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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이 떠난 빈곳을 채우다
슬라브족의 틈새공략
집이든 건물이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쉽게 허물어지게 마련이다. 마당은 잡풀들로부터 금세 점령당하고, 밀림처럼 변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천장은 물론이고 집안 곳곳에 거미가 줄을 치고, 바닥에 먼지가 쌓이면서 좀먹기 시작한다. 기둥은 곰팡이가 슬면서 스스로 생명을 다하는, 마치 서서히 자살을 선택하는 듯하다. 세찬 바람과 폭우에 오롯이 노출되었을 때 무방비로 당하는, 사람이 떠나고 없는 텅 빈 폐가를 상상해보면 금방 그림이 떠오른다. 버려진 흉가는 상상만 해도 을씨년스럽게 짝이 없다. 사람의 손길이 그만큼 중요하단 뜻이다. 어루만지고, 쓸고 닦으면서 인간이 품어내는 생명의 기운이 온기로 전해지면 집은 숨을 쉬는 공간으로 변한다. 마치 식물에게 햇살을 쬐여주고, 바람도 맞게 하면서 애정을 가지고 말을 걸어주면, 꽃이나 이파리가 더 화사하고 싱싱하게 빛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슬라브족의 태생적 원류
민족의 대이동을 공부하면서 숨 가쁘게 달려온 듯해 살짝 빗나간 예를 들었다. 이제 슬라브족 그들의 태생적 원류가 어디인지, 그들이 터전을 버리고 발칸반도에 자리 잡게 된 원인은 무엇인지 공부해보기로 하자. 원시 슬라브족의 발원지와 관련해서는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유력한 학설은 서부 시베리아로부터 현재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에 걸친 카르타피아산맥을 비롯해 독일과 폴란드를 흐르는 오데르강과 체코와 독일을 흐르는 엘바강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걸쳐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의 이동은 아리아인들과 무관하지 않는데, 아리아인들은 아무다리야강 유역에서 무려 3천 년 가까이 살아가던 민족이었다. 그러나 어떤 연유에서든(동쪽 시르다리야강 유역에 살던 우랄알타이어계 종족들의 침략, 혹은 날씨의 변화 등 자연재해가 유력하지만) 이들의 이동은 기원전 1500년경부터 시작된다. 인도지방으로 이동했던 일련의 아리아인들이 인도아리아인이 되었으며, 남쪽으로 이동한 몇몇 무리가 이란인이 되었는데, 훗날(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동유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이 원시슬라브족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들이 이동한 경로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아무다리야강 상류와 인더스강 중류지역 인접)과 파키스탄 국경 카이버 고원(Khyber Pass)라고 추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연에서든 그곳에 남아 생존을 이어간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꾸준하게 자연과 맞서면서, 혹은 순종하거나, 살아남기 위해 우랄알타이 종족과 동화되면서 살았다. 그중 일부는 따뜻한 기후를 찾아 소규모로 이동을 감행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남아 있던 원시 슬라브족의 결정적 이동이 일어난다. 기원전 500년경 고대 이란땅(이미 기원전 1500년 전에 이동한 아리아인의 핏줄이 어느 정도 섞인 민족이라고 추정되지만)에서 살아가던 스키타이족의 침략을 피해 도망치면서 발트해와 엘베강 연안에 정착하면서 이미 수세기 이전에 이동해 살았던 후예들과 섞여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세계는 이즈음에서 농경의 발달로 정착 정주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리스, 중국, 인도 등지에서 문명권이 탄생된다.
민족의 구분에 있어서 언어도 중요 분석군에 속한다. 아리아인의 언어가 이란어와 산스크리트어, 슬라브어 모두 사템어(Satem)로 분류된다고 한다. 필자가 찾아본 자료에 의하면 신라 최초의 나라이름 서라벌徐羅伐 역시 슬라브족이 한반도로 이주한 흔적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하긴 알렉산드로스가 신라인이라고 입에 거품을 무는 이도 있지만) 이들의 주장대로 슬라브인들은 민족이동 이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등 이주지에 남긴 이름에서 보듯 서라벌이란 이름을 대입해도 어색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는 그야말로 단순한 우연일까? 발칸반도가 유독 관심이 가는 까닭은 보이지 않는 어떤 연결고리 같은 것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마치 마틸트 아센시가 말한 “어떤 신비로운 운명이 우리의 계획과는 무관하게 운명의 실을 잣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발칸반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도 이 운명의 연장으로 보고 싶은 애틋한 마음에서다.
