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앞에서 작아지는 플라톤
- 언어비평 -
I
서구문명의 기반은 고대 희랍의 헤라클레이토스 이래 로고스(logos)우주관이다. 로고스는 원래 ‘자체적인 것’이라는 의미다. 헤라클레이토스에 의하면, 실체(substance)란 본질적으로 변화하는 실체이며 세계는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그는 우주의 궁극적 질료의 실체를 불이라고 보았다. 불은 스스로의 동일성을 보존하고 있으면서도 - 즉, 변함없이 계속 불이면서도 - 매 순간마다 끊임없이 생성소멸의 전화轉化를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화의 흐름과정은 그 자체로서 만물을 지배하는 이법인 로고스에 의해 인도된다. 그래서 로고스는 스콜라철학에서 말하는 자체원인(causa sui), 다시 말해 자기가 자기존재의 원인인 신과 관련되기도 한다.
로고스라는 이법으로 된 우주는 수학적 패러다임의 비례나 비율과 관련된 [조화로움으로 이루어진 그 무엇이 아니라]조화(cosmos)로서의 형이상학적 실체이다. 영원불변의 보편자 로고스가 품부稟賦(혹은 분유分有 혹은 분수分殊)된 일체의 사물은 각 사물범주 별로 비례나 비율에 기반된 조화로운 특정 질서와 구조를 가짐으로써, 인간이 감각-지각할 수 있는 각각의 일정한 모양(appearance)으로 존재하게 된다. 인간 역시 로고스를 부여 받아 자신의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바, 이 로고스가 말로 표현될 때 ‘논리(logic)’라고 한다. 인간의 논리적인 말은 우주와 모든 사물을 참되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고스는 논리적인 말 혹은 논리적인 말에 담겨있는 진리를 뜻하기도 한다. 또한 그래서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Logos)’라고도 한다 (*).
(*) 성경의 요한복음 첫 절에 의하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말씀이 곧 로고스인 바, 말씀과 하나님과 로고스는 동의어로서 맥락에 따라서 골라서 쓰인다. 바이블(Bible)은 후기 라틴어 bibliothéca에서 온 것인데, ‘쓴 것’이라는 의미인 biblio와 ‘담는 그릇’이라는 의미인 theca의 합성어이다. 이것은 ‘써 모은 것’ 혹은 ‘써 담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을 써 모은 것을 희랍사상(특히 [읽어나가면서 그 이유를 짐작하게 될 것인 바]플라토니즘)에 기초해서 합리적으로, 즉 최대한으로 이성적 설명이 가능하도록 체계화하는 작업이 2~8세기에 그리스도교 교부敎父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중심에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있다. 교부철학에서는 ‘철학이 신학의 시녀'일 정도로 철학이 그리스도교와 분리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유대사상이 교부철학을 거치면서 희랍화된 서양사상이다.
부연하면, 사람을 포함해서 만물에는 공히 영원불변한 우주적 전일全一자(the one and undifferentiated)인 로고스가 품부되어 있다. [바로 앞서 소생의 중용관련 글에서 보았던 것처럼]존재론적으로 유학은 이일분수理一分殊이고 도교 역시 도일분수道一分殊인바, 고대로부터 서양의 존재론 또한 로고스일분수이다. 사물에 분수分殊된(the differentiated and omnipresent) 로고스는 인간이 감각-지각으로 포촉捕燭할 수 있는 각 범주 별 사물의 조화로운 일정한 모양과 성질로 구현되어 있다. 다시 말해, 사물 자체가 바로 로고스가 구현된 것이다. 반면에 인간에게 품부된 로고스 곧 이성 - 희랍어인 로고스를 번역한 라틴어가 라티오(ratio)다. 라티오는 계산, 비례, 비율, 조화라는 의미다. 이 라티오로부터 프랑스어 레종(raison), 영어 리즌(reason) 곧 이성이다 - 은 말(언어)에 구현되어 있다. 그래서 말이 논리적일 때 ‘이성적’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논리가 맞는 이성적인 말 자체가 바로 로고스가 구현된 것이다. 범주 별로 제각기 조화로운 일정한 모양과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물도 로고스요, 논리적인 말도 로고스인 것이다. 이 점이 포인트다. 만약 사물에는 로고스가 품부되어 있지 않다면 혹은 사람에게 품부된 것과 다른 어떤 로고스가 품부되어 있다면, 아무리 논리적인 말이라 하더라도 말은 사물을 올바로 포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논리적인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능력을 타고 났다고 간주함은 인간이 명석하고 판명하게 사물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 로고스적 이성을 타고 났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생득적인 명석판명한 이성, 이것을 데카르트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어 ‘자연의 빛(lumen naturale)’이라고 했다. 서구문명은 바로 이러한 로고스적 이성에 기반되어 있다. 서구문명을 두고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문명이라고 하는 이유이다.
