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숙녀동 할머니
눈앞엔 커다란 굴이 시꺼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굴 앞에는 천년 묵은 영물 같은 새하얀 원숭이들이 어지러이 뛰어다니고 코끼리 몇 마리가 자루같이 기다란 코를 흔들며 둔하게 어
슬렁거렸다. 더욱이 머리에 털이 한줌도 없이 빤빤한 큰 독수리들이 지붕같이 어마어마한 날개를 파닥거리며 무쇠 갈퀴 같은 단단한 발톱을 세우고 낚아챌 듯이 단지흥 일행의 머리 위를 바투 날아다녔다.
대리에서 태어나 남방의 짐승들을 숱하게 보아온 그들이건만 이렇게 무지막지한 것은 처음 보는지라 모두들 얼이 빠졌다,
'대관절 이 무당 할미란 여인은 어떤 여인이기에 이런 흉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걸까, 충피가 겁을 집어먹고 벌벌 떠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단지홍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이곳 여자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더욱이 하나같이 이 이방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기네끼리 뭐라고 수군덕거리며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단지홍은 갈수록 의아하기만 했다.
옷차림새 또한 가관이 아닐 수 없었다. 모두들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이 횐 천으로 국부만 살짝 가렸을 뿐 봉곳한 젖가슴을 다 드러내 놓고 삼단 같은 머리채를 어깨까지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품새로 사내 앞에 서 있으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모르는지 앞가슴을 가릴 줄도 몰랐다. 개중에 한 여자는 손톱이 어찌나 긴지 매 발톱같이 끝이 꼬부라져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로군. 정말 기이한 일이야. 도대체 굴안한 무엇이 있을까?'
다섯 사람은 의아함을 풀 길이 없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멀찌감치 서서 굴 안을 기웃거렸다.
그때였다. 안에서 작은 계집애 하나가 종종걸음을 치며 걸어 나왔다. 자그마한 젖봉오리가 도드라진 앙증맞은 젖가슴을 그대로 드러낸 채 계집애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할머니께서 어서 들어오라는 분부십니다."
그 말에 다섯 사람은 선뜻 굴 쪽으로 다가서서 굴 안으로 한 발 들여놓으려다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마터면 악 소리를 지를 뻔했다. 굴 안에는 천장, 바닥, 벽 할 것 없이 온통 크고 작은 뱀들이 무더기로 엉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한 발자국 내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계집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맨발로 뱀 위를 밟으며 사뿐사뿐 걸어갔다.
"겁내지 말고 어서 들어오세요."
계집아이는 재촉했다.
일행은 도저히 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못 내고 어린 계집애가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손에 땀을 쥘 뿐이었다. 저렇게 마구 밟으면서 걸 어가다가 뱀들이 독이 나서 대가리를 꼿꼿이 쳐들고 저 매끌매끌한 종아리를 한 번만 물어 버려도 저 애는 당장 혼절해 쓰러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괴이하게도 짓밟힌 뱀들은 계집애를 물기는 커녕 스르르 한옆으로 피해 기어가는 것이었다.
"야, 재밌어, 정말 재밌는데, 왜 안 들어와요? 그냥 걸어오면 되는데."
계집애는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뱀들이 이렇게 득실거리는데 자칫하면……."
단지흥은 머뭇거렸다.
"뱀이 무서워서 그래요? 아니, 허우대가 멀정한 사내들이 그래, 뱀을 무서워한단 말예요? 뱀은 사람을 해치지 않아요. 함부로 여자를 겁탈하기나 하는 당신들 사내들과는 다르다고요."
계집애는 흐드러지게 웃어젖히며 능청을 떨었다. 기껏해야 열두어 살밖에 안 돼 보이는데, 말하는 품새는 영락없이 갖은 풍상을 다 겪은 늙수그레한 아낙이었다. 아직 사내를 알 나이도 아닌데 남
녀간의 일을 어쩌면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입에 담는 것일까, 단지흥은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태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얘야, 손님을 이렇게 대접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너희들 할미가 청해서 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오히려 뱀으로 길을 막다니, 이게 손님 접대하는 예의냐?"
그러자 계집애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조롱하듯 말했다.
"글쎄요, 당신들 중에 황제 폐하도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사내들은 모두 구린내 나는 것들이에요. 구린내 나는 사내들이란 워낙 우리 숙녀동(淑女洞)에는 가까이도 못 오게 하는 법인데 할머님께서 오늘은 웬일로 그쪽을 부른 건지 나도 알 수가 없군요. 어쩌다 명이 떨어졌으니 그렇지 제멋대로 발을 들여놨다간 목숨이 남아 나지 않는다구요."
그리고는 계집애는 잔뜩 눈을 부릅뜨고 다섯 사람을 노려보았다. 조그마한 계집애가 그렇게 나오자 되레 깜찍해 보였다.
"어쩔 거예요? 걸어오겠어요, 아니면 오지 않고 계속 거기 있겠어요? 그러겠다면 내 가서 할머님한테 말하지요, 할머님이 만나기 싫어 오지 않으려 한다고……."
그리고는 계집애는 몸을 돌려 안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아가씨, 서두르지 말아요. 우리가 곧 건너간다는데도!"
선비가 소리쳤다. 단지홍은 선비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충피가 무당 할미를 두려워하는 걸로 봐서 무당 할미에게 일심으로 매달려 보면 천룡사 중들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선 무당 할미를 만나 보는 것이 급선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계집애는 그때껏 아가씨라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는지라 대번에 희색이 만면해졌다.
"아가씨라구요? 그 말 참 듣기 좋네요. 구린내 나는 사내가 말은 제법 얌전한데요. 좋아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내 당신들을 안으로 안내하지요."
