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임말
이정록
커피 나오셨습니다.
아메리카노 시키신 분
커피 나오셨습니다.
커피 한 잔 값이
제 시급에 맞먹지요.
당연히 높임말을 써야지요.
왕관을 쓰시고
눈꽃빙수께서 나오셨습니다.
당연히 존댓말을 써야지요.
세상은 언제나 성에처럼 내치는
냉정한 얼음이라니까요.
커피가 나오시면
진동 벨에 불이 들어오실 겁니다.
천국의 맛으로 인도하실 겁니다.
엔젤 인 어스, 두 손으로 잘 받드십시오.
태초에 빛이 있으셨지요.
부르르, 전율이 있으셨지요.
―《시와소금》, 2017년 봄호
▪시 읽기
존댓말은 어떤 대상을 높여서 말할 때 쓰는 말이다. 특히 우리말은 어떤 나라 말보다 ‘존댓말’이 발달되고 또 두루 쓰이고 있어서 어른을 존경하는 예의지국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높임의 대상은 분명 사물이나 자연이 아니다. 사람이고, 손윗사람이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 젊은이들의 전통적 존장의식이, 물질적주의적이고 상업적인 경제의식이 촉발한 과잉 친절병으로 하여 사람이 아닌 물건(상품)에 대한 존대로까지 확대(?)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널리 퍼져 있다, 우습다.
이 우스운 장면을 서정적 자아는 시치미 떼고 ‘당연히 높임말을 써야지요.’라고 말한다. 아이러니 시이다. 현대적 삶의 모습을 읽고 씹음으로써 풍자적 쾌감을 맛보게 된다. 이런 풍자시들은 난해하면 바라는 바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으므로, 쉽다. 그러면서 냉정한 얼음 세상에서 긍정의 따뜻함을 보태고 싶어 하는 서정적 자아의 목소리에서 ‘깊은 웃음’까지 선물 받는다.
아메리카노 커피, 눈꽃빙수 등의 상품이 인간의 경제적 가치(자아의 시급)와 맞먹거나 월등하여 상실된 휴머니즘, 찾아야 한다고 들고 나온 반어적 풍자의식은 이 시에서 너무 확실하다. 이러한 내용 요소는 이 시에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어김없이 찍어 놓은 마침표의 형식적 장치와 조응하면서 독특한 언어미의 패턴을 구현했다. (추천 서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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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 횟집에서
조양상
동기들 모임이 야릇해졌다
고기든 괴기든 안가리던 먹장어들이
이젠 곰치껍데기처럼 마냥 미끌거린다
저번 일공 모임 메뉴는 붕장어 아나고
누구 애처가 궁해, 해대려海大鱺* 들이대는지
갯장어 하모횟집으로 이번 모임을 정했더니
안하고는 못베긴다나 설레발도 하모 하모다
젊어서는 야한 숫자라고
10회를 일공회, 열기회라 이름 짓더니
이제는 서빙 아지매 치마폭이 눈을 흘겨도
뱀장어들 건배 삼창은 늘 ‘씨입~회’다
일 잘 저지르는 하고재비 개장어라서
미꾸라지처럼 동기회장 몇 년간 손사래 쳐왔는데
조선소 명퇴당한 갯장어들 마당쇠 내 역할은
자연산 파란바다 알약 공급책, 꾀장어가 어울리겠다
*해대려 : 1814년(순조 14)에 정약전(丁若銓)이 저술한 어보(魚譜). 정약전이 귀양가 있던 흑산도 연해의 수족(水族)을 취급한 어보다. 자산어보에서는 붕장어를 ‘해대려(海大鱺)라고 일컬었다.
―《시와소금》, 2017년 봄호
▪시 읽기
시적 화자는 동기회의 회장으로서 저번 하모횟집에서 있었던 모임에 대해 재미있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의 의미적 구조는 단순히 붕장어 회를 먹었다는 것인데, 왜 이리 맛이 좋은가.
말장난[言語遊戱, Pun]의 즐거움이구나.
인간은 놀이 인간[Homo Ludens], 문학은 말놀이, 시는 그 놀이의 원조? 정화(精華)! 그래 이런 게 진짜 재미지. 심각한 의미의 탑만 쌓으면 고상하고 아름다운가. 열매보다는 꽃이지. 꽃은 어떻게 피었던가.
우선 자신을 포함한 동기 친구들을 미끌미끌한 뱀장어로 바꾸었는데, 비슷한 뜻과 소리들이 어우러져 미끌미끌하다. 먹장어, 붕자어, 갯장어, 개장어, 꾀장어, 해대려, 하모, 그리고 고기와 괴기, 해대려海大鱺 등등, 펀이 질펀하게 널렸구나. 먹장어는 밤에 민첩하게 활동하며, 다른 어류에 달라붙어 뼈만 남길 정도로 철저히 파먹는다는데, 동기 친구들 먹장어처럼 식욕이 왕성하구나. 그래서 ‘해대려海大鱺 들이대는’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건강한 동물성으로 살아가는구나. 하고재비인 자신은 그 중 개장어, 또는 꾀장어구나. ㅋㅋ, ㅎㅎ∼. 10회 졸업생인 이 친구들 모여서 ‘씨입~회’를 외치며 건배 삼창하는구나, 건강하니까. 교훈이 아니라 쾌락이구나.
그런데 이 친구들 명퇴를 당한 갯장어들이었네. 이들이 이렇게 모이니 ‘하모하모’라니까.
이런 해학이 펼쳐진 뒤에는 실직과 늙음으로 뭉쳐진 ‘명퇴’라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구나. 아이러니의 한 변형으로서 언어유희는, 단순한 말장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기지와 날카로운 어조로 풍자의 형식이 된다는 사실, 확인되는구나. 날카로운 따뜻함 속에서. (추천 서범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