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쇄천일식(碎天一式)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아홉째가 죽었습니다."
"누가 감히 그를 죽일 수가 있느냐?"
"일곱째의 말로는 그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라니?"
"금마옥주!"
"으음...!"
"일곱째와 아홉째가 빙백마혼주를 손에 넣으려는 순간 그가 불쑥 나타나 그들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일곱째는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이홉째는 미처 몸을 빼지 못하고 그의 손에 쓰러진 것 같습니다."
"..."
"그가 나타났으니 계획을 부득이 변경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럴 필요는 없다. 그가 우리 뒤를 쫓으리라는 것은 처음부터 각오한 일이 아니냐?"
"그렇다면..."
"일은 예정대로 진행한다."
"여섯째에게는 뭐라고 알릴까요?"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가 위험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 금마옥주가 그를 죽이려고 했다면 벌써 손을 썼을 것이다. 허나 아직까지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아 그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요?"
"흐흐... 아마 그의 뒤를 밟아 우리들의 행방을 추적하려고 하는 것이겠지. 허나 그 일은 내게 다른 비책(秘策)이 있다. 그러니 여섯째에게는 아무 걱정없이 품검대회에서 우승하는 데만 신경 쓰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넷째와 여덟째, 열째를 불러라."
"무슨 일로 그들을 부르려고 하십니까?"
"흐흐... 내 예상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금마옥주는 아마 우리들을 찾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에게 단단히 무서운 맛을 보여줘야겠다."
"그들이 그를 당해낼 수 있을까요?"
"흐흐... 혼자라면 모르지만 셋이 합공한다면 아무리 금마옥주라도 쉽게 물리치지는 못할 것이다. 금마옥주가 그들을 뒤쫓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천검동을 찾으면 된다.
일단 천검동의 무공만 손에 넣고 나면 아무리 금마옥주라 해도 우리들을 당해내지는 못할 것이다."
"금마옥주만 쓰러지고 나면 우리들을 가로막을 자는 아무도 없겠지요."
"흐흐... 그렇다. 천하는 곧 우리들의 수중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크하하..."
"하하하..."
그날 저녁, 좌혼지는 형운비를 자신의 방으로 불렀다.
"오늘은 네게 본문의 검법 한 가지를 가르쳐 주겠다."
형운비는 입을 함지박만 하게 벌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좌혼지는 담담하게 웃었다.
"그렇다. 지금까지 너는 기대이상으로 잘 해주었다. 하지만 내일부터 격돌할 고수들은 네가 이제까지 싸웠던 자들과는 겻이 다르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백여 명의 고수들이 출전했단 품검대회도 이제 여덟 명 밖에는 남지 않았다.
허나 그들 여덟 명이야말로 당금무림의 최정상을 달리는 무서운 고수들이었다.
그들 중 형운비를 제외한 다른 일곱은 그야말로 혁혁한 명성을 구축하고 있는 절세의 인물들인 것이다.
그런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연환십절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래서 좌혼지는 형운비에게 다른 무공을 전수해줄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연환십절은 비록 효용가치가 높지만 어느 수준에 도달한 고수들에게는 잘 먹혀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내가 알려주려는 수법은 그와는 정 반대다. 사용하는 범위는 비록 제한되어 있지만 한번 펼치면 어느 누구도 쉽사리 빠져나갈 수 없다."
좌혼지의 말에 형운비는 가슴 설레는 표정이 되었다.
좌혼지는 온화하면서도 엄격함이 담겨 있는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본문의 무공은 내공과 검법을 위주로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우주육검(宇宙六劍)은 본문무공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지."
형운비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발했다.
"아, 그럼 오늘 제가 배우는 수법이 바로 우주육검인가요?"
좌혼지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우주육검은 천하무쌍(天下無雙)의 절세검학(絶世劍學)이다. 따라서 익히기도 그만큼 어렵지."
형운비의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찼다.
"에이... 그럼 언제나 그것을 익히게 될까요?"
"네가 인형하수오의 약효를 완전히 네 자신의 것으로 하면 우주육검을 익힐 수 있다. 그전에는 가르쳐 주어도 네 내공으로는 그것을 펼칠 수가 없지."