단지홍은 이 말에 계집애가 뱀들을 내쫓고 길을 터줄 줄 알았다.
하나 계집애는 생각 밖으로 그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눈꼬리를 치켜 올리고 외쳐대기만 했다.
"안으로 안내 하겠다는데 도 왜 그렇게 꼼짝 않고 있는 거예요? 우리 할머님을 만나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려면 어서 이 뱀 위를 걸어서 오라니까요."
분명 일행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고 단단히 놀려 주자는 수작이었다.
"그럼 좋다! 이곳에서 손님 대접하는 법도가 그러하다면야 우리도 별수없다. 죽든 살든 뱀을 밟고 건너 갈밖에."
단지흥이 말했다.
"폐하, 정 그러시다면 저희가 먼저 건너가 볼 테니……."
사대 시위가 가로막고 나섰다. 그러는 것을 보고 계집애가 또 손뼉을 치며 톡 끼여들었다.
"뱀들이 뭐가 무섭다고 서로 밀고 당기고 그 난리예요? 정말 할머님 말씀이 맞아. 세상 사내들이란 모두 옹졸하고 못났다더니, 명색이 사내들이 왜 저 모양이지?"
자그마한 계집애가 멋모르고 지껄여대는 소리라도 사대 시위들은 그 말에 얼굴이 벌게졌다.
'내 오늘 뱀한테 물려 만신창이가 되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여길 건너가야겠다. 한다 하는 대리의 사대 시위가 한낱 계집애의 비웃음거리가 되어서야 면목이 말이 아니다.'
"내 먼저 건너가 보리다."
선비가 나섰다. 그러자 사대 시위 중 성미가 제일 급한 농부가 소리쳤다.
"잠간, 내가 먼저 가겠소!"
농부는 다음 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농부가 꾸물거리는 뱀을 밟기 시작하자 넷은 가슴을 졸였다. 방금 여자 애가 건널 때처럼 뱀들이 가만있어 줄까? 그렇지 않으면 큰일 아닌가.
농부는 조심스레 발을 옮겨 디뎌 벌써 중간까지 들어갔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었다. 뱀들이 알아서 스르르 피해 주는 것이었다.
일순, 계집애가 난데없이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네 사람은 너나없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계집애의 휘파람 소리는 뱀들을 부리는 신호였다. 선비는 다급하여 더 볼 것 없이 손을 들어 계집 애한테로 장풍을 내쳤다. 그러자 계집애는 튀어나온 바위 모서리 뒤로 날쌔게 몸을 숨겼다.
과연 뱀들은 계집애의 휘파람 소리에 마치 깊은 잠을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난 듯 대번에 대가리를 꼿꼿이 세우고 일제히 농부에게 달려들었다. 잠간 사이에 얼룩덜룩한 뱀들이 농부의 온
몸을 친친 감고 꾸물럭거렸다. 흡사 몇 천 갈래 동아줄이 농부의 몸을 꽁꽁 동이고 꿈틀거리는 형상이었다. 뱀들은 농부의 얼굴을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농부는 기겁을 하며 몸에 감긴 뱀들을 떼내려고 두 팔을 허우적거렸다.
"꼼짝 말아욧. 꼼짝만 하면 죽어요."
계집은 손뼉을 쳐 가면서 웃어젖혔다.
단지홍은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얼른 큰소리를 내지르며 손가락 하나를 뻗쳐 들어 팍하고 지풍을 날렸다. 농부의 얼굴을 깨물려고 쉭 다가든 독사 한 마리가 지풍에 맞아 힘없이 툭 떨어졌다.
"화아, 거기도 그런 재간이 있네요. 우리 할머님에게만 그런 재간이 있는 줄 알았더니. 하지만 내 다시 말하는데 더는 움직이지 말아요. 이제 정말 움직이기만 하면 뱀들이 저 사람을 베만 남기고 다 뜯어먹을 거예요."
계집애의 말에 단지홍은 화급히 농부에게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아. 절대 움직이지 말아!"
농부는 몸을 휘감고 꾸물럭거리는 뱀들을 보지 않으려고 그 눈을 질끈 감고는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옳지, 그렇게 가만히만 있어요. 꼼짝 않고 있으면 뱀들도 물지는 않을 거예요. 알았어요?"
자그마한 계집애는 연신 생글생글 웃으며 이번에는 뒤에 있는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 어떻게 할래요? 한 사람이 건너오기도 저렇게 힘든데 다섯이 다 무사히 건너올 수 있겠어요?"
네 사람은 이 조그만 계집애가 무슨 수작을 꾸미느라고 그러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계집애가 또 재잘댔다.
"내 보기엔 아무래도 못 건너와요. 그럴 바엔 차라리 돌아가고 말겠네. 어때요, 여기 이 사람도 놓아줄 테니까 굴을 빠져 나가 돌아가겠어요?"
단지흥은 저 계집애가 자기들을 한번 떠보려고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가기란 실로 지난했지만 그렇다고 예까지 찾아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터, 뱀에 물려 죽을지언정 도저히 물러설 수는 없었다.
"얘, 그러지 말고 길을 터주렴. 너희 할머님을 꼭 만나야겠으니."
단지홍은 마음을 다잡고 계집아이를 구슬렸다. 이 숙녀동이라는데가 어린 계집마저 저토록 지독하니 그 할미라는 여인이 어떠할지 안 보고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설사 무사히 들어가 그 할미를 만난다고 해도 뜻을 이를 수 있을지 막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되고 안 되고는 부딪치고 볼 일이다.
"자, 건너가세나."
"폐하, 오지 마세요. 이리로 오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농부는 자기 안위는 염두에 두지도 않고 소리쳤다.
"아니네! 죽고 살고는 하늘에 맡길 뿐, 자 가세."
