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 본명:김남진 1945년 9월 25일생 70년대 가요계 제1의 스타 관객들은 무대 전면에 나선 다듬어지고 분장한 스타들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인기 연예인들의 소박한 진면목은 언제나 컴컴한 무대 뒤에서 별처럼 더욱 빛난다. 팬들이 갈채와 사랑을 보내는 인기인들의 본래모습은 어떤 것일까? 지방무대와 야간업소 무대에서 스타들과 고락을 함께 한 전국 사회자들의 친목모임인 '까치회' 상임감사 김태랑(金泰浪)씨가 회고하는 가수 남진씨의 추억담을 들어본다. 전국이 열광한 노래 '님과 함께'로 70년대 가요계를 활활 불태웠던 제1의 스타 남진. 그는 현재 내로라 하는 그 어느 가수도 비교하지 못할 살인적 인기를 누렸던 진정한 대중가수였다. 남진이 가는 곳마다 팬들은 열광했고 그가 어느 지방에서 리사이틀을 갖게되면 그 곳은 공연 며칠 전부터 마치 축제분위기처럼 술렁이곤 했다. 이러한 그의 리사이틀에 내가 사회를 보고 함께 무대에서 코미디도 했다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었고, 지금 돌이켜보아도 잊혀질 수 없는 흥분이었다. 그때 그 감동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는 무대 위에서나 무대 뒤에서나 언제나 소탈한 사람이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어떤 화제라도 그는 떠들고 얘기하기를 사심(私心)없이 즐거워했다. 공연이 끝나면 타고 갈 자가용도 보내버리고 한사코 삐걱거리는 공연단의 전세버스를 타는 것이었다. 순전히 우리와 떠들고 술 마시는 그런 유쾌한 분위기가 좋아서였다. 그의 장난기는 알아줄 정도였다. 어떤 면에서 악동(惡童)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지난72년 경북 안동 '대한극장'에서의 리사이틀 때였다. 공연이 끝난 뒤 남진을 비롯한 악단, 무용단, 분장요원 모두는 장마철이었던 관계로 일찍 숙소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리 스타가 끼어있더라도 단체가 투숙할 경우 여관주인은 좀처럼 손님 받기를 꺼리는 것이 상례였다. 그래서 방을 얻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고 가까스로 구했다고 해도 이가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것 같은 초라한 여관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우리가 투숙했던 여관도 그렇고 그런 수준이었고 지루한 장마로 인해서 방의 천장이 샜고 그 사이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남진에게는 하나의 좋은 '건수'였고 개구쟁이 끼로 가득한 그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이마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그는 대뜸 “불이야!”하고 소리치면서 방을 뛰쳐나왔다. “물이야” 해야 될걸 고의적으로 불로 바꾼 것이었다. 한 숙소에 머물던 단원들은 정말 화재가 발생한 줄 알았고 한바탕 시끌벅쩍한 대소동이 일었다. 이런 꼴을 보고싶어서 그가 장난을 친 게 분명했지만 이날은 결국 그의 꾀에 그가 넘어갔다. 순간 공연단원의 숙소들 중 따로 마련된 여자들의 방에서 난데없이 한 여자가 뛰쳐나왔다. 아무리 위기상황이라도 한밤중에 여자가 잠옷만 걸친 채 달려나오기는 힘든 법. 그 여인은 서라성(현재 일본체류)이라는 무용수였다. 그런데 둘은 이전부터 아리송했던 관계로 끊임없이 우리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사이였다. 내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는 눈빛이 남달랐다. 본인들한테 확인절차를 거치면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며 생사람 잡지 말라고 딱 잡아뗐지만 이날 사건으로 정체가 불분명했던 사이가 객관적으로 희미하게 가닥을 드러낸 것이었다. 말이 그렇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내용과 무관하게 듣고싶은 것 아니겠는가. 우리는 서라성에게 “얼마나 남진이가 좋았으면 잠결에도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을까?”하고 놀려댔고 남진도 두고두고 우리들의 조롱대상에서 제외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더 이상 진전이 없이 끝내 '아리송한 관계'를 유지했다. 1977년 전남 완도 공연 때의 일이다. 당시 남진은 한창 윤복희(尹福姬)와 열애에 빠져있었다. 