이성주의 철학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로고스로서의 이성(이하, 로고스적 이성 혹은 이성)이 자신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에게 생득적으로 품부되어 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서 늘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그에게 신은 맥락에 따라 우주적 보편이법으로서의 로고스이기도 하고, 우주적 보편사유로서의 이성이기도 하고, 우주적 보편도덕으로서의 양심이기도 하며, 이데아 중에 지고至高의 이데아인 선善이데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당시 희랍의 다양한 신들에 대한 믿음이 아테네인의 생각과 문화를 지배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로고스우주관을 믿었다. 플라톤이 특히 <파이돈>에서 케베스와의 대화를 통해 역점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바, 생활문화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희랍신화에 나오는 신들을 수용했지만 그 개인의 정신세계에서 신은 상기 로고스라는 우주적 형이상학자였다. 이것은 그가 [창세기신화에 기반된 고대 유대민족의 문화나 단군신화에 기반된 고대 우리 한민족의 문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그러한]신화(mythos)에 기반된 문화를 지양止揚하고 사람의 형이상학적 사유(logos)에 기반된 서구문화의 새벽을 연 것이었다. 이점이 그가 그리스문명에서 최초로 형이상학을 다룬 철학자로 불리게 된, 또한 스스로도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하는 근본적 이유이다. 또한 바로 이점 때문에 그가 희랍의 신들을 믿지 않는다 혹은 다른 신을 아테네로 들여왔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그가 재판관들 - 당시 아테네민주제도에 의해 30세 이상의 성년남자들 중에서 추첨된 500명. 이들 중에는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도 많았다 - 앞에서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조금 굽히는 척이라도 했더라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늠름하게 죽음을 택했다. 소크라테스는 사후에 자신의 영혼이 신의 세계(hadés) - 플라톤으로 말하면 이데아세계 - 로 되돌아갈 것을 믿어 독배 앞에서도 놀라우리만큼 평온했다.
플라톤은, 로고스우주관에 대한 믿음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면서까지 지킨 스승 소크라테스로부터 충격적 감동을 받았으리라. 그는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에 태어나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 것을 신에게 감사한다고 고백했다. 그는 정치가로 나가겠다는 원래의 꿈을 접었다. 그리고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에 접하게 된, 상기 헤라클레이토스와 더불어 엘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파르메니데스의 항존恒存 개념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다. 이에 그는 로고스우주관을 형이상학적으로 체계화해서 이데아(Idea)우주론을 제시한다. 이데아는 ‘보는 것’이라는 뜻인 희랍어 이데인(idein)의 파생어인 바, 보이는 것 그래서 형상 혹은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플라톤이 특히 <티마이우스>와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 소크라테스는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플라톤은 28편(혹은 35편)의 대화집과 서간 13통을 남겼다. <변명> <크리톤> <향연> <파이돈> <국가> <파이드로스> <티마이우스> 등등 그의 모든 글은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다. 그래서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학설이고 어디까지가 플라톤 자신의 학설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 피력한 이데아론을 징후적으로 독해하면, 데미우르고스가 우주를 [창조가 아니라]제작하기 전부터 영원불변의 항존恒存인 이데아 - 아리스토텔레스로 말하면 관념으로서의 형상(eidos/form) - 가 있다. 그리고 그 어떤 형상에 의해서도 규정되어지지 않은 순수물질 - 아리스토텔레스로 말하면 질료(hyle/matter) - 가 있다. 관념 상의 형상인 이데아가 존재론적으로 참 실재(ontologically real)이다. 이 이데아가 모든 사물에 품부되어 내재된 것이 사물의 범주 별 이데아다. 닭이라는 범주에 드는 모든 닭에는 영원불변의 참 실재인 닭이데아가 동일하게 내재해 있다. 모든 사람 각각에도 동일한 사람이데아가, 모든 말 각각에도 동일한 말이데아가 역시 내재해 있다. 모든 닭은 참 실제인 닭이데아가 질료와 결합되어 세상에 현현顯現(appearance)된 것이다. 물질인 질료는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그래서 이데아(형상)와 물질(질료)의 결합물인, 현상계에 있는(actually existent) 닭은 변하고 늙고 결국은 죽는다. 그러나 참 실재인 불변의 닭이데아는 영원히 존재한다. 사람의 경우, 말의 경우, 혹은 그 어떤 사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플라톤 이래 서구문명에서는 어떤 사물에 지어져 있는 이름을 그 사물의 여일한 이름이라고 보는 견해(representationist view)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토끼’라는 말이 있다는 것은 영원하고 불변하게 실재하는 범주 별 형상인 이데아로서의 토끼가 있기 때문임으로, 말은 말이 지칭하고자 하는 대상을 일대일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II
플라톤은 자신의 아카데미아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써두었다. 그 글은 스승 소크라테스로부터 이어받은 이성주의 철학과 이분법적 이원론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함축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글에 서구이성주의 언어관의 본질적 문제가 배태되어 있다.
