (1580년 선조18년 - 1640년 인조 18년) 사계 김장생의 셋째 아들
• 이조 정랑, 대사간, 병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
• 공신에게 내려주는 사패지(賜牌地)를 받아 묘역조성
• 신도비(글 김상헌. 글씨 송준길)
• 강화도에서 순절한 부인 연산 서씨와 아들 김익겸의 정려문 배치
• 사후 영의정에 추증 되였고 부인 김씨와 서씨가 합장
조선시대에는 이 인근에 전민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광산 김씨 문중의 묘 중 대전시 문화재 자료로 지정된 것이 김반의 묘와 신도비이다. 김반의 묘 주위에는 상석, 문인석, 묘비, 신도비 등이 있다. 봉분의 직경은 8m, 높이는 2.2m 이고 앞에는 12m의 장대석을 놓고 묘역을 조성해 놓았다. 묘의 왼쪽 앞에 있는 신도비의 글은 청음 김상헌 선생이 짓고, 글씨는 동춘 송준길 선생이 쓴 것으로 현종 2년(1661)에 세워진 것이다. 또 중앙에는 상석을 놓았고 좌우에는 문인석을 배치, 장중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묘의 바로 아래쪽에는 광산 김씨 문중의 제실이 있어 1년에 한번씩 후손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제를 지낸다.
그는 유명한 유학자인 사계 김장생의 아들로 자는 사일이고 호는 허주이다. 그는 문과 급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 모셨고 둘째아들 김익희와 함께 독전어사로 전투에 나가 병사들을 감독하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그때 부인 서씨와 셋째아들 김익겸도 강화도에서 순절하여 정려문을 세웠는데 이 정려문은 묘 아래쪽 동네입구에서 잘 보이는 곳에 있다. 그때의 공으로 김반은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김익겸 과 연산서씨 정려각-김반의 셋째 아들로 주전파로 유명한 사람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서 섬을 사수하며 항전을 계속하였으나 전황이
불리해 김익겸은 김상용,권수장과 함께 끝내 자분하고 말았다. 뒤에 영의정
으로 추증되고 광원부원군으로 추봉되였다. 그의 모친 서씨부인도 강화에서
피난하던 중 왕후와 세자를 모시고 있을 때 적이 강화도까지 오자 순절하신
분이다.
- 김만중(金萬重) 1637(인조 15) ∼ 1692(숙종 18). 대제학
* 숭현서원
대전시 기념물 제27호 / 대전 유성구 원촌동 산35-1
• 선조18년(1585 년) 용두동에서 삼현 서원으로 건립 : 임란으로 소실 ⇒ 광해군 1년(1609년) 현 위치에 송남수가 재건 : 「숭현(崇賢)」이라 사액 ⇒ 고종8년(1871) 서원 철폐령으로 철폐 ⇒ 2001년 복원
• 송남수, 송시열, 송준길, 등 거유들이 강의
•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8분을 모셔 팔현묘(八賢廟)라고도 한다.
• 사당, 강당, 동제, 서제 등이 완전히 갖추어져 옛 모습을 볼 수 있어 선조들의 충절 정신을 기리는 교육의 장
청금록은 성균관, 서원 및 향교에 출입하는 양반들의 출석부의 일종(양반 학생 명부)으로, 푸른색의 비단으로 표지를 한 데서 유래한다. 유안 혹은 유림안이라 불리어진다.
이 서원의 전신은 회덕의 충절지사인 충암 김정, 수천(守天) 정광필, 규암 송인수를 배향하는 사우로 출발하여 선조초 회덕의 용두록(龍頭麓)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자, 1609년(광해군 1) 송남수(宋枏壽)가 다시 건립하여 삼현서원(三賢書院)이라 하였고, 그해에 유생들이 조정에 청액(請額)하여 숭현(崇賢)이라 사액되었다.
그러나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으로 이 서원도 헐렸는데, 1994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사당, 별사, 강당 등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현재는 1667년(현종 8)에 건립된 비석만이 남아 있다. 묘정비는 신흠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모두 여덟 분의 유학자를 배향하고 있어 팔현묘라고도 불린다.
* 여흥민씨 - 사교루와 3세 7효
위 치 ; 대전광역시 유성구 도룡동
건 립 연 도 ; 16세기 초, 1993년 중건
유성구 도룡동 대덕초등학교 앞에 위치한 이 재실은 여흥 민씨 집의공 민충원의 재실로 현재는 18대 후손인 민황기씨가 거주하고 있다. 여흥 민씨는 단일 본관으로 고려 중엽이래 훌륭한 명신 거유와 조선조의 원경왕후(태종비, 세종모).인현왕후,명성왕후. 순종비 등을 배출한 가문으로 여흥 민씨 13세 사헌부 집의공 민충원과 배위 및 모부인 여산 송씨를 모시는 재실로 운촌공 민여검이 머물면서 이지역이 집성촌이 되어 살아오고 있다. 현재는 이곳에 '한국사교학술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주 건물인 영호암(永護庵) 뒤편에 있는 사교루(四敎樓)는 자손의 교육을 위한 서재로 후학들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현왕후 생부인 둔촌 민유중이 짓고 우암 송시열이 공자 문행충신(文行忠信) 사교(四敎)에 근거해 사교루라 이름 붙였다. 송시열의 제자 수암 권상하 선생이 현판을 썼다.