둘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여관방에서 잠도 자지 않고 미국에 있는 윤복희에게 수없이 전화통화를 하는 바람에 그 날 공연에서 번 돈을 통화료만으로 몽땅 날려버렸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윤복희가 남진 모르게 불쑥 완도에 잠입(?)했다. 물론 남진이 보고싶어서였다. 그 때 무대에서는 한창 '최진사 댁 셋째 딸' 코미디가 펼쳐지고 있었고 남진이 '칠복'역을, 셋째 딸은 홍화숙이라는 무명가수가 맡아 연기했다. 윤복희는 잽싸게 분장실을 찾아가 화장을 하고 홍화숙의 의상을 빼앗는 듯 대신 입고 무대로 총총히 걸어나갔다. 그 장면은 마침 셋째 딸과 칠복이가 혼례식에서 맞절을 하는 대목이었다. 이를 까맣게 모르는 남진은 맞절을 하고 신부의 얼굴을 보더니 파랗게 질려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아버렸다. 윤복희와 남진의 이 난데없는 해프닝으로 3분이나 쇼가 중단되었다. 진상을 알고있는 나와 분장실 요원은 배꼽을 잡고 낄낄 웃어댔지만 관중들은 영문을 몰라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남진 앞의 셋째 딸이 윤복희인줄 알 턱이 없는 손님들은 '남진이 갑자기 복통이 났나?' 아니면 '총각이라서 결혼식 장면에 의외의 쇼크를 당한 것일까?'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남진과 윤복희가 결혼 전 얼마나 서로에게 깊이 빠져있었던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일화였다. 이처럼 공연할 때마다 뒤 무대에서는 관객들은 전혀 모르는 아기자기한 얘기들이 예고 없이 터져 나오곤 했다. 하지만 70년대 초반의 최대 히트상품인 남진 리사이틀을 다녔던 때를 회고하면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그에게 쏟아진 팬들의 엄청난 환호와 갈채였다. 공연이 끝나고 여관에 투숙하면 그를 만나보려는 사람들로 언제나 숙소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래서 밤만 되면 남진을 제외한 우리 공연단은 자연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는 사람들 모르게 남진만이 딴 여관에 투숙하는 방법을 택하곤 했다. 그랬더니 덕보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었다. 남진이 그 여관에 머무는 줄 알고 여성 팬이 압도적이었던 팬들은 정성 들여 끓여온 차와 만들어온 떡을 쉴 새없이 우리 숙소에 보내주었다. 리사이틀이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모두 호화로운 디너쇼로 탈바꿈한 오늘의 가요계는 이런 흥취와 낭만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최근 컴백해서 다시 활동하고있는 남진을 보니 그때 그 시절의 장면들이 간절히 그리워진다. (1987.12 주간경향) 남진
이 땅의 누이들을 달뜨게 한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내내 가요계를 평정하며 슈퍼스타로 군림했던 남진. 동시대의 또 다른 슈퍼 스타 나훈아와는 숙명의 라이벌 경쟁으로 팬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릴 만큼 잘 생긴 외모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경쾌한 율동은 그를 진정한 오빠 부대의 원조로 가요사에 자리 잡게 했다.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던 그는 영화 배우로서도 큰 인기를 누렸고, 제14대 가수분과위원장과 연예협회 회장까지 역임했다. 남진(본명 김남진)은 5대 국회의원, 호남매일신문 사장, 정미소 사업을 했던 갑부 사업가인 부친 김문옥씨와 모친 장기순씨의 부유한 가정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1946년 9월 27일 전남 목포 남교동에서 태어 났다. 그는 어린 시절 차분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그의 꿈은 가수가 아닌 영화 배우였다. 목포 북교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올라와 경복중을 졸업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목포고에 입학했다. 당시 세상을 뒤집어 놓았던 엘비스 프레슬리에 그도 반해 버렸다. 가족 몰래 가수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상경했다. 작곡가 한동훈의 픽업으로 남진이란 예명으로 64년 12곡을 취입해 데뷔 음반(서울플레이보이/킹스타ㆍ65년 1월)을 발표했다. 