참 실재(ontological reality)인 기하학적 형상에는 근원적 3대 공리가 충족되어 있다. 점, 선 그리고 점과 선을 연결하는 연결사連結絲에 관한 것이다: 점에는 질량이 없다; 선은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이다; 원은 한 점에서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다. 그러나, 감각-지각의 세계인 현상계에 존재하는(actually existent) 점에 질량이 없을 수 없고; 선에 두께가 없을 수 없으며, 두께가 있는 이상 선이 두 점 사이의 최단거리일 수가 없다; 따라서 원이란 실은 100각형 혹은 1000각형 등등일 수 밖에 없다. 게다가 3대 공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완전한 평면이란 현상계에 존재하지 않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도구를 가지고 정교하게 삼각형을 그린다고 해도 그려진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일 수가 없다. 무엇을 말해주는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라는 기하학적 공리는 실제로 경험한 진리로서의 공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하학의 3대 공리가 충족되는 참 실재로서의 삼각형형상은 우리의 생각 곧 사유 속에서만, 다시 말해 관념으로서의 형상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관념적 참 실재, 즉 내각의 합이 정확히 180도인 기하학적 형상 곧 삼각형이데아를 사유思惟할 수 있는 것은 인간에게 품부된 이성의 작용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에서 이성이란 전형적으로 말하면 기하학적 이성인 것이다.
모든 수식과 공식의 값도 마찬가지이다. 참 실재로서의 원주율 파이(π)값은 현상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상계에는, 위에서 언급된 바, 참 실재로서의 직선과 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참 실재로서의 모든 수식과 공식의 값은, 다시 말해 모든 기하학적 수학적 형상은 우리의 생각 곧 사유 속에서만 즉 관념계에서만 존재한다. 플라톤에서 이성이란 전형적으로 사유에 의한 계산능력인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기하학과 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그가 자신의 아카데미아 입구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은 들어오지 말라’고 써둔 이유이다. 이성을 아는 사람, 이성에 관해 알고자 하는 사람, 나아가 현상계 너머의 참 실재 곧 이데아에 관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들어오라는 것이다.
기하학이나 수학에서 뿐만 아니다. 플라톤에 의하면 사랑, 민주, 노랑, 토끼, 미美, 정의 등등 모든 사상事象을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 각각의 범주 별 본체, 예를 들어, 사랑 그 자체(사랑이데아) 그래서 지고의 완전한 사랑; 민주 그 자체(민주이데아) 그래서 흠결 없는 완전한 민주; 미 그 자체(미이데아) 그래서 티 하나 없이 완전한 미 등등 모든 완전한 사상事象이 애초부터 관념계에 있기 때문이다. 미술가(예술가)는 그러한 미이데아를 시공時空계에서 현상으로 현현顯現시키고자 하는 전문가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지덕체智德體를 닦음은 관념으로서의 완전한 사람 곧 사람이데아를 현상계에 구현하고자 함이다. 지고의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관념으로서의 완전한 사랑 곧 사랑이데아를 현상계에 구현하고자 하는 이른 바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를 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플라톤에 의하면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현상계에서는 참 실재로서의 완전한 삼각형(삼각형이데아)에 근사한 삼각형만을 그릴 수 밖에 없는 것처럼 사랑, 민주, 미, 자유, 토끼, 사람, 노랑 등등 현상계의 그 어떤 사상事象에서도 완전성이란 근사치일 뿐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모든 것이 완전한 참 실재계인 이데아계와 모든 것이 이데아계의 그림자에 불과한 불완전한 현상계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플라토니즘에서 우리는 서구 이성주의 언어의 한계를 이미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플라톤 이후 서양철학의 과제는 모두 플라토니즘 이원론의 (변형적)계승 혹은 극복 혹은 해체를 지향하게 된다. 이에 화이트헤드는 서양철학사란 모두 ‘플라토니즘에 대한 각주’라고 했다.