참고로 현재 아리아인이 살았던 아무다리야강 유역에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과 전통 등 서양적인 색채를 띠고 있으며, 시르다리야강 유역에는 동양적 색채가 강한 사람들이 살고 있단다.
빈 틈을 헤집고 들어온 슬라브족
앞선 장에서 보듯 4세기에 들어와 동쪽에서 미친 듯 밀려오는 훈족의 침략에 여러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낳았다. 슬라브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발칸반도의 민족구성에 핵심을 자랑하는 슬라브족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흉노의 서진으로 어쩔 수 없이 이동을 택해야만 했던 게르만족 보다 동쪽(혹은 북동쪽)에서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중서슬라브족은 자신들이 살아가던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에서 폴란드와 체코, 슬로바키아로 이주해 현재 그곳의 민족뿌리를 구성한다. 그리고 아바르족을 피해, 혹은 이들과 함께 발칸반도로 이주한 남슬라브족이 갈라져 지금의 불가리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핵심 민족구성원이 된다.
정리하자면, 4세기부터 훈족을 피해 도망치면서 얼떨결에 로마 영토에 진입한 게르만족의 이동은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처럼 조상들이 살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엑소더스가 일어나지 않은 한 그들이 살고 있던 영토는 텅 빈 상태로 남게 된다. 이 공간을 슬라브족이 메우면서 세력을 확대해가기 시작했다. 슬라브족은 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유럽에 모습을 나타내며 실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엘바강 건너 중부유럽까지 슬라브족이 곳곳에 포진하게 된다. 이들의 등장은 비잔티움제국의 입장에서 게르만족과 더불어 무척 위협적인 존재였다.
서기 476년 서쪽 로마가 망한 뒤에는 게르만족이 중부와 서부유럽에 고만고만한 세력으로 갈라져 치고 박는 사이에 슬라브족은 비잔티움을 공격하는 무시할 수 없는 나라로 거듭났다. 그 중에서 특히 대불가리아주의를 탄생케 한 불가리아왕국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러던 중 6세기 중엽이 되면서 비잔티움의 걸출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등장해 동서로마를 장악하고 로마를 통일하자 게르만족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이게 된다. 이때를 틈타 용감한 슬라브족들이 도나우강을 건너 남으로 남으로 이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자 기다렸다는 듯 지금의 조지아 동부, 아제르바이잔 북쪽과 카스피해 서쪽 연안, 그리고 다게스탄의 험준한 산악지역에 분포해 살아가던 아바르족이 비잔티움제국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비잔티움제국은 시시때때 공격해오는 이들을 맞아 만신창이가 되도록 항전을 이어가면서 이민족들로부터 서유럽의 튼튼한 방어막의 역할(물론 의도하진 않았으나)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비잔티움은 힘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바르족의 용감무쌍한 기상은 비잔티움제국은 물론, 유럽 서부의 프랑크제국을 넘보고 있었으며, 오늘날 헝가리를 비롯해 발칸반도 전역, 이탈리아 해안가와 소아시아의 일부지역까지 호령하고 있었다. 이때 아바르족의 침탈로 달마티아지역에 남아 있던 초기가톨릭 문화들이 거의 파괴되거나 불타버려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된다. 침략에는 반드시 약탈이 뒤따라야 존재하는 까닭이다.
슬라브족은 당대의 강자 아바르족과 군사동맹을 맺고(군신관계든 형제관계든 조공을 바치면서까지) 발칸반도에 본격적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서기 650년경 슬라브인들이 발칸반도 대부분을 정복하기에 이른다. 그 여세를 몰아 발칸반도에서 살아가던 원주민들을 산악지방으로 내몰아내면서 발칸반도의 맹주를 자처했다. 이로 인해 8세기에 들어서면 발칸반도는 오롯이 슬라브족이 차지하게 된다.
