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특강자 - 박정남 시인
2016 텃밭시인학교 신춘문학특강
박정남 (시인)
1. 시는 토르소다
시와 반시 기획시집으로 33편의 자그마한 손바닥 시집을 2012년에 출간한 바 있다. 거기 쓴 서문을 찾으려고 이메일을 뒤지다 뜻밖의 시 한 편을 발견하게 되었다. “검은 색을 쓰는 설경” 읽어 보니 쓸 만했다. 이는 초고였지 싶은데, 그 뒤에 뭔가 내가 덧붙이려고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아 결국 시집에는 못 넣고 버린 작품인데, 잃어버릴 뻔한 내 자식을 다시 찾은 느낌! 그때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내 엉성한 눈의 예지, 정말 시라는 것은 잘 쓸려고 욕심낼수록 망치기가 일쑤인 경우가 허다하다. 금방 써 놓은 작품은 또 제대로 된 것인지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럴 때 한 석 달 서랍 속에 넣어 두었다가, 즉 아주 잊어버리고 난 뒤에, 다시 꺼내 읽어 보아야 한다고 돌아가신 박 목월 시인은 말씀을 하셨다.
시는 의미적 언어에 음악적 요소인 운율과 회화적 요소인 이미지가 곁들여 쓴, 비교적 길이가 짧은 함축적 문학 양식이다. 절제된 언어의 고급 예술이다. 시를 만난 우리들은 모두 마음의 위안을 찾기 위하여 시집의 첫 페이지를 열었을 것이다. 시는 평화고 아름다움이고 치유고 경이인 신대륙이다.
시는 토르소다. 미술 시간에 데생을 하는 용도로 자주 쓰이는 토르소는 머리가 없다. 그리고 팔 다리도 없다. 미켈란젤로가 사람들로부터 이 토르소에 머리와 팔다리를 붙여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 토르소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러므로 토르소는 전체가 부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시도 짧은 양식으로 독자들께 증후적 체험을 하게 함으로 오랜 여운의 감동을 준다. 내가 쓴 “검은 색을 쓰는 설경”도 마찬가지다. (여백을 중시하는 우리 동양화의 필법이 그렇지만) 검은 색 하나로 세한도 불국사를 완벽하게 그려낸 것이다. 그때 내가 만난 박대성 화백의 세한 불국은 흰 여백이 화면의 3분의 2이상을 차지했을 것이다. 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여백이 많은 공간. 거기에서 우리는 말이 주는 침묵의 떨림과 평화를 느끼게 되는 것은 아닐까?
검은 색을 쓰는 설경
박정남
눈을 그리는데 다른 것은 다 그리면서
눈은 끝내 그리지 않았다
세상은 눈이 와서 온통 눈뿐인데
화가는 붓으로 흰색을 찍어 칠하지 않았다
소나무를 베끼는데 그는 더욱 집중했다
비로소 석축 앞의 흰 바닥이 환하게 드러나고
희게 쌓인 장엄하고도 꿋꿋한 세한불국이 떨면서
살아 나왔다
검은 붓질이 치열하게 들여다 본 빛의 세계
가느다란 소나무 가지에도 눈은 아슬아슬하게 쌓여 있었다
한 불국의 영혼을 육체로 감싸면서 들어 올리고 있는 검은색은
검은색의 심지에서 뿜어 나오는
힘이었는데 또한 그렇게 고요할 수 없었다
분홍색은 아프다
박정남
작은 분홍색 알약을 먹는 가을 아침에
분홍색은 아프다
분홍색 하늘을 나는 나비들이 하나 둘
자개처럼 쪼개지며 날개를
파닥이고 있다
아득히 하늘에 떠 있다
가을에 분홍색은 구석으로 구석으로
몰리고 있다
대빗자루로 쓸어간 가을 하늘
그 넓은 뜰에는 분홍 꽃잎 한 장
떨어져 있지 않다
쇠약해진 분홍색들이
병원에 가니 푸른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누워 있었다
2. 성적 상상력의 피안
이는 내 첫 시집 “숯검정이 여자” 시집 해설 제목인데, 평론가 장석주가 쓴 글로 나를 참, 곤혹하게 했던 말이다. 시집이 출간되고 잡지사에서 무슨 대담을 하자고 전화가 왔을 때, 남편이 크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性이란 말은 아직 낯설었다. 나는 1973년 2월, 대학 3학년 때, 현대시학 초회 추천을 받고 1975년 10월, 3회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는데, 그즈음 대구는 여성시인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고로 나는 대구여성시인들 중 고참인 셈이다. 나는 대학 때 프로이드 심리학과 융의 심리학에 경도되었다. 