III
플라톤의 <티마이우스>에 의하면, [창조자(Creator)가 아니라]창발자(Originator) 신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라는 원상原象에 맞게 우주를 디자인할 때에, 로고스 곧 비율·비례와 관련된 조화라는 이법에 따라 디자인했다. 그리고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탄생된 희랍신화에 나오는 다양한 신들이 그 디자인에 따라 각각의 디자인에 맞는 질료 - 플라톤 이전 밀레토스학파의 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에 의거해서 구체적으로 말하면 흙, 물, 불, 공기 - 를 가지고 우주의 모든 것을 제작했다. 이 제작과정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신들에게 인간의 신체를 만들도록 하고, 불멸의 영혼은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진 불사不死의 영혼과 사멸死滅하는 육체의 결합으로 탄생된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 이래 서양인의 사유와 철학을 관통하는 인간관, 즉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이분二分하는 인간관이다.
플라톤이 <파이돈> - 일명 <영혼의 이야기> - 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말하는 바에 의하면, 영혼은 이데아를 사유할 수 있는 이성이다. 인간의 영혼은 [말하자면]천상의 이데아로부터 온 것이다. 이 천상의 영혼이, 불교의 윤회와 유사한 윤회과정을 거쳐, 인간의 탄생과 함께 인간에게 깃들게 된다. 인간의 육체는 물질과 욕망으로 유지되는 더러운 고기덩어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육체에 천상이 본향인 영혼이 갇혀있다. 이 영혼은 육체에 갇히기 이전 천상의 지고한 선善이데아를 그리워하는 향수 곧 에로스(eros)를 가지고 있다[사실 그러하다. 우리는 누구나 선하게 살고 싶어 한다. 혹은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에로스는 끊임없이 천상의 세계를 회상하면서 그리로 나아가고 싶어한다. 하지만 영혼이 육체에 갇혀 있는 한 현상계의 인간은 천상의 이데아계와 단절되어 있다. 방법이 무엇인가? 인간이 육체적 욕망을 거부 혹은 극복함으로써 영혼이 맑게 유지된 상태에서 육체를 벗어나야만, 즉 맑고 깨끗한 영혼으로 죽어야만 영혼(이성)의 본향인 이데아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요컨대 플라톤에서 육체와 영혼간, 현세와 내세간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분리되는 이원론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진 인간은 죽음이라는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는 결코 영혼의 본향이요 참 실재인 이데아계로 갈 수 없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가 글라우콘에게 말하는 동굴비유는 이데아론에 함의된 이원론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결정판이다. 동굴 밖은 참 실재인 이데아세계인 것으로, 동굴 안은 참 실재의 그림자로 이루어진 허구의 세계인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동굴 안에서 태어날 때부터 쇠사슬에 묶여있는 죄수들이, 동굴 밖의 진짜 세계를 경험하고 다시 들어와 자신들의 사슬을 풀어서 진짜 세계인 동굴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는 동료의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쳐 죽여버리는 결말이다. 이 동료의 죽음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다. 소크라테스는, 세속적 욕심과 육체적 향락 추구가 지나침으로 인해 이성이 흐려지고 마비된 당시 아테네 사람들에게 이성을 회복시켜 그들을 이데아지향적 삶으로 인도하기 위해 구세주적 노력을 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은, 상기 죄수들이 동료에게 한 것처럼, 소크라테스를 거짓으로써 혹세무민하는 사람으로 몰아서 죽여버렸다. 플라톤은, 이 알레고리를 통해, 영혼이 깨끗한 스승 소크라테스는 참 실재인 이데아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성의 화신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동시에 그 죄수들은 영혼이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코 천상의 이데아계와 단절되어있다는 것을 역점적으로 말하고 있다.