형운비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앞으로 적어도 이삼 년은 기다려야 되겠군요."
"하하...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오늘 전수해줄 무공은 비록 우주육검은 아니지만 그에 조금도 못지않는 무서운 수법이다. 네가 이것을 완벽하게 익히게 되면 천하의 누구도 너를 깔보지 못할 것이다."
형운비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아무래도 그는 나이가 어려 감정이 쉽게 변하곤 했다.
"그래요? 그 무공이 뭔데요?"
"그것은 쇄천일식(碎天一式)이라한다. 이 수법을 절정까지 연마하게 되면 말 그대로 단 일검(一劍)에 하늘을 부술 수가 있지."
"야! 괴장한 무공이군요."
좌혼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이 초식은 원래 우주육검을 익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보조수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우주육검은 너무도 심오하고 난해(亂解)한 무공이라 조사이신 천수자께서 우내육검보다 난해하지 않으면서 나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남겨놓으신 것이지. 엄밀히 따지자면 쇄천일식은 우주육검의 기수식(起手式)이라 할 수 있다."
"아!"
"네가 쇄천일식을 완벽하게 익힐수록 나중에 우주육검을 보다 쉽게 완성할 수 있다. 그러니 이것을 익히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형운비는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좌혼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쇄천일식의 원리(原理)는 변화를 무변(無變)으로 제압하고 쾌(快)를 지(止)로 억누르는데 있다. 너무도 강한 힘은 오히려 소리가 적고 너무나도 빠른 것은 오히려 느리게 보인다. 쇄천일식도 천하에서 가장 느리게 보이나 아무도 막을 수 없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지."
천하에서 가장 느리나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쇄천일식!
그것은 과연 어떠한 위력을 가지고 있는가?
"와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주위를 떠나가게 울려 퍼졌다.
마립은 그 함성을 등 뒤로 받으며 천천히 대 위로 올라갔다.
이미 한 사람이 비무대의 중앙에 서서 올라오는 그를 지켜보고서 있었다.
눈부신 백발... 매부리 코에 비정하리만치 얄팍한 입술...
그는 요근래 품검대회를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마검 유장령이었다.
추첨결과 팔강전(八强戰)의 첫 번째 대결은 고금제일의 쾌검수, 일검구주섬 마립과 신비의 백발청년, 마검 유장령이었던 것이다.
중인들이 열광해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금제일의 쾌검수!
다른 하나는 신비스럽게 나타나 가공할 신위를 떨치고 있는 공포의 고수!
두 사람의 대결은 누구도 승부를 점칠 수 없을만큼 치열한 격전이 예상되고 있었다.
허나 누가 이기던 그들의 무공이 이번 품검대회의 출전자들중 가장 강한 축에 속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선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두 사람은 무척 대조적이었다.
한쪽은 눈부신 백발을 펄럭이고 있는 청년이었고, 한쪽은 흰색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잿빛 옷을 걸친 중년인이었다.
허나 좀 더 가까이서 보면 두 사람이 몹시 비슷한 인상을 풍기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마립의 극도로 무심하고 냉정한 눈빛은 백발청년의 사악하고 잔인한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문득 생전 열릴 것 같지 않던 마립의 메마른 입술이 살짝 열리며 나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출도한 이래 이제까지 일검 이상을 펼쳐본 적이 없소."
백발청년은 두 눈을 사악하게 빛낸 채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마립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지금까지 모두 구종(九種) 백삼십 팔초(百三十八招)의 검법을 익혔소. 허나 그것을 펼쳐볼 상대를 만나지 못해 안타깝게 생각해왔소."
백발청년의 얄팍한 입술꼬리가 슬쩍 치켜올라가며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흐흐... 너는 앞으로도 그것을 펼쳐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마립은 그가 자신에게 대뜸 하대를 하자 눈빛이 삭막하게 변했다.
그는 두 손을 늘어뜨린 채 백발청년에게로 서서히 다가왔다.
"광오한 자로군."
백발청년은 뼈골이 시릴 정도로 잔인한 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조금씩 들어올렸다.
"흐흐...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마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순간,
파앗!