우리 인간은 성적 인간이라는 것과 동시에 융의 집단 무의식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다. 영미의 이미지즘시와 유럽의 초현실주의시에 영향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여성의 몸과 꿈을 들여다보는 시를 쓰게 되었고, 또한 여성의 몸과 더불어 우리 몸의 거쳐 환경과 생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성을 다룬 시인으로는 여성시인 중 내가 아마 처음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개개인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시는 제 갈 길을 제가 찾아간다. 언어가 앞서 물꼬를 트게 한다. 난데없이 저 무의식 속 감춘 일들까지 끄집어 올려 난감하게 하는 것이 시다. 시는 비밀이 없다. 그 사람의 냄새가 난다. 향기가 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네가 내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내 거칠은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이하 생략)
환상을 떠올리는 파블로 네로다의 이런 시편(한 여자의 육체)이나, 티이 흄의 “가을날‘ 같은 이미지즘시에 경도되었다.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밖을 나갔더니
얼굴이 붉은 농부처럼
불그레한 달이 울타리 너머로 보고 있었다
나는 말을 걸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주위에는 생각에 잠긴 별들이 있어
도회의 아이들처럼 얼굴이 희었다
커튼 드리우고
박정남
1
커튼 드리우고 꽃 속의 살이, 꽃잎 벌릴 때
어둠 속에 빛나는 당신의 두 손
가쁜 숨결, 나자빠진 달빛, 알몸이 하나
풍성히 누우며 올 때
불그스레 불그스레 어둠이 혀를 내두르며 올 때
2
무거운 돌의 水面 속을
달빛이 흔든다
붉은 꽃 피어나고
산 채로 누어있는 音樂
출렁이는 물의
발이 젖는다
(박정남의 1975년작 “커튼 드리우고” 1,2 부분만 인용)
종일 갈치냄새를 생각했다
박정남
속리산에 오니 그때 보던 함박꽃이 피었다 난의 향기를 지녀 목란이라고도 하고, 산목련이라고도 불렀는데, 어디서 갈치비린내가 따라온다 가지를 꺾어 물속에 넣으면 물이 푸르게 된다는 물푸레나무도 하늘을 뜨개질해서 온통 연녹색인데, 바로 문장대 상감오륜을 싼 옛 종이에까지 배어들었는지 문장대 석천을 내려 보는 데도 제주은갈치비린내다 누가 갈치 도시락을 싸왔다 코앞에 갈치 한 마리, 산 속을 헤엄쳐 다니는 갈치 몇 마리, 종일 속리산에 누가 풀어놓은 미세한 갈치비린내를 생각했다 세조의 문장에까지 끼어 든 비린내, 산 푸른 잎 냄새, 산목련 냄새, 나무들에 갈치가 피었다 나무들이 솟대인 양 갈치를 달았다 온 산을 헤엄쳐 다니는 은갈치 무리 갑자기 싱싱하고 달다 비릿한 스물 살 난 여자를 꽃 피우고 서 있는, 흰 꽃들의 키 큰 나무들
3. 시의 자리는 소지(小指)다
키가 작은 소지는 검지 중지 무명지와 함께 나란히 서지를 못하고
반지를 낀 무명지 옆에서 좀 떨어진 거리를 두고 산다
그렇게 외따로 노는 소지를 가진 사람 중에 예술가가 많다고 한다
숟가락을 들거나 책을 펴거나 꽃의 살을 만질 때도 엄지 검지처럼
앞에 나서지 못하고 맨 뒷자리에 서 있기 일쑤다
뭔가를 움켜잡을 때만 해도 다부지게 잡지를 못하고 잡을 것을 놓치거나
흘러내릴 때는 새끼손가락 쪽이다
하지만 냉방에서 열심히 공부할 때 새파랗게 얼었던 아픔의 기억으로
소지는 늘 혼자 불을 켜두고 있다 무슨 방향등처럼 깜박깜박 생각에 잠겨 있는
소지는
우리는 참 일찍이 새끼손가락 걸고 많은 약속을 했다
― (소지(小指) 탐색, 박정남 시)
평론가 강동우 선생은 『꽃을 물었다』는 내 시집 해설에서 “생태의 빈 자리를 품는 감각”으로 내 시를 다루었는데, 그 일부를 여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박정남은 삶의 가시적 세계에서 ‘그늘’과 ‘어두움’이라는 비가시적 세계들의 의미를 육화(肉化)하는 데 탁월한 시인이다. 그녀에게 ‘보이는’ 세계는 온통 ‘보이지 않는’ 것들로 존재한다. 그녀는 고통에서 희망을 보듯이 죽음 속에서도 삶을 보고, 삶 속에서도 죽음을 본다. 슬픔에서 사랑을 보고 사랑에서 슬픔을 본다. 그녀는 내면의 눈물을 빚어 지상의 그늘진 풍경의 자리들을 찾아 그윽한 눈빛으로 그 여백의 의미를 길러낸다.
