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을 죽여 본 적이 없다. 젊어서 월남전에 참전했을 때 내가 쏜 몇 방의 총알에 재수 없이 맞아서 숨진 월남인이 없다면. 그러나 사람을 죽이고 싶은 때는 여러 번 있었다.
인간에게 심리적으로 극한상황은 어떤 것일까? 사랑의 극한상황은 상상하기가 어렵지만 미움의 극한상황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즉, 누군가를 죽여 버리고 싶은 때일 것이다. 정말로 타인을 죽이고 싶을 때 실제로 죽일 수도 없지만(상대방이 스스로 죽어주면 좋겠지만) 죽인다고 해결되지 않고 살인 사건으로 문제만 더 복잡해질 뿐이다. 그 때야말로 내가 죽어야 할 때이다. 남을 죽이고 싶을 때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기이다. 인간은 ’남을 죽이지는 못해도 자신을 죽일 줄 알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이다.
세상을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지만 가장 중요한 전쟁은 무어니 무어니 해도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전쟁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늘 지고 살아서 아예 긴장을 느끼지를 못하고 산다. 타인과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실제로는 자기와의 싸움일 경우가 더 많다.
바울은 “나는 매일 죽노라.”고 했다. 죽는 습관이란 자기를 부정하는 습관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매일 남을 부정하면서 산다. 특히 부부싸움을 할 때 보면 그렇듯이 남을 부인하는 것은 밥 먹는 것보다 더 쉽지만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소태보다 쓰다.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를 긍정하려는 동물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상에는 온통 징그럽게 자기를 긍정하는 사람들뿐이다.
예수가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들면서 하나 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점잖게 말해서 “오늘 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가 가진 그 많은 소유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 이야기는 깡패들이 싸울 때 “너 오늘 밥숟가락 놓고 싶어?”하는 표현과 똑 같은 것이다. 한 마디로 "잘났어! 정말."인 것이다.
예수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예수는 ‘가는 말이 험해야 오는 말이 곱다.’는 것을 잘 알았다. 즉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세게 나간 것이다. 예수는 자기 긍정 밖에 모르는 인간들에게 단순 무식하게 자기를 부정하는 법을 한 수 가르친 것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깨닫는다.'는 것을 서양식으로는 해석학이라고 한다. 해석학의 특징은 파괴력이다. 자기긍정을 뒤집어 자기부정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써먹었던 방법이다. 깨달음의 특징은 부서짐 즉, 파괴이다. 즉,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교통 법규를 많이 위반하고 산다. 그러나 걸리지 않을 때는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걸려서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될 때가서야 비로소 잘못을 처절하게 반성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는 그렇지 말아야지. 절대로 교통규칙을 어기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도 그렇다. 그냥 넘어가면 괜찮고 문제가 잘못 되었을 때에야 원인을 찾고 반성을 하게 된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벌이 없으면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겁을 주기 위해서 지옥을 설정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제품의 구조가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 어떤 형태로든 댓가를 치르도록 하려고 하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댓가를 치르기를 원하지 않게 되어 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타인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자신에 대해서는 최대한 관대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나쁜 제품은 자신에게 한 없이 관대한 인간이고 좋은 제품은 자신에게 엄격한 인간이다. 대부분 자신에게 한 없이 관대한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기 쉽다.
내 주변에 아주 기분 나쁜 인간이 있다. 그와 전화를 주고받으면 하루 종일 기분 나쁘고, 메일을 주고받으면 이틀은 기분 나쁘고,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한 주간이 기분 나쁘고, 어쩌다가 그와 토론이라도 하게 되면 최소한 한 달은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내가 왜 기분이 나쁠까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에고라는 이른바 ‘존재의 벽’을 가지고 있다. 즉, 마음 깊숙한 곳에 에고라는 ‘반향판’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타인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에고의 반향판으로 받아들인 뒤 그 반향음을 듣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타인의 음성을 내가 듣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에고가 듣는 셈이다. 결국 기분이 나빴다 좋았다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안의 에고가 내는 소리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군대에서 PX 관리병을 할 때의 일이다. PX 관리병은 군대 안에서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직책으로 내 체질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일이었지만 일이 편하기 때문에 빽을 써서 그 자리를 맡게 되었다. 내가 맡은 PX는 규모가 큰 곳이어서 정원이 2 명인데 내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수가 제대를 해서 내가 사수가 되어 조수를 받게 되었다.
보통 사수가 현금을 다루는 일과 회계 일체를 담당하고 조수는 주로 청소 물품관리 판매 등 몸으로 하는 허드레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수로 받은 조 일병이 상고 출신으로 계산이 밝고 장사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PX 운영을 잘해서 부대 운영비를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조달하기 위한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조수에게 금전관리 일체를 넘겨주고 내가 대신 빗자루를 잡았다.
그랬더니 아무리 군대라고해도 장사는 장사니까 경영권이 조수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가고 조수가 나에게 이것 저것을 지시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고참인 나에게 “지 병장 님! 이것 좀 해주실래요?” 하고 어렵게 이야기를 하더니 나중에는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처럼 일을 시켰다. 어느 집이나 금고 열쇠 가진 사람이 주인이 되는 법이지만 군대 생활을 나보다 반도 안한 조수가 사수가 되고 내가 조수가 되어버린 군대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상황을 개의치 않았다. 그것은 내가 관대하거나 혹은 아랫 사람을 통솔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PX 운영에서 내가 지켜야할 아무런 에고가 없었기 때문에 즉 내가 죽었기 때문에 상하 질서가 절대적인 군대 문화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목사님 덕분에 아침에 좋은 글로 하루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