단지홍은 태연자약하게 미소까지 머금고 말했다.
그쯤 되자 세 시위는 새삼 단지흥에게 탄복을 금치 못했다.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몸을 사리지 않고 천룡자 중들을 살려내려 하는 그 의리와 각오에 사뭇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었다.
세 시위들은 정중히 읍을 하며 굴 안으로 성큼 한 발 들여놓았다. 단지홍도 뒤따랐다. 그러자 어린 계집애는 눈이 휘등그래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들이 이렇듯 참말로 건너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계집애는 다급히 소리쳤다.
"건너오지 말아요! 정말 건너오지 말아요! 뱀들한테 잡아먹히면 난 몰라……."
그러나 네 사람은 아랑곳 않고 한걸음 한걸음 뱀이 득실거리는 속으로 발을 옮겨 놓았다. 뱀들이 앞을 다투어 달라붙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네 사람의 몸에도 뱀들이 새까맣게 기어올랐다. 넷은 더 나아갈 수가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이고, 이젠 난 몰라. 정말 미련한 사내들이야. 그렇게 오지 말라는데 말을 안 듣고 왜 온단 말이야. 자기네들이 무슨 신선이라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야, 고집을 부리긴. 이젠 정말 까딱도 하지 말아요. 까딱만 했다간 죽어요. 정말 모두 죽고 말아요. 아이 참, 난……."
어린 계집애는 미처 말을 맺지도 못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러더니 난데없이 울음을 터뜨렸다. 일행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 아이에게도 뱀을 막는 재간은 없구나. 그렇담 이제까지 계집애의 짓궂은 장난에 놀아난 꼴이로군. 그렇다면 그 무당 할미라는 여자는 만나 보지도 못하고 예서 이렇게 값없이 죽어 버리고 마는 것인가?'
계집애는 이제 마구 소리소리 질러대기 시작했다.
"야단났어요. 누구 좀 와 봐요! 어서 좀 와 봐요! 이 구린내 나는 사내들이 뱀한테 친친 감기고 말았어요, 네? 어서요!"
징그러운 뱀들은 다섯 사람의 몸에 새까맣게 들러붙어서 연신 꾸물거렸다. 사대 시위들은 잔뜩 긴장한 탓에 안면에 경련이 일 듯했지만, 단지홍은 애써 마음을 누르며 태연히 말했다.
"인명은 재천(在天)인 법, 뭐가 두려워서 이까짓 뱀들을 무서워 하겠는가."
그 말에 사대 시위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황제께서는 저토록 당당하신 데 우린 이게 뭔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으랴.'
사대 시위는 바싹 정신을 가다듬고 이를 사리물었다.
"얘야, 이젠 어떻게 들어가야 하느냐?"
단지흥이 물었다.
"난 몰라요. 들어 오겠으면 들어와 봐요. 하지만 죽어도 내 탓은 아녜요. 목숨이 대수롭지 않거든 어서 들어와 콱 물려 죽으라구요. 어차피 사내들이란 모두 개 같은 작자들인데, 개죽음을 당하라지, 뭐."
계집애는 자포자기하여 불쑥 내뱉더니 마침내는 풀썩 주저앉아 발을 동당거리며 펑펑 울어댔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휘파람을 불어 골탕을 먹이고는 이쪽에서 저를 어쩌지도 않는데 울긴 왜 운단 말인가. 계집애는 미친 듯이 훌쩍이더니 일순 벌떡 일어나 안으로 뛰쳐 들어가 버렸다.
이 다섯 사람은 난감하기 그지 없었다. 온몸을 감고 꿈틀대는 뱀을 떼쳐 내지도 못하고 뿐더러 앞으로 나서지도 뒤로 물러서지도 못했다.
"어쨌든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기어코 할미를 만나야 한다."
단지홍은 네 시위를 보고 말했다.
그 말에 성미 급한 농부가 먼저 앞으로 발자국을 뗐다. 그러나 채 한 발자국 떼기도 전에 그는 뱀에게 물리고 말았다. 농부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는 순식간에 온몸이 뻣뻣해져 더는 꼼짝도 못했다.
"페하, 저는…… 저는 더……."
농부는 더 이상 말을 못 잇고 그대로 털썩 쓰러져 버렸다.
단지흥은 등골에 식은땀이 확 내뱄다. 우리 군신 다섯이 오늘 예서 이렇게 뱀의 먹이가 되고 마는구나 싶었다. 그는 경황 없는 목소리로 급급히 외쳤다.
"자네들은 꿈쩍도 하지 말게, 나 혼자 들어 가야겠네."
그러나 세 시위가 그 말을 들을 리 만무였다.
"한 번 죽지 두 번 죽습니까.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를 옹위하고 들어가 그 할미를 만나 보고야 말겠습니다. 이런 지독한 노친네 한테는 따금하게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해욧!"
그들은 한결같이 증오심으로 부글부글 끓어올라 눈에 불을 켜고는 뱀들을 마구 짓밟으며 비척비척 앞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나무꾼이 비명을 내질렀다. 독이 잔뜩 오른 뱀에게 사정없이 한방 물려 버린 것이다. 그는 너무나도 통분해서 비명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차라리 너털웃음을 웃으며 그는 푹 꼬꾸라져 버렸다.
단지홍은 분기탱천하여 눈에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선비, 어부 두 사람 역시 앞뒤 가리지 않고 앞으로만 내달렸다. 죽음을 각오한 이상 한시 바삐 그 노파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몇 걸음 못 가서 이번에는 선비가 와락 어부를 붙잡았다.
"폐하, 빨리…… 어서…… 어서 여기를 벗어나…… 어서……."
