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껴드는 햇살이 눈에 시린 날 온 몸이 불덩이같이 달아올랐다 펄펄 끓는 신열 녹이고 달래기 위해 은밀한 골방 내 침소에 들러 한낮의 이글거리는 부대(負戴)한 퍼런 욕망 잠시 잠재우기로 했다 번잡하던 한 낮의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니 곧 이어 파란 하늘이 열렸다 꿈속에서 보는 열린 하늘은 언제 보아도 맑고 깨끗하다 출렁이며 귓가에 속삭이며 쉴 새 없이 파고들어 연약한 내 가슴에 못을 박고 퍼렇게 멍울이 지게 하던 근거 없는 부대낌의 속성들 형체도 없이 쉴 새 없이 내 창가로 날아들어 눈부신 하늘을 가로막던 암울한 회색빛의 욕망들 뭉클뭉클 솟아날 때마다 나는 몸살과 함께 진절머리를 치곤했다 그럴 때는 도리가 없었다. 그것과 맞닥뜨려 정면으로 치고받으며 승부하기란 모질지 못한 내 연약한 심성이 문제였다 더부룩한 욕정을 삭이기 위해 간간이 찾아드는 침실 그 문지방 근처에는 졸졸 나를 따라 다니던 우리 집 포인터가 살짝 쭈그리고 앉아 꿈꾸는 틈새를 엿보고 있었다.
절벽 위의 양떼들
그 곳에 가면 해변의 끝자락 깎아지른 듯한 암벽 위 평화로운 풀밭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떼들을 종종 목도할 수 있다 양들은 두 ~ 서너 마리 씩 떼를 지어 풀을 뜯기에 한참이나 정신을 못 차린다. 씽씽 해변에서 거센 강풍이 휘몰아쳐도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기죽지도 않고 연신 풀밭에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향긋한 목초지 에서 풍기는 그 먹음직한 냄새의 유혹을 결코 떨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 양들의 생리였다 그러나 그 보다도 더 양들로 의기양양하게 그들의 목초지 에서 풀을 뜯어먹게 할 수 있는 원천적인 소스는 사방이 단애로 끊어져 있고 또한 석재로 축성된 울타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어 풍우나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그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양떼들은 훤히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양떼들은 그들의 방목지에서 성곽으로 둘러 쳐진 안전히 거하는 곳에서 맘껏 배불리 포식하며 콧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먹을거리가 널려 있고 따사로운 햇살이 감싸고도는 포근하고 좋은 나날들이었다.
화병의 꽃
그대가 보내 준 화병에 담긴 꽃을 본다 한가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장지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와 길게 그림자를 내릴 때 당신이 보내 준 꽃의 알싸한 향기가 온 집안 거실과 뜰 사방으로 차고 넘쳐난다 언제나 의미 있는 꽃으로 내게 다가와 넌지시 눈웃음치는 이여 ! 꽃을 볼 때마다 당신 생각에 내 가슴은 이리도 콩닥거리고 살풋한 그리움의 자락 저렇게 너울지듯 퍼지는데 나 아마도 오늘 오후 당신 생각으로 깡그리 채워진 몽롱한 무릉도원 그 속에서 한참이나 뒹굴겠소 오고 가는 계절마다 당신은 잊지 않고 꽃을 보내고 나는 그 그리움이 묻어나는 형형색색의 이미지를 못 잊어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오 꽃들이 있음으로 해서 줄기차게 이어지는 당신과 나 끝도 없는 연결고리의 화사하고 보드라운 웃음 매번 비시시 미소를 짓게 하니 세상 천지에 꽃 만한 선물 아직 까지 있단 말 못 들었으니 언제나 내게 들려오는 좋은 소식들 내게 들려주는 좋은 노래들 향긋한 향취가 어디 있으리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정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거실 베란다 내가 즐거이 가서 뒹굴며 노는 사색의 창가에는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커다란 우리 집 포인터라 이름 부르는 애완견이 있다 정원에 제 집이 따로 있지만 햇살이 포근한 날 사방이 눈부신 빛살 무늬로 가득 차는 날 종종 포인트를 불러 올린다 귀가 축 늘어지고 입가엔 언제나 허연 거품을 물고서 커다란 두 눈을 왕방울같이 데룩 데룩 굴리는 그 순한 넘은 내가 부르는 소리에 언제나 반가운 듯 꼬리를 좌우로 흔든다 주인의 호출이 무엇 그리 반가울까마는 삼 시 세끼 우리 밥 먹을 때 제 밥도 챙겨주는 그 마음 씀씀이가 고마운지 유독 나를 잘 따른다 오늘도 부르니 올라와서는 턱하니 내가 앉는 소파에 오뚝 올라서 쪼그리고는 한참이나 창 밖을 보고 있었다 아, 그 개 이름 포인터라고 기가 차게 잘 지었구나 ! 정원의 경치를 음미하는 듯한 도통한 듯한 애완견의 모습에 나는 어느새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비가 내릴 때
