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산책 / 차수현
환상적인 날씨입니다 혀 내밀고 내달리기에
나는 줄을 당겨 바람을 가릅니다 간신히 기어 나오는 웃음
좋은 날입니다
죽어가는 사람 목줄 채우기에
느껴봐 온통 살아 있는 것 투성이야
냄새만 맡아도 꿈틀대는 흙, 돌, 풀, 눈 뜬 벌레, 죽은 자의 혀가 잘린 그림자, 산 사람의 입을 뗀 발자국 그곳에서 영靈을 찾는 발자국 발자국들
천사 같은 아이들이 하나둘 따라붙어 나팔을 붑니다
터져버릴 풍선 같은 주인 여잘 놓칠세라 나는 줄을 힘껏 당깁니다
봄눈의 생사가 움찔대는 건 입춘이 지나서라지
마지막 의자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노파가 말합니다
검은 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새 한 마리 보입니다
검은 눈들이 나란히 나란히 그 중, 유일한 흰 눈 한 알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ㅁ ㅗ ㄱ을 그었거든요
달리는 남자 위로, 만보 걷는 여자 위로, 쌩 지나가는 자전거 위로, 갑자기 우산을 펴는 여학생 위로 뚝 뚝
서둘러 서둘러야 했어
나는 더 이상 당겨지지 않는 바람을 가릅니다
그처럼 깨끗하게 죽은 사람 처음 봤다지 어찌나 핥아줬는지 얼굴이 말갛더래 봄꽃 마냥
주인 여자와 어깨를 부딪친 노파가 입을 뗍니다
자,
당신의 앞발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서둘러 두드리세요 그녀가 사는 옆집 대문을
똑 똑 똑 산책할 시간입니다
2023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소감 : 시는 쓰면 쓸수록 삶 속에 빠져드는 것…나만의 시 쓰고파
스승인 이돈형 시인 영향 2년 전부터 시를 쓰기 시작. 좋은 시는 진정성 ‘가슴’으로 건너가 두드려지는 시
이제 시인으로 첫발…글은 꾸준히 써야 된다고 생각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대전에 사는 차수현입니다. 이란 소개 밖에는... 자신을 그 어떤 글이나 말로 표현하여 소개한다는 건 여전히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 같아요. 제겐 그렇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뵙겠습니다.
-신춘문예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소감이 어떠신지.
▲사실 ‘머릿속이 하얘졌다’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제 운전면허증을 따고 오늘 막 운전대를 잡은 기분이랄까요. 얼떨떨하기만 합니다.
-당선작인 본인의 시에 대해 간단히 소개 바랍니다.
▲강아지를 데리고 매일 산책을 갑니다. 그 산책이 제 의지가 아닌 날들이 더 많아질 때쯤 썼던 시입니다. 힘겨운 날들이 계속 되었던...
-작품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나요.
▲그녀의 힘겨움을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좋은 날 살아있음으로 끌어 당기고 싶었습니다. 매일 매일 저를 끌어당겨 산책시켜 주는 제 강아지처럼요.
-시를 처음 쓴 게 언제였나요?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2년 전입니다. ‘시’가 아닌 다른 글을 쓰려 두드린 문이 ‘시’로 빼꼼히 열리게 되었습니다. 그 문의 손잡이를 잡고 열어주신 분이 스승님이었구요.
-대략 발표하거나 보관하고 있는 시가 몇 편 정도나 되나요? 그중 대표적인 시나 특별히 아끼는 시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제 시를 발표해 본 적은 없습니다. 2년 남짓 성실히는 써왔으니 꽤 쌓였겠지요. 그저 써 놓았던 시 중에 ‘에밀리 디킨슨’의 삶의 일부와 제 고백을 모티브로 써 놓은 시가 있습니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사람은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이사 가든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릴 테니까” 제목의 시가 떠오르는데요. 지금부턴 개인적으로 아끼는 시가 되겠네요.
-시를 쓸 때 주로 영감은 어디에서 찾고 시상(詩想)은 어디서 얻는 편인가요
▲‘주로’라는 게 없는 거 같아요. 운전 중에 갑자기 스치는 장면이나 사물 속에서도 떠오르고요.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글귀를 발견하거나 그 책 내용에서 그려지는 단상 속에서도 잡아내고요. 혼자 중얼거리다가도 튀어나오곤 한답니다.
-시를 쓰는 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그리고 기억에 남는 분의 시가 있다면 누구였을까요?