IV
이원론의 세계관과 이성주의가 무르익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등에게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는 감각-지각의 세계는 사실 그대로의 세계가 아니라 ‘착각의 세계’이다. 그들에게 사실 그대로의 세계는 ‘감각의 허위증언’에 대해 끊임없이 대항하는 이성적 언어의 세계, 즉 관념에 의해 성립된 수학이나 기하학에서 보는 그러한 정치精緻한 언어의 세계이다.
변증법인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소쉬르-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가 소크라테스-플라톤 이래의 뿌리깊은 이분법적 이원론(dichotomous polarity of dualism)을 부정하고, [의역해서]이원일자적 일원론(conceptual, not essential, polarity of dualism)과 그에 따른 일자一者(oneness)사상의 문명을 제시했다. 소위 ‘구조주의 혁명’이다. 소쉬르에 의하면 말이란 이성의 현현이기는커녕 의미가意味價가 영零인 기호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언어뿐만 아니라 친족, 토템, 신화, 음악, 요리 등등 일체의 문화현상은 인간(이성)과 무관한 초월적인 ‘이항대대待對(binary opposition)’라는 구조의 소산임을 과학적 방법(신실증주의)으로 입증했다. 이것은 그렇게도 양양한 서구문명의 이성중심주의를 뿌리째 뽑아버린 것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의 데리다는 이성으로서의 언어를 자신이 만들어낸 차연差延(차이 + 끝없는 지연)이라는 망치로써 해체해버리고는 이성을 ‘백인의 신화’라고 코웃음 쳤다.
그런데 우리 동양으로서는 ‘구조주의 혁명’이 결코 혁명적인 것이 아니다. 이미 2천5백년 전에 노자는 <도덕경> 제1장을 시작하는 첫 머리에서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 천명함으로써 이성주의 언어관을 부정하고, 소쉬르-레비스트로스 언어관의 단초를 열었다. 도를 ‘도’라고 이름을 지어 부르면 그 이름 지어진 ‘도’는 여일하게 원래의 참된 도(이데아로서의 도)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어로써 인식하는 세계만이, 즉 이성의 현현인 말을 통해 뇌리에 떠올려지는 개념 곧 관념의 세계만이 영원불변의 참 실재계(이데아계)라고 보는 플라톤의 언어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역경>의 부록 제3장과 <도덕경> 제14장 및 42장을 종합해서 연역해볼 때, 도는 하나 그 자체이다. 하나는 단순한 숫자적 개념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노자가 말하는 무無와 함께 도의 한 다른 말이다. 하나는 도의 존재론적 속성을 당시의 어휘로 말한 것인 바, 지금의 어휘로 말하면 전일全一(the one and undifferentiated)이다. 전일로서의 하나는 둘, 즉 음과 양을 있게 한다: 음과 양이 도, 즉 하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고, 둘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도는 둘, 즉 음과 양이기 때문에 만물을 생성시킨다. 도라는 것이 이러할진대, 정녕 그것은 인간의 이성 혹은 이성적 언어로서는 어떤 존재가 아니고(Non-being), 이름도 붙일 수가 없는 것(the Unnameable)이다.
여기에 <도덕경> 제25장을 연관시켜 부연하면, 우주만물생성변화의 근본원리는 이성적인 말(언어)로서는 무엇이라고 이름 지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원리를 따르는 혹은 그 원리에 맞는 세계관과 인간의 삶에 관해서 하나의 단일한 체계로 - 즉, <도덕경>이라는 하나의 텍스트가 될 수 있도록 - 담론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그 원리에 이름을 붙일 수 밖에 없어 ‘도道’라고 이름했다. 그러니 ‘도’가 그 원리의 본래 이름이라고 생각하지는 마라. 그리고는 뒤이어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비단 ‘도’라는 이름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사물에 있어서 그 붙여진 이름은 그 사물 본래의 여일한 이름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놀랍다. 바로 소쉬르-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언어관의 단초를 이미 노자가 제공하고 있다.