그의 허리춤에서 빛살같은 검광이 백발청년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 속도는 실로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너풀!
백발청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대신 잘려진 옷자락 하나만이 허공에 너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마립은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 사이에 가 있는가?
백발청년은 마립의 우측에서 오장 떨어진 곳에 선채 그를 노려보고 있지 않은가?
백발청년의 낯빛이 철갑을 씌운 듯 무표정해졌다.
"생각보다 빠르군. 허나 넌 죽는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마립을 향해 짓쳐오고 있었다.
치치치칙!
검을 뽑은 것 같지도 않았는데 끔찍한 음향과 함께 칙칙한 검광이 어둠처럼 밀려왔다.
마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슬쩍 어깨를 흔들며 왼쪽으로 날아갔다.
팟!
허나 어느새 그의 왼쪽 팔뚝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백발청년은 손에 기형의 검을 움켜쥔 채 숨 쉴 사이 없이 다시 덮쳐왔다.
츠츠츠...
악마의 호곡성 같은 소리가 터져 나오며 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정도로 끔찍한 검광이 마립의 몸을 휘감았다. 마립은 더 이상 피하지 못하고 일검을 발출했다.
쐐액!
어둠을 뚫고 뇌전(雷電)이 치듯 한 가닥 눈부신 섬광이 허공에 찬연히 피어올랐다.
허나 백발청년의 칙칙한 검기에 닿는 순간 섬광은 눈 녹듯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닌가?
치치치치치...
악마와 같은 검기는 마립의 쾌검을 간단히 돌파하고 그의 몸으로 짓쳐들었다.
마립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제 보니 이것은 사살검(死殺劍)...!"
마립은 안색이 시퍼렇게 변해 사력을 다해 십팔검(十八劍)을 격출했다.
콰콰쾅!
따땅!
그의 검이 칙칙한 검기에 닿는 순간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파편(破片)을 퉁겼다.
"크으!"
마립은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놀랍게도 고금제일의 쾌검수라는 그가 단 몇 수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패하고 만 것이다. 마립의 상반신은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막중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허나 마립은 고통도 느끼지 않는지 멍하니 백발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발청년은 여전히 기형의 장검을 손에 쥔 채 차가운 눈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 손에서 삼초를 버티다니 네가 당대제일(當代第一)의 쾌검수임을 인정하겠다."
마립의 눈은 경악과 공포로 찢어질 듯 부릅떠져 있었다.
"다... 당신은 혹시 검(劍)..."
그 순간,
"내가 누구인지 안다면 왜 죽어야 하는지도 알겠지?"
백발청년의 얄팍한 입술에서 인간의 음성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오며 그의 손에 들린 기혐검이 빛을 발했다.
츠측...!
끔찍한 검기가 피어오르며 마립의 몸을 그대로 휘감았다.
"크아악!"
마립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허리가 두 동강 난 채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저... 저럴 수가!"
"으... 저, 저자는 악마다!"
중인들은 이미 패한 상대조차 살려두지 않는 백발청년의 악독한 손속에 치를 떨었다.
허나 우내칠검의 일인이자 자타가 공인하는 고금제일의 쾌검수를 간단히 도륙한 그에게 누가 감히 욕을 퍼붓겠는가?
백발청년은 잔인한 빛이 일렁거리는 눈으로 잠시 피바다 속에 누워있는 마립의 시신을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대 아래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도 한동안 장내에는 죽음의 공포가 가득찬 침묵이 감돌았다. 우내칠검의 두 사람이 실로 어이없다 할 정도로 간단하게 백발청년의 손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런데도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홀연히 나타나 품검대회를 온통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는 백발청년!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마립의 시선이 곧 치워졌다.
이제 두 번 다시 그의 눈부신 쾌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쾌검수도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대 위가 정리되자 형운비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화경홍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 대전은 추혼검(追魂劍) 허력(許曆)대협과 형운비 소협이오!"
형운비는 그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좌혼지가 그를 불렀다.
"운비!"
형운비는 급히 그를 바라보았다.
"예, 사부님!"