차남 단암 민진원(閔鎭遠)이 중수하고, 누(樓)의 이름을 송시열로부터 "사교(四敎)"라 지어 받았다.
편액(扁額)은 송시열(宋時烈)의 제자(弟子)인 수암 권상하(遂菴 權尙夏)가 썼다.
출처는 논어(論語) 문행충신(文行忠信) 구절이며,
뜻은 문학(文學)과 수행(修行)하는 방법을 가르쳐서
충의(忠義)스럽고 진실한 인간이 되게 함이라 한다.
1876년(고종13년)에 보수를 하였고, 1980년 다시 중수되었는데, 이 때의 중수기 현판 네 개가 걸려 있다.
- 민씨삼세칠효비
민씨 삼세칠효란 여흥민씨 중에서 18세 운촌공 민여검의 아들대로 부터 3세에 걸쳐 직계 6인이 세상에 돋보이는 효행을 하여 그 정신이 후인의 모범이 되었기로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서의 칠효자는 민여검의 아들 민평·민환의 형제와 민평의 아들 민광신·민광민 형제, 그리고 민환의 아들 민광경과 민광신의 아들 민경중, 민광민의 아들 민원중 등을 칭하는데, 이들은 세상의 명예와 부귀를 탐하지 아니하고, 가난한 중에서도 대를 이어 돈독한 효행과 유자의 덕을 수행하여 당시의 후세의 귀감이 된 인물들이다.
민여검
1564(명종)~
1627(인조 8)
민 평
민 광 신. 민 광 민.
민 경 중. 민 원 중.
민 응 중(민광경).
민 환
* 성북동산성(城北洞山城) - 백제시대
유성구 성북동(城北洞) 산 20-5 성재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8호
1 지형 및 주변환경)
유성구 원내동(院內洞)에서 성북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의 남쪽 표고 230m 산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산성에서는 서북쪽으로 유성산성(儒城山城)과 직접 연결되고 있는데 최고처에서는 시계가 양호하여 대전-연산(連山)간의 통로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2 체성(體城)
산성의 형태는 테뫼식 석축산성(石築山城)으로, 산성의 둘레는 약 450m 정도이다. 석축의 상태는 거의 붕괴되었으나 서벽의 일부가 남아있어 9단 정도의 석축을 확인할 수 있다. 동벽과 남벽은 대부분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원상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붕괴되었다.
3 성내시설(城內施設)
문지(門址)는 동북벽의 모통이에 위치하여 산의 정상부로 오를 수 있는 곳에 1개소 그리고 북벽의 중간부에 위치하고.있는 곳에 1개소 등 2개소가 확인되고 있다. 성내 동남고지(東南高地)에서 건물지가 확인되고 있으며 북문지 바로 근접된 곳에는 우물자리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산성의 내부가 무연고자들의 공동묘지가 되고 있어 모두 파괴되었다.
건물지 부근에는 격자문(格子文), 파상문(波狀文) 등의 경질토기편(硬質土器片)과 와편(瓦片) 등이 수습되고 있다.
* 성북동(城北洞) -잣뒤
성북동은 동북으로 원내동, 교촌동, 대정동, 계산동과 경계를 이루며, 남서로는 세동과 경계를 이룬다. 그리고 서북으로는 금수봉 능선을 경계로 공주군 반포면 계룡산과 접해 있고, 동남으로는 서구 봉곡동과 구계를 이루고 있다.
〔유래〕성북산성(城北山城)의 뒤쪽에 위치해 있어 잣뒤 또는 성북(城北)이라 부르던 지역이었다.
〔연혁〕행정동으로는 진잠동에 속하는 성북동은 백제 때 진현현(眞峴縣)에 속했으며, 신라 때는 진령현(鎭嶺縣)에 속했다. 고려 때는 기성부(杞城府)에 속했다가 고려 현종 9년부터 공주목(公州牧)에 속했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진잠현(鎭岑縣)의 지역이었으며 조선시대 말기 고종 32년(1895)에는 진잠군(鎭岑郡) 서면(西面)의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폐 때에 상성북리(上城北里), 하성북리(下城北里), 신천리(新川里)일부를 병합하여 성북리(城北里)라 해서 대전군 진잠면에 속했다가 1935년 11월 1일 대전읍(大田邑)이 대전부(大田府)로 승격할 때 대덕군(大德郡)에 속했으며, 1989년 1월 1일 대전시가 직할시로 승격함에 따라 유성구(儒城區)에 편입되었다.
