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가요무대에서 <황성옛터>가 등장했습니다. 그래서 <황성옛터>의 창작 배경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제시기 가요 중에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곡들은 1930년대 대거 등장합니다. 대표적으로 <황성옛터>,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눈물젖은 두만강>, <알뜰한 당신> 등이 있지요. 1930년대 대중 가요 신드롬의 신호탄 역할을 한 곡이 바로 <황성옛터>입니다. <황성옛터>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유하여 조선 대중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고, 민족의 노래로 격상됩니다. 이 노래는 한국의 대중 가요 중에서 처음으로 히트한 곡이기도 합니다.
먼저 <황성옛터>가 창작된 배경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순회극단이었던 <연극사>는 1928년 만주 공연을 거쳐 개성 공연까지 무사히 완료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개성이 고향이었던 작곡가 전수린 선생님은 연극 작가 왕평 선생님과 함께 휘영청 달밝은 밤에 만월대를 방문합니다. 만월대는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경(개성)의 궁궐터를 지칭합니다. 전수린 선생님은 만월대를 관람하고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만월대에서 떠오른 악상을 바이올린 선율로 옮깁니다. 이를 본 작사가 왕평 선생님은 그 멜로디에 가사를 붙입니다. 불후의 명곡 <황성옛터>가 탄생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황성옛터>는 레코드 취입이 아니라 막간 가요로 불려지기 시작합니다. 극단에서는 그해 가을부터 연극 무대의 막간에 이애리수라는 가수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합니다.
<황성옛터> SP 앨범 (1932)
이애리수는 귀여운 외모, 명랑한 목소리, 섬세한 연기로 인기를 누리던 연극 배우였습니다. 이애리수는 예명으로서 영어명인 앨리스를 한자로 번역한 것이지요. 조선인 청중들은 고려의 망국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황성옛터>의 가사에 감동을 받고 열띤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애리수는 3절을 부르는 대목에서 감정이 북받쳐올라 노래를 중단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청중들은 재청을 외쳤습니다. 그렇지만 이애리수는 또 다시 3절이 되자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노래를 중단합니다. 사람들은 이같은 소문을 듣자 연극보다는 <황성옛터>를 듣고자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빅타레코드사는 <황성옛터>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1932년 이애리수에게 이 곡을 취입시킵니다. <황성옛터>가 수록된 음반은 순식간에 5만장이 판매되었다고 하는데, 그 당시 인구 비례로 볼 때 5만장은 어마어마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유성기 음반 <황성옛터>는 < 사의 찬미 >, <목포의 눈물 >과 더불어 일제시기 3대 명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유성기 음반은 1960년대까지 제작되다가 LP 음반에 자리를 넘겨주는데, 감상용보다는 소장품으로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요. 몇년전 경매에서 < 사의 찬미 > 초반은 5,600만원에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황성옛터>의 본래 제목은 < 황성의 적 >(荒城의 跡)이었고, < 황성의 적 >이란 황폐해진 궁성의 흔적이라는 의미입니다. <황성옛터>의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1.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지어요
2.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3.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만월대
황성옛터는 황폐해진 궁궐터를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만월대를 뜻합니다. 만월대는 고려 왕조의 수도였던 개경(개성) 소재의 궁궐터를 의미하지요. <황성옛터>는 고려의 멸망과 나그네의 유랑이 절묘하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즉 국망으로 폐허가 된 고려 궁궐과 망국으로 나그네 신세가 된 조선 대중들의 상황이 담겨 있습니다.
<황성옛터>에는 고려 시인들이 고려 멸망 당시 만월대를 돌아보고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었던 시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길재 시인은 오백년 도읍지를 돌아보고 무상했던 고려왕조의 영화를 탄식했고, 원천석 시인도 만월대가 풀 속에 가려져 황폐한 것을 보고 비감한 심정을 노래한 바 있습니다. 두 시인 모두 고려 왕조에 충절을 바쳤고, 조선 왕조와는 거리를 두었던 인물들이지요.
1절의 가사에는 월색(달빛)이 가득찬 만월대(황성)가 등장하지요. 만월은 보름달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작사가는 월색을 집어넣어 자신이 만월대를 방문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지요. 또 고려가 망해서 궁궐이 폐허가 되었듯이 조선도 망해서 민인들이 나그네가 된 현실을 강조합니다. 나그네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주인에서 손님으로 전락한 조선인의 처지를 은유한 것입니다.
2절에서 주인공은 폐허가 되어버린 궁궐터에 향기로운 풀들(방초)이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보고 세월의 무상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고려의 영화가 허무한 것처럼 자신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허무한 꿈을 꾸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3절은 주인공이 궁궐에서 나와 정처없는 유랑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작사가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순회 공연하는 자신들의 처지가 나그네와 같다고 비유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황성옛터>는 일본풍의 2박자와는 달리 3박자를 사용했습니다. 조선인들은 급하게 쫒아가야만 하는 2박자 곡보다는 호흡이 훨씬 여유로운 3박자 곡을 선호했다고 합니다. 가사도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로 가야했던 조선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일제는 <황성옛터>가 서정적인 가사 속에 반일감정을 내포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이 노래를 경계했습니다. <황성옛터>는 1934년 이경설 선생님이 < 고성의 밤 >으로 제목을 바꾸어 불렀다가 치안방해죄를 적용받아 금지곡으로 지정됩니다. 일제가 지목한 치안방해란 것은 독립을 고취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일제시기 <황성옛터>는 고려의 망국과 조선의 망국을 연결지음으로써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합니다. 현재 <황성옛터>의 배경이 된 개성은 민족의식을 제고시키는 장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개성의 만월대는 2007년부터 남북공동발굴이 시작되어 많은 유물들을 수습하는 한편 고려 국왕이 정치를 행했던 화경전 등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성은 남북이 민족사를 공유하고 통일의 주춧돌을 놓는 장소라 할 수 있겠지요. 이 때문에 <황성옛터>는 민족의 노래로서 생명력을 유지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유행가는 흘러간 노래라는 의미와 흐르고 있는 노래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지요. <황성옛터>는 일시적으로 불려지다가 사라지는 유행가가 아니라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유행가로 보여집니다. 그것은 <황성옛터>가 한 시대를 상징하고, 그 시대의 대중들의 정서를 잘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황성옛터>는 1935년 이애리수가 은퇴하자 인기가 조금 떨어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다가 1941년 남인수 선생님의 절창 음반으로 다시 큰 인기를 모읍니다. 그리고 노래 제목도 < 황성의 적>에서 <황성옛터>로 바뀌어 지금까지 호칭되고 있지요. 이 때 3절 가사는 ‘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 에서 ‘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로 바뀌고, ‘ 주노나 ’ 는 ‘ 주노라 ’로 바뀝니다.
https://youtu.be/QEDlBYTor4Q
조용필 님이 <황성옛터>를 열창하는 모습
<황성옛터>는 이미자, 나훈아, 조용필, 한영애 등 명가수들이 열창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노래들은 하나같이 1절의 ‘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지어요 ’를 2절에 배치했고, 2절의 ‘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를 1절에 배치했습니다. 이것은 원래 가사와는 다른 것으로서 가요 악보 편집자의 실수라고 보여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