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로 게재되는 [天金]의 글은 자비(自費) 출판하여 대학도서관에 기증한 <훈민정음에 담긴 인류문화사(2017)>의 내용 중,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올린 글의 전후맥락의 정확한 이해와 내용 전체를 읽고 싶으신 분들을 위하여, 특수문자 때문에 출판 과정에 생략한 제3장이 포함된 책의 전문(全文)을 pdf로 변환하여 블로그 http://blog.daum.net/tiangold에 올려놓았으니 많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카페에 올린 글은 ᄒᆞᆫ글로 작성된 것인데, 훈민정음 고어글자와 특수문자, 도표 등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어 pdf로 변환한 것을 같이 실으니, 될 수 있으면 pdf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카페와 블로그에 공개된 내용을 인용 내지 차용하시게 될 경우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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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金62] 정재 연화대, 일본 아와오도리(阿波踊り), 탁지무, 쿠바 차차차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
[天金62] 정재 연화대, 일본 아와오도리(阿波踊り), 탁지무, 쿠바 차차차의 역사문화언어인류학적 이해.pdf
<<고려사(高麗史)>>악지(樂誌)에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포구락(抛毬樂), 연화대(蓮花臺)의 다섯 당악정재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연화대는 인종 2년(1123) 송 휘종의 사신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남긴 <<고려도경(高麗圖經)>> 에서, 조선 고종 때의 <<정재무도홀기 呈才舞圖笏記>> 까지, 긴 시간동안 궁중에서 공연되고 기록되어 왔다.
연화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본래 탁발위(拓跋魏)에서 나왔다....그 전해진 것이 오래 되었다”는 것과 서역의 석국(石國 Tashkent 부근) 자지무(柘枝舞)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있는데, 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본 글에서는 <<고려사>>와 <<악학궤범>>의 기록을 중심으로, 원문에서 쉽게 이해되지 않는 무용 동작을 살펴보고, 연화대의 유래와 관련된 종합적인 것은 추후(追後)에 정리하여 공개하기로 한다.
1. <<고려사>> 악지 ‘연화대’의 줄거리
합립(蛤笠[gé,há][lì]) 두 개를 놓고, 두 동녀가 가로서 나란히 서서 있으면, 악관이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 인자(引子)를 연주하고, 기녀 2인이 죽간자를 들고 입장한다. 동녀가 앉고 음악이 멎으면 죽간자가 구호(口號)^한다. 다음 악관이
<중선회(衆仙會)>인자(引子)를 연주하면 동녀가 들어가서 춤을 추고, 연주가 끝나면 자리로 돌아간다.
<백학자(白鶴子)> 연주가 끝나면, 두 동녀는 서서 <미신사(微臣詞)>를 창(唱)한다. 끝나면
<헌천수령(獻天壽令)>을 만(慢)하게 연주하면, 왼쪽 동녀가 좌우수(左右手)3궤무(跪舞)를 춘다. 춤이 끝나고 음악이 멎으면 두 동녀가 헌천수령(獻天壽令)을 창(唱)한다. 끝나면
<최자령(嗺子令)>을 연주하고, 왼쪽 동녀가 춤을 춘다. 끝나면 두 동녀는 최자령(嗺子令)과 낭원인간사((閬苑人間詞)를 창(唱)한다. 끝나면
<삼대령(三臺令)>을 연주하고, 왼쪽 동녀의 춤이 끝나면
<하성조(賀聖朝)>를 연주하고, 왼쪽 동녀가 먼저 춤을 끝내고, 다음 오른쪽 동녀의 춤이 끝나면
<반하무(班賀舞)>를 연주하고, 두 동녀는 或面或背 3進退舞, 蹈而進, 跪而就笠, 起着, 舞如前儀, 三進退의 춤이 끝나면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인자(引子)를 연주하고, 죽간자가 조금 나아가 서서 구호(口號)^하고, 끝나면, 두 동녀는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구ː호 (口號): ⦗악⦘ 지난날, 정재(呈才) 때 부르던 치어(致語)의 한 토막. 곧, 여문(儷文)의 한 단(段)이 끝나고 다음에 딸리는 시(詩).
1.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와 만(慢)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라고도 한다. 『고려사』악지에 의하면 「오운개서조인자」는 당악정재의 하나인 오양선(五羊仙)과 연화대(蓮花臺) 연주 때 반주음악의 하나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통이 조선 성종 때까지 전승되었음이 『악학궤범』 권4에서 확인된다. 한편, 「오운개서조인자」는 고려시대부터 전승된 「오양선」과 「연화대」에서 뿐 아니라 조선 초기에 창제된 당악정재 「금척(金尺)」·「근천정(勤天庭)」의 연주 때에도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이 반주음악의 명칭은 조선 후기의 문헌에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 전기 이후에 당악정재와 함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운개서조라는 명칭이 조선 말기에 「여민락」의 현명(絃名)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 오운개서조인자(五雲開瑞朝引子)> ⟶그래서 <오운개서조>를 <여민락>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헌천수령」은 고려 때 「연화대(蓮花臺)」및 「헌선도(獻仙桃)」의 반주음악으로 쓰였고, 「헌천수만」은 조선 초기 성종 때 「연화대」·「헌선도」·「하성명(賀聖明)」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었다.
성종 당시 「헌천수」는 당악을 연주할 악공취재(樂工取才)의 한 시험곡으로 쓰이기도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헌천수(獻天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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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가 연주되고 나면, 죽간자가 구호를 외치고 연회는 시작된다. <오운개서조>가 고려 때부터 연주되어 온 것인지, 조선 시대 때 연주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것이 기록된 <<고려사>>는 1451년, <<악학궤범>>은 1493년에 편찬되었다. 두 책은 약 40년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편찬되었는데, 두 책의 내용을 합쳐야 정재 연화대 공연 전체의 흐름이 보다 뚜렷하게 그려진다.