당시는 현미, 한명숙, 최희준 등 허스키한 목소리의 가수들 전성시대. 부드러운 음색의 남진은 큰 주목을 받지도 못하고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인 가수 활동도 못하고 공백기를 가졌다. 고교 졸업 후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외국 팝송을 즐겨 들었던 대학생 남진은 취미로 학내의 공연에 참가했고, 외부 공연장도 빠트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준수한 외모의 그는 그룹 미팅의 사회자로도 활동할 만큼 여학생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이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 아들을 당할 수 없었던 모친은 ‘이왕 하려고 최고가 되라’며 정성 어린 뒷바라지를 했다. 1년 후인 66년 12월, 김영광 작곡의 <울려고 내가 왔나/오아시스>를 내 놓으며 본격 활동에 들어 갔다. 이 앨범은 보름만에 7,000장이 팔려 나가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또한 블루스, 트롯, 왈츠, 차차차, 트위스트 등 다양한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선보이자 각 레코드사와 쇼 단체로부터 치열한 스카우트 전이 벌어졌다. 연기 공부를 했던 그는 무대 위에서 의상 컨셉과 노래에 어울리는 독특한 몸짓을 개발하며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 갔다. 67년 1월, 주목받는 신인가수로 시민회관에서 열린 연극영화상(한국일보 주최) 시상식에서 초대 가수로 오르고 1967년 MBC 방송의 신인 가수상을 수상하며 젊은 여성들의 우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울려고 내가왔나'가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 처분이 내려졌다. 67년 3월 전속사를 지구로 옮기면서 발표한 박춘석곡 '가슴 아프게'는 그의 확실한 출세작이 될 만큼 연타석 히트를 터트렸다. 한달 만에 남진은 이미자를 누르고 전국레코드 판매성적 1위에 등극하면서 4월의 최고 가수로 선정되었다. 이 곡은 또 최고 인기곡으로 뽑혔다. 연기를 전공한 준수한 외모의 그는 자신의 히트곡 '울려고 내가 왔나', '가슴 아프게'등 동명의 영화뿐 아니라 '형수' 등 수많은 영화에 주연 배우로 발탁되며 영화 배우의 꿈도 이뤄냈다. 관심의 표적이 된 남진에게서는 수많은 여가수, 배우들과의 스캔들 또한 양산됐다. 1968년 남진은 해병대에 입대하여 69년 7월 월남에 파병되었다. 2년 간 북부 호이안에서 마이크 대신 M16 소총을 든 청룡부대 2대대 5중대2소대 소총수로 싸웠다. 당시 청룡부대에는 남진 외에도 진송남, 이명진, 태원등 세 명의 가수가 더 있었다. 1969년, 월남장병 남진은 TBC 방송가요 대상에서 남자 가수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군복무로 인한 2년 간의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구레코드는 남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70년 4월, '청춘' '파도의 블루스' 등을 수록한 신보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최대 라이벌로 등장한 나훈아는 최고의 인기 가수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휴가를 얻어 잠시 귀국한 남진은 11월, 신보 '사랑이 스쳐간 상처'를 발표해 나훈아의 '두 줄기 눈물'을 제치고 가요차트 정상에 올랐다. 가요 사상 최대 라이벌인 남진, 나훈아 대결의 서막이었다. 71년 6월 남진의 제대에 맞춰 지구와 오아시스간에는 치열한 스카웃 전쟁이 벌어지고 동향인 인기가수 조미미와의 약혼설도 터졌다. 뜨거운 인기의 반증이었다. 공식 복귀 무대는 7월의 TBC TV의 <쇼쇼쇼 남진아워>. 발 빠르게 컴백 신보 음반 '마음이 약해서'도 발표했다. 제대 3개월 후인 9월, '귀국 리사이틀'이 시민회관 무대에서 열렸다. 남진의 리사이틀은 불황을 깨는 것은 물론 당시의 뉴웨이브음악인 포크, 록 등에 밀려 설자리를 잃어 우왕좌왕하던 트로트의 부활을 꿈꾸게 할 만큼 대성황을 이뤘다. 사흘 후인 71년 9월 22일 방송가요대상에서 그는 남자 가수상의 영예를 되찾으며 최고 가수로 등극했다. 이에 나훈아도 뒤질세라 10월 2일 시민회관에서 <나훈아 리사이틀>을 개최했다. 누가 관객 동원에서 승리할 것인지 여부가 당시 대중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나훈아 역시 매진 사례를 이루며 두 사람은 호각지세를 이뤘다. 당초 3년 간의 공백기를 가진 남진을 누르고 나훈아가 가수 왕에 뽑힐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을 뒤엎고 남진이 71년 MBC 가수 왕에 등극했다. 이후 두 사람은 언론의 부채질도 한 몫 했지만 사상 유례가 없는 과열 경쟁으로 가요계를 후끈 달궈 놓았다. 라이벌 가수의 대명사 '빈잔' 자세로 꾸준한 활동
