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0일주일예배 “마7:13~14” <좁은 문으로 그리고 좁은 길로>
‘大道無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대통령 가운데 김영삼 대통령이 자주 쓰던 좌우명입니다. ‘대도무문’(큰 大, 길 道, 없을 無, 문 門)의 원래의 뜻은 사람으로서 가야 할 올바른 길, 큰 뜻에는 에는 거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원래 이말은 송나라 ‘무문관’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인데 대도무문. 큰 길에는 문이 없다. 원뜻은 ‘도를 닦는 길은 쉬우나 그 갈래 길이 너무 많다,‘라 는 뜻을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독재세력에 맞서 험난한 정치적 고난의 상황을 뚫고 나가면서 민주화를 위해 굴복하지 않았던 그의 열망을 ‘올바른 길에는 거칠 것이 없다’며 정치사에 한 획을 그었던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세상일 가운데는 모든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옳은 길이라면 굴복하지 말아야함을 교훈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도가 아닌 좁은 길을 걸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믿음생활을 하면서 이것, 저것, 거칠 것에 굴복하면서 고민하고 마음을 써야하는 것은 어쩌면 좁은 길을 걷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격어야 관문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예수 인이 되면 당연히 예배를 드리고 교회 일에 충성하며 성도의 본분으로 살아야 함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이유로 믿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성도의 본분을 망각하거나 고민 아닌 고민을 한다면 참으로 안타깝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며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입니다. 나의 자유함보다 주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살기를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면서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과 좁은 문”으로 인도하십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좁은 문을 기피합니다. 편한 길, 넓은 길을 좋아하고 좁은 길은 선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권하는 좁은 문과 좁은 길 뒤에는 다른 무엇이 있음을 그리고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는 선택으로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문이 되고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문이 된다는 겁니다.
성경은 세상을 향해, 세상을 벗 삼아 사는 자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사람 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고 나약하며 연약한 존재입니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한치 앞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 뒤의 상황을 알 수 없고 내 눈에 좋아 보이고 편하게 갈 수 있는 넓은 문을 선택하게 되는 겁니다. 넓은 문은 넓은 길로 연결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여 찾는 문입니다.
그 길은 멸망의 길이기에 이미 문 뒤의 상황을 알고계신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는 것을 막으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직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바로 좁은 문, 좁은 길, 생명의 길을 인도하는 좁은 문을 선택함이 당연한 것입니다.
눅13:24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렇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길입니다. 입시의 문이 그렇고 취업의 문이 그렇습니다, 좁을수록 세상에서도 성공을 보장합니다.
성도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힘쓰라”는 헬라어 단어 ‘아도니제스테’는 ‘죽도록 힘쓰다’ ‘노력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목숨까지도 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실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시간을 포기해야 합니다. 나의 자유를 제한해야 합니다. 예배에 참여해야 하고 봉사해야하고 때로는 나를 포기하고 남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인내해야 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계명과 교훈을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좁은 문을 통과하는 생활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고 고난이고 어려움의 연속입니다. 나를 내려놓아야 하고 나를 버려야 하는 진정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주님이 원하시기에 성도는 이겨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 고초의 길을 가셨습니다. 이 길이 좁은 길이고 외로운 길이지만 영광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며 십자가의 길이기에 주님은 그 길을 선택하셨고 기꺼이 걸으셨습니다. 그 길은 생명을 구하는 길 이었기에 선택하셨습니다. 한 생명의 구원은 신중하고 값비싼 결정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이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래서 찾는 자가 적습니다. 모두가 외면합니다. 누구나 갈 수 있고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라면 예수님은 분명 그 길로 우리들을 인도하시지 않으셨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을 것이고 예수님의 곁에는 늘 무리제자들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적은 수의 사람만이 선택받은 자, 구원 받은 자만이 좁은 길 협착한 길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좁은 문 뒤에는 놀라운 세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좁은 문을 선택하여 들어가라고 말씀하세요, 그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어서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세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좁은 문을 선택하라 하심은 고된 삶을 주시려고 하심이 아닙니다. 그 좁은 문, 좁은 길 끝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구원이 있으며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주님을 볼 수 있는 겁니다.