사전에 실린 내용에서 짚고 넘어갈 것은, 정재 연화재를 기록한 <<고려사 악지>>에는 <獻天壽令>慢, <<악학궤범>>에는 <獻天壽>慢으로 주석을 붙이는 식으로 표기된 것이다. 이렇게 연주 곡명 뒤에 기록된 ‘령(令)과 만(慢)’에 대해서는 다음 인용내용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사(詞)는 당나라의 초⭑중엽에 형성되었고, 사는 바로 가사이며...당(618-907)나라 때에 단지 소령(小令)[즉, 령(令)]의 형식만 존재했는데, 오대(五代)(907-960)에...근(近)의 형식..., 북송(960-1126) 후기 인종 때의 유영(柳永)이 만사(慢辭)를 많이 창작하”면서 만(慢)이 발전하게 되었다. ...“대략 령(令)의 음악은 비교적 빠르고, 만(慢)의 음악은 상대적으로 느리며, 근(近)은 그 중간의 리듬을 사용하고 있다”<<고려사 악지의 당악연구, 박은옥, pp 20-22)
중국의 당송 시대에 정리된 ‘령⭑근⭑만’의 음악 형식은 고려로 전해졌고, 그것을 계승한 조선에서는 ‘령⭑근⭑만’ 대신, ‘만대엽(慢大葉)⭑중대엽(中大葉)⭑삭대엽(數大葉)’의 표현으로 연주의 빠르기를 정하였으니, <獻天壽令>慢 ,<獻天壽>慢은 곡을 만대엽(慢大葉)을 연주하듯이, 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곡명 뒤에 붙은 慢은 중대엽(中大葉)·삭대엽(數大葉)과 함께 곡의 빠르기를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만대엽은 조선 초기부터 애호되다가 중대엽이 유행하던 숙종 때부터 차츰 자취를 감추었고, 삭대엽이 유행하던 영조 무렵에는 아주 사라진 듯하다” 하니, <<고려사 악지>>와 <<악학궤범>>에 기록된 정재 연화대의 <獻天壽令>慢<獻天壽>慢은 만대엽 풍으로 연주하라는 표시다.
“ 만대엽은 제2강에서 시작하므로 <치화평 致和平> 등 세 틀로 된 악곡의 제일 느린 곡인 일기(一機)와 용강법(用綱法)이 같다. 이 곡의 본래 연주형태는 대체로 거문고·비파·피리·장구·북 등의 관·현·타 악기로 반주되는 모습이었다.
≪현금동문유기 玄琴東文類記≫에는 이 곡의 곡풍을 “평조의 만대엽은 모든 곡의 으뜸으로서 조용하고 평담하다. 그러므로 만약 삼매경에 들어가 타게 된다면 유유할 손 봄구름이 하늘에 뜨는 것 같고, 넓고 넓을 손 춘풍이 들판을 쓰는 것 같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대엽>
하니, 이는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의 연주 분위기와 음악의 느낌을 잘 나타낸 것이다.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의 오운(五雲)의 오(五)와 운(雲)은 【명사】오색의 구름.
五 다섯 오; ⼆-총4획; [wǔ] 다섯, 별 이름, 제위(帝位)//雲 구름 운; ⾬-총12획; [yún] 구름, 습기, 높음의 비유
로 풀이되는데, <오운개서조>는 문법적으로 “오운(五雲)이 서조(瑞朝)를 열었다. ”로 해석되고, 五 다섯 오; ⼆-총4획; [wǔ] 다섯, 별 이름, 제위(帝位)를 볼 적에, “(삼황)오제에 해당하는 분들이 서조(, 조선왕조)를 열었다.” 로 이해된다. 그리고 연주 곡명에는 종합적인 것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오양선(五羊仙)>
:고려 때부터 전하는 당악정재(唐樂呈才) 중의 하나. ≪태평환우기 泰平寰宇記≫에 전하는 중국 고사(古事)에 따르면 “다섯 명의 신선이 오색의 양(羊)을 타고 한 줄기에 여섯 개의 이삭을 가진 육수거(六穗秬)를 효성이 지극한 백성에게 주었다.”고 되어 있다.
에 등장하는 “양을 탄 다섯 명의 신선”이 서조를 열었다’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곡이 기록된 책들이 모두 조선 문종~성종 시기의 것이니, <오운개서조>는 전주 이씨 집안이 조선 건국의 정당함을 노래한 <용비어천가>와도 관계있을 듯하다. 즉 두 책에 기록된 정재 연화대는 고려 시대의 상황으로 연출된 것이 아니라, 조선 시대 초기의 시대상황,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연출되었다는 것이고, 그런 점에서 오운(五雲)은 정치적으로 조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의 다섯 임금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즉 다섯 임금님의 업적으로 성종 때 조선 왕조의 체제가 완정하게 갖추어졌고, 이때 <<고려사>>와 <<악학궤범>>이 편찬되었다.
