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기찻길과 가까웠다(세 번째 이야기)
서우당
진갑이 지난 짧지 않은 세월을 돌이켜 본다. 우연이라 하기엔 너무 우연처럼 철길과 가까운 곳에서 살아왔다. 앞에서 두 가지의 삶을 기찻길과 함께한 삶을 얘기했다면, 세 번째 이야기도 기찻길과 떨어질 수 없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1978년 12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업계 고등학교 3학년 하반기에 수원시 매탄동에 소재한 삼성전자에 실습을 나간다. 예외 없이 성적순으로 600명 졸업 동기 중에서 40명이 선발대가 되었다. 11월 1일 자에 가려던 것이 화재로 인하여 1달 연기되었다. 구미역에서 기차로 수원역에서 하차했다. 경부선 기찻길에서 거리 멀지 않은 곳에 ㈜삼성전자 수원공장이 위치했다. 수원에서 용인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에 위치하며 가는 길가에 아주대학교와 ㈜태평양화장품이 있었다. 바로 옆으로 삼성정밀, 삼성전기 등 계열사들이 있었으니 매우 너른 부지를 가졌다. 당시 회사원만 1만 1천 명이었으니 가히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시내를 다니면 푸른 수의 색깔처럼 연푸른색 상하의를 입은 삼성계열사 직원들과 통근버스를 쉽게 볼 수 있었다. 매일 아침 8시와 저녁 8시 2교대로 12시간 근무하고 2, 4째 일요일만 쉬었으니 혹사도 그런 혹사가 없었다. 처음 입사해서 1주일 내내 코피를 흘린 기억이 난다. 근무하는 사원들은 2시간마다 15분씩 쉬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골판지 박스를 펴고 단잠을 자기 일쑤였다. 첫 월급으로 6만원, 두 번째 달에 67천원을 수령했다. 실습기간은 급여액의 70%만 지급했다. 세 번째 급여일 아침에 곧장 자취방으로 와서 간단한 이삿짐을 꾸려 택시로 수원역에 내려 기차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퇴직서 제출이나 어떤 절차도 없었으니, 군대로 말하면 탈영이고 회사로 보면 무단 행방불명자가 되지 않았을까?
그 후에 군 입대가 임박한 시점에서 정규 사원으로 취업할 수도 없었으며, 코오롱 내 방수공사에 일당제로 다니다가, 대구시 중구 동인로터리에 위치한 대구고시학원에 당시 4급을(7급) 공무원 수험생으로 2개월 과정에 등록해서 사곡역에서 대구역을 왕래했다. 그것이 기회가 되어 지방행정직 5급 을류(9급)에 대구시를 임용지역으로 합격했다. 그 이듬해인 80년 4월 3일부로 북구청과 시민운동장이 소재한 고성동사무소 발령이 났다. 과거 태평로 1, 2가는 중구로, 3, 4가는 북구 고성동으로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나뉘었다. 아침 5시 30분 기상해서 사곡역에서 6시 50분 기차로 55분 걸려서 대구역에 내리면 걸어서 사무소에 출근했다. 민원부서에서 2만 5천여명 주민들을 대상으로 출근하자마자 수십 명이 민원실을 꽉 채울 정도로 폭주했다. 두루마리형 복사기는 고장이 잦아 볼펜으로 직접 한글과 한문(성명)으로 인감증명서나 주민등록 등초본을 발급했다. 2개월 근무하던 중 6월 13일 육군에 입대했다.
경산역에서 장정으로 연무대역에 도착했다. 논산훈련소 4주 훈련 후 다시 연무대역에서 군악대의 팡파르를 뒤로하고 군용열차에 이등병 동기들을 실은 기차는 곤히 잠든 상태로 밤새 달려 서울의 한강철교를 지나 의정부역에서 내렸다. 3군 보충대에서 25사단으로 배속되었고, 다시 수색대대로 3명이 배속되었다. 휴가는 6개월마다 나왔으며, 최전방에서 동두천역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서울역에서 다시 기차로 구미역까지 왔다. 심지어 완행열차로 8시간이 걸렸다. 한번은 휴가차 서울역에서 우등열차를 타려다가 티케팅 후 시간을 놓쳐, 뒷 열차에 탑승을 승낙받고 내려오던 중, 여객전무의 차표검사 중에 무단 탑승 군인으로 오인되어 열차 안에서 5명의 공안들과 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기어이 천안역에서 강제로 하차당하고 역사에서 따뜻한 마음씨의 역무원 덕분에 다음 기차로 귀향한 적이 있었다. 최전방 수색대에서 목숨을 건 군인들을 비하하는 태도로 대하는 일부 여객전무에 대한 반감이 뇌리에 각인된 내 인생의 일대 사건이었다.
제대 후 바로 복직을 하였다. 이번에는 북구 동서변동(현, 무태동)이었으니 88번 버스 종점인데 대구역에서 경북대 북문 산격동을 한 바퀴 돌아 금호강 잠수교를 건너면 바로 고촌마을로 해서 고속도로를 지나 버스 종점이 연결된다. 서변동과 동변동 사이로 동화천이 흐른다. 4년여를 근무하다가 고향 연고지 신청으로 구미시 인동동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6년 8개월 근무하고 철길이 통과하는 송정동사무소로 발령 났다. 그 뒤에 구미시청으로 전입하고 나중에 5급 사무관 승진으로 장천면장과 상모사곡동장을 역임했다. 상모사곡동사무소는 사곡역에서 가깝고 기찻길과는 100m 거리였다. 그전에 철길옆 고향집에서 아파트를 장만해서 송정동 기찻길 옆으로 이사했다. 국장으로 승진하고 다시 3급 지방부이사관으로 명예퇴직하고 곧장 연구실을 얻은 곳이 내 아파트 후문 철길과 100m 거리 위치한 건물이며, 강의 준비와 영상물 녹화 등 펜대믹 상황에서 지난 3년간 2개 대학교에서 학생들의 강의를 진행해 왔다. 돌이켜보니 나의 하루는 기적소리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교통에 큰 편리함을 주었으며, 역마살이 끼어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20230203 서우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