농부 강 씨는 오늘도 베잠방이 걷어붙이고 지게를 지고 들일을 나간다. 그의 아내 박 씨도 삼베 저고리 달랑 걸치고 땀내 풀풀 풍기는 강 건너 논둑길로 새참을 머리에 이고 가뿐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옆으로 무거운 소가 첨벙거리며 개울 속에서 주인의 이거(馭車) 하는 손에 이끌려 말 못 하는 인고(忍苦)의 줄을 따라 싫어도 도리 없이 끌려갑니다. 오늘 하루도 주어진 해 아래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견디기 위해 개울 위에 나무다리도 삐걱거리며 소리를 냅니다. 온종일 추적거리는 비는 도무지 그칠 줄을 모릅니다. 수고의 땅 투박한 대지를 시나브로 어루만지는 천계의 고운 젖줄은 마르지 않고 내립니다. 이게 모두에게 주어진 축복이라는 하루치 양식입니다 개울 건너 나루터 논배미 부근 도랑에는 올해에 유달리 미꾸라지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나중에 써레질하고 돌아갈 때 양동이로 한 대야 잡아선 펄펄 끓는 가마솥에 한껏 고와서 맛깔 나는 추어탕 맛을 볼랍니다 온 가족이 오순도순 평상에 모여 앉아 깊어 가는 여름밤에 모깃불을 피워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이게 바로 시골 사는 쏠쏠한 재미입니다.
견공(犬公) 상팔자
주인 잘 만난 개들은 언제든지 주인 곁에 벽에 걸린 화첩처럼 풍경으로 붙박이 되어 있다 오고 가는 야산의 산자락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 그 개들로 인해 산행을 즐기는 대다수의 사람들 여간 심기가 불편하지가 않다 그렇든 말든 견공을 좋아하는 사람들 시도 때도 없이 개와 동행을 하니 안하무인의 그 배포가 참으로 실하다는 데 혀를 한참이나 내 둘렀다
사랑 받는 진짜 견공들은 결코 주인의 따뜻한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법이 없다 우리네 속담에 토사구팽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 말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 건전치 못한 인간관계에나 적용시킬 말이지 충실한 견공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언젠가 TV뉴스를 보니 개를 좋아하는 프랑스 사람들 바캉스 철이 돌아오면 그만 그 애지중지 하던 개들을 내팽개쳐 버리고 자기네들끼리 일락(一樂)을 좇아 피서지로 줄행랑을 친단다 주인 잃은 개들은 문전걸식 노상 방뇨하다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는 소식을 들으니 참 안됐다
좋을 때야 핥고 빨고 씻고 먹이고 입히고 온갖 짓을 해 대지만 사람이나 견공이나 약발이 떨어지면 다 별 볼일 없는 한 통속인 것을 ...
이삭항(港) 근처의 日沒
소들은 아직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많이 남은 걸로 안다
거뭇한 해거름이 길게 꼬리를 끄는 이삭항 언덕배기에는 순하고 순한 얼룩소들이 산출을 위한 워밍업을 날마다 하고 있는 광경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해가 뜨고 지는 반복의 일상사 중에도 언제나 한결같은 심사로 어김없이 찾아와 주는 밝은 햇살의 고마움을 한시도 떨칠 수 없다는 듯 어진 왕방울의 초식동물들은 쉴 새없이 여물 질을 하고 있다 그랬다 풍부한 목초지 는 언제나 소 떼들의 놀이터 배부르고 영양만점의 식탁 적어도 도살할 날이 남은 때 그 운명의 수레가 굴러오기 전까지 초지(草地)는 평온하고 햇살은 싱그럽다
길게 끄는 해의 그림자가 번득이던 수평선 너머로 다소곳이 고개를 들이밀 때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사이로 하나 둘 찾아드는 고기잡이배들 섬마다 피어나는 저녁밥 짓는 연기 아, 오늘도 생업의 터전에서 퍼런 바다와 씨름한 시간들 언제나 허기지고 숨찬 삶의 터전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게 눕힐 해 아래 시간이 영락없이 찾아올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