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씨(王氏)
개성왕씨(開城王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국조(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曾孫)으로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門戶)를 연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스무살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정벌(征伐)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건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포가 나날이 심해져 민심(民心)이 어지러워지자 918년(고려 태조 1) 신숭겸(申崇謙)․홍 유(洪 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후 34대 왕조(王朝)에 걸쳐 4백 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웠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회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옥(玉)․금(琴)․전(田)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이렇게 뼈져린 수난의 역경을 딛고 일어선 왕씨(王氏)는 교서감(校書監)을 지낸 미(亹)를 시작으로 하여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흥(興)은 선비(善妃 : 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우왕(禑王) 초에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문하평리(門下評理)를 거쳐 상의문하부사(商議門下府事)에 이르렀다. 강원도 영월(江原道寧越)까지 호송하고 돌아왔으며, 인조(仁祖) 때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희걸(希傑)은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의성(義成)은 선조(宣祖)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청주(淸州)의 전투에서 공(功)을 세워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다. 그밖에 한말(韓末)의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인 재일(在一)은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 왕씨(開城王氏)는 남한(南韓)에 총 4,456가구, 18,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주왕씨(羅州王氏)
나주왕씨(羅州王氏)는 중국 산동성 연대시 모평구에서 왕혜수(王惠修)가 처음 한국에 도착한다.
그의 아들 왕문해(王文海)가 한국에 태어나 나주에 정착하게 되었다. 왕문해가 나주왕씨의 시조가 되며,
아들은 왕승위(王承偉)로 이어지며, 현재 나주에서 연경(燕京)이라는 중화요리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글쓴이는 식당경영까지 밝혔습니다.
현재도 하는지 안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남왕씨(濟南王氏)
제남왕씨(濟南王氏) 시조 왕이문(王以文)은 천계(天啓)4년 1625년 乙丑 5월 26일에 중국의 산동성 제남부 장구현(章丘縣) 상원장제(常遠庄第)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이름은 왕봉강(王鳳崗)으로 왕족이었다. 명나라 의종때 청나라가 중국의 판도를 석권하자 섬서성 안찰사로 있던 왕접이 이에 대항하여 싸우다 영하대전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청나라 세조가 왕씨를 멸족하려고 1645년(조선 인조 23년) 왕봉강을 심양 포로 수용소로 압송하였다. 그때 심양(沈陽)에 볼모로 잡혀있던 봉림대군이 그를 만나보고 뜻이 맞아 같이 우리나라에 와서 왕이문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살았다. 후손들이 왕이문을 시조로 하고 고향인 제남을 본관으로 하였다. 지금까지 제남왕씨를 한사람 만난적이 있는데, 왕종선씨로 광주에서 한집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과 관련되는 사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