장자는 이 단초를 발전시켜 <장자> 제물齊物 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말은 단순히 불어내는 소리가 아니다; 말이란 것은 의미를 담은 말이 있다; 그러나 그 말이란 것의 문맥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말을 했다고 할 수 없거나 혹은 말을 아니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혹은 그것은 새소리와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계속 놀랍다. 이것은 구조주의의 의미론을 더욱 밀고 나간 데리다 류의 텍스트의미론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문장, 하나의 문단, 한 권의 책, 나아가 하나의 문화집단, 더 나아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인간세상 등등 모든 것이 각각 하나의 텍스트다. 일체의 의미는 맥락적 의미(contextual meaning), 즉 하나의 텍스트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들간의 차이 및 관련성에 의해서 네거티브하게 잠정적으로 드러나진다. 이 텍스트의미론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구조주의 혁명’ 이전에는 우리가 그런 줄을 몰랐을 따름이다.
언어의 의미란 오직 텍스트의미론적 의미일 뿐이라면, 언어를 통해 의미를 소통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가 말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장자의 대답은 한마디로 ‘지언거언至言去言’이다. 진정한 실재에 이르고자 한다면 말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언지언에 함의 된 언어철학과 관련해서 일찍이 노자는 ‘말에 의존하면 이치가 막히게 된다’고 했다. 또한 ‘믿음성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선한 사람은 변론에 능하지 않고, 아는 사람은 박식하지 않다’고 했다. 공자 역시 ‘말이 질박하고 어눌하면 인에 가깝다’고 했다. 불가의 수행은 묵언默言수행이 기본이다. 선禪불가에서도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면 달을 보아야지 손가락은 볼 필요가 없다’고 했다(도가 ‘달’에, 말이 ‘손가락’에 비유되었다). 뿐만 아니다. 라캉의 실증에 의하면, 말을 이성적으로 하면 할수록 인간세상에 진정성을 감소시킨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이성중심주의인 서구문명으로서는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문화적 거세(cultural castration)’를 통해 철학의 판을 새로 짜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카톨릭의 어떤 수도원에서는 철학의 판을 새롭게 짜서 말을 하지 않는 것, 침묵을 수도의 으뜸으로 삼는다.
<장자> 제물齊物 편에 의거해서, 지언거언의 언어철학적 의미를 구조주의언어학 용어를 빌려 이해하면 이렇다. 말이라는 기표記標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지칭해서 그것의 개념을 의식에 떠올리는 것 곧 기의記意을 목적으로 하는 도구이다. 그럼에도 지칭도구에 불과한 말에 집착하면 사물과 현상의 참된 실상을 보지 못하거나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까닭에 자신도 모르게 우리에 갇힌 원숭이처럼 조삼모사朝三暮四라는 사태 속에서 희비쌍곡선적 삶을 살게 된다. 지칭도구에 불과한 말에 집착하기 때문에, 실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데도 - 즉, 내용(상수리)과 전체 숫자(일곱 개)는 변함이 없는 데도 - 단순한 눈앞의 숫자 놀음(말 놀음)에 마음이 동요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실상이 아니라 ‘삼’이라는 말에 울고 ‘사’라는 말에 웃고, 내일 역시 실상이 아니라 ‘오’라는 말에 웃고 ‘이’라는 말에 우는 그러한 삶이 된다는 것이다. 장자는 이것을 지맹知盲이라고 했다. 혹은 의식이 사물화됨으로 인해 의식에서 도道가 사라져버린 사태 곧 좌치坐馳라고도 했다. 이에 장자는, 결론적으로, 언어란 물고기를 잡는 통발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통발은 물고기를 잡는 수단이다. 물고기를 잡으면 통발을 잊는다. 올가미는 토끼를 잡는 도구다. 토끼를 잡으면 올가미는 잊는다. 말은 의미를 전달하는 수단이다. 의미를 전달하고 나면 말을 잊는다. 나는 어떻게 하면 말을 잊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말할 수 있을까. (장자: 잡雜 편, 외물外物)
‘나는 어떻게 하면 말을 잊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말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우리는 장자의 문학적 천재성에 감탄한다. 지언거언至言去言에 함의된 언어철학을 이처럼 비합리적고 역설적인 시詩적 언어로써 말하고 있다. 그래서 논리정합적인 이성적 언어로는 형언해 낼 수 없는 어떤 큰 감동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V