8세기에 시작된 유럽 북부지방의 노르만족의 대이동은 또 한 번 발칸반도를 비롯해 유럽을 요동치게 했다. 이들이 어느 순간 한꺼번에 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바이킹이라는 어원을 지닌 이들은 유럽 전역으로 나누어 골고루 퍼졌다. 그리고 이탈리아 남부에 나폴리 왕국을,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공국을, 더 나아가 영국의 노르만 왕조를 세운 이들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정복하고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베리아반도 끄트머리 지브롤터해협을 통과해 지중해로 들어가는 긴긴 항해를 이어간 무리는 시칠리아왕국과 나폴리왕국을 세운다. 특히 동쪽으로 이동한 무리는 노브고로드 공국과 더불어 러시아의 전신인 키에프 공국을 건설하자, 이전에 이곳에서 살던 슬라브족 일부가 발칸반도로 내려오면서 그리스와 알바니아, 루마니아 등 몇 나라만 제외하면 발칸반도는 슬라브족의 땅으로 변하는 데 일조했다.
9세기에는 훈족의 후예라 일컫는 마자르족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자 반대로 아바르족의 위축을 가져온다. 10세기 초가 되면서 슬라브족 불가리아가 또 한 번 요동친다. 용감무쌍했던 아바르족은 점차 이들 마자르족과 흡수 되어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고, 이때 헝가리의 국가기원인 마자르족은 기세를 몰아 동프랑크를 침략하면서 세력을 키운다. 더구나 발칸반도의 불가리아 스스로 제국을 칭하면서 비잔티움을 위협하고 비잔티움제국 땅 일부를 먹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1세기 초 비잔티움의 바실리우스 2세에게 달려들다 결국 호되게 당한 후 망국의 지름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이후 스스로 제국이라 칭했던 불가리아 땅은 비잔티움의 영토로 변했으나, 1300년대가 되면서 세르비아의 영원한 영웅으로 등극한 스테판 두산에 의해 세르비아 땅이 되어버린다.
발칸반도에 폭력의 씨를 뿌리다
동서로마 분리는 제국내의 문제였지만, 그 여파는 외부세력을 불러들이는 것은 물론 먼 훗날 폭력의 경계선이 된다. 일등공신은 발칸반도 달마티아지방 출신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정치체제로부터 시작되지만, 그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비잔티움으로의 수도 천도는(의도하지 않았던 관계로 직접적인 잘못이 없지만) 결정타였다. 그리고 마지막 굳히기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으면서까지 유언으로 남긴 동서로마 분리통치가 그것이었다. 물론 20세기 가장 더러운 폭력의 원인제공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억울한 케이스들이다.
어쨌거나 비잔티움이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이민족들이 권력이 옮겨간 후 공백상태인 로마와 발칸반도를 넘보기 시작했다. 정치 군사적으로 이민족 침입의 전성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서기 395년에는 비시고트족이 발칸반도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의 코소보 땅에 훈족이 들어왔고, 서기 461년에는 오스트로고트족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들은 발칸반도에 온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역사에서 이름 한 줄만 남긴 채 퇴장했다.
그 뒤를 이어 발칸의 새로운 정복자 슬라브족이 등장한다. 물론 일순간에 밀려든 것이 아니지만, 이들의 이동은 폭력이 동반된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빈틈을 헤집고 찾아든 매우 순진한 예다. 그리고 일부는 토착세력과 동화되거나 아니면 손을 잡으면서 생존을 이어갔다. 그러다 세력이 확대되면서 6세기에 들어서 토착화된 민족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발칸반도에 살아가는 슬라브족 당시의 조상들은 지금처럼 나누어 적대시하거나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 슬라브인으로 통칭된 이들이 발칸반도에 정착하면서 자신들만의 삶을 이어갔을 뿐이다. 다만 중부유럽으로 이동한 슬라브족과 달리 발칸반도는 산악지대인 까닭에 지역 간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는 않았다. 고립무원은 독자적인 문화와 부족형성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세대가 등장하면서 이전의 교류와 문화의 속성인 전파가 거의 차단되고 만다. 이는 언어는 물론, 관습과 정치조직에까지 확대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남슬라브민족은 세르비아족, 불가리아족, 크로아티아족, 슬로베니아족 등 크게는 4개 종족으로 구분되었다.
