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누가복음 17장 11-19절 / 11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4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마을 입구 이르러 들어가실 때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멀리서 보고는 서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문둥병자 열 사람이 마을 입구에 들어선 예수님을 보고서는 가까이 하지는 못하고 멀리서 보고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줄 것을 간청한 것은 자신들의 병이 예수님에게 옮길 것을 걱정해서가 아닙니다. 문둥병이라고 불리는 병은 나병, 또는 한센병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병은 나병균에 감염되어 걸리는 병입니다. 문둥병은 나병균이 피부, 말초신경계, 상기도의 점막을 침범하여 조직을 변형시키는 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제3군 법정 전염병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문둥병은 나병균이 원인이지만 어떻게 해서 이 병에 걸리는지의 정확한 감염 경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문둥병은 치료받지 않은 환자에게서 배출된 나병균에 오래 동안 접촉한 경우에 발병하며, 침입경로는 피부 또는 호흡기를 통하여 체내로 들어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접촉자들은 나병균에 대한 저항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걸리지 않습니다. 전 세계 인구의 95%는 나병[한센병]에 자연적인 저항을 갖고 있습니다. 나병균을 배출하는 환자의 경우도 리팜핀(리팜피신) 600mg(4알)을 1회만 복용하여도 체내에 있는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합니다. 이 병은 성적인 접촉과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병[한센병]은 유전되는 병도 안입니다. 가족 내 한센병 환자가 있는 경우에도 감염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치료중인 환자가 가족 내 있다 하더라도 감염되는 경우는 240만 명중 1명 정도입니다. 따라서 나병[한센병]균에 걸린 문둥병자는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병에 걸린 사람은 이 병의 진행으로 인해서 신체가 변형되어 흉한 모습을 갖게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가까이 하지 않는데다가 이 병에 감염될 것을 우려하기도 하고, 이 병이 마치 천형(天刑)인 것처럼 여겨 나병환자 스스로도 사람들을 가까이 하는 것을 꺼리는 까닭에 자의반 타의반 격리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표적인 곳이 소록도입니다.
유대인은 문둥병자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 병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며 멀리 합니다. 그것은 이 병이 의학적으로 사람들에게 감염되는 병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그들의 종교와 삶의 관습에서 문둥병자는 가까이 하지 않으며 격리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서 문둥병자를 부정한 자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문둥병자라고 할 땐 우리들 사회에서 말하는 나병[한센병]에 걸린 문둥병자와는 그 개념이 다릅니다. 문둥병이 성경에서 처음 언급된 곳은 출애굽기 4장 6절입니다. 이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 왕 바로에게 보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실 때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해주는 것으로 그의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낼 때 문둥병이 발하여 손이 하얗게 되게 하셨다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 꺼낼 때는 어린아이 손처럼 부드럽게 하는 이적을 행하신 것에서입니다.