많은 사람이 장자를 ‘신비한’ 인물이라고 본다. 그의 초월적인 선인仙人경지에는 과장과 허풍뿐만 아니라 주술적인 데도 있다고 보는 경향이 농후하다. 정말로 그런가? 우리가 볼 때, 장자의 <장자>에서 신비적인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장자에서 신비성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들이 서구의 이성주의언어관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장자>라는 작품을 이성주의 언어관으로 접근해서 서양철학작품처럼 분석하면 거기에는 상당한 상충과 모호성과 엉터리가 들어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동양고전만고진리주의와 결부되면 신비성을 생성시키게 된다. <장자>에서 보는 그러한 상충이나 엉터리나 허풍 등은 장자의 분석력과 논리력이 서양의 철학자들보다 못해서가 결코 아니다. 또한 그가 어떤 신비한 인물이라서 그런 것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장자가 개발적으로 해설하고자 하는 노자 <도덕경>의 도道일원론 세계관과 이원일자적 인식론은 서구의 이분법적인 이성주의 사유문법과 언어적 표현을 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언어로써 표현해 낼 수 방법이 무엇인가? 장자는 그것을 비유(은유, 풍유, 의인 등)와 상징을 이용하는 시詩적 언어, 역설, 우화 등을 통해서 표현해 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득한 고대의 장자에게서 오늘날 후기구조주의의 동태적 기호학이론의 단초를 보기 때문이다. 소쉬르와 트루베츠코이는 언어에 무의식적 수준과 의식적 수준 두 측면이 있음을 밝혔다. 이를 토대로 야콥슨은 언어의 무의식적 수준인 내적 언어(internal language)와 의식적 수준인 외적 언어(manifest language)를 구분했다. 그에 의하면, 전자는 시詩적 기능을 가지는 언어로서 기표(지칭하는 도구로서의 기호)에만 관련된다. 후자는 일반적인 의사소통 기능을 가지는 언어로서 기의(기표에 의해 떠올려지는 개념이나 아이디어)에만 관련된다. 핵심 포인트는 시적 언어에서는 [의식을 가진 사람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의식이 없는 ‘기표가 스스로 말한다(autotelic)’는 것, 그리고 이 시적 언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일반 의사소통언어로는 결코 다 나타낼 수 없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시적 언어에는 늘 상 쓰는 고착적 의미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의미의 생성을 가능하게 하는 지노텍스트(genotext)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말을 잊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말할 수 있을까’. 상기 장자의 이 말은 의사소통 기능이 없는 언어다. 이것만을 따로 떼내서 이성논리로 보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혹은 말장난 같은 말이다. 하지만 그 앞에 ‘통발은…’으로부터 시작되는 말들이 있음으로 인해 그 말들과의 맥락에서 그 구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감동은 보통의 의사소통언어로는 이루 다 표현해 낼 수 없다. 왜 그런가? 역설을 이용한 시적 언어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그 앞의 모든 말들이 기표이고 이들 기표간의 관련 혹은 차이에 의해 기표들 스스로가 말함(autotelic)으로써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지노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비근하게 다시 한 번 보자. 예전에 “앞 마을 냇가에 빨래하는 순이, 뒷마을 목동들 피리소리. 그리운 고향 그리운 친구 정든 내 고향집이 그리워지네”라는 노래가사가 있었다. 이 가사는 보통의 의사소통언어로 쓴,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피노텍스트(phenotext)이다. 그래서, 쓰여진 그대로 옛 고향의 풍경과 추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잠시 어떤 정서적 효과를 준다. 이것이 전부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조지훈은 <승무>에서 “오동 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라고 했다. 오동 잎 잎새마다 달이 지다니, 이런 비이성적이고 터무니 없는 말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그 시를 처음부터 읽어 나가면, 그 구절이 주는 느낌과 감동은 의사소통언어로는 이루 다 표현해 낼 수 없다. 그 시는 지노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장자>는 시적 기능을 가진 내적 언어로 가득한 지노텍스트 곧 뛰어난 문학작품이다. 