슬라브족 역시 태어날 때부터 동방정교를 믿은 것은 당연히 아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자연신, 즉 태양신과 대지의 신, 천둥과 번개로부터 두려움, 숲이라는 어둡고 막막한 미지의 공간은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령의 신과 숲, 물 등을 숭상하는 토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이 발칸반도로 내려와 정착하기까지 그들의 신앙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고대 로마처럼 집집이 신전을 두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처럼 마을 가까운 곳에 신당과 같은 기도처는 있었을 법하다. 결국 이들이 지리적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동방정교권에 흡수된다.
863년에 발칸반도에 살아가는 슬라브민족에게 종교에 일대 혁신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비잔티움황제 미카일 3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포교를 위해 지금의 슬로바키아 땅의 신생 모라비아왕국에 포교단을 파견했다. 당대 가장 뛰어난 문법학자였던 키릴형제와 행정과 정치, 외교에 능했던 메소디우스형제, 그리고 그를 따르는 무리(제자)들에게 포교와 행정체제수립을 막중한 책임이 주어졌다. 이들 포교단은 자신들이 개발한 슬라브 문자와 말을 기초로 하여 마테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등 4대 복음서를 만들어 모라비아왕국에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도 내부의 자중지란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894년 모라비아왕국 내란과 가톨릭교권의 동프랑크왕국의 시비와 견제는 뜻대로 굴러가게 놔두지 않았다. 더구나 907년의 마자르족의 침략은 왕국의 멸망을 초래하면서 이들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발칸반도로 도망친 이들 제자들이 비잔티움제국과 각을 세우며 성장을 거듭하던 불가리아 제1제국의 보호아래 오늘날 마케도니아에 교회를 세우고 남슬라브민족을 대상으로 키릴문자(처음에는 슬라브 문자)와 성경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것이 밀알이 되어 동방정교는 지금처럼 발칸의 여러 나라와 멀리는 러시아의 정신적 고향인 키예프공국과 우크라이나까지 전파되면서 동방정교가 깊게 뿌리내리게 된다.
훗날 폭력의 단초는 동서로마 교회간의 갈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로마교회와 콘스탄티노플교회 간의 주도권싸움은 6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저울추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서기 800년 게르만 이민족의 대거 유입으로 가톨릭교권이 절실했던 서로마 교황 레오 3세가 당시 서유럽을 장악했던 프랑크왕국의 샤를마뉴(742~814) 머리에 로마황제의 관을 씌어주면서 로마 교회의 세속적 지원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주도하에 로마 가톨릭과 비잔티움제국이 이끄는 정교세력이 양분되면서 동서로마는 물론 동서유럽은 교세확장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세력의 충돌은 슬라브족이라는 단합된 원주민 공동체가 급격하게 해체되는 계기가 된다. 지리적 정치적으로 프랑크왕국에 소속되어 있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은 9세기를 거치면서 당연하게도 동방정교에서 로마가톨릭으로 개종이 일어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한폭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엄준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교류의 단절을 가져오면서 느슨한 종교, 즉 정교와 가톨릭의 접경지에 위치해 교회갈등에 오롯이 노출되면서 ‘보스니아교회’라는 양대 교회의 특징만 요약해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양대 교회에 모두에게 이단으로 치부되면서 훗날 오스만트루크제국의 발칸 침략으로 이슬람으로의 개종이 늘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발칸반도에 살아가기 시작한 슬라브민족은 당연하게도 그곳의 문화와 역사에 지배를 받았다는 것은 순진한 표현이지만, 이때 종교가 서로 갈라지고, 삶의 가치가 욕망의 화신에 의해 부추김 당하면서 합스부르크왕가의 서북지역 슬라브인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로 나뉘고, 동쪽 발칸반도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을 세르비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물론 세르비아사람, 크로아티아인으로 부르게 된 것은 제국의 욕망이 겹치면서 우리도 제국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망령이 부추긴 광기의 잔재가 틀림없다.
