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 자유로운 영혼의 방랑자
1966년 세르비아계 프랑스 영화감독 알렉산드로 페트로 비치는 세르비아에 사는 집시들의 집단생활을 필름에 담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의 한 집시촌에서 그들과 함께 몇 달을 보내게 된다. 그는 거기서 자유와 음악에 대한 집시들의 영원한 감수성에 흠뻑 빠졌고 그는 영화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를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영화 나는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를 1967년 깐느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집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을 변화시켜줄 이 변화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상호 이해의 노력을 인정받았다. 알렉산드로 패트로 비치는 그가 알게 된 집시들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삶에서 자신을 위해 자유를 얼마나 획득할
수 있는가의 인간성에 진정한 기준을 둔다면 집시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롬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집시들도 돈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들은 금화 몇 닢 때문에 눈앞에 놓인 즐거움 강렬한 순간을 희생하는 법이 없다. 그들이 자유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뿐이다. 그들은 뼛속 깊이 자유를 느낀다. 자유는 즐거움과 고통이 섞인 그들의 암담한 삶의 한줄기 빛을 비춰준다.라고 얘기했다. 집시들과 함께 가장 행복한 한때를 보내면서 그들의 전통과 문화를 과장 없이 그리고 힘차게 기록한 알렉산드라 감독이 쓴 짧은 시는 집시에 매혹된 그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알렉산드라의 시 ( 주여 내세의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면, 집시로 태어나게 해 주소서. 제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즐거운 길을 택하게 하소서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죽어서 당신을 다시 만나렵니다. ) 실로 오랫동안 집시의 기원과 그들의 진정한 모습은 신비 혹은 무지의 너울에 가려있었다. 오늘은 여기 내일은 저기로 떠돌아다니는 거무튀튀한 살갗의 이상한 언어와 습관을 가진 집시의 무리를 보면서 사람들은 많은 호기심을 가졌고 그들의 수수께끼를 푸느라 갖가지 억지스러운 생각을 짜내기도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연구에 힘입어 그 수수께끼는 어느 정도 풀렸지만 그래도 여전히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이 나도는 형편이다. 집시들의 영혼의 고향
은 방랑이다. 인도에서 비롯되어 늘 위험을 안은 채 미지를 향해 끝없이 떠도는 그들의 사연을 전설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해서 신의 노여움을 샀으며, 신은 사나운 바람을 보내 인간과 말과 마차들을 모조리 흩날려 버렸다. 폭풍이 멎자 주위를 둘러본 그들과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낯선 땅 낯선 이들 틈에 섞여 있었고 고향이 어디였는지 또는 당초 고향이라는 게 있기는 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학자들은 집시의 기원이 인도라는 점에는 의문을 갖고 있지 않지만 집시 쪽의 선사시대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이유는 집시의 언어인 로마니는 금세기 이전까지 아무
런 표기 수단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원래 인더스강 중류에서 상류 (서북부 찬디가르를 포함하는 판자부에서 카슈미르 일대에 집단적으로 살고 있던 하층민들이 전쟁이나 지금과 같은 어떤 이유로 서쪽으로 집단적인 이주를 한 것은 5-6세기 경이라고 한다. 집시들이 서쪽으로 이주한 뒤부터 집시에 대한 다소 신빙성 있는 기록이 전설과 역사가 뒤섞인 두 권의 페르시아 문헌에 처음으로 약간씩 나타나고 있었다. 10세기 경 이스파한의 역사가 함자는 페르시아의 1만 2천 명의 조트 악사들이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세기 뒤 페르시아 최대 민족 시인 페르 도우 시의 서사시 제왕기에 이에 비슷한 얘기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부자들은 포도주를 마시고 머리에 꽃을 장식하고 악기 소리에 둘러싸여 있어서 음악도 꽃도 없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의 일을 조금도 생각해 주지 않는다. 이런 백성의 불평을 들은 왕은 인도에서 류트(현악기의 조상)에 능한 루루족 남녀 일만 명을 불러들여 음악 부족으로 정착시키려 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보니 각자에게 소와 당나귀 1마리씩과 당나귀 천 마리 분의 밀을 주었는데도 영양결핍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대신에 소도 씨앗도 먹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왕은 말했다. 남은 당나귀에 짐을 싣고 악기를 가지고 비단 현을 메고 나가라. 이리하여 지금도 개나 이리를 벗 삼초 거리에서 도둑질을 하면
서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그 당시 페르시아엔 인도에서 온 음악에 재주가 뛰어난 집시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이미 농경생활을 싫어하고 유랑을 즐기는 악사로써 때로는 도둑질도 했음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페르시아 터키 그리스 등지에서 악사 전쟁이 대장장이 등을 하며 지내고 있던 그들이 또다시 행동을 게시한 것이 14세기 중엽이었다. 1348년 세르비아 근처의 챙가리에 라고 불리던 제철 공이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발칸반도를 북상할 때 그들의 이동은 매우 신속해서 북으로는 1418년경 보헤미아와 함부르크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1427년 파리에 1440년 경에는 어느