▲이 질문엔 당연히 ‘시’를 품게 해주신 스승님이십니다. 겨울 첫눈을 기다리며 내내 하늘만 올려다보던, 철모르는 아이 같은 제게 ‘시’의 첫 눈송이를 날리게 해주셨거든요. 시를 알게 될 줄 쓰게 될 줄 모르던 제게 말입니다. 그런 스승님이 정말 좋은 시, 좋아하는 시를 쓰시는 이돈형 시인이십니다. ‘경청, 기일, 죽을 만큼, 눈, 잘디잘아서....’ 시를 아시는 분 누구나 스승님의 시들을 읽어보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시를 쓰는 일이 자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된 순간은 언제인가요.
▲외롭고 고단할 때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산 하루라도 그 끝 바람곁에 저 홀로 앉아 그저 적막하기만 할 때 그때 시를 읽고 시를 씁니다. 이제는 그래서 조금 힘을 얻습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좋은 시란 어떤 것일까요.
▲진정성이라 할까요. 시를 쓸 때도 읽을 때도 늘 맘에 먼저 와 닿는 건 진심이더라구요. 눈으로 머리로 따라가야 하는 시가 아니라 ‘가슴’으로 건너가 두드려지는 시, 제가 느끼는 좋은 시입니다.
-시인 등단을 꿈꾸는 많은 예비 시인들이 있습니다. 그분들께 선배로서 조언해주고 싶은 점이 있다면?
▲감히 선배라 말하지 못합니다. 저도 이제 막 발을 떼려 한 것뿐이니까요. 함께 써가고 있으니까요. 조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렇게만요. 쓰세요 계속 쓰세요 그게 맞습니다.
-시인에게 시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스승님은 ‘목숨’이라 하셨습니다. 처음엔 그 말에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어요. 뭐가 그리 거창하지? 하고요. 하지만 목숨이 맞았습니다. 살아 있어 그저 숨이 쉬어지듯 살아 있어 그냥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쓰면 쓸수록 제 삶 속에 빠져들고야 마는 것 그게 ‘시’였습니다.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나요.
▲ ‘차수현’ 시를 쓰고 싶습니다. 이상이 ‘이상’의 시를 썼듯 스승님이신 이돈형 시인께서 ‘이돈형’ 시를 쓰시듯 에밀리 디킨슨이 ‘에밀리 디킨슨’만의 시를 썼듯 저도 차수현이 ‘차수현’의 시를 쓰고 싶습니다. 그저, 그냥요 그리고 그 시가 읽혀지면 좋겠습니다. 그냥 그저요.
차수현
서울 출생 대전 거주
한남대학교 사회문화행정복지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2020년)
2023년 경남도민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 사회를 경쾌하게 표현
경제난과 아직 끝나지 않는 코로나19 등 사회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예비 시인이 창작의 열정을 멈추지 않고 신춘문예에 응모해 왔다. 시를 쓰겠다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 역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러 시인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들을 하지만 시인이 많은 사회는 정치인이나 투기꾼이 많은 사회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회일 것이다.
214명의 시인 지망생이 총 1589편의 시를 응모해 왔다. 그중 23명의 시 134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오랜 시간 검토하여 이영숙의 ‘태풍주의보’, 서승한의 ‘30 큐브 레이아웃’, 차수현의 ‘산책’,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 이 4편의 작품을 최종심에 올렸다. 이영숙의 ‘태풍주의보’는 이미지는 선명하고 표현이 매끄러우나 시적인 시상의 새로움과 시적 표현의 참신성이 부족해서 제외되었다. 홍여니의 ‘그림자 구조대’는 주제 선정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사유의 깊이를 전개해 내지 못해 최종심에 오르지 못했다.
서승한의 작품과 차수현의 작품 두 편을 두고 심사위원들은 오래 고심했다. 두 편 모두 표현의 참신성과 주제의 밀도가 장점이어서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서승한의 ‘30 큐브 레이아웃’은 어항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의 한 측면을 형상화해내고 있다. 특히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우리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시적 기교를 보여주는 등 오랜 창작의 숙련 기간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떨어진 문장들이 흠이었다.
결국, 오랜 논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차수현의 ‘산책’을 선택하는 데 합의했다. 차수현의 작품에서는 뛰어난 언어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산책하는 개의 시선으로 바라본 경쾌한 언어가 반대로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을 말해주고 있는 시적 아이러니가 잘 살아 있어 시의 주제 의식을 강화해 주고 있는 점이 큰 장점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속도감 있는 이미지의 전환이 작품 전체에 리듬감을 만들어 내고 있어서 운문의 효과를 아주 잘 살려내고 있다. 오랜 수련 과정을 거친 듯한 작품의 완성도와 신인으로서 보여주는 참신한 패기가 모두 함께 느껴지는 작품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와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밀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이런 좋은 작품을 이번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선정하게 되어 기쁘고 뿌듯하다.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된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한다.
▲심사위원-황정산 평론가, 신미균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