그러면 <獻天壽>慢의 의미를 이해하였고, 덧붙여 <헌천수령(獻天壽令>을 살펴본다. 한국한자어 令의 뜻에 “소리(,노래 소리)”가 있고, 타령(打令) 장단 명칭에서 볼 수 있다. 중국어 令의 뜻에 “사(詞)나 산곡(散曲)의 소령(少令)에 사용되는 곡조명”이라는 뜻이 있고, 少令(ditty)의 뜻은 ‘소가곡(小歌曲), 소곡; 민요(folksong)’ 이다. 그리고 瓴의 본래 글자 형태Original form of 瓴 (líng)인데, 瓴의 구어체 뜻에 ‘brick 《口》 믿고 의지하는 남자, 쾌남아, 유쾌한 놈; 멋있는 것’이란 뜻이 있다. 즉 <獻天壽>慢은 장중하고 엄숙하면서 호연지기의 분위기가 있는 연주를 하는 것이고, <獻天壽令/獻天壽令>은 쾌남아가 밝고 즐거운 마음으로 경쾌하게 민요나 소가곡을 부르듯이, 연주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獻天壽慢>의 慢은 단순히 장중 엄숙 평온한 분위기만 내는 것이 아니고, “아이티의 토착 종교인 부두교의 여자 사제의 이름으로 "신과의 대화"라는 뜻”을 지닌<위키백과:맘보>”, Mambo로 불리는 음악의 명칭에 보이는 Mambo(=Mam+bo)의 Mam과 대화 하듯이, 조부, 손자, 조상, 종종 왕과 영혼 소통하듯이, 정성을 다하여 진심으로 연주하라는 것이다.
Mam [mam] 'grandfather' or 'grandson', is a pan-Mayan kinship term as well as a term of respect referring to ancestors and deities. In Classic period in grandfather, grandson, or ancestor, often a king.[1] Ethnographically, Mam refers to several aged Maya deities:<Wikipedia:Man>
2. 좌동녀우동녀좌우수삼궤무(左童女右童女左右手三跪舞)
<헌천수령(獻天壽令)>을 연주하고 나면, 양(兩) 동녀가 춤을 추는데, 그 것이 ‘좌우수삼궤무’이다. 그리고 춤을 멈추고 난 다음 양동녀는 천수령(天壽令)을 창(唱)하여 올린다. 연주와 창 사이에 추는 춤이기에 그다지 길지는 않을 것이고, 일종의 장면 전환을 알리는 춤이면서, ‘천수(天壽)를 누리소서’ 하는 마음을 표현하였을 것이다.
‘좌동녀우동녀좌우수삼궤무’에서 무용학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이 ‘궤(跪)’인데, 궤(跪[guì]):꿇어앉다, 발, 게의 발 의 훈은 무릎을 바닥에 닿는 것을 보여주지만, 궤가 반드시 무릎을 꿇고 바닥에 닿는 것은 아니다. 인사 상대의 신분에 따라 무릎을 바닥에 닿게 할 수 있지만, 단순히 두 다리를 굴신하는 것, 그냥 서서 허리만 굽히는 국궁으로도 궤(跪)하였다고 표현한다. 이런 모습은 서양 사회의 여성이 인사를 할 때 서서 간략히 무릎을 굴신하는 것, 연주나 연기가 끝나고 관중의 환호에 대한 답례 인사로 한 발을 앞으로 디딘 상태에서 굴신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춤을 추는 동안에 이루어지는 ‘궤’는 ‘이수고저’ ‘저앙수’ 의 굴신하는 자세를 뜻한다.
그리고 만주인은 하늘에 대한 예배를 할 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하였고, 명대에는 오배삼고두(五拝三叩頭)의 예가 있었다. 이를 참고하면 춘앵전의 저앙수이수고저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좌우수삼궤무’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를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 춘앵전의 저앙수 이수고저(低昂手 以手高低) 이다. 저앙수 이수고저를 추는 동안 도드리 1장단, 2장단, 3장단에 맞추어 손은 좌우로 흔들리고, 무릎은 세 번 굴신(屈伸)하게 된다. 세 번째 굴신이 끝나면 절요이요(折腰理腰)를 위해 직립자세로 잠시 멈추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리고 <<악학궤범>>에는 양동녀가 대열에서 나오지 않고 광수무(廣袖舞)를 춘다고 주석되어 있다. 이는 양동녀가 제자리에서 광수무를 추었다는 것이고, ‘소매가 넓은 춤(광수무)’은 춘앵전의 앵삼과 같은 무복을 입고 추었다는 것이다. 이 춤을 대열을 나오지 않고 추었다는 것은 제자리에서 손을 위로 올리면서 만세 삼창하는 식으로 임금님의 덕(치)를 찬양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춘앵전과 삼궤구고두를 참고하면, ‘좌우수삼궤무’는 일단 무릎을 세 번 굴신하는데, 좌우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지만, ‘이수고저’와 같다고 보면 된다.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일본 시코구(四国(しこく) 지역의 아와국(阿波国(現・徳島県)의 집단 춤(盆踊り아와오도리(阿波踊り)를 참고한다. 이 춤의 유래는 명확하지 않고, 1586년 徳島城의 완성을 축하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그런데 아와현(, 고대 阿波國)에서 이 춤이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아와 지방과 관계없이,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 바다를 건너 전해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식 한자 사용에서 도래(渡來)는 해외에서 일본으로 이주하는 것을 의미하니, 파(波)는 파도(波濤)를 타고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것이다.
언어적으로 아(阿)의 음은 Proto-Sino-Tibetan *ʔa(ŋ/k)- (“noun prefix”), 고대 중국어 (Baxter–Sagart): /*qˤa[j]/, /*ʔˤa/(Zhengzhang): /*qaːl/중세 중국어 /ʔɑ/, 이니, 이는 ᄀᆞ>ㆆ>ㅇ 의 음변화 과정을 거친다.