그리고 다시 문둥병이 다루어지고 있는 곳은 레위기 13장에서입니다. 이곳에서는 누구든지 피부에 부스럼이나 뽀록지나 어루러기가 생겨서 그 피부가 문둥병 같으면 제사장 아론이나 제사장인 그의 자손 가운데 한 사람에게 데리고 가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그 피부를 살펴 문둥병인 것이 확인이 되면 제사장은 그 사람이 부정하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문둥병은 아닌 것으로 보이면 그 사람을 이레 동안 격리시켜 상태를 두고 보고서 환부가 더 이상 퍼지지 않으면 그 사람을 다시 이레 동안 격리시켜 두 이레가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의 환부를 살펴 다른 곳으로 번지지 않고 아물 기세가 보이면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깨끗하다고 선언하라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피부에 난 병은 문둥병이 아닌 부스럼이나 그와 같은 단순한 피부병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이 깨끗하다고 선언하였는데도 환부가 낫지 않고 더 퍼졌으면 그 사람은 다시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 병이 피부병인지 아닌지를 판결 받아야 하며 제사장은 그 사람을 다시 살펴보아 병이 퍼져 다른 피부로 번졌으면 그 사람이 부정하다고 선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의 피부에 번진 병은 문둥병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문둥병인지 단순한 피부병인지 의심스러운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든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게 했습니다. 제사장은 그 사람의 피부를 자세히 살펴보아 그 상태가 심하고 또한 이미 상태가 오래되어 문둥병이 의심할 바 없이 확실하면 그 사람은 부정한 자라고 선언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문둥병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경에서의 문둥병은 나병[한센병]과는 다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문둥병은 나병[한센병]균(Mycobacterium leprae)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종류의 피부질환을 말하는 것으로 원래의 뜻은 깨끗하지 못한(unclean), 거룩하지 못한(unholy), 부정한(profane)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나병[한센병]과 똑같은 의미는 아닙니다.1)
비록 성경의 문둥병이 나병[한센병]에 의한 문둥병은 아니지만, 그래서 나병[한센병]과는 다른 질병에서의 문둥병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이는 나병[한센병]에 의한 문둥병을 제외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나병[한센병]도 피부질환에 의한 병이기 때문에 피부질환에 의한 악성 피부병을 비롯하여서 피부질환에 의한 병의 하나인 나병[한센병]도 포함하여 총칭하여‘문둥병’으로 말해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문둥병에 걸린 자들은 마을 안에 있지 못하고 자신들을 마을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서 떨어진 곳에 격리한 채 살았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서 전염성의 피부병 증세가 나타나는 문둥병이 발하면 제사장은 문둥병의 진행 상태를 검진하기 위해 그를 격리하고 관찰[검진, 진찰]하여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간은‘이레’ 곧 7일간이었으며, 이레가 지나서 관찰하였을 때 문둥병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으면 제사장은 다시 이레 동안 격리하여 두었다가 모두 두 이레가 지나고 나서 그 사람을 다시 관찰하여 문둥병자의 환부를 본 결과 다른 피부로 더 이상 번지지 않고 아물 기세가 보이면 제사장은 그 사람에게 깨끗하다는 판결을 내리는 선언을 하게 한데 따른 격리의 기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에서의 문둥병은 의학적인 관점에서가 아닌 제의적인 관점에서 이 병에 걸린 자의 격리가 있었습니다. 성경에서의 문둥병은‘부정’이란 범주에 속하였습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려 있어 부정하다고 판정을 받은 사람은 정결한 공동체에서 축출되는 것에서 격리되어 있었습니다. 문둥병이 몸에 퍼져 있는 사람은 부정한 상태에 있어 정결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접촉해서는 안 되므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 수가 없어 마을 밖에 머물러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레 13:46).
그에 따라서 문둥병자는 제의적인 원리에 의해서 마을 안에 있지를 못하고 마을 밖에서 은둔처를 두고 일정한 기간 격리된 상태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에게 정해진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을 행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경계를 지나가시게 되어 이 지역의 한 마을을 들어가시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한 마을을 들어가시는 것은 우연한 기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이곳의 한 마을을 들어가시는 것에서 마을 밖에 있는 문둥병자들이 자신을 보고 만나게 하는 준비된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구원 얻는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한 마을을 들어가시는 일을 하신 것은 이곳의 한 마을 어구에서 만난 문둥병자 열 사람 중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몸이 깨끗이 낫고 예수께 감사를 드리는 것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에 의해서 행해진 것이며, 이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는데, 그는 사마리아인인 이방인이었다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불신앙에 있는 유대인과의 차이를 말씀해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인들에게서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독특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이들을‘이방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이방인’이란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주로 쓰이는 것은 다른 종족인을 뜻하는 타국인으로 유대인이 아닌 외국 사람을 뜻하는데 이교도의 신앙에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만, 본문 누가복음 17장 18절에서는 이 단어가 사마리아인에게 사용된 것입니다, 이들은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으로 여겨져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절반은 이방인의 의심스러운 혈통을 지닌 이스라엘 사람들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방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에게서는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접경에 있는 문둥병자들이 거하고 있는 곳에는 유대인 문둥병자만이 아니라 사마리아 문둥병자도 함께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자로 취급합니다만, 문둥병자 촌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다 같이 부정한 자로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에게서 정결한 자는 없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 한 마을에 들어설 때 이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함께 섞인 문둥병자를 만나는 섭리에 있으신 것은 의도한 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앞서에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누구일지를 여러 가지 말씀을 가지고 말씀해 오셨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자는 그에게 있는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할지라도 그 믿음에 의해서 죄 용서의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있은 그는 이제 예수님에 의해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것을 말씀하시게 됩니다(눅 17:20-37). 