선비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려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도 점점 가늘어지고 촌각 만에 그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천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꼭 이 할미를 만나고야 말리라. 이 한 목숨 잃을지언정 정녕 내 그 년을 가만 놔둘 수 없다?'
단지홍은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앞으로 내달렸다.
"폐, 폐하! 조심……."
마지막으로 남은 어부마저도 말을 못 맺고 또 꼬꾸라졌다.
'내 그 년을 찾아 사대 시위의 원수를 갚지 않고서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단지흥은 눈에 불을 켜고 이빨을 바드득 갈며 정신없이 달려 들어갔다. 수많은 독사한테 온몸이 친친 감겨 있어 다리를 떼놓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독사한테 물려 죽는다는 것도, 급히 내달리면 내 달릴수록 더 위험하다는 것도, 그리고 도대체 어디로 가야 노파를 찾을 수 있는지도, 그는 그 어떤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내달렸다.
얼마를 그렇게 달렸는지 모른다. 그는 문득 영롱한 빛에 눈이 부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혼백이 다 달아날 지경으로 정신없이 뛰어왔는지라 그는 숨을 후 들이켜고는 얼른 사위를 둘러보았다. 독사들은 간데없고 수없이 많은 종유석들이 굴 천장을 가득 메운 채 온통 삐죽삐죽 솟아나와 있었다. 머리를 찌를 정도로 낮게 드리운 그 종유석들이 수백 개의 등불처럼 오색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굴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복판에는 김이 무럭무럭 피
어 오르는 큰 온천까지 하나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물위로 언뜻 무엇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여인의 풀어진 머리칼이었다. 머리는 보이지 않고 머리칼만 떠있는 걸로 보아 필시 죽은 사람인 모양이라고 단지흥은 생각했다. 산 사람이라면 저러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단지홍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무당 할미라는 여인은 악독해도 이만저만 악독한 게 아닌 듯했다.
그런데 불현듯 흩어진 머리카락이 서서히 한데 모아지더니 여인의 머리가 물 밖으로 쓱 올라왔다. 단지홍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인도 고개를 들리다가 단지흥을 보고는 적이나 놀란 듯 대뜸 내쏘았다.
"거…… 거기 누구예요?"
단지흥은 일순 사대 시위의 얼굴이 번개같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울분이 치받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희, 그 할미인지 뭔지 하는 년은 어디……."
단지홍은 채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물을 필 요가 없었다. 눈앞의 저 여인이 그 할미가 분명했다. 소름이 끼칠정도로 온 얼굴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것이 백 살은 족히 넘어 보였다. 단지홍은 흥물을 보듯 경악스런 눈길로 그 노파를 바라보았다.
노파는 단지흥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다시금 적이 놀랐다.
느닷없이 뛰어들어온 이 사내는 옷이 후줄근히 젖어 있고, 그 위로 수많은 독사들이 친친 감겨 있었다. 개중 몇 마리는 단박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바깥 사람이 이 숙녀동엔 뭐 하러 왔나요?"
노파가 다시 입을 뗐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노파의 목소리가 아니라 아리따운 소녀의 목소리마냥, 은쟁반에 은방을 굴리듯 낭랑했다.
"먼저 거기서 대답하시오, 당신이 무당 할미요? 나는 무당 할미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오!"
단지홍은 격하게 외쳤다.
"이렇듯 무례한 사람은 처음 보겠군! 맞아요, 내가 무당 할미예요. 아무튼 할말이 있어 왔다니 어디 들어나 봅시다."
노파는 싸늘하게 내뱉었다. 단지흥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빠르게 주워섬겼다.
"나와 나의 네 시위는 본래 목숨을 구해 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었소. 그런데 우리를 뱀 구덩이에 몰아넣고 시위 넷을 죽여 버렸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어서 거기서 나오시오! 내 사대 시위의 원수를 갚고야 말 테니!"
그러자 노파는 단지흥이 그러는 것이 오히려 재미난다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며 한껏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그래요? 그것 참 모를 일인데요. 그 말을 듣자면, 같이 온 사대 시위는 모두 죽었는데 거기선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요? 당신 말대로라면 사대 시위야 원래부터 명이 그뿐이라 죽은 것이고 거기 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 예까지 온 것인즉, 나를 탓할 건 못 되지 않아요?"
'정말 언어도단도 이런 언어도단이 있는가? 더 입씨름할 필요조차 없다!'
단지흥은 악이 받쳐 소리쳤다.
"그런 말 같지 않은 소린 집어치워! 내 너의 머리를 잘라 사대 시위의 영전에 제사를 지내리라."
"참 이거야……. 세상 사람들이 모두 날 죽이지 못해 야단이니 큰일이군요. 글쎄 정 그것이 소원이라면 싸워 봐야지 어쩌겠소?"
노파는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단지홍은 노파가 온천에서 나올 줄 알고 잠시 그대로 서서 기다렸다. 그러나 노파는 나올 생각을 않고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등을 돌려야 옷을 입지요!"
'제기랄, 저깟 쭈글쭈글한 할망구가 그래도 부끄러움은 아는 모양이지? 주름지고 말라 비틀어진 몸뚱어리에 춘정이라도 일까봐?'
단지홍은 가소롭기 그지없어 코웃음을 쳤다.
"잡아먹진 않을 테니 어서 나오기나 하시오."
노파는 몹시 부끄러움을 타는 계집애모양 머뭇머뭇하다가 마침내 쭈뼛쭈뼛 몸을 일으켰다.
"나 참, 성화로군! 하는 수 없지. 그냥 나가리다."