첫 리사이틀에 이어 1972년 초에 벌어진 두 사람 리사이틀 재대결은 장군멍군 식으로 이번에는 나훈아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인기 경쟁이 지나치게 되자 노래보다는 묘기까지 부리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시민회관의 KBS 가수청백전. 남진, 나훈아 양측은 서로 꽃다발 공세, 화환 숫자 늘리기로 인기 세몰이는 기본이고 무대에서 여성 팬들과 키스신까지 연출했다. 방송 때는 남진, 나훈아에 등장할 때만 소녀 팬들의 아우성이 이어지고 다른 가수들의 무대는 썰렁한 무관심으로 일관되는 등 부작용도 심각했다. 결국 라이벌 관계는 지구와 오아시스 레코드회사 간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사고가 터졌다. 그해 6월 남진의 팬을 자처했던 김웅철은 사이다 병을 휘둘러 나훈아를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의혹의 눈길은 따가웠지만 결백함을 주장했던 남진은 이 사건으로 가수 분과위에서 제명 위기를 겪는 등 큰 곤혹을 치렀다. 이처럼 불미스러운 일도 많았지만 남진, 나훈아의 사력을 다했던 경쟁은 후배 가수들에겐 의욕을 주고 불황에 허덕이는 대중 음악계에는 팬들의 관심을 불러 모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대결은 70년대 내내 팬들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72년 10월, 미국 공연 때는 오색 창연한 불빛이 배터리로 작동되는 25만원짜리 사이키델릭 무대 복을 구입했다. 이 옷은 엘비스 프레슬 리가 호놀룰루 공연 때 선보였던 무대 복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73년 3회 리사이틀에서는 이 무대 복장으로 등장해 '동양의 프레슬리'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해 TBC 방송가요 대상은 그의 몫이었다. 그는 71년 한국 무대 예술 대상, 71ㆍ72ㆍ73년에는 MBC가 주관하는 가수왕 등극, 67ㆍ71ㆍ72ㆍ73ㆍ74ㆍ75년에는 10대 가수상 선정 등 70년대 중반까지 화려한 수상 퍼레이드를 벌였다. 72년에는 7천명 규모의 팬클럽을 결성해 이듬해 5월 남이섬에서 야외 잔치를 벌여 화제가 되었다. 그의 팬클럽은 '박수 부대', 무더기 희망 곡 ‘엽서 부대'로 일부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남진은 극성 여성 팬들의 등쌀에 항상 시달렸다. 꽃다발 공세는 기본이고 목에 매달리고 키스를 하려들고 몸의 일부를 만지고 붙잡기는 예사로 벌어졌다. 심지어 숙소에 속옷차림으로 들어오는 여성 팬도 있었다. 남진의 전성기 당시 히트곡들은 대부분 박춘석과 정두수의 합작품. 박춘석씨는 의리가 강한 남진을 누구보다도 아꼈다. 이들 히트곡 제조 트리오는 동아방송에서 처음 만났다. 74년 1월 레코드 계의 혁명이 일어났다. '박춘석 프로덕션'의 탄생이 그것. 남진은 이미자 등과 함께 스승인 박춘석 정두수 씨를 따라 대도 레코드사로 둥지를 옮겼다. 이때 남진은 레코드가 팔리는 숫자대로 개런티를 받는 국내 최초의 인세 가수가 되었다. 75년 4월, 경남 창녕군 대한극장 공연 때 7명의 여성 팬들이 산에서 진달래꽃을 무더기로 꺾어 꽃다발을 만들어 산림 법 위반으로 입건되는 사건이 화제가 되었다. 75년 11월에는 나훈아를 폭행했던 김웅철이 이번에는 자신을 피습하는 봉변을 겪었다. 이후 김웅철은 5년 뒤 목포의 남진 집에 불을 지르며 질긴 악연을 이어 갔다. 75년 9월, 열애 설이 나돌던 가수 윤복희와 약혼 6개월 후 파혼 선언, 2개월 후 다시 동거에 들어가는 곡예 같은 생활로 관심을 모으더니 결국 2년만인 77년 11월 정동교회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1977년에는 오아시스로 전속을 옮긴 이후 윤복희, 윤항기와 가족 쇼단을 구성해 활동했다. 하지만 78년 10월 대전 시민관 개관 17주년 기념 남진. 윤복희 쇼 '춤추는 함대' 공연 때 또 사건이 터졌다. 술에 취한 남성 팬들이 휘파람을 불며 야유를 하자 화가 난 남진이 객석으로 뛰어 내려가 전치 10일의 상처를 입힌 것. 불행의 전조였을까. 3년 7개월의 부부 생활 동안 아이가 없었던 남진과 윤복희는 79년 3월 결국 이혼의 아픔을 겪었다. 80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중앙교회에서 재미교포 강정연과 재혼을 하며 식품점을 경영했다. 3년 후 귀국한 남진은 박춘석의 주선으로 신보 '빈잔'을 발표했고 84년에는 목포에 하와이 관광나이트클럽을 오픈, 사업가로도 활동을 했다. 86년 남진은 신곡 '누가 아나요'를 발표했다. 