본문에서 예수께서 문둥병자 열 사람을 만나시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이 그 믿음에 있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에서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을 하시는 것에서였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의 내용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두 지역 사이에 있는 접경 마을 입구 이르러 들어가실 때 문둥병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멀리서 보고는 서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예수님은 소리쳐 외치는 그들을 보시고는 그들에게 말해주었습니다.“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 주도록 해라.”이 말을 듣자 열 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제사장들에게 문둥병에 걸려 있는 자기들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길을 가는 중에 그들 중 하나가 자기 몸이 깨끗하게 나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매우 놀라워했으며,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며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큰 기쁨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며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열 사람이 모두 문둥병에서 나아 몸이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방인인 너 한 사람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냐?”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일어나 집으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여기에서 보는 대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지나가시는 길에 있는 한 마을에 들어가실 때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치는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여기에 있어서 예수께서는 먼저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청을 들으시고는 그들에게 말해주기를,“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여 주어라.”라고 하였습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을“예수 선생님이여”라고 부른 것은 전통적인 간구의 문장 형식으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즉. 자신들은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하여 따르겠다는 복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자신들을“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베푸실 자비를 받고자 함에 있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자비에 자신들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자비를 입고자 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그들의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지시를 내린 것은 이 지시가 있은 때 그 즉시 하나님의 능력이 행사되어서 열 명의 문둥병자는 온 피부가 깨끗함에 있어 문둥병에서 나음을 입을 것이기 때문에 제사장에게서 그 사실을 확인하게 하여 그들에게 깨끗하다는 선언을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을 듣자 열 명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제사장들에게 문둥병에 걸려 있는 자기들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신들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게 하기 위하여 가게 한 그때에 그들의 몸을 깨끗하게 하실 하나님의 능력이 이미 자신들에게 행사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길을 나섰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도중에 몸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길을 가는 중에 그들 중 하나가 자기 몸이 깨끗하게 나은 것을 알았습니다. 길을 가는 중에 자기 몸이 깨끗하게 나은 것을 자기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는 매우 놀라워했으며, 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을 큰 소리로 찬양하며 예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큰 기쁨에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며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너희 열 사람이 모두 문둥병에서 나아 몸이 깨끗하게 되지 않았느냐? 그런데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방인인 너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돌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냐?”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일어나 집으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문둥병에서 나은 사람은 모두 열 사람입니다만, 이들 중에서 사마리아인만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수께로 돌아와서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큰 기쁨에서 감사를 드린 것은 오직 이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 안에서 능력을 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시고 있습니다. 문둥병자 열 사람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구했습니다만, 그들이 구한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예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시는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예수님을 주로 받아 섬김에 있는 믿음으로 찬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큰 기쁨으로 감사를 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었으며, 그에게 있는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는 것에서, 이 믿음에 있지 않은 나머지 아홉 사람의 악하고 믿음이 없는 세대의 참담함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문둥병자 열 사람 모두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만. 