단지홍은 한켠에 서서 노파가 물위로 솟아 나오는 모습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나체를 본 순간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천만 뜻밖으로 노파의 살결은 백옥같이 희고 처녀처럼 탄탄했다. 게다가 미끈한 팔이며, 그 섬섬옥수란…… 그때껏 황중에서 숱하게 궁녀들을 대해 봤지만 이처럼 눈부신 자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굴을 보지 않고 단지 몸매만 본다면, 그 노파는 물위에 곱게 피어난 부용이나 용궁의 용녀(龍女)에 비견될 만했다.
노파는 실 한 오리 걸치지 않은 미끈한 알몸으로 한들한들 단지흥한테로 다가와서는 방실 웃었다.
"단황 나으리, 기왕 이 굴 안으로 들어왔으면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요."
웃음을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 말에는 살기가 배어 있었다.
'이 노파가 무슨 요술을 부려 몸은 어떻게 처녀처럼 변신했지만 얼굴만은 어쩌지 못했나 보다. 몸매가 아무리 황홀하다 한들 얼굴만 쳐다보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오만 정이!'
단지흥은 비웃으며 언성을 높였다.
"죽일 테면 죽여 보시오. 싸우다 죽는다면 그나마 한은 없을 것이오. 그러나 만일 내게 진다면 내 손을 더 더럽히고 싶지 않으니 스스로 자결을 해야 하오."
"맞았어,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거기 몸에 아직 독사들이 감겨 있는데! 난 그 독사들을 떼 줄 순 없어요. 테 주기만 하면 거기서는 당장에 일양지공을 쓸 거고 그럼 내가 당하게 되거든요."
노파는 한마디 내뱉더니 요염하게 호호호 웃었다. 그 웃음 소리는 젊디젊은 처녀들이 남정네를 홀리며 웃는 웃음과 같이 기가 막히게 나긋나긋했다.
'파파 할미인데도 웃음 소리 하나는 사내들 간깨나 녹이겠는걸. 이 웃음 소리만 들어 봐도 얼마나 요망한지 대번에 알겠다.'
단지흥은 한층 냉엄하게 말했다.
"일양지공? 좋소. 내 오늘 일양지공이 뭔지를 직접 보여 주지."
말은 옹골차게 하면서도 단지흥은 자기도 모르게 슬그머니 노파의 나체에 눈길이 갔다. 빙골설부(米骨雪賦)랄까, 희디흰 살갗도 그렇지만 처녀의 젖가슴처럼 탄탄하게 도드라진 젖봉오리가 단지 흥의 눈길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순간적이나마 별스럽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단지홍은 이빨을 사리물었다. 노파는 짐짓 단지홍을 유혹하려는 듯 미동도 않고 한동안 서 있다가 아주 천천히 한 가지씩 한 가지씩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단지홍은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유심히 보고 있다가 퍼뜩 머리를 흔들었다.
'요망한 것! 저 나이에도 남정네를 유혹하려 하다니. 하긴 몸매가 저토록 아리따우니 한창 피어날 땐 뭇사내들의 애간장깨나 녹였을 게야.'
이윽고 노파는 옷을 다 주워 입고 정성 들여 머리를 빗어 올리고는 단지흥을 향해 똑바로 섰다. 옷을 다 입는 데 밥 한 사발 다 먹을 시간이나 걸린 듯했다. 노과는 여전히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 나와 싸우지 않는 게 어때요? 내 휘파람 한 번이면 그몸에 감긴 독사들이 일제히 대가리들을 쳐들고 당신의 그 잘생긴 얼굴을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을 텐데. 그러면 이 굴을 나가기는커 녕 아주 딴 세상으로 가게 된다구요. 그러니 우리 그만 화해를 해요. 황제고 뭐고 거추장스러운 건 다 걷어치우고 여기 남아 나와같이……."
거기까지 말하고는 노파는 부끄러운 듯 말꼬리를 흐렸다. 단지흥은 어이가 없었다.
"허튼소리 집어치우고 내 일양지공이나 받아라!"
단지홍은 대로하여 대갈일성을 내지르며 몸을 날려 노파에게 공격을 들이댔다. 자고로 이런 만이 (蠻異)의 굴 안에는 천생적인 이인(異人)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대부분은 각기 독특한 요술과 법 술들을 갖고 있으리라고 단지흥은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들과 싸우려면 먼저 손을 써야 했다.
그러나 노파는 금방 그 어떤 생각에 도취되어 한창 몸이 단 참이라 단지흥의 공격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단지흥이 내친 지풍은 그녀의 몸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아이 참, 일국의 황제가 이게 무슨 짓이에요? 점잖지 못하게!"
노파는 당황한 기색으로 외쳤다. 순간 단지홍은 흠칫하며 이미 내친 손가락의 방향을 급히 돌렸다. 그러자 지풍은 노파를 바싹 비켜 나가 기세 좋게 석벽을 때렸다. 순식간에 석벽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단지홍은 원래 노파에게 손을 내뻗칠 때 이 노파가 여자라는 것을 고려할 새도 없이 잽싸게 손을 썼었다. 오직 이 악귀를 단번에 쓰러뜨리려는 일념으로 곧바로 그녀의 젖무덤에 있는 유돌대혈(乳突大穴)을 향해 일양지 지풍을 내쳤던 것이다.
그때 돌연 여인이 나무라는 소리를 듣고 단지홍은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아무리 노파라도 여인임에는 틀림없는데 방비도 하지 않고 있는 여인의 가슴에 지풍을 내친다는 것은 남자로서 할 짓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더욱이 자기는 일국의 황제가 아닌가.
노파는 단지흥이 왜 자기를 죽일 좋은 기회를 이렇게 포기하는가 잠시 의아했으나 곧 그 영문을 깨닫자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자, 이젠 내 솜씨를 보시겠어요?"
