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로 보는논술] 인물화에 황제보다 키가 큰 시종이 없는 이유는 뭘까?
조선일보 | 최혜원 블루로터스 아트디렉터·'미술 쟁점-그림으로 비춰보는 우리시대' 저자
2010.12.30 03:21
염입본 '역대제왕도'
위진남북조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중국 인물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당나라의 인물화가 중 가장 중요한 화가로 염입본(閻立本, ?~673)이 있다. 그의 작품으로 전하는 것은 송나라 때의 모사본인 '보련도(步輦圖)'와 전칭작(傳稱作·해당 작가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인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뿐이지만 이 두 작품으로도 당나라 인물화의 특징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당나라 인물화의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후육형(厚肉形)'의 신체표현이 눈에 들어온다. 앞선 위진남북조 시대의 길고 마른 몸매와 갸름하고 수려한 얼굴 표현과는 정반대로 작달막한 신체비례와 풍만한 몸매의 신체표현이 두드러진다. 두상이 크고 키가 작아서 5등신 정도의 '단구(短軀)'의 신체비례를 보인다.
염입본의 전칭작인 '역대제왕도'는 북송시대(960~1127)에 모사한 그림으로 여겨진다. 폭 50cm의 비단 두루마리에 그려진 것으로 길이가 5m가 넘는 대작이다. 전한(前漢)의 소제(昭帝, 기원전 179~157)부터 수나라 양제(煬帝, 607~617)에 이르는 역대의 제왕 13명을 시종들과 더불어 묘사한 대규모 초상화이다.
이 작품에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당나라 인물화의 주된 특징인 후육형 신체표현과 단구의 신체비례가 눈에 띈다. 또한 황제는 항상 시종들보다 크게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주인공을 가장 크게 그리는 전통적인 인물화의 화풍에 따른 것인데, 이는 당나라뿐 아니라 다른 문화권 인물화에서도 보이는 특징이다.
◆'심리적인 원근법'과 '존대비소(尊大卑小)'의 전통적인 인물화 표현방식
우리가 잘 아는 이집트의 벽화를 보면, 파라오는 거인처럼 그려져 있고 왕비와 신하, 노예들이 신분에 따라 엄청난 크기 차이를 보인다. 등장인물의 크기가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해 그려진 것도 같은 맥락의 고전적인 인물화의 화풍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심리적인 원근법'이라고 한다. 심리적으로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그 인물의 중요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근거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신분이 높고 중요한 사람은 크게 부각하여 그리고, 상대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함은 작게 그리는 것으로 '존대비소(尊大卑小)'라고도 한다. 즉 인간의 심리에 근거한 보편성을 나타내는 표현방식이다.
전(傳) 염입본(閻굤本, ?~673),‘ 역대제왕도(곎代帝王圖)’, 당나라(7세기), 비단에 채색, 51.3×531cm, 미국 보스턴 파인아트 미술관 소장.
여기에 또 하나, 당나라 인물화의 옷 주름 표현에 사용된 '철선묘(鐵線描)'도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주로 인물화의 옷 주름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동양화의 표현기법 중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굵기로 예리하게 그리는 필선이다. 철사처럼 쉽게 부러지지 않는 강하고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멸망한 수나라의 두 황제를 그림에서 만나다
'역대제왕도'에서 우리나라 역사와 연관이 깊은 두 명의 황제도 만날 수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581~618)나라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개국 초부터 적극적으로 통일 사업을 펼치며 북방민족과 전쟁을 벌여 무리하게 영토를 확장하고, 대운하와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실시해 백성의 원성을 샀다. 이어 수나라 문제(文帝) 양견(541~604)과 그의 아들 양제(煬帝, 607~617)가 4차례에 걸친 고구려 전쟁에서 모두 패하면서 618년 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수나라 문제 양견은 그의 제호처럼 문치주의를 표방한 황제였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구품중정법 을 대체한 과거제를 587년에 처음 실시하는 등 합리적인 방법으로 인재를 등용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통일왕조로서의 확고한 정통성 확립이 절실했던 터라 598년(고구려 영양왕 9년)에 30만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반격과 질병, 풍랑으로 퇴각했다.
그 뒤를 이은 양제도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역시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에 부딪혀 퇴각했다. 수나라는 다시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으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크게 패해 고작 2700명만이 살아 돌아갔다. 이 전쟁이 바로 '살수대첩(薩水大捷)'이다. 이렇게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역사 속의 주인공들을 바로 염입본의 그림 속에서 지금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
― 고전적인 동양 인물화와 서양 인물화를 비교해서 서로 다른 특징을 찾아보고 표현방식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조선일보 2010,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