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리에는 공병대대 정비대대 보충대가 있고,
사건이 있기전에는 보충대 옆에 화학지원대가 있었죠.
직할대 일직사령들이 특히 정비대대 보충대 일직사령들이
부대 울타리내로 연해서 부대 취침후 순번을 정해 순찰을 하는데..
근무를 서면서 순찰돌때 항상 화학지원대 터를 지나갔었죠.
그때는 화학지원대 터였는지도 몰랐지만.
특히 새벽이나 저녁에 지나갈때 그쪽에서 느껴지는 한기는
지금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무서웠습니다.
낮에 지나가도 무서운 느낌이 들었던 곳입니다.
그믐날 비오는 창고지역을 밤에 혼자 지나갈때
느끼는 그런 느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름이 돋는 이상한 곳이었습니다.
돈사와 담을 두고 길게 큰 소나무가 몇그루 심어져 있지만
거의 벌판과 같은 곳이고 무서울 것도 없는 곳이지만 이상하게
그곳이 싫었죠. 그옆에 있는 직할대 병공통 교장 입구 건너편이
화학지원대 자리였죠.
97년 사단 사령부로 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근무할 때
군수사령부에 있는 병과 선배 소령과
업무를 겸해서 동두천에서 술을 먹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선배 하는 말이 " 아직도 화학대 그자리에 있냐?"
화학대는 제가 있을 당시 사단사령부 옆쪽에 있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몰라서 "화학대라니요? 계속 사단사령부 옆에 있었는데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제가 다시 되물었더니 그때 그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해주더군요.
겨울이 끝나갈 무렵있었고,
토요일 선배가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답니다.
그날 새벽 총성이 연달아 울렸고......
지휘계통으로 선배는 보고를 하고
총성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고 하더군요.
우리대대와 화학대는 같은 울타리내에 있고
불과 2~300미터정도 떨어져 있는 곳 입니다.
울타리 하나에 연병장 두곳으로 나눠서 쓰고 있었으니까.
바로 도착할 수 있었고,
사건이 진행될 때부터 거의 끝날때까지 현장에 있었다고 하면서
가장 끔찍한 날이었다고 하더군요.
병사가 근무를 서다가 당직하사가 있는 당직실로 들어왔고,
당직하사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책상위에 있었던
키로 당직실 탄약통 키를 열고 통채로 탄통을 들고
내무실로 향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병사가 사고를 저지르고 바로 도망가지 않고,
타격대 병력들과 대치를 했었습니다.
끔찍한 것은 난사를 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난사를 해서 무차별적으로 죽인후
조준 사격으로 원한이 있었던 고참병들 몇명을
차례대로 사살했다고 했습니다.
죽이면서도 죄상을 이야기 해줬다고 합니다.
"모상병...너는 몇월 몇일 나를 몇대 때리고...어쩌고 저쩌고...
입구로 걸어나가라...뒤돌아보지 말고...." 걸어나가면
뒤에서 쏘고
"너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나를 무시하고 때렸고...."
이렇게 내무실에서 계속 확인사살을 했습니다.
확인사살이 아니고
개인적인 사형집행이었죠.
그래서, 대치가 상당 시간 지속됐고...
설득하기 위해 정훈차량까지 동원됐다고 했습니다.
타격대가 출동했었고, 수색대원들까지 투입됐지만
제압을 못했던 이유는 내무실에 입구가 하나였습니다.
입구는 하나에 안에는 실탄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정신나간
놈이 부대원들을 인질로 잡고 있으니 무리하게 제압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계속 몇분간격으로 총성은 계속 울리고...
상당한 시간동안 대치했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서는 집행이 계속 진행됐고...
이 병사가 죽일 사람들 모두 죽인 후 탈출을 시도했다고 하더군요.
말이 탈출이지....설득을 계속하자
죽일 사람들도 없고 해서 설득을 당한 척
입구쪽으로 나왔을 때 병력들이 덮치려고 하니까 몇발자욱 도망가다 잡힌 것이라고 합니다.
그 때 현장에서 몇명이 대치중에 살아서 걸어나왔답니다.
살려주면서 그 상병에게 그랬답니다.
"자기에서 잘해줘서 고맙다고... 이런 모습 보여줘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몇명을 풀어줬답니다.
그중에 죽이지 않고 다리쪽만 총살을 입히고 살려준 사람도 있고.
선배 입에서는 믿지못할 말들이 계속 쏟아졌습니다.
그때 화학지원대 병력이 말이 지원대이지 거의 소대 몇개 모아 놓은 대급 감편 중대 병력도 못되는 병력있었는데...
외출나간 몇사람 빼고 모두 사살됐다고 합니다.
당시 사건현장에 직접 있었는데 그때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다고
그때 사망자가 최소 20명 이상이있었다고 했습니다.
9년이 지나서 명확하지 않지만 24명 그 전후라고 들었습니다.
화학지원대는 그 이후 부대 재편성을 당했고,
재편성때 살아있었던 사람들이 몇명 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시체들도 신속하게 여러곳에서 와서 처리했다고 들었습니다.
전두환이 대통령이었고...
보도 통제당해서 언론에 알려지지 못했고...
그때 이후로 국방부에서 브라보 이후 지역에서는 실탄 휴대하고 근무투입하는 것을 금지 시켰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괴롭혔던 고참 몇명은 토요일에 외출을
나간 상태였답니다. 그래서 운좋게 살았다고 하더군요.
이번 530GP사건을 보고 85년의 그때 일이 생각이 났는데...
결국 보도를 통해 그때의 일이 보도가 됐었군요.
그런데... 사실과 약간 다르네요. 국방부에서 확인해 주는데도
한계를 분명이 설정하고 확인해줬을 것이고...
그나저나, 그때 돌아가셨던 분들과 가족들... 늦었지만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군사독재 시절이라... 뭐라고 이의제기도 못하고
자식들을 가슴에 묻었을 부모님들...
참으로 가슴이 미어졌을 것이라 생각되고 무엇보다
쓸쓸하게 숨어서 장례를 지낸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