잣뒤의 용바우
웃잣디의 가적골 골짜기 동쪽, 교촌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날망이에 있는 바위로서 옛날 이곳에서 장사가 태어났다 한다. 지금도 바위 위에는 아이를 낳을 때 그 아이를 받기 위해 끓은 무릎자국과 태를 자르기 위해 사용했던 가위 자국, 그리고 바느질 그릇의 자국도 있으며 또한 바위가 홈이 져서 여기에 고인 물로 아이를 씻겼다고 한다, 장사 남매가 놀다 오줌눈 자리, 앉은 자리 등도 남아 있으며 아이를 씻은 물은 지금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날이 가물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는데 성북동 아낙네들은 목욕재계한 후에 병에 물을 담아 솔가지로 막고 거꾸로 들어서 비가 오는 흉내를 내며 횃불을 밝히고 시루떡으로 젯상을 차려 용바위에 제를 올렸다 한다.
봉소사석조보살입상(鳳巢寺石造菩薩立像)
이 석조불상은 성북동 봉소사(鳳巢寺) 경내에 세워있는 석조보살입상(石造菩薩立像)인데 지방문화재 68호로써 고려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며 길이는 250cm이다. 이 부처는 본래 진잠 잣디산 기슭에 있었는데 언제인가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본다.
은진송씨정려(恩津宋氏旌閭)
성북동 동편 마을가에 세워진 정려문(旌閭門)이 다. 조선 순조 때 여철영(呂喆永)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죽자 부인 송씨(宋氏)가 남편을 뒤따라 목을 매 자결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매 나라에서는 아내 은진송씨에게 열녀(烈女)의 정려(旌閭)가 내려져 이곳에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진 것이라 한다.
* 적오산성[赤鰲山城]- 백제
유성구 덕진동(德津洞) 산 19-1 외
대전광역시기념물 제13호
대덕연구단지 에너지 연구소의 서남쪽에 위치한 표고 255.1m의 적오산 정상부에 축조된 테뫼식산성으로, 덕진산성으로도 불린다.
이 산성 내의 지형은 동고서저의 형상이며 성의 평면형태는 마름모꼴을 하고 있다.
이 산성은 동남쪽으로 계족산성 및 연축동산성과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인 성벽의 축조방법은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협축기법에 의하여 축조하였으며, 성체는 토사에 묻혀있거나 대부분이 붕괴되었으나 石壘가 융기되어 있어 그 윤곽선은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이 산성의 둘레는 730m 정도로 표고 255m의 정상부를 최고처로 하여 동남벽으로 삼고 산능선을 따라 축조되어 등고선 230m 선의 북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곳에 북문지가 있다.
이 곳에서 성벽은 등고선 210m 선으로 연결되고 있다.
여기에는 서문지가 있고, 성벽은 이곳에서 동쪽으로 꺾여져 축조되어 동문지로 연결되어 있다.
현재 내벽 높이는 약 2m 내외, 외벽 높이는 약 6~8m 정도이다.
남단부의 성벽은 내벽 높이 1.5m~2m, 외벽 높이 5m~6m 정도로 잘 남아 있다.
城石이 많이 유실되어 토성 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순수한 석축에 의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의 원상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은 북벽의 중앙부로서 길이 약 10m, 높이 약 6m 정도가 잔존해 있으며, 이곳에서의 최대 높이는 8m에 달한다.
여기에 나타난 축성기법을 살펴보면 자연할석을 외면을 맞추어 가로쌓기 하였으며, 그 적심부는 면석과 비슷한 크기의 석재로 서로 엇물리도록 축조하였다.
외벽은 성벽의 기저부에서 상부로 올라 갈수록 조금씩 물려쌓다가 2/3선 높이에서는 거의 수직으로 축조한 규형을 나타내고 있다.
문지는 동, 서, 남, 북에 각기 1개소씩 4개소가 남아 있는데 문폭은 대체로 2.6~2.8m이다.
또한 남문지에서 약 30m가량 떨어진 곳에 우물지 1개소가 남아 있는데, 직경 1.2m의 원형으로서 2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다.
깊이가 약 60㎝ 정도 되는 이 우물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성내에는 4개소의 건물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군초소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의 남쪽에 형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40m×40m의 평탄한 대지가 있으며, 남문지 안쪽에도 2개소의 건물지가 있다.
이곳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다양한 기와편과 토기편들이다.
이들은 백제시대 유물을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 및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 안산동산성
유성구 안산동 산 40-42번지 시 기념물 6호
유성구 안산동과 공주군 반포면 송곡리와의 시·군계에 있는 표고 226m의 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 내 지형은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은 형상으로 남벽과 서북벽과의 고저 차이는 40m이다. 따라서 서벽이나 북벽에서 바라보면 3중으로 구축된 성곽같이 보인다.