이들 중에서 사마리아에 사는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되지 않고 이방인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는 더러운 짐승인양 취급되었습니다. 유대인에게서 사마리아인은 정결한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부정한 이방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도 문둥병이 들고 유대인도 문둥병이 들어 부정한 자로 선언되어 함께 문둥병자들이 거하는 곳에로 격리되어 있는 것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의 부정함이 몸에 문둥병이 든 것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것에 요인이 있음을 알게 해 주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구함에 있는 그들에게 예수께서 그들의 몸을 제사장에게 가서 보일 것을 말씀하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제사장에게 문둥병이 든 자신들의 몸을 보이러 길을 나서 갈 때 그들의 몸을 문둥병에서 나아 깨끗하게 하신 것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문둥병이 들었던 자신의 몸을 보이기 위하여 제사장에게 가기 위하여 길을 가는 도중에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문둥병 나아 온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이에 그는 찬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의 발 앞에 엎드려 큰 기쁨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런 그는 몸이 문둥병이 듦으로 해서 부정하다는 선언에 있었던 것에서 몸이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음으로써 정결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정결은 문둥병이 나아 온 몸이 깨끗하게 된 것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비록 유대인들에게서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그래서 성전에도 들어가는 것을 금지당하고 있지만, 예수께서 그를 깨끗하다는 선언을 듣게 하여 정결한 자가 되게 하신 정결에서 나오는 정결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찬양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큰 기쁨으로 감사를 드리는 믿음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자로 알고 주님으로 영접하여 따르는 믿음에서 나오는 참으로 마음이 정결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나머지 아홉 사람의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냈을 때 사마리아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몸 또한 문둥병이 나아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하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만, 그래서 문둥병이 없는 깨끗한 몸으로 있는 한에는 더 이상 부정한 자가 아닙니다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었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도, 예수님께로 돌아와 큰 기쁨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도 없었습니다. 이는 말이죠. 예수님에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며,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거룩하신 자로 알지 못하여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몸은 문둥병에서 나아 깨끗하다는 제사장의 선언에 의해 정결한 자로 유대인의 공동체에로 다시 들어와 함께 하며 같이 지낼 수는 있을지언정, 그리고 예전처럼 다시 성전의 마당도 밟고 제사도 드릴 수 있을지언정,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함이 없어 주 예수님이 없는 이들의 마음은 부정하여 정결함이 전혀 없는 말과 행동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어떤 말에도 있지 않으며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겨 따르는 어떤 행동도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에게서는“내가 의로우니 너희도 의롭다.”,“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는 말씀을 결코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한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제사장에게로 보내진 문둥병자 열 사람이 모두가 비록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만 이방인으로 취급 받는 사마라아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사마리아인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여 말씀하셨습니다.“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제사장은 비록 몸이 깨끗하게 되었다는 선언은 할 수 있을지언정 이 선언의 말씀은 결코 할 수 없었습니다. 제사장은 단지 자신의 눈으로 보고 확인한 몸의 정결만을 선언할 수 있었을 뿐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결함에 있게 하신 믿음이 그의 죄를 사하여 그를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기에“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죄 사함 받음에 있는 구원을 선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마리아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보내 주셔서 문둥병에 있는 자신을 긍휼히 여겨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고 그 놀라운 능력을 행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은 단 한 명의 이방인에 불과했지만, 예수께서 그에게 주신 믿음은 죄와 그 비참함에서 그를 구원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문둥병자 열 사람 중에서 사마리아 한 사람을 문둥병을 낫게 하시는 이적을 행하심으로 문둥병자 열 사람 중에서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지금 예수 안에서 구원을 행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공적으로 확증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심을 믿는 믿음이 그 믿음에 있은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에서 예수님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일을 하시는 것에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을 정결한 공동체로 여기고 있으며 이방인은 부정한 자로 여겨 상종치 못할 사람으로 대하고 그들을 자신들과 거리를 두도록 격리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르지 않는 불신앙에 있어 악하여 믿음이 없는 세대에 있는 그들이야말로 부정에서 결코 정결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죄 사함에 있는 믿음의 은혜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문둥병자 열 사람을 모두 다 깨끗하게 하였으며,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돌아와 엎드려 감사를 표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듯이, 이 사마리아인에게서 나타내 보이신 믿음의 은혜를 이제 곧 온 세상으로 확장시켜 나가심으로 온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는 수다한 자가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너 외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라고 하셨던 물으셨던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에게서 앞으로 하나님께서 택정하신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게 하여 예수께서 행하신 죄 사함을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인하여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일을 하시기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자신에게 맡겨진 구속 사역을 수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침내 구속 사역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온 세상에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천하에 예수 그리스도 이 이름 외에는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음을 나타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말이죠. 