장자는 <장자>를 맨 처음 시작하는 소요유逍遙遊 편에서 무엇보다 먼저 참 실재인 도의 세상을 향유하는 이상적 삶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원일자적 인식론과 그에 따른 관계론적 일자(oneness)사상의 세계관이 내면화된 삶이다. 그것은 일체의 이분법적 인식, 심지어 [제물齊物 편의 호접몽胡蝶夢 이야기 혹은 지락至樂 편의 장자처사莊子妻死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이승(삶)과 저승(죽음)마저도 이원일자적으로 통합된 삶이다. 하지만 그것을 당시의 어휘로서는[당시의 어휘와 개념이 어떤 수준이었을 지를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도저히 표현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적인 문학재능을 가진 장자는 그것을 시적 언어로, 즉 얼마든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일 수 있는 비유나 상징이나 우화나 역설 등을 동원해서 훌륭하게 표현했다. <장자>의 처음 시작인 소요유逍遙遊 편은 대뜸 상상을 초월하는 황당한 우화로부터 시작된다. 크기가 수 천리나 되는 곤鯤이라는 물고기 그리고 역시 수 천리나 되는 등을 가진 거대한 붕鵬이라는 새의 행태와 삶을 통해 이원일자적 인식론과 그 일자(oneness)사상에 백 퍼센트 입각해서 사는 사람의 완전 자유롭고 초탈적인 삶[니이체가 말하는 초인의 삶을 떠올리시라]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작은 매미와 비둘기와 메추리 그리고 미세한 곰팡이의 행태와 삶은 이분법적 이원론의 인식과 세계관으로써 다사다난한 성심成心의 역사세계 - 요순堯舜으로부터의 도道, 즉 역사적 현실이 반드시 진리와 선에 입각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그 생각이 만들어낸 세상 - 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제한된 사고를 은유적으로 풍자해서 말하고 있다[니이체는 ‘인간이란 극복되어야 할 존재’라고 언명했음을 상기하시라]. 그리고 전자와 후자의 행태와 삶을 비교적으로 묘사하고 또한 이들 양자간의 대화들을 들려 줌으로써, 후자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인간들이 얼마나 소인배적이고 가여운지를[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초인 성을 잃어버린 그래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인지를] 마치 망치로 머리를 치는 듯한 큰 충격적 깨달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과장이 큰 그만큼 깨달음의 충격도 더 크다는 것, 바로 이것이 장자의 문학적 전략인 것이다.
그 어마어마한 곤어나 붕새의 삶처럼 진정 자유롭고 유유자적하게 노니는 소요유적 삶은 매미나 곰팡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인 것이다. 그런데도 매미나 메추리나 개구리나 곰팡이는 자기들이 진정 자유와 편리함을 누리고 산다고 믿기 때문에 곤어나 붕세의 삶을 오히려 비웃는다. 이 풍자적 우화를 통해 장자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장자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 대답할 필요가 없다. 그 어마어마한 물고기, 그 거대한 세, 그 작은 메추리나 미세한 곰팡이 등의 행태와 삶 그리고 그것들간의 대화 등 모든 것이 기표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우화 자체가,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하고도 남도록 스스로 말하고 있다(autotelic).
니체와 하이데거는 서구의 이성주의언어의 한계를 깨달았다. 그들은 동양고전에서 보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시적 언어가 사실이나 진실을 이성논리적인 의사소통언어보다 얼마든지 더 잘 나타낼 수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이성적 논리와 그 언어만이 참다운 철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 당시의 영미철학자들은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은유나 우화 혹은 시적 언어가 들어있는 동양의 철학작품과 사상을 아주 폄척貶斥했다. 그들은 니체를 거의 정신병자 취급했고, 하이데거를 두고는 ‘구제불능적으로 부품하게 구는 얼빠진 반계몽주의적인 인간(a hopelessly pompous and muddle-headed obscurantist)’이라고 단죄했다. 이성중심주의인 영미철학자들은 그들은 동양의 사상과 언어관에 심취 혹은 동조했다는 죄목으로 서양철학사의 계보에서 아예 추방해버렸다[후일 프랑스의 메를로 뽕띠 등이 주도해서 복권된다]. 그러나 푸코, 라캉, 데리다, 바르트 등등 작금의 (후기)구조주의 사상가들은, 서구의 이성주의와 그 언어관을 실증적 방법을 통해 [부정 혹은 거부 수준이 아니라]해체해버리고 니체와 하이데거를 시대를 앞서간 ‘해체주의의 선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라고 받들고 있다. 오늘날 플라톤은 장자 앞에서 작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