"허력은 네가 일전에 겨루었던 신풍검 동방청이나 철온후 섭궁과는 달리 쾌속함을 장기로 삼고 있는 자다. 그러니 같이 그와 빠르기로 맞서서는 아무래도 네가 불리하다."
형운비는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지요?"
좌혼지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제 내가 말한 것을 잊었느냐? 쾌(快)의 극(極)은 지(止)에 있다. 네가 쇄천일식의 원리를 잘 이해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형운비는 알쏭달쏭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허나 좌혼지는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형운비는 아무래도 그가 더 이상의 언질을 주지 않을 것 같자 할 수 없이 그에게 머리를 숙이고는 비무대로 향했다.
좌혼지는 묵묵히 그가 대 위로 걸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의 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렸다.
"어린아이한테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게 아닌가? 허력은 비록 우내칠검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무서운 검객인데..."
좌혼지는 그 음성이 귀에 익음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곽지산이 곽소홍과 곽채릉을 데리고 그의 뒤에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좌혼지는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했다.
"곽노인이셨군요."
곽지산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가왔다.
"운비는 재질이 뛰어난 아이일세. 하지만 어쩐지 이번 대전은 승산이 희박한 것 같군. 허력은 그 아이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강한 인물이네."
좌혼지는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곽노인의 말씀이 옳습니다. 허력은 확실히 운비가 상대하기에는 벅차지요. 하지만 이번 대전은 운비가 승리할 것입니다."
곽지산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되었다.
"글쎄... 그럴 수 있을까?"
"허력은 익히 알려진대로 쾌검의 달인(達人)입니다. 허나 성질이 급하지요. 운비는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적으로 참을성이 강합니다. 말하자면 허력은 이번에 자신의 극성(極成)을 만난 셈이지요."
곽지산은 그래도 못 미더운지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한쪽에 서 있던 곽채릉이 불쑥 입을 열었다.
"좌공자의 말씀은 너무 포괄적이군요. 아무리 두 사람이 극성이라 할지라도 무공에 현격한 차이가 있으면 소용없는 게 아니겠어요?"
좌혼지는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허나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 웃음을 보자 곽채릉은 공연히 마음이 두근거렸다.
망사가 얼굴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의 두 뺨이 홍조로 물든 것이 송두리째 드러날 뻔 했다.
그녀는 이때 입을 열었다가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려나올까 봐 입을 꼬옥 다물었다.
마침 때맞춰 곽지산이 말했다.
"어쨌든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벌써 격전이 시작되었군."
그 말에 중인들은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과연 대 위에서는 이미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다.
파파파파!
허력은 추혼검이란 외호답게 눈부신 속도로 검을 펼쳐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던지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끝없이 밀려드는 검의 물결뿐이었다.
형운비는 안색이 바짝 긴장된 채 연거푸 연환십정의 초식을 펼쳐 수비에 급급했다.
허나 그가 한 초식을 펼쳐낼 때 허력은 세초식, 네초식을 뿌려내고 있었다.
더구나 그가 공격하는 부위가 하나같이 치명적인 곳인지라 형운비는 감히 반격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연신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그의 패배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눈 깜박할 사이에 형운비는 비무대의 가장자리까지 밀려났다.
형운비의 두 눈에서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좋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동시에 지금까지 수비에 치중하던 그의 검이 매서운 변화를 일으키며 허력의 전신을 핍박해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팔방풍우의 초식이었다.
허력의 차가운 입가에 싸늘한 조소가 떠올랐다.
(감히 팔방풍우따위로 나의 추혼십팔검(追魂十八劍)을 막으려 하다니...)
그는 이번 기회에 결판을 내리라 작정하고 더욱 재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쐐애액...!
마치 부챗살 같은 검광이 퍼지며 형운비의 가슴팍을 압박해왔다.
형운비는 팔방풍우의 초식을 급히 거두며 장검을 중단(中段)으로 그어댔다.
슈슈슉!
예리한 바람소리와 함께 한가닥 매서운 검광이 부챗살 같은 추혼검광을 뚫고 허력의 목덜미로 쏘아져갔다.
"역벽화산(力劈華山)이로군..."