이 은혜를 입은 자, 곧 구원의 혜택을 입은 자입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 중에서 아홉 사람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제사장에게 보내 문둥병에서 해방된 것을 확인 받게 하신 것에서 이 비참함을 가져온 죄의 부정으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은총의 복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심을 깨달아 알고 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둘려야 할 것이지만 악하여 믿음이 없는 그들은 결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전혀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 있음으로써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 믿음을 예수께서는 문둥병에서 깨끗이 고침을 받은 열 사람 중에서 유대인 문둥병자인 아홉 사람에게서가 아닌 이방인으로 취급받는 사마리아인 한 사람에게 있게 하신 것을 통해서 예수님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있는 일임을 알게 해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너 외에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예수님의 이 물으심이 시사해 주시는 바가 무엇이겠는지요. 아홉은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몸은 문둥병에서 나았습니다만 그 나은 것이 나은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께 나와 예수님이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지 않은 그들의 입술은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대로 부정하며, 그래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께 나와 예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었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모두 다 자신의 몸이 깨끗해진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만, 어찌 아홉 사람은 제사장으로부터 정결 선언을 들은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단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이 예수께 돌아와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었는지요. 이는 말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께서 가져온 구원을 받음에 그를 있게 하시는 것에서 였습니다. 문둥병자 열 사람이 모두 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으로 문둥병에서 나아 그 몸에 깨끗해졌습니다만, 그래서 제사장으로부터 정결 선언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다시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이 죄 사함 받는 구원의 은총을 입은 정결에 있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죄 사함 받는 구원의 은총을 입은 정결에 있게 하신 사람은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악하여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 앞에서 예수님이 죄와 그 비참함에 있어 부정한 죄인들에게 죄 사함의 구원을 주시는 구주이심을 계시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이 믿음에 있은 믿음에 우리 모두가 들어와 있습니다. 이 믿음은 문둥병에서 낫는 경험을 가졌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선언을 주시고자 하여 예수께로 나아오게 하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 이 믿음을 소유합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죄 사함의 구원을 받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이 정결한 자로 있는 자들이 하고 지내는 것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을 제사장에게 보내 문둥병에서 나아 그 깨끗함에 있게 하신 것을 알고는 예수께 돌아와 그분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에 있은 것과 똑같이 지내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신 일에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세월이 흘러가는 것 속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악함이 더욱 극명해집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에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 지닌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대합니다. 세상에서 악한 죄가 그 힘을 아무리 크게 발휘할지라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믿음이 지닌 하나님의 능력은 더욱 위대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고 있는 위대한 힘을 성경은“끝까지 구원을 이룰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해 주십니다. 이렇게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믿음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 증거에 있는 것입니다.“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8-11) (*)
.....................................
1) 성경에서 ‘문둥병’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 ‘차라아트’는 사람 뿐만 아니라 건물벽이나 옷에도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 나병[한센병]이라고 불리는 문둥병과는 다른 종류이다. 수리아의 고위 관리인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이면서도 왕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는 점만 보아도 이 병이 오늘날의 문둥병과는 다른 병임을 알 수 있다(왕하 5:1-6). 성경에서의 문둥병은 일종의 악성 피부병이나 곰팡이에 의해 발생되는 얼룩으로 보이는 여러 종류를 총칭하는 것으로 이 단어를 번역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용어가 필요하다. 참고로 헐스(E. V. Hulse)는 “혐오스러우며 비늘 같은 것이 덮이는 병(repulsive scale disease)"이라고 묘사하였고, 밀그룸(J. Milgrom)은 ”비늘 같은 것이 덮이는 병(scale disease)"이라고 하였다. 정중호, 「레위기 만남과 나눔의 장」(서울: 한돌출판사, 2004),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