노파는 말을 마치자마자 매섭게 장풍을 날렸다. 단지흥은 얼른 몸을 피했다. 노파의 무예 역시 매우 출중했다. 그 손이 얼마나 빠른지 여느 사람 같으면 채 서너 합도 못 되어 꼬꾸라지고 말 터였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노파는 여느 때 없이 애를 먹었다. 단지흥은 좌우 두 손을 다 쓰면서 일양지 지풍을 가로세로 정신없이 팍팍 내쳤다. 노파는 그때마다 살짝살짝 피했지만 그 지풍에 스치는 바람에 노파의 옷엔 벌써 구멍이 뺑뺑 뚫려 버렸다.
단지흥은 손을 쓰기 시작하면 몸에 감긴 독사들이 가만 안 있을거라는 우려도 없지 않았으나 이렇게 된 바에야 그깟 뱀이 무서워서 공격을 늦출 수도 없는 터였다. 일단 이를 악물고 싸우기 시작하니 뱀 같은 것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뿐더러 기이하게도 뱀들은 단지흥을 물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정신을 집중하여 일양지공을 내치고 또 내쳤다. 그럴수록 내력은 더욱 강해지고 한층 신묘해져서 노파마저도 감탄을 연발하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팍팍팍 연거푸 세 차례 지풍을 내쳤다. 노파는 그 순간 잠시 틈을 보였던지라 머리채에 그대로 지풍을 맞고 말았다. 그러자 틀어 올렸던 노파의 머리채는 삽시간에 풀려 흐느적거리며 미끄러져 내려 노파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아, 내 머리! 내 머리칼을 이렇게 망치는 법이 어딨어요?"
노파는 어린 소녀가 하는 양으로 울먹울먹하며 투정을 부렸다.
기이하게도 노파의 머리칼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흑발이었는데 그녀는 필시 그 머리를 대단히 소중히 여기는 모양이었다.
단지홍은 노파가 어찌하든 간에 코방귀만 뀌었다. 사대 시위를 죽인 원수인데 머리칼 아니라 머리를 통째로 날려 버려도 시원치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노파는 목숨 따위엔 관심도 없는 듯
아예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얼굴을 감싸쥔 채 엉엉 울며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이렇게 남을 업신여기며 약을 올리는 법이 어디 있어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죽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알아라!"
단지홍은 노기를 풀지 않고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개탄스럽기 그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리. 운남의 남만(南蠻) 동굴에서 수족 같은 사대 시위를 잃고 천룡사 고승들을 살릴 해독약을 얻기도 다 글렀으니……. 나 자신도 살아서 나갈 가망이 거의 없 다. 이제 더 볼 것이 무에 있는가. 이 노파를 죽여 다시는 죄업을 못 저 지르도록 목숨을 끊어 놔야겠다!'
"그 동안 지은 죄를 안다면 죽기를 아까워 말아라."
단지흥 엄하게 호통쳤다. 그러자 노파는 문득 울음을 그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눈물 고인 맑은 눈을 들어 되묻는 것이었다.
"내가 죄악이 많다니 무슨 말이에요? 난 선한 사람은 한 번도 죽인 적이 없어요."
"선한 사람은 죽인 적이 없다고? 내 시위 넷은 그래 누구 손에 죽었느냐?"
그러자 노파는 한껏 교태를 부리며 웃어젖혔다.
"그럼 그 넷이 내 손에 죽었단 말이에요? 죽었는지 살았는지 똑똑히 봤어요? 뱀에게 물렸다고 다 죽는다는 법이 어디 있나요? 물려도 죽는 사람이 있고 죽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내심 자기 시위 넷은 분명 죽었다고만 생각하고 있던 단지흥은 그 말에 일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노파 말대로 사대 시위가 살아 있다면 구태여 이 노파를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내 시위들은 죽었소. 난 그들이……."
단지흥은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시 바삐 노파를 제압해 두려고 번개같이 손을 뻗어 노파의 혈도를 찍었다. 노파는 꼼짝없이 그자리에 그대로 못박힌 듯 굳어져 버렸다. 긴 머리채가 얼굴을 뒤덮어 흡사 천년 묵은 요괴가 하나 서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머리카락 사이로 굴벽 석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노파는 악 비명을 내질렀다.
"이게 뭐예요, 이게? 나를 이렇게 능욕하려면 아예 날 죽여요, 죽여 버려."
노파는 속이 터져 눈물을 뚝뚝 떨구다가 고래고래 소리쳤다.
"얘들아, 그 네 녀석의 시체를 어서 이리 메고 오너라!"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숙녀동의 여인들이 사대 시위의 시체를 들것에 메고 들어왔다. 들것에 반들이 누운 넷에게선 숨소리 하나 들을 수가 없었다. 네 시위의 시체를 보자 단지홍은 가슴 미어지는 듯하여 금세 눈물이 고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 노파를 절대 살려 두지 않으리라.
그때 노파가 또 소리쳤다.
"이제 혈도를 풀어 줘요. 어서 풀어 달라는데!"
"풀어 달라구? 내 시위들을 환생시키기 전엔 절대로 풀어 줄 수 없다."
단지홍은 노기충천하여 인정 사정 없이 내쏘았다.
"이제부터 내 당신 말대로 하겠어요. 온 숙녀동의 여인들이 다 당신 시키는 대로 할 거예요. 내 몸을 달라고 하셔도 선뜻 바치겠으니 어서 날 풀어 줘요."
"네 몸? 말 같잖은 소리 집어치워! 내 너 같은 요귀를 없애 버리지 않고서는 이 한을 풀 길이 없다."
단지흥은 바드득 이를 갈았다.
노파는 영롱하게 까만 눈동자로 단지흥을 바라보았다. 애련한 눈빛이었다. 단지홍은 얼른 그 눈길을 피해 버렸다.