波의 중세음 Middle Chinese: /puɑ/, 고대음 (Baxter–Sagart): /*pˤaj/(Zhengzhang): /*paːl/
을 참고하면, 阿波의 발음은 ‘ᄏᆞᄇᆞ>ᄀᆞᄇᆞ>ᄋᆞᄇᆞ>ᄋᆞㅸㆍ>ᄋᆞᄋᆞ>아와’로 변이하였고, ’ᄏᆞᄇᆞ‘는 ‘가비:신(神)’을 뜻한다. 그래서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ᄏᆞᄇᆞ 신을 맞이하는 의식의 춤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는데, 금관가야 김수로와 관계되는 영신군가(迎神君歌) 구지가(龜旨歌)의 ’거북, 거붑:구(龜)‘의 ’거붑‘의 어원은 ᄏᆞᄇᆞ(神)이다. 즉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김해 지방의 구지가와 관련 있는 집단 춤이기도 할 것이다.
이 춤의 기원에 대해 도쿠시마 번이 성립된 이후, 한창 춤을 출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겨진다(토쿠시마시 관광협회의 설명에서).덴쇼 14년(1586년), 도쿠시마 성이 준공했을 때 당시 아와 모리, 하치스카 이에 마사가 성에 "성의 완성 축하로 좋아하게 춤춘다"이라는 포고를 낸 것이 발상이라는 설도 있다(하치스카 입성 기원설).<위키백과:아와도오리>
이 춤의 특징은 첫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대중 집단 춤이라는 것, 춤사위는 간단하고 흥이 난다는 점이다. 앵삼 형태로 소매가 넓으면서 간편한 무복을 입은 여자들의 춤사위는 한국국악원 기본무 중에 머리 위로 두 손을 올려 1박 1보로 춤을 추는 것과 거의 똑 같다. 남자들의 춤사위는 무릎 굴신이 심하고 개구리 점프하듯이 뛰면서 두 손(,좌우수)을 좌우로 교차 방어 공격 자세를 한다. 여자들도 이 자세로 춤을 추기도 하는데, 한국의 전통무술 기천무의 내가신장 자세에서 뛰어 오르면서 범도 자세를 좌우로 취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춤을 계속 추면 하체단련이 엄청나게 되고, 두 팔의 공격과 방어 훈련이 된다. 대단히 간단하면서 무술 효과가 큰 기본무이다. 그리고 여자들의 집단 춤 동작은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두 발은 스텝을 좌우로 반복하는데, 이는 죽도를 머리 위로 올려 잡고 연속적으로 격검 연습하는 자세이다. 이 춤은 성의 완성을 축하하면서 추었고, 이 춤 이후 6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래서 아와오도리(阿波踊り)는 사회구성원 집단이 ᄏᆞᄇᆞ 신을 맞이하는 의식을 치르고 놀면서 전투훈련을 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즉 놀이가 생존 훈련이다.
일본의 아와오도리(阿波踊り)와 비슷한 점이 있는 것이, 고대 중국 탁무(鐸舞)와 비슷하다는 한반도 마한 지역의 집단 춤이다. <<삼국지>>> <마한전>에 "馬韓常以五月祭鬼神 歌舞飮酒 畵像無休 其舞數十人 俱起隨 踏地低昴 手足相應節秦有以鐸舞 十月農功畢 赤復如之"이 있다. 답지저앙 수족상응(踏地低昴 手足相應): 발은 땅을 밟고 뛰면서 몸체는 저앙(低昂)하니, 개구리 점프하는 것이다. 발동작에 맞춰 손을 흔들어야하니, 이는 바로 아와오도리(阿波踊り)의 집단 춤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마한 지역은 백제로 편입되었었고, 백제에서 일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갔으니, 두 지역의 춤이 비슷한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좌우수삼궤무’는 무릎을 한 번 굴신하면서 점프하여, 도약하여 앞으로 가면서 두 손은 위로 올려 교차방어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런데, 궁중 연회에서 이를 그대로 할 수는 없으니, 현재 춘앵전의 이수고저 자세로, 그냥 도(蹈)하면서, 두 손을 머리 위에 올려 흔드는 춤을 추는 것이다. 이 춤을 빠르게 진행하면, 일본 아와오도리(阿波踊り) 춤이 된다.
3.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兩童女或面或背三進退舞)
악관이 <반하무(班賀舞)>를 연주하면, 양동녀는 삼진퇴무(或面或背三進退舞)로 도(蹈)하면서 나아가, 궤(跪)하면서 합립을 취하여 일어나 앞의 삼진퇴무(或面或背三進退舞)를 추고, 춤을 마치면 악관은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인자(引子)를 연주한다. 여기서 ‘도(蹈)’는 춘앵전의 <향섭족도(足蹈)>에서 볼 수 있는데, <보허자(步虛子)>의 보허(步虛) 보법으로 걷는 것으로 이해된다.
혹면혹배삼진퇴무(兩童女或面或背三進退舞)는 양동녀가 함께 추는 춤인데, 이에 대하여 <<악학궤범>>에는‘협진(挾進) 도약무(跳躍舞)’ <<고려사>>에는 손뼉을 치고 도는 ‘변전(抃轉)’으로, 보완 설명되어 있다. 협진 도약무는 서로 팔장을 끼고 나와 도약하는 춤을 추는 것이다. 도약에는 다섯 가지(Jump, Hop, Leap, Assemble, Sissonne)가 있다. 팔짱을 끼고 둘이서 도약한다면 2인 삼각(三脚) 형태로 뛰어 오르는 것인데, 이는 한국 무용에서 보기 힘들다.