우리의 목적하는 그 목적지가 그 좁은 문 끝에 있음을 우리는 분명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는 것의 실상이 됩니다. 보이지 않지만 증거가 됩니다. 믿음으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은 이 길을 가셨습니다. 주님이 가셨으니 이제 이 길은 우리가 가야하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좁은 길을 외면합니다. 그 길은 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좁은 길은 예수님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예수님은 보잘 것이 없습니다. 나신 곳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고 조롱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직업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마을 사람조차도 출신배경을 보고 예수님을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쫒아내며 환영하지 않았고 배척하였습니다. 모두 성경의 예언대로였습니다.
사53:2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모양이나 풍채나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이시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구원의 주, 생명의 주이신 줄 믿습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합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매우 좁아서 한 사람이 간신히 출입 할 수 있는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정도입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면 탈옥수들이 좁은 자신의 몸 하나 간신히 빠져나올 그런 땅굴이나 환기구와 같은 통로로 탈옥을 합니다. 그래서 몸이 뚱뚱한 죄수는 탈옥을 포기하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협착한 좁은 길은 생명의 길이기에 이 좁고 협착한 곳을 가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세상의 군더더기를 버려야하고 포기해야 합니다. 소유를 포기해야 하고 최대한 겸손의 모습으로 나를 낮추어야 합니다.
마19장에 예수님이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건너 유다지방으로 오십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오지요. 그 가운데는 재물이 많은 청년도 있었습니다. 청년이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마19:16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청년은 하나님나라 천국을 소망하며 구원받기를 원했습니다.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의 답은 분명했습니다. 마19:22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말씀하세요, 이 말을 들은 청년이 근심을 합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세상의 제물이 나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세요, 마19:24“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나의 세상염려와 근심까지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좁고 협착한 좁은 문을 지나야 하기에 세상의 많은 소유는 짐이 되고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세상의 재물,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는 없습니다.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한 가지를 선택하면 다른 한 가지는 포기해야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선택할 것이냐 세상의 유익을 선택할 것이냐 사도 베드로는 빌4:8절에서 그리스도를 선택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 모든 것이 믿음 때문이라 그리스도 때문이라 고백을 합니다.
아직도 믿음의 확신이 없어서 흔들리고 고민되며 갈등하게 됩니까? 믿음은 고민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쉼의 기회를 통해서 정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겁니다. 더욱 더 주일이고 수요일이고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말씀을 보고 예배에 참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생기고 기도를 통해서 돈독해지며 성경을 읽으므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나라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합니다.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만 열립니다.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전하시는 다른 말씀은 거짓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하세요, 그리고 열매를 통해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을 하세요. 마7:18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드러나는 겁니다. 생각으로 드러나고 언어로서 드러나고 행실로서 드러나고 그래서 우리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든 행동들을 통해 예수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좁은 문을 통과한다는 것은 신앙생활의 기초적인 입문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하여 우리는 경험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외로운 인생의 길과 같습니다. 수고와 노력과 땀의 결실이 수반되어지는 길입니다. 고통도 있습니다. 어려움과 염려와 걱정도 있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함께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배후에서 우리의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상황을 이겨내며 상황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짐이 무거우면 주님은 말씀하세요,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무거운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쉬게 하리라 약속하세요.
우리의 삶이 고달파 염려하면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세요, 눅12:22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우리의 삶이 의식주 해결이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하고 염려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 구원받은 우리의 생명, 영원이 죽지 아니하고 사는 영생함이 더 소중하다고 말씀하세요,
우리가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의 사랑받는 백성들이 가야하는 길이라면 좁은 길, 협착한 길일지라도 주님이 함께 계시고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