유고란 말도 세르비아어로 ‘남쪽’이란 뜻이며,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남쪽슬라브인’들의 국가란 뜻이다. 이들이 20세기 말 제국의 망령이나, 일부 광기에 휩싸인 잘못된 지도자를 선택함으로써 파시스트를 가장 혐오하면서도 기꺼이 파시스트의 전사로 거듭나기를 주저하지 않은 인간들의 원초적 폭력성을 낱낱이 드러내고야 만다. 피정복민끼리, 그것도 같은 말을 사용하며, 표기방식만 약간 다를 뿐인 같은 문자를 쓰는 저들끼리 저지르는 일어난 폭력의 이유는 딱 하나다. 나를 넘어 우리가 힘의 중심에 서려는 매우 황량하고도 가난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18세기 말까지 발칸반도에는 민족주의라고 할 만한 건더기 혹은 민족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폭력의 주역, 가장 문제가 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와의 사이 양 민족 간 정보교환과 교류라고 해봐야 우리나라 보부상 수준일 뿐이었다. 그런데 일부 지식인을 자처하는 민족주의자들이 의기 넘치는 학생들을 부추겨 민족의 위상을 앞세운 폭력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렀다. 쥐꼬리만 한 역사를 가진 비루하고도 가난한 역사를 가지고 만족사란 이름으로 역사서가 발간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의분이 가슴에 요동치면서 자발적 살육자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민족이동을 마치며
민족이동은 평화스러운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약탈과 폭력을 동반한다. 그와 더불어 새로운 땅에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을 재촉하고 통치기반을 위해 하나의 구심점이 될 종교와 문화 언어까지도 제도 속에 포함시킨다. 당연하게도 토착종교가 이민족의 정신세계와 융합하면서 새롭게 각색되는가 하면, 철학과 인간 보편적 가치를 이루는 생활윤리(생활방식에 따른 사회적합의?)나 통치제도가 나타난다. 단언컨대 통치제도는 통치자를 위한 것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국가에도 질서와 통제를 위한 세력은 어떻게든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당시의 제도란 폭력을 동반한 빈부의 격차와 부와 권력의 확대에 따른 찌꺼기가 굳은 피딱지의 잔재일 것이다.
스스로 선진문명인들이 살아가는 서구유럽이라는 개념 역시 이 과정을 거치며 생겨났다.(기실 폭력의 역사만 두고 보았을 때 문명보다 야만에 가깝지만) 앞서 보았듯이 일찍이 유럽이라 하는 지역 개념은 아시아라는 타자화를 만들면서, 유럽과의 대비를 통해서 형성되었으며, 그 기조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결과적인 면에서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유럽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개념에 입각하여 그 안의 많은 다양성을 은폐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유럽 내에도 다양한 갈등의 씨앗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서유럽으로 일컫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다. 라틴적인 남부, 게르만적인 북서부, 노르만적인 북유럽, 이베리아의 지중해,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유럽, 유럽 내 늘 이방인으로 취급되는 유대인 등 다양성을 용해하고 포용하는 자세가 가장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러시아와 터키 등 비유럽적인 요소를 내포한 국가들과의 융화되고 풀어야할 과제도 안고 있다.
첫댓글 지도 없이 머리 속으로 민족 이동을 따라가자니 제법 피곤하구마... ㅋㅋㅋ
나도 헷갈려서 다시 읽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아 정리했는데 여전히 부족하네...^^*.. 피곤해 말고 그냥 대충 상상만 해. 그따위 땅이 있었으려니 하면서... 내 친구놈 말처럼 알아서 뭐하려고?
저는 그냥 박참봉님이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것 저것 막 줏어삼키다 보니 저도 헷갈립니다^^*..
늘~ 고맙습니다. 용기를 주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