그러면 처음 무대로 나올 때는 팔짱을 끼고 나오고, 춤을 추는 동안 둘이서 혹은 마주보고, 혹은 등을 맞대고 추면서 도약하고, 손뼉을 치면서 회전하는 춤은 어떤 것인가. 포크댄스 - 코로부시카 Korobushka ,콘트라 댄스 Contra dance, Bohemian National Polka 에는 둘이서 팔짱끼고 ,돌고, 손뼉치고, 하는 장면이 거의 다 있고, 대체로 6쌍의 남녀가 추게 된다. 포크 댄스의 기본 장면은 연화대 양동녀의 협진 도약무와 거의 일치한다. 차이가 있다면 무용수의 숫자이다.
‘도약무’라는 단어적 의미에 가장 접근한 것은 러시아의 폴카이고, “러시아 모이세예브 명칭 무용단의 춤 –꼬빠끄-” 에는 其舞數十人 俱起隨 踏地低昴 手足相應節秦有以鐸舞 , 좌동녀우동녀좌우수삼궤무(左童女右童女左右手三跪舞), 혹면혹배삼진퇴무(兩童女或面或背三進退舞), 협진(挾進) 도약무(跳躍舞)의 장면이 거의 그대로 다 들어있다. 즉 판굿과 같은 일부 춤을 제외한 한국 전통무용에서는 도약무를 쉽게 볼 수 없지만, 러시아 일대 동유럽 지역의 민속춤에서는 연화대에서 추어지는 ‘협진 도약 변전’하는 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정재 연화대의 원본, 즉 ‘자지무/석지무(柘枝舞)’는 현재 동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속춤과 거의 같고, 자지무가 현재 타슈켄트 지역, 고대 석국(石國)에서 당으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자 柘枝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의 고대 이름 Chach를 나타내는데, 페르시아 어 čâč,아랍 어 šāš로 불리었다.
자(柘[zhè])柘 ; 산뽕나무, 산상(山桑), 적황색, 사탕수수
지(枝[zhī,qí]); 가지, 초목의 가지, 가지 치다, 가지가 나오다, 나누어지다, 분기(分岐)하다
柘의 중국 한자어 고대 발음 (Baxter–Sagart): /*tAk-s/(Zhengzhang): *tjaɡs/, 중세 발음 /t͡ɕiaH/, 현대발음 (Pinyin): zhè (zhe4) Cantonese(Jyutping): ze3
한국 한자어 柘• (ja) (hangeul 자, revised ja, McCune–Reischauer cha, Yale ca)
枝의 중국 한자어 고대 발음 Baxter–Sagart): /*ke/ (Zhengzhang): /*kje/ 중세 발음 Middle Chinese: /t͡ɕiᴇ/ 현대 발음 (Pinyin): zhī (zhi1)
한국 한자어 발음 枝• (ji) (hangeul 지, revised ji, McCune–Reischauer chi, Yale ci)
枝
Alternative form of跂 (qí, “extra toe”).
Alternative form of 歧 (qí, “divergent”).
柘枝는 중국 고대 한자어 발음으로 (Baxter–Sagart): /*tAk-s/(Zhengzhang): *tjaɡs Baxter–Sagart): /*ke/ (Zhengzhang): /*kje/ , ‘ 탘스케, 탹스게, 탁지’로 읽을 수 있다. 이곳은 소그드 인들(Sogdians)과 투르크 유목민들 사이의 교역 중심지였다. 이곳은 교통의 중심지이어서, 당의 현장(602/603? – 664 AD)은 인도로 가면서 이곳을 방문하였고, <<대당서역기>>에 Zhěshí (赭時)로 기록하였는데, 이는 5세기 이래로 불리던 이름 표기로, 수와 당대의 역사서에는 Shí 石 or Zhěshí 赭時로 기록되었다. 석국(石國)이란 국명은 5세기 이후로 ‘ 탘스케, 탹스게, 탁지’로 불리었는데, 이곳의 현대 지명 타슈켄트(("Tashkent" means "stone city").를 한자어로 지역하면, 석국(石國)이고, 석(石[shí,dàn])의 터키 어는 taş 이다.
현재 지명 표기 Tashkent는 20세기 소비에트 시절 러시아 철자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石의 러시아 어는 kamen'이다. 이 사실은 석국 Tashkent 지역 사람들이 터키가 속한 투르크 계열의 인종이하는 것인데, 페르시아 강대국 주변에 위치하다보니, 페르시아(,이란) 문화권에 속하였었다.
그리고 柘枝의 현대어 발음
(Pinyin): zhè (zhe4) Cantonese(Jyutping): ze3
한국 한자어 柘• (ja) (hangeul 자, revised ja, McCune–Reischauer cha, Yale ca)
베트남 한자어 柘 (rú, giá, chá) 한국 한자어 발음 枝• (ji) (hangeul 지, revised ji, McCune–Reischauer chi, Yale ci) 베트남 한자어 발음 枝 (chi, che)
을 참고하면, 석국은 자지국으로 읽혀진다, 탁지무, 석지무, 자지무의 이름 유래는 이렇다.