'이건 구미호다, 구미호! 사람들을 홀려 잡아먹는 구미호! 이런 구미호는 냉큼 죽여 버려야 세상 사람들이 마음놓고 살 수 있다!'
단지홍은 한걸음 한걸음 다가서면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애원해도 소용없다. 살려 뒀다간 아무 득도 없으니 넌 죽어야만 해! 단 네 사혈(死穴)을 찔러 편하게 죽게는 해 주지."
그리고는 그는 서서히 손가락 하나를 뻗쳐 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요란하게 굉음이 일었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노파도 보이지 않고 사대 시위의 시체도 눈앞에서 사라졌다. 오직 그 혼자 천길 지옥 속으로 떨어지듯 몸이 쑥 꺼지며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참이나 떨어져서야 비로소 발이 땅에 닿았다. 그는 영문을 몰라 허등지등 사위를 살폈다.
넓지도 않은 그곳은 돌벽이 빽빽하니 사방을 막고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함정이었다. 그의 몸을 감고 있던 독사들은 마치 무슨 신호라도 들었는지 다투어 그의 몸에서 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벽 밑으로 난 구멍을 향해 구불구불 기어가더니 모두 빠져나가 버렸다.
뱀들이 저절로 떨어져 나가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그는 한결 온몸이 거뜬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시금 사방 돌 벽에 눈길이 닿자 그는 새삼스레 절망감으로 치를 떨었다. 빽빽한 돌 벽엔 빠져 나갈 만한 틈이라고는 한치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들고 위를 쳐다보니 몇 십 길이나 되는지 아득한 꼭대기 위에 희미한 빛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내가 그만 그 요망한 노파의 간계에 빠져 이 나락에 떨어져 죽는 길밖에 도리가 없게 되었구나. 이젠 모든 걸 운명에 맡기고 이렇게 앉아 있는 수밖에 없다.'
그는 체념하듯 마음을 비우고 축축한 돌바닥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았다. 운공을 하여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누르며 그는 차츰 망아(忘我)의 경지로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불현듯 꼭대기 쪽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거기요, 이젠 노여움이 좀 사그라지셨나요? 할머님이 끼니를 갖다 드리래서 가져 왔는데 드시겠어요?"
단지흥은 아닌게 아니라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시장하던 참이라 먹을 것을 가져 왔다는 말에 군침이 꿀꺽 넘어갔다.
'여하튼 주는 밥이야 먹고 봐야지. 그런데 이거 빠져 나갈 길이 없으니 큰일이다. 나 하나 죽는 것쯤이야 아무 문제도 아니다. 내가 없으면 왕위는 동생이 이어받으면 되지만 천룡사 중들의 목숨은 어떻게 구한단 말인가. 천룡사가 망하면 대리국의 존망도 위태로운 지경에 빠진다.'
단지홍은 안달이 나서 크게 외쳤다.
"밥보다도 당신네 무당 할미를 보내시오. 할말이 있소."
그러자 꼭대기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뻔뻔스럽게 우리 할머님이 목욕하시는 걸 훔쳐 보았다면서요? 할머님은 지금 매우 노여워하고 계시니 할말이 있으면 저희들한테 해요. 전해 드릴 테니."
단지홍은 선뜻 대꾸를 않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도리를 말해서 들을 노파가 아니었다. 그런 바에야 구구이 사정할 필요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고 그렇게 손 놓고 멍청히 있을 수도 없는 터, 그는 속이 탔다.
"어쨌든 노파를 만나야겠소. 내가 직접 말해야 해!"
단지흥은 또 소리쳤다.
"그럼 올라와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 그런데 한 가지, 올라오려면 이 독약을 마셔야 돼요. 그래야 할머님을 만나게 해 주겠어요."
그리고는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에 자그마한 병을 하나 매달아 밑으로 내렸다. 받아 보니 작고도 깜찍하게 생긴 옥석으로 만든 약병으로 '빙청여아심갱심(氷淸女탔tl更深)'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
었다.
단지홍은 그 말뜻을 대번에 알아차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얼음장 같은 여인의 냉혹한 마음…….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독약을 내려보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단지흥은 다른 방법이 없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결연히 그 약병을 들어 단숨에 쭉 들이켰다.
그러자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던 계집애들이 웃으며 재잘댔다.
"할머님 말씀이 정말 맞는데. 저 사람이 꼭 마실 거라더니, 봐, 정말 마셨잖아!"
"별걸 갖고 다 호들갑이야. 할머님 예측이야 언제나 귀신 같지 않았니? 할머님이 마실 거라면 꼭 마시게 되는 거야."
"그것 참, 할머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그거지? 독약을 마시래도 마시고. 참 한심한 황제로군. 남이 죽으라면 죽는 그런 황제가 무슨 황제야."
"얘, 그런 말 말고 좀 내려다봐. 눈여겨보라구! 얼마나 잘생긴 황제님이시게. 세상에 없는 미남자지? 너 저 황제한테 시집 안 가련? 그러면 적어도 황비(皇妃)가 되는 거야, 황비! 황비가 되면 어떤지 아니? 여직껏 꿈도 못 꾸어 봤지? 한번 돼 보련, 응? 한 번 돼 봐!"
"얘 얘, 난 싫다. 너나 해라! 네가 황비로 나서겠다면야, 기왕에 죽을 거, 저 황제도 마다하지 않을걸. 그런데 저 황제가 이제 할머님 손에 덜컥 죽게 될 텐데 그러다 같이 순장을 당하면 어쩌 냐?"
"너 정말 그런 얄궂은 소리만 할 테야, 엉 ? 날더러 어서 죽으라고 제사를 드려라, 제사를! 고약한 계집애같으니라구!"
