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 고향 평창의 새 역사
심 영 희
아침 일찍 고향을 향해 달렸다. 다른
날처럼 운전하며 혼자 가는데 마음이 허전하다. 오늘 고향 가는 목적은 좋은 일인데 오일 전에 세상을
떠난 언니를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이 든다.
새말부터 영동고속도로에 들어서자 차량은 밀리기 시작했고 길이 얼까 염화칼슘을
뿌리는 차가 연속으로 세 대나 줄을 서서 달리고 있다. 추월선으로 두 대를 지나 세 번째 차를 지나는데
분사액이 옆 차선 차량을 뒤덮는다. 자동차는 금방 엉망이 되었고 횡계IC를
빠져나가는 데만 30분이 걸렸다.
다른 때 같으면 문학행사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즐거웠는데 오늘은 그런 기분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 중 고향에 제일 오래 살았던 언니가 설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1월 29일에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월 30일이 ‘한국수필가협회’ 총회이고 2월 5일 월요일은
복지관 개강이라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고 집에 와 저녁을 먹는데 언니의 부고 소식이 왔다. 다음날 서울로
가려던 발길은 강릉으로 향했다. 총회를 하는 시간에 눈물로 언니의 입관식을 하고 그 다음날 춘천에 있는
‘부활성당’이란 납골당에 모셨다. 언니도 카톨릭신자이지만 언니 아들은 춘천교구의 모 성당의 주임신부다.
오늘 2월 3일은 강원예총 행사로 고향인 횡계리에서 ‘평창문화올림픽 대축제’가 열리는 날이다. 강원문인협회에서는 평창동계올림픽을 내용으로 쓴
시 육십 편을 전시하기에 구경도 하고 작품도 가져올 겸 길을 나섰는데 마음은 우울하고 차는 막히고 특히 횡계로 진입하는 길은 통과하는 차보다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차량이 더 많았다. 이해는 가는 상황이다. 그
많은 차량을 횡계로 들여보내면 좁은 동네에 주차할 것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내 고향을 코앞에 두고도 들어가지 못하고 새로 난 길로 돌아 반대편에서 횡계로
진입하는 데도 무엇을 물어보는지 통과하는 차는 별로 없다. 내 차례가 되어 횡계에서 점등식 행사로 문인협회에서
시화전을 하기 때문에 행사장에 가야 한다고 해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럼 횡계에 사세요”하고 묻기에 살지는 않지만 고향이기에 웬만한 곳은 다 알고 있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제야 통과가 되어 텅
빈 도로를 전세 내듯 혼자 달려 아버지께서 근무하시던 농협을 지나 아버지 오빠 언니 동생들이 다니던 성당마당으로 들어가 차를 세웠다. 고향 땅 밟기가 이렇게 힘들기도 오늘이 처음이다.
또 요즈음 날씨는 얼마나 추운가 더욱 춥기로 이름난 대관령 횡계의 칼바람을 맞으며
행사장을 찾아갔다. 회장님을 비롯해 준비하고 있던 회원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또 고향이란 점을 배려해 내 작품을 맨 앞에 전시해 놓았는데 몇 분 어르신이 구경을 오셨는데 ‘조합장 딸’이라고 했더니 알더라고 전해주는데 아버지를 만난 듯 반가웠다.
시화를 구경하는데 누가 나를 찾는다기에 앞으로 가보니 전혀 모르는 여성과 외국남성
두 명이 서있었다. 이번 전시는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한글과 함께 넣어 시화를 제작했으니 외국인도
시화작품을 보기에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내 시 제목이 ‘내 고향 평창의 새 역사’라 고향에 대하여 몇 가지 물어보고 동계올림픽이
고향에서 열리는 소감을 인터뷰를 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러겠다고 대답하고 강원문인협회 회장님을 소개했다. 작품을
구경하고는 윗사람 허락을 받고 취재하러 올 테니 좀 기다려달라고 한다.