‘ 탘스케, 탹스게, 탁지’ Tashkent를 종합하여, 한국사에서 이를 찾아보면 탁순국(卓淳國) 혹은 탁순국(㖨淳國) 으로 기록된 가야의 소국이 있었다. “신라에 병합된 시기는 534년에서 541년 사이에 해당하며, 『일본서기(日本書紀)』흠명기(欽明紀)에 나오는 아리사등(阿利斯等) 또는 기능말다간기(己能末多干岐)가 창원탁순국의 마지막 지배자로 추정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탁순국>”. 이 나라의 군주 명칭으로 아리사등(阿利斯等)이 있는데, 아리사는 이란의 arša(,"male")’와 관계있다.
arša(,"male")’를 숭배하였던 이란에서는 “아라스티(Arasti):경외받는 자 /아르다시르 (Ardashir,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아레타크샤트라):통치자 /아르다반 (Ardavan, 아르타바누스):신성함의 수호자 /아르샨 (Arshan):영웅” 등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 이름은 백제의 어라하(於羅瑕), 신라의 알지(閼智)와 관계있고, 이는 이란 일대 지역의 Haplogroup R1b 사람들이 한반도로 이주하였다는 것을 알려준다.<<훈민정음에 담긴 인류문화사>>
≪악부잡록 樂府雜錄≫에, 당대의 악무로 건무·연무(軟舞)·자무(字舞)·화무(花舞)·마무(馬舞) 등의 다섯을 들고 있다. 건무 중에는 능대(稜大)·아련(阿連)·자지(柘枝)·검기(劒器)·호선(胡旋)·호등(胡騰)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에서 호선·호등·자지 등은 이란풍의 무용이며, 호선무는 원래 강국(康國, Samarkand)·미국(米國, Maimurg) 등 소구드(粟特, 識匿, Sogud) 여러 나라의 특기(特伎)<민족문화대백과사전:건무(健舞)>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면, 페르시아 이란 문화권의 국가였던 중앙아시아 석국(石國) 사람들은 왕성한 국제 무역을 하면서, 한반도 남부 창원 지역에 탁순국(㖨淳國, 卓淳國)이란 작은 나라를 건국한 적이 있었고, 아마도 이곳에서도 탁지무(, 석지무, 자지무)는 연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래서 고구려 지역에서 탁순국이 있었던 한반도 남부 창원 해 지역에 이르기 까지, 정재 연화대의 원본이었던 자지무는 유행하였었고, 가야연맹의 탁순국이 망하면서 이 지역의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들이 집중적으로 정착하였던 곳이 시코쿠 지역의 아와국(阿波國)이었고, 이 일대에서 일본화된 자지무가 이어져 온 것이 아와오도리(阿波踊り) 춤일 것으로 짐작된다. 즉 자지무의 원본에 가까운 것이 일본에 남아있고, 그것을 통해 정재 연화대의 춤을 복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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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순국이 신라에 병합된 것은 534년에서 541년이고, 이는 북위(北魏, 386년~534년) 말년이었다. 북위는 동위(534~550)⟶북제(50~577)와 서위(535~557)⟶북주(557~581)로 분열되었고, 수(581~618)가 등장하고서야, 중국은 분열 시대를 지나 겨우 안정되어갔다. 당시 고구려는 장수왕(재위:413~490)과 문자명왕(文咨明王, 재위:491~519), 그의 아들 안원왕(安原王, 재위 : 531~ 545) 시절이었다. 북위가 무너지고 중국 북부 지방이 흔들릴 때, 당시의 예술가들이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곳은 고구려 뿐 이었다. 고구려는 초원으로 연결되는 지역의 많은 예술가들을 수용하였고, 그 모습은 무용총의 벽화로 남아 있다. 당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 최고 강성국 문명의 꽃이 화려하게 만개한 시기였으니, 북위의 정재 연화대는 고구려에서 이미 공연되었었고, 그 사실은 <<악부잡록>>에 기록되어 있다.(기록에는 건무가 당에서 전해진 것이라 하나, 당 이전에 많은 예술가들이 자발적으로 고구려로 이주하였을 것이다.)
(건무(健舞))
서역의 영향이 많았던 당나라에서 성하던 악무(樂舞)의 하나로, 고구려에 전래되어 고구려의 대표적인 춤이 되었다. 단안절(段安節)이 ≪악부잡록 樂府雜錄≫에, 당대의 악무로 건무·연무(軟舞)·자무(字舞)·화무(花舞)·마무(馬舞) 등의 다섯을 들고 있다. 건무 중에는 능대(稜大)·아련(阿連)·자지(柘枝)·검기(劒器)·호선(胡旋)·호등(胡騰)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에서 호선·호등·자지 등은 이란풍의 무용이며, 호선무는 원래 강국(康國, Samarkand)·미국(米國, Maimurg) 등 소구드(粟特, 識匿, Sogud) 여러 나라의 특기(特伎)로 백거이(白居易)와 원진(元稹)의 <신악부 新樂府>에도 호선무를 읊고 있다.
자지무는 호등무와 마찬가지로 석국(石國, Tashkent)에서 나온 춤으로 무용을 시작할 때 각각 연꽃 속에서 나와 춤을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연화대무 蓮花臺舞>와 같으며, ≪문헌비고≫에도 <자지무>와 <연화대>가 같은 계열임을 말했고, 그것이 조선시대까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건무(健舞)>
그러면 고구려 춤 속에서 정재 연화대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인데, 기록상으로는 찾기 힘들고, 무용총 벽화에서 춤을 단편적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를 통해 ‘혹면혹배삼진퇴’를 알 수
는 없다. 다만 중국인이 고구려무를 보고 남긴 글, 편편무광수 사조해동래(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의 翩翩 1.graceful; elegant 翩翩 1.lightly (dance/flutter/etc.)2.lightly and swiftly (descriptive of movement) 이란 단어를 통해, 마치 새가 날듯이 가볍고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순조 때 고구려무(高句麗舞) 창사:금화절풍모 쓰고/백마로 더디 도네/번득이는 넓은 소매/해동에 새가 온 듯하네(金花折風帽 白馬少遲回 翩翩舞廣袖 似鳥海東來)<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구려무> |
그리고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 의하면, 「고구려무」의 춤추며 상대하는 절차는 「엽무(葉舞)」와 같다고 되어 있다. 「엽무」는 「첨수무(尖袖舞)」의 속칭으로 영조 때 고쳐 부르게 한 것으로, 칼을 들지 않고 맨손으로 추는 춤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고구려무>
는 것을 참고하면, 고구려 무용은 평양검무와 궁중검무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행 궁중검무에서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兩童女或面或背三進退舞)와 비슷한 것은 있지만, 방울소리와 손뼉치고 도는 장면은 없다. 그래서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의 장면은 다른 지역의 것에서 차용하여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고, 이에 관한 것은 본 글의 후반에서 다루어진다.