허력은 냉랭하게 중얼거리며 허리를 뒤틀면서 형운비의 검을 피함과 동시에 팔검(八劍)을 발출해냈다. 추혼십검 중에서도 절초인 팔비추혼(八臂追魂)이었다.
형운비의 전신이 여덟 개의 검광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파ㅍ파...!
형운비는 자신의 몸이 차가운 빙굴 속에 빠지는 듯한 싸늘함을 느끼고 전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뉘였다.
찌익!
그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길게 찢어지며 검은 피부에 엷은 혈흔(血痕)이 내비쳤다.
형운비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급히 허리를 비틀며 개창망월과 풍소낙엽의 두 초식을 연거푸 전개했다.
두 초식은 모두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었지만 동시에 펼쳐지니 서로의 미비점을 보완하여 전혀 뜻밖의 날카로운 위력이 있었다.
허력은 형운비가 팔비추혼의 초식에도 쓰러지지 않고 오히려 매서운 반격을 해오자 흠칫 놀랐다. 그는 감히 경시할 수 없어 슬쩍 뒤로 한걸음 물러서며 혈전추혼(血電追魂)을 떨쳐냈다.
차차창!
귓청이 떨어지는 듯한 쇳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이십여 차례나 격돌했다.
"으음...!"
형운비의 몸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왼쪽 어깨에는 다시 이검(二劍)을 격중 당해 가는 핏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허나 허력 또한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그의 머리에 매고 있던 두건이 잘려지며 머리카락이 한줌이나 베어져 허공에 나부끼고 있었다.
허력은 낯빛이 조금 창백하게 변했다.
조금 전에 하마터면 그는 머리를 다칠 뻔했다.
겨우 십오 세의 소년에게 낭패를 당할 뻔한 것을 생각하자 그는 가슴이 섬칫해왔다.
그는 이빨을 질끈 깨물며 비호처럼 덤벼들었다.
파파파파...!
주위 사방이 그의 질풍노도같은 검세 속에 빠져들었다.
이번에 그는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서 추혼십팔검중 가장 무서운 십지추혼(十地追魂)을 전개한 것이다. 그의 이 한 수는 우내칠검의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절세의 위력이 있었다.
순식간에 형운비의 전신은 허력의 검세에 송두리째 휘말려 들었다.
허나 형운비의 눈빛은 오히려 침착해졌다.
(무변으로 변화를 제압하고 지(止)로써 쾌를 누른다...)
그의 장검이 서서히 들려졌다.
형운비는 마치 검이 천근만근의 무게인 것처럼 힘겹게 검을 들고 느릿느릿 앞으로 찔러갔다. 그 동작은 무거운 돌을 지고 앞으로 간신히 움직이는 듯 느리기 그지없었다.
허나 그 순간 허력은 자신이 거대한 절벽에 갇혀버린 듯한 착각에 빠졌다.
우우우우...
형운비의 검이 보는 사람이 애가 탈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전진함에 따라 어디선가 뇌성이 치는 듯한 은은한 우렛소리가 들려왔다.
허력은 끝없는 검의 파도가 자신을 휘몰아쳐오는 듯한 나락에 빠졌다.
찰나,
콰콰쾅!
벽력같은 폭음이 터지며 그토록 무시무시하게 몰아쳐오던 허력의 십지추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그의 몸이 비무대 끝까지 주르르 밀려났다.
"크윽!"
중인들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뜬 채 비무대 위를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허력은 가슴팍 옷자락이 누더기처럼 갈가리 찢겨진 채 낭패한 몰골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는 크고 작은 검상(劍傷)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었다.
수중에 들린 장검 또한 산산이 부서져 검자루만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전면을 바라보았다.
"이... 이럴 수가..."
형운비는 그의 앞에 검을 꼬나쥔 채 우뚝 서 있었다.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조금도 초라하거나 볼품없어 보이지가 않았다. 그의 검은 얼굴마저 천상의 금동(金童)인양 준수해 보이는 것이었다.
한순간 장내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 최고다!"
"뚱뚱보 잘한다. 흑풍검이 추혼검마저 꺾었구나!"
그 벼락같은 환호를 들으며 형운비는 가슴 설렌 표정이 되어다.