둘은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느라고 밑에서 독약을 마신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다. 단지흥은 급해서 소리쳤다.
"난 이미 독약을 다 마셨소! 빨리 나를 끌어올려 무당 할미를 만나게 해 줘야지 왜들 그러고만 있는 거요?"
여자들은 그제야 생각난 듯 화들짝 놀라며 밧줄에 큰 바구니 하나를 매어 흔들흔들 내려보냈다. 단지홍은 이미 기력이 다하여 기다시피 간신히 바구니에 올라앉았다. 여인들이 영차영차 바구니를 끌어올렸다.
단지흥이 마신 독약은 보통 독약이 아니었다. 단지흥은 운공을하여 그 독을 단전 한곳으로 모아 놓을 수는 있었으나 몸 밖으로 내뿜어 버릴 수는 없었다. 이 노파는 무슨 작정으로 이 독약을 내
려보낸 것일까.
처녀 둘은 단지흥을 올려 놓고는 또 실랑이를 했다.
"네가 안아라. 네 황제가 아니냐? 네가 안아 할머님한테 데려다줘."
"어머나, 왜 내가 안고 가? 누가 황비인데. 황비가 안고 가야지."
둘은 단지흥을 흘끗흘끗 곁눈질하며 얼굴이 도화색이 되어 속닥거렸다. 그러다 둘은 서로 힘을 도와 단지흥을 안아 들고 석굴 안의 넓은 방으로 데려갔다. 정교한 조각품이며, 도자기로 정갈하게 꾸며진 그 방에선 마치 중원 명문귀족의 규방(閨房)처럼 향내가 풍겼다. 이런 처녀의 규방 같은 곳으로 왜 자기를 데려온 것인지, 단지흥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어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파가 문발을 들치고 들어왔다. 그는 단지흥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함정 안이 어땠어요? 편하게 쉬었어요?"
단지흥은 화가 머리 끝까지 솟구쳤다.
'내 사대 시위를 죽인 것만으로도 성이 안 차 나까지 이렇게 능멸을 하다니…….'
단지흥의 얼굴에 노기가 서린 것을 보고 노파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할말이 있다고 했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어디 해 보세요."
단지흥은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아 선뜻 말을 못했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눈길이 노파의 목덜미에 닿았다. 백설같이 하얗고 보드라운 미인의 목이었다. 얼굴만 아니라면 천하에 이런 미인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징그럽게 웃고 있는 쪼글쪼글한 노파의 상판때기에 눈길이 미치자 그는 더한층 성이 나서 버럭 소리를 내 질렀다.
"난 대리국의 중차대한 국사를 다 제쳐놓고 여기 왔소. 사대 시위의 목숨보다도, 내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어 도움을 청하고자 이렇게 온 것이오."
단지흥의 말에 노파는 어째서인지 얼굴에 주름살이 다 펴지도록 환하게 웃었다.
"무슨 일인데요? 어서 말해 보세요."
"먼저 수고스럽지만 대리에 있는 내 동생 단지방(段智方)에게, 황제의 제위를 이으라 전해 주시오."
그러자 노파는 아주 실망한 기색으로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말이 있다 할말이 있다 하더니 고작 그게 다예요? 황제로 있으려니 성가신 일이 많아 그러는 모양인데 걱정 말아요, 내가 대신 처리해 줄 테니깐."
노파는 단지흥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또 말을 이었다.
"듣건대 황제들은 열에 아홉은 모두 탐욕스럽다는데 거기는 그래 일호백응(-呼百應)하는 황제 자리가 귀찮단 말이에요? 그럴 리야 없겠지요. 황제를 그만두겠다는 말은 진정이 아니지요? 내 말 만 들으면 독을 해독시켜 줄 테니 안심하고 돌아가 마음껏 황제의 낙을 누리세요. 그 무궁한 부귀영화를 왜 발로 차 버리겠다는 거예요? 내 말만 들으면 죽을 때까지 복락을 누리게 해 줄 텐데……. 어때요?"
단지흥은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우리 단씨 가문 사람들을 모르고 하는 말이오. 단씨 가문엔 지금까지 대대로 환위를 버리고 불가에 귀의한 분이 대여섯이나 되오. 남들은 황위를 다투느라 형제간에도 파를 흘리고 싸운다지만 우리 단씨 가문은 결코 그렇지 않소."
노파는 그 말엔 별다른 대꾸도 않고 난데없이 딴소리를 했다.
"그런데…… 황제의 궁전에도 희비는 있겠지요?"
"물론 있소. 희비를 아니 거느리는 황제가 어디 있소? 나도 황위에 오를 때 황비가 하나 있었소만……."
그러자 노파는 그의 말을 자르며 호들갑스럽게 웃어젖혔다.
"그래 어때요? 그 황비가 마음에 들어요? 그 황비를 사랑해요, 응?"
"제왕의 생활을 모르면 그런 말은 마시오."
"아니, 그렇다면 그 황비가 싫다는 건가요?"
노파는 눈에 띄게 반색을 하며 다그쳐 물었다. 단지흥은 괘씸하기 짝이 없어 언성을 높였다.
"어쩌자고 시시콜콜 요것조것 묻는 거요? 궁중의 일을 알아서 뭣 하려고!"
무당 할미는 아랑곳 않고 깔깔 웃었다.
"내 적당한 사람을 하나 골라다가 거기 대신으로 대리 황궁으로 보낼 셈 이거든요. 정말 거기처럼 꾸며서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게 이에요. 그러면 대리국은 내 손아귀에 있는 거나 진배없지 않아요? 호호호…… 자 뒤를 돌아봐요, 어떤가?"
단지홍은 그 말에 홱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자기 등뒤에 자기와 생김새가 똑같은 사람이 하나 서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