이 산성의 서쪽에는 금강의 지류인 용수천이 흐르고 있으며, 성내 高臺에서는 대전에서 공암 및 대평리를 거쳐 공주에 이르는 양통로가 잘 내려다보이고 있어 공주를 방어 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이 산성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500m이다.
성벽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內托外築하였다.
성벽 일부에서는 융기된 석루상을 볼 수 있는데, 내벽 높이 1.1m, 외벽 높이 6.3m, 상부 폭이 2.3m이다.
이 산성의 축조 방법은 화강암 및 자연석재의 가로쌓기와 모로쌓기를 병행하여 외면을 맞추어 축조하였다. 또한 성체의 내탁부분은 면석과 비슷한 석재로 적심하였다.
현재 남벽의 외벽고는 22단의 층수에 3.6m이며, 북벽의 외벽고는 6.3m이다.
이 산성의 최고처에는 방형으로 담을 쌓은 건물지가 있다.
담의 둘레는 약 100m에 달하며, 높이는 1.5m이다.
이 시설물은 창고지로 짐작되며 남쪽으로 통로가 나 있다.
성내 문지에는 서문지와 남문지가 있다.
그 중 서문지는 그 형태가 고대산성으로는 드물게 원상에 가깝다.
이 서문지의 문폭은 4.9m이고, 문지 양쪽 측벽의 육축폭은 5.7m이며, 높이는 5m이다.
남문지는 남벽과 남서벽이 연결되는 부분에 시설되어 있는데 파괴가 심하다.
한편 동벽의 끊어진 부분을 오늘날 통로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 통로의 폭은 2.8m이다.
산성 내에는 내호로 보이는 통로가 8~12m의 폭으로 돌려져 있으며, 백제 시대의 경질토기편과 와편들이 수습된다
* 기성관(杞城館)유성구 원내동 213-4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
조선시대 진잠현(鎭岑縣)의 관아 건물 중 하나로 교촌동(校村洞)에 있었던 것을 1934년경에 이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다.
평면은 앞면 4칸, 옆면 2칸으로 나누었는데, 오른쪽 3칸에 넓은 대청을 들여 공무를 수행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그 옆에 1칸의 온돌방을 들여 숙소로 사용하였다.
동향(東向)을 하고 있는 작은 규모의 건물로 약간의 변형이 있었지만, 이 고장에서 조선시대 관공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다.
건물의 정면에 “기성관(杞城館)”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 을미의병의 효시 문석봉
항일의병은 을미사변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을미의병의 최초 진원지는 대전의 유성·회덕 지방이다. 공주·진잠·회덕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는 진잠 현감을 지낸 문석봉(文錫鳳)이다.
문석봉은 1895년 9월 18일 유성의 장대(지금의 유성구 장대동)에서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선봉에 김문주(金文柱), 중군에 오형덕(吳亨德), 군향에 송도순(宋道淳) 등 지휘부를 조직하고 대전지방에서 의병을 모았다. 이때 좌의정을 지낸 회덕의 사족 송근수는 진잠에 거주하던 신응조와 함께 의병항쟁을 지원하였다.
유성의병의 공격 목표는 공주목 이었다. 이에 따라서 유성의병은 먼저 회덕현을 급습하여 무기를 탈취하였다. 이어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00여명의 의병은 유성 장대리로 돌아와 주민들의 의병참여를 독려하였다. 10월 21일에는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에게 동참을 요구하였으나 거절 당하자 같은 달 28일 공주의 공암을 거쳐 공주목으로 진격하였다. 유성의병은 공주의 와야동(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서 관군과 일전을 벌였으나 무장이 열세했던 의병진은 이 전투에서 패했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유성·회덕·진잠 등 대전지방의 사민들에 의하여 전개된 항일투쟁이다. 이 사실은 일제의 국권침탈에 이 지방에서 반침략 의병투쟁이 있었음을 최초로 알려 주는 사실이다.
첫댓글 선생님 자료 넘 감사합니다. 그런데 사진이 보이지 않는데 어찌 하면 볼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3기 김순이 soclsrn1965@hanmail.net
또 배꼽? 글자만 보시고 메일 주소가 확정되면 각자 메일로 보내겠습니다. 사진은 월요일 ppt로 설명시 볼수도있구요.
항상 애써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자료 잘 보았습니다. 날씨가 찹네요 . 건강조심하세요
우리 유성문화유적 자료!!! 반갑고 고마운데 어쪄죠. 저도 김순이님처럼 사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귀여운 배꼽만 보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
김영환선생님 나는너무 몰라요 이제자료찿았어요 넘감사해요
잘보려구 가져갑니다 김영환선생님 감사해요. 한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