이번 시화전에 가는 목적은 첫째로 작품을 감상하고 내 작품을 가지고 오는 것이지만
더 큰 목적은 점등식 주변에서 열리는 행사와 전경을 보고 글을 쓰려고 했던 것인데 생각과 달리 날씨는 춥고 바람은 거세고 밖으로 나가기 싫어 난로
앞에 비스듬히 앉아 사선으로 보이는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 예술인들의 춤을 구경하는데 그들은 얼마나 추울까 그 추운 날씨에 얇은 공연복을 입었으니. 그래도 ‘평창문화올림픽’이라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웃음으로 공연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얼마 후 취재진이 왔다. 천막속도
추워죽겠는데 다른 곳에서 취재를 하자고 한다. 바로 옆에서 공연을 하고 있으니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니 할 수 없이 그렇게 하자고 했는데 분위기를 살린다며 하필이면 횡계벌판 다리 위에다 자리를 잡았다.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눈 쌓인 다리 밑에서는 더욱 세찬 바람이 치고 올라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도 없고 인터넷으로도 볼 수 없다는 ‘올림픽방송 OBS’라고 하는데 외국인 남자들은 네델란드와 독일 사람이고
전주가 고향이라는 여성이 통역을 하며 인터뷰는 시작되었다.
오십 년대 썰매 타는 얘기서부터 올림픽이 열리기까지 고향이 발전하며 변모한 모습과
학창시절 스키를 타보았느냐는 질문에 조금은 타보았다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스키의 고장 횡계에서 태어난 특권이었다. 고향에서 올림픽이 열리는 소감, 무엇을 생각하며 시를 썼느냐는 질문
등 추운 날씨에 인터뷰는 꽤 오래 계속되었다. 통역으로 인터뷰를 하니 곱절의 시간이 걸렸다.
시를 읽어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외우지 않아 낭송을 못하고 낭독은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리 위에서 내 시화작품을 보며 낭독을 하였다.
내 고향 평창의 새 역사
스키선수를 많이 배출한 평창
횡계
꿈으로 익어가던 내 유년의
추억이
설원 위를 날고 있는 동화의
나라
지구촌 사람 위해 환한 미소
지으며
Yes, 평창외치면서 이루어낸 새 역사
2018평창동계올림픽!
그날 위해 울고 웃던 지난 그 세월
성공으로 솟아오른 강원인의 힘
세계 속에 우뚝 선 내 고향 평창
너도 나도 얼싸안고 춤추고 노래하며
2018년 꿈을 향해 뛰어라 날아라
높이높이 날아라 축제의 하늘로
설원을 달리는 지구촌사람들이
평창의 하늘에 만국기 휘날리며
승리 위해 싸우는 세계인의 축제장
시 낭독이 끝나고 이어서 강원문인협회 김양수 회장님이 시화전을 열개된 동기와 강원문인협회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고향에 왔으니 시가지를 걷는 것도 찍어야 한다는 주문에 둘이서 다리 위에서 데이트하는 걸로 촬영은 끝이 났다.
전시장으로 돌아오는데 어찌나 추운지 걸음이 제대로 걸어지지 않았다. 물론
바지에 부츠차림이라 내 평상시 차림이 아니어서 더 어색했으리라.
고향에 왔다고 제정자 수필가가 저녁을 사주어서 맛있게 먹고 춘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옛날 우리 집이 있던
부근을 돌아보았는데 날은 어둡고 많아진 건물 때문이 구분이 어렵다. 우리 집이 있던 옆으로 중학교가
이전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학교 간판을 보고 입구로 들어가 보았으나 교문 앞에서 길이 끊겼다. 교문
안으로 들어가 차를 돌려 춘천으로 오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부모형제란 고향이란 가족이란 무엇이기에 이렇게 내 마음을 애타게 하는가,
맺어진 연결고리를 끊고 이별을 해야 하는 우리 인생의 무상함이 야릇한 마음으로 고동친다. 살아
있는 동안 내 삶에 충실해야 하겠다. 고향이 발전하여 세계 속에 우뚝 서며 새 역사를 쓰듯이 나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을 해본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동계올림픽 각국의 선수들은 승리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싸우겠지 우리들은 언제나 경쟁
속에서 승리와 패배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다.
내 고향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정말 새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세계
속에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안고 온 2018평창동계올림픽 개최는 대한민국의 자랑이며 내 고향 강원도 평창의
자랑이다.
(한국수필 4월호 수록)
약 력
ㅇ 1995년 ‘수필과
비평’지로 등단
ㅇ 수필집 ‘아직은 마흔아홉’
외 4권
시집 ‘어머니 고향’ 출간
ㅇ 제20회 동포문학상/제27회 한국수필문학상/제21회
황희문화예술상 시부문 금상/제6회 소월문학상 등 수상
ㅇ 메일 : sunsy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