우연인지 나훈아도 비슷한 시기에 신보를 발표했다. 87년부터 본격 가수 활동에 돌입한 남진은 89년 11월, 타워호텔 나이트클럽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 20대 청년 3명에게 긴 칼로 허벅지 하단부를 관통 당하는 피습을 당했다. 절치부심한 남진은 1991년 가수분과위원회 14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92년에는 3년 만에 신곡 '바다'를 발표하고 94년에는 힐튼호텔에서 노래인생 30년을 결산하는 기념콘서트를 열었다. 98년 7월 조선일보에서 조사한 건국이후 가수 베스트50에서 10위에 랭크되는 영광을 안았다. 2000년에는 한국연예협회 제7대 이사장으로 선출되며, KBS 가요 대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최근 그의 대표 곡‘님과 함께'는 5인조 그룹 칠리에 의해 30년 만에 새롭게 리메이크 되기도 했다. 남진은 여전히 전국 투어와 신보 발표를 멈추지 않고 활동을 벌이고 있다. "저는 음반 PR을 하지 않는 가수 중 하나예요. TV도 1년에 두세 번만 나갑니다. 인위적인 히트곡은 방송이 끊기면 1년도 안 돼 사라져버려요. 반면에 좋은 노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커져요. '빈잔' 같은 노래는 10년 만에 히트한 곡입니다." ."청춘을 돌려다오~." 남진과 나훈아는 70년대 쌍벽을 이룬 한국 대중가요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었다. 지금은 둘 다 나이 육십을 넘긴 중년 가수가 돼 있지만 당시 국내 가요계에 사실상 '오빠 부대'를 창시한 '아이들 스타'의 원조이기도 했다. '님과 함께' '미워도 다시 한번' '가슴 아프게' '빈잔' (남진), '고향역' '울긴 왜 울어' '잡초'(나훈아) 등 주옥같은 히트곡들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서로 라이벌이었기에 더욱 더 큰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20대 군복무 시절 모습은 마냥 이채롭기만 하다. 남진은 70년 청룡부대에 자원입대해 베트남 파병용사로 복무했고 나훈아는 백마부대 명예정훈대위가 돼 한달간 파월 위문공연을 가기도 했다. 이후 공군으로 복무했다 한국 대중가요사의 최고의 맞수로 손꼽히는 나훈아(왼쪽)와 남진. 두 사람은 1960년대 혜성처럼 등장해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10여 년 이상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다. 미워도 다시한번[69]
영화 <지금 그사람은>은 1969년작으로 <최훈>감독의 작품이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에서 촬영한 작품으로,
가수겸 배우 <남진>이 주연으로 나왔고, 영화의 주제가도 불렀다. 여주인공으로는 <문희>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여인”으로 나와 <남진>과 슬픈 사랑을 나눈다. 영화음악은 <박춘석>이 맡았고, 메인 주제곡 <지금 그사람은>외에도 <남진>의 노래가 많이 나왔는데, 이 영화는 1969년 설날에 개봉되어, 흥행에도 성공하였다 지금 그사람
辛奉承 作詞/ 朴椿石 作曲
1.못 잊어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못 잊어 그 얼굴을 새겨 보았다 못 다한 사연들이 산처럼 쌓였는데 세월은 낙엽처럼 떨어져 덧없이 흘러가도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그 사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그 사람 2.못 잊어 그 이름을 불러 보았다 못 잊어 그 얼굴을 새겨 보았다 돌아서 가버리면 혼자 남을 그 모습 강물에 그림처럼 흘러서 바다로 밀려가도 기다리고 있을까 지금 그 사람 생각하고 있을까 지금 그 사람
남진옛추억 히트곡 모음 나열순서...
1] 사랑이라는 것은 15] 빗속에서 누가 우나
2] 가슴 아프게 16] 사랑의 공중전화
3] 각시와 신랑 17] 사랑의 편지
4] 그대여 변치마오 18] 아랫마을 이쁜이
5] 김포가도 19] 어머님
6] 꽃잎지는밤 20] 우수
7] 너와 나 21] 이슬비
8] 님과함께 22] 젊은 초원
9] 당신은 나의 태양 23] 지금 그 사람은
10] 당신이 좋아요 24] 미워도 다시한번
11] 마음이 고아야지 25] 사람나고 돈 났지
12] 마음이 약해서 26] 멋쟁이 아빠
13] 무엇하러 왔니 27] 눈물로 끝난사랑
14] 별아 내 가슴에 28] 고교 3년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