그리고 정재 연화대는 북위에서 비롯되었다는데, 북위의 영토는 돈황 지역 북쪽 까지 이어져 이른바 서역 지역으로 가는 실크로드와 연결되어 있었고, 유연/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바다를 건너 고구려와 마주보고 있었다. 이는 북위의 문화에는 동유럽에서 만주 지역까지 이어지는 초원문화가 많이 있다는 것이다. 즉 북위 정재 연화대의 춤에는 초원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의 문화가 많이 반영되어 있고, 이를 바탕으로 당대(唐代)에 석국에서 들어온 탁지무를 합쳐, 당의 연화대가 되었고, 그 이후 송의 연화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송의 무용에 서역의 것이 많이 들어와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과 송을 통해 받아들인 한국무용에는 서역의 것이 많이 깔려있다 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중심의 궁중 정재 연화대의 원형에 가까운 것은 서역이나 동유럽 지역의 초원지대 춤에서 찾아볼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와 내몽골 초원지역에는 바다를 통해 전해진 문화가 있었고, 이 문화가 초원지대 문화로 정착된 것이 있다. 그래서 초원 문화의 춤에는 바다를 통해서 유럽 지역으로 전파된 것과
Morris dance is a form of English folk dance usually accompanied by music. It is based on rhythmic stepping and the execution of choreographed figures by a group of dancers, usually wearing bell pads on their shins. Implements such as sticks, swords and handkerchiefs may also be wielded by the dancers. In a small number of dances for one or two people, steps are near and across a pair of clay tobacco pipes laid one across the other on the floor. They clap their sticks, swords, or handkerchiefs together to match with the dance. 16세기말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무용을 한층 더 장려했다. 그녀는 가야르와 볼타를 능숙하게 추었으며, 1쌍의 무용수가 높이 도약하여 강하게 포옹하는 동작도 잘해냈다. <Daum 백과:서양무용의 역사> Pair dancing[edit]
In pair dancing, two people of the same gender would perform together.[24][23] This form of dancing was established by the 6th dynasty(ca. 2345 BC–ca. 2181 BC). An image from this time depicted female pair dancers with canes. 5th dynasty female dancers are shown to hold hands while performing in unison. The dances used symmetrical and dramatic movements and conveyed emotions such as longing or depression<위키백과:Dance in ancient Egypt> 이집트 신왕조 BC 1350년 경 무용벽화에는 두 여성무용수가 손뼉을 치면서 회전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 장면은 연화대의 변전(抃轉)과 일치한다.
가야르(gaillard)는 경쾌한 16세기 유럽 궁중무용. 4번 가볍게 뛰고 1번 높이 뛰어오르는 스텝으로 건장한 신사들은 파트너에게 자신의 기량을 자랑해보일 수 있었다. 파반이라는 장중한 춤이 끝난 뒤에 이 춤을 춘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특히 1530년경부터 1620년까지 프랑스·스페인·영국에서도 유행했다. 이들 나라에서는 이 춤이 5개 기본 스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생파(cinq pas)라고도 불렸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아침 운동으로 이 춤을 추었다고 한다. <Daum 백과:가야르> |
통하는 점이 있다. 이 점을 고려하여, 자지무/ 정재 연화대의 춤과 비슷한 것을 살펴보면,
한국의 궁중검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영국의 Morris dance가 있다. 이 춤은 보통 정강이 위에 bell pads를 착용하고 추는데, 막대나 검, 손수건으로 딱딱 부딪혀 소리를 내면서 춘다. 이는 연화대의 합립에 동령(銅鈴)을 달고 춤을 추는 것, 궁중검무의 검이 소리를 내는 것과 비슷한 점이 있다. 영국은 섬이어서 일본과 같이 문화의 보존력이 높다는 점에서 관심을 둘 만하다.
그리고 이집트 문화의 연화화생은 정재 연화대 연화화생의 기본 바탕이기에, 정재 연화대의 무녀(舞女) 양동녀의 유래를 이집트 문화에서 찾아보면, 이집트 제6왕조 (ca. 2345 BC–ca. 2181 BC) 시기에 형성된 양무녀(兩舞女)의 춤에서, 무녀들은 막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이 막대는 춤추는 과정에 부딪혀 소리를 내는 것인데, 중국 신석기 문화지역인 반포 유적지에서 대나무 막대 두 개를 마주치면서 추는 춤을 본 적이 있고, 영국 Moris의 춤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연화대의 춤동작에 변전(抃轉)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손뼉을 치면서 도는 것이고, 그 때에 합립의 동령이 울리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Moris에 등장하는 정강이 위의 벨 착용 패드를 연상케 한다. 이집트, 영국, 정재 연화대, 이들 무용의 밑에는 무언가 공통의 요소가 흐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정재 연화대의 역사는 이집트 제6왕조 (ca. 2345 BC–ca. 2181 BC) 까지 올라갈 수 있고, 이를 참고하면 정재 연화대의 기본무는 이집트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연구 자료로는 당시 이집트의 춤에서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를 찾기 힘들고, 그보다는 이집트를 거쳐 다른 지역으로 전해진 춤과 음악에서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집트 이 외 다른 지역에서 추어지는 춤 중에서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兩童女或面或背三進退舞)의 모습을 갖춘 것을 찾는다면, 카스피해 주변과 연결되는 동유럽 지역,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속춤, 포크댄스와 쿠바에서 발생하였다는 "two, three, chachacha", "four-and-one, two, three" or "one, two, three, chacha". 기본박자의 ‘차차차’(cha-cha-chá, informally called cha-cha, is a dance of Cuban origin)를 들 수 있다.