이 시에서 “키가 작은 소지”는 자신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을 ‘소지’에 비유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그녀는 “외따로 노는 소지”를 대상화하여 자신의 삶을 그려내고 있다. 이 시를 통해 유추해보건대 그녀는 아마도 앞에 나서는 것보다는 “맨 뒷자리에 서 있”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시가 본질적으로 주체의 삶의 근원적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할 때, 평안과 불안, 초연과 초조, 앞과 뒤, 날것과 곰삭힘, 빛과 그림자의 등식에서 시인은 항상 전자보다는 후자에 초점을 둔다. 우리 삶의 불가피한 양면성에서 후자를 예각화하고 있는 시인의 감성은, 그러나 그 안에서 “늘 혼자 불을 켜두고” 있는 어떤 강렬한 심지를 태우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뒷자리, 불안과 초조, 힘없음 등의 예각화는 주저함이나 열등감의 발로라기보다는 상대를 배려하고 보조하는 데에 초점을 둔 탓일 것이다. 시인은 “새파랗게 얼었던 아픔의 기억”을 담고 있는 삶이지만 “우리는 참 일찍이 새끼손가락 걸고 많은 약속을 했”듯이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긍정하는 데로 시선을 돌린다.
시는 또한 치유다. 고통의 시대가 지나가면 나직하게 그것을 쓰다듬어 주는 지혜의 감성이 움직이는 법이다. “포옹” “발굴” 등등 이번 시집을 보면 낮은 목소리의 치유적 시가 많이 눈에 띤다.
등을 달다 보면
박정남
등을 달다 보면 촛불이 넘어져서
연등이 홀랑 타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불이 당겨진 창호지는 아주 순식간에 타버리고
연등의 뼈대인 철사만 그을음 묻은 채
화려하면서도 밝게 불 켜진 등 사이에
매달려 있습니다
오늘 저녁은
절 마당에 구석구석 환하게 밝힌 연등의 물결 속에서
제 어둠을 환하게 밝혀보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떨고 있는 한 춥고 외로운 등을
오래 지켜보았습니다
불타버렸다고 생각한
그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비인 자리
간절한 소원의 말마저 떠나간 자리
크게 난 구멍 속으로 자유로이 왕래했을
바람의 이동과 잠시 적신 빗방울 몇 점
새어드는 별빛 몇 점
이제 막 싹트기 시작한 나의
죽음과 소외에 대한 사유
병에 대한 사유
가난에 대한 사유
화에 대한 사유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의문과 근심들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자리입니다
목화밭에서*목
박정남
한 여자의 가방이 길에 내동댕이쳐졌다
여자는 순식간에 엎드려 분통이랑 루주랑 거울이랑 챙겨 넣고
종종 애인인 한 남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여자는 거울 앞에서 눈썹을 밀고 다시 눈썹을 커다랗게 그려 넣었다
자기가 그려 넣은 눈썹의 여자는 얼굴이 길었다
여자는 한이 많았다 그녀의 작품 목화밭 하늘 골짜기에는
디귿 자 모양의 흰구름 두 개가
서로 혀를 밀어 넣은 듯 엉켜 있었다
서른 살의 여인 천경자가 목화꽃이 만발한 황토밭에 앉아
아가에게 커다란 구름덩이 젖을 물리고
붉은색 치맛자락 하나는 애아비에게 주어
애아비는 아주 넉넉한 오수에 들었다
하늘에는 떠가는 목화송이 구름
집에 두고 온 개 한 마리도 아주 편안하게 잠들고
바구니마다 가득 담겨 피어오르는
목화솜덩이들
몇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난 뒤
생사가 묘연한 천 화백에게 목화밭 그림이 왔다
그녀의 목화밭 그림을 인화해 비단으로 짜서
그녀의 야윈 몸에 착 달라붙는 폭신한 솜이불 만들어
그녀를 아주 편안하게 잠재우고 싶다고 했다
어느 먼 이국 땅에서 헤매고 있을 외로운 영혼에게
* 천경자 화백의 1954년작.《유심》2015년 3월호
박정남 시인 약력 : 경북 구미에서 태어나 1975년《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숯검정이 여자》,《길은 붉고 따뜻하다》,《이팝나무 길을 가다》,《명자》,《꽃을 물었다》등이 있다.〈대구시인협회상〉,〈상화시인상〉을 수상했다. 전, 대구시인협회장을 엮임했으며, 현재《시와반시》고문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