추혼검 허력은 수십 년간 강호에서 누구도 넘을 수 없는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 일대의 검객이었다. 헌데 무공에 입문(入門)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이 그를 격파했다는 것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형운비는 격동과 흥분에 휩싸인 채 검은 얼굴을 붉게 상기시키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이번에 펼친 것은 물론 쇄천일식이었다.
허나 그는 어젯밤에 간신히 배웠기 때문에 그 경지가 아직 채 오성(五成)도 되지 못했다. 그런데도 당금 무림의 최절정고수인 허력을 격파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쇄천일식의 진정한 위력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그리고 그 쇄천일식조차 기수식에 불과하다는 우주육검은 또 얼마나 가공스러운 것일까?
"정말 잘했다."
형운비가 좌혼지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을 때 곽지산이 제일 먼저 다가와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형운비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고개를 수그렸다.
"곽대협께서도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하하...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군. 얼마전만해도 일차관문조차 통과하지 못해 쩔쩔매던 소년이 뭇 고수들을 물리치고 사강전(四强戰)까지 진출하다니..."
형운비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쪽에서 웃고 서 있는 좌혼지를 돌아보았다.
"모두 사부님께서 돌봐주신 덕분입니다."
곽지산은 껄껄 웃었다.
"허허... 사부를 잘 만나는 것도 커다란 복이지. 허나 본인의 노력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사부를 만나도 소용이 없다."
형운비가 무어라고 대꾸하려 할 때 좌혼지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하하... 곽노인의 말씀이 옳다. 이제 강호제일의 여고수(女高手)의 솜씨를 구경하자꾸나."
그 말에 형운비는 퍼뜩 정신이 들어 비무대를 올려보았다.
어느새 대 위에는 두 사람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손에 희고 붉은 단검을 들고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며 공격을 하고 있는 인영은 다름아닌 철봉황 곽채릉이었다. 그녀의 상대는 무당(武當)의 제일고수인 태청도장이었다.
허나, 그녀의 신법과 검술이 얼마나 정교하던지 무당의 후기지수 중 제일인자라는 태청도장은 방어에만 급급할 뿐 감히 반격할 염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파파파파...
그녀의 백옥같은 쌍수가 움직이며 설형쌍검이 두 마리의 뱀처럼 영묘(靈妙)하게 태청도장의 옆구리를 노리고 짓쳐들었다.
그녀의 이 수법은 은우비화(銀雨飛花)라는 초식으로, 날카로우면서도 현묘한 점에서 가히 뛰어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태청도장은 허겁지겁 옆으로 몸을 피하며 구궁검법(九宮劍法)중의 구궁변의(九宮便意)를 펼쳐냈다.
허나, 그의 검이 채 반도 뻗어나기 전에 그녀의 쌍검이 기이한 호곡선을 그리며 그의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스으으...
마치 나비가 허공을 날아오듯 절묘한 각도를 이루고 있었다.
바로 기봉등교(奇鳳騰交)의 절초였다.
태청도장은 안색이 창백해지며 급히 몸을 뒤로 뺐다.
허나,
쩌억!
이마로 날아드는 설검(雪劍)은 피했으나 미처 가슴팍을 노리고 쏘아져 온 혈검(血劍)을 피하지 못하고 옷자락이 길게 찢기고 말았다.
곽채릉은 단 오초만에 그의 옷을 찢고는 손을 멈추었다.
"도장께서 반대하시지만 않는다면 우리들의 대결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군요."
태청도장의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당당한 사내대장부의 몸으로 한낱 여인의 손에 수모를 당하다니 어찌 치욕을 느끼지 않겠는가?
허나, 그는 명문정파의 제자답게 곧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곽여협께서 손에 사정을 두신 점에 감사드리오. 빈도는 곽여협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겠소."
말을 마치자 그는 서슴없이 몸을 돌려 대 아래로 사라졌다.
그의 이 깨끗한 행동에 중인들은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와아...!"
곽채릉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군웅들의 환호를 받으며 대를 내려왔다.
이제 사강전의 진출자중 세 명이 가리어졌다.
오직 한 명만이 남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