‘차차차’의 명칭은 “이 춤을 출 때 연주되는 곤봉처럼 생긴 악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이 악기는 서인도제도 카리브지역에 섬에서 자라는 차차(Tcha tcha), 또는 콰콰(Kwa kwa)라는 이름의 열매로 만들었기 때문에 ‘차차’라고 불렸다.”<Daum 백과:차차차>는데, ‘차차’는 柘枝의 고대 명칭 Chach, چ (čâč)와 음이 비슷하고, 석국(石國)의 石은 [shí,dàn]으로 발음되는데, 이 중 dan의 음은 음악 ‘차차-차’의 원형에 가까운 ‘룸바와 맘보’‘danzόn’ , 이것과 관련 있는 Danza에서 볼 수 있다. 이들 음악이 아프리카와 관련 있다는 점에서, 쿠바의 ‘차차(Tcha tcha)’는 아마도 석국의 탁지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柘枝의 고대 명칭 Chach, چ (čâč), ش (šāš)와 현대 발음 zhè (zhe4) Cantonese(Jyutping): ze3 (rú, giá, chá), ‘자루, 자쟈, 자차’ 등을 고려하고, 자지무/탁지무의 기본안무가 여러 가지였다는 연구를 참고하면, 이것의 안무 형태 중의 하나가 아프리카에서 쿠바 섬으로 이주한 흑인들의 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라틴 댄스 “차차차”가 아닌가 한다.
Historians believe the name Cuba comes from the Taíno language, however "its exact derivation [is] unknown".[24] The exact meaning of the name is unclear but it may be translated either as 'where fertile land is abundant' (cubao),[25] or 'great place' (coabana). 쿠바의 어원은 신을 뜻하는 ᄏᆞᄇᆞ 이고, 이는 일본어 한자로는 阿波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바다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서인도제도의 쿠바 문화의 밑바탕 뿌리는 바다를 통해 이주해온 ᄏᆞᄇᆞ 신을 믿는 사람들의 문화이다.
차차차는 춤을 반주하는 악기가 ‘차차’라는 열매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는데, 이 나무의 열매를 중국 지역에서 찾는다면, 산뽕나무의 열매 오디 비슷하지 않을까. 자(柘[zhè]) ; 산뽕나무, 산상(山桑), 적황색, 사탕수수 는 자지무 춤을 출 때, 자(柘) 나무 가지를 맞부딪혀 음악적 효과의 음을 내면서 추었을 것이고, 이 효과음을 내기 위해 차차 열매로 만든 악기가 차차차 음악에 사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정재 연화대에서 모자에 방울을 달고, 손뼉을 치면서 회전하는 동작을 취하는 것은, 바로 ‘차차’를 흔들 때 나는 소리, 나뭇가지 부딪치는 효과를 반영한 것이다. 즉 현대 쿠바의 ‘차차차‘의 "two, three, chachacha", our-and-one, two, three" or "one, two, three, chacha".에서 과거 석국 탁지무의 차차차를 볼 수 있고, 이것에서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를 볼 수 있다.
차차차의 기본스텝과 춤추는 과정, 동유럽 지역의 민속춤 포커댄스, 러시아 주면의 폴카,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양동녀혹면혹배삼진퇴무’는 복원가능한데, 이를 굳이 한국 무용에서 찾는 다면, 2박4보의 보법과 연풍대 보법, 궁중검무, 궁중 기본무(,국악원기본무)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it was noticed that the dancers had improvised a triple step in their footwork producing the sound "cha-cha-cha". Thus, the new style came to be known as "cha-cha-chá" and became associated with a dance where dancers perform a triple step.[5] Usually they are two quick steps and one slow one, i.e., often they are counted as "quick-quick-slow", "one-and-two", "three-and-four", etc.
The basic footwork pattern of cha-cha-chá (two, three, cha-cha-cha) is also found in several Afro-Cuban dances from the Santería religion. For example, one of the steps used in the dance for the orisha Ogun uses an identical footwork pattern. These Afro-Cuban dances predate the development of cha-cha-chá and were known by many Cubans in the 1950s, especially those of African origin.[6] Thus, the footwork of the cha-cha-chá was likely inspired by these Afro-Cuban dances
恰恰舞(cha-cha-cha)是所有拉丁舞中最受欢迎的舞蹈,音乐很容易辨认,旋律音符通常是短音或是眺音。
恰恰恰舞是古巴的舞蹈,与伦巴舞一样,古巴舞者以音乐的第二拍开始前进或引导。男士方面,正确的方法是两脚稍微分开站立,重心置于左脚,第一拍时,以右脚向右侧跨一小步(女士相反),然后以左脚前进(女士右脚后退)进行基本动作,节拍数法有:“慢,慢,快快,慢”、“踏,踏,恰恰恰”和“2,3,4&,1”所有的舞步都是这种数
<Wikipeia:cha-cha-c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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