새 영국에 건너가 있었다. 그때부터 유럽에는 집시들이 등장하는 문헌이 아주 많아지는데, 셰익스피어의 몇몇 작품 속에 집시와 관계되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오셀로에는 오셀로가 애정의 표시로 장차 비극의 씨앗이 될 손수건을 데스데무나에게 주면서 이 손수건은 옛날에 한 이집트 사람이 어머니에게 주었던 것인데 어머니는 마법의 힘을 지니고 있어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었소라고 한다. 셰익스피어도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피부가 검었던 집시들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믿었다. 집시라는 영어 호칭은 에스파냐 어의 히따노 프랑스어의 지땅 이탈리아어의 징가로와 마찬가지로 이집트인에서 건너온 말이다. 즉 이집
트인, 이 두음 소실에 의해서 집시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하여 발칸 터키 일대에서 그들은 찌깐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밑바닥 천민을 뜻하는 그리스어 아신가노히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집시 자신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롬이라는 말을 썼고 그렇게 불렀다. 롬=로마어로 사람이라는 뜻. 그들이 사용하는 루마니아 어가 저 멀리 동쪽에 있는 코카서스나 서아시아 그리고 북부 인도의 상크리스트 계통의 언어와 통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들이 이집트나 그리스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1427년 8월 집시들은 당시 영국이 점령하고 있던 파리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은 호기심에 찬 군중에게 에워쌓여 3주 동안 성데미 성당
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다. 그러자 곧 그들을 둘러싸고 좋지 못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용한 집시 점쟁이들에게 손금을 보는 사이에 지갑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에 파리 주견은 속기 쉽고 미신에 사로잡힌 자들을 꾸짖으며 집시들은 어쩔 수없이 파리에서 쫓겨나 봉투아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집시들은 소매치기가 하나의 본인들의 살기 위한 직업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자 온 프랑스 땅에 집시들의 발길이 가득 차게 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에스파냐의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성지인 산티아고대 컨퍼스텔라로 순회 가는 듯 가장하여 아랍과 카탈루냐를 거쳐 카스티야를 지나 안달루시아에 도착을 했다. 1501년 무렵 일부의 집시 무
리가 남부 러시아로 이동했으며, 또 다른 일부는 폴란드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갔다. 1721년 그들은 드디어 시베리아의 수도 토벌스크에 다다랐다. 그들은 중국에까지 들어가려했으나 총북이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리하여 15세기에서 18세기 사이의 집시들의 발길은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닿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중세에 파리에 혼잡한 군중들 틈에서 자신의 인생처럼 짧고 격정적인 춤을 추는 에스메랄다 노트르담의 꼽추와 투사와 눈이 맞아 첫 애인을 벌이고 끝내는 자신이 버린 애인의 손에 죽고 마는 시 노래 예언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정열적인 여인 카르멘을 만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오페라 카르멘-집시) 유랑하는 민족이라고 하지만 에스파냐 남부 안달루시아의 경우처럼 이미 여러 세대에 걸쳐 정주하고 있는 집시들도 적지 않았다. 집시 사회에서는 그들을 께렝게 정착 집시라고 부르며 께렝게는 유랑 집시들 드로멩게를 얕보게 된다. 정착하는 집시- 께렝게 유랑하는 집시-드로멩게 정착하는 집시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일부가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집시의 절반 이상이 아직도 유랑 생활을 하고 있으나 1000에서 1200만으로 추산되는 집시 전체를 놓고 볼 때 드로멩게는 현재 유럽의 집시들 중의 극히 일부분을 이루고 있다. 전통적으로 방랑을 하고 있는 집시의 생활단위는 가족이며 그것이 몇 개 모인 꿈빠니아라는 집
단으로 이동한다. 가족의 여러 개의 형태를 가지고 이동을 하는 것. (여러 가족들이) 특히 발칸 일대는 지중해 연안에 걸친 지역을 여행해 보면 지금도 이곳저곳에서 집시 특유의 마차 행렬이나 텐트촌과 마주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하여 서구권에서는 반 정착화 한 상당수의 집시들이 마차 대신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그중에는 비행기로 가축 등의 거래를 위해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고 설명한다. 몇 세기 전에 인도를 떠나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게 된 집시들은 아직까지도 그들의 집시 의식을 잃지 않고 있다.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의식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들어가 살게 된 본고장 토박이들의 태도가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17세기까지 유럽에서 집시와 유대인은 같은 신세였다. 가난한 유랑민으로써 정착민들에게 경멸의 대상이었고 질병 전쟁 등 재앙이 있으면 악역을 뒤집어쓰는 희생양 노릇을 하곤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17세기 이후 교육을 받으며 정착 사회에 동화할 뿐 아니라 산업사회로써 전환에 앞장서는 역할을 많이 받은 반면 집시들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동화를 거부하고 있다. 집시들은 스스로를 롬이라고 부르며 외부인은 가조스 혹은 갓재로 구분을 한다. 전통을 중시하는 집시들은 가조스와 접촉을 극히 두려워한다. 가조스는 불순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관념은 청결성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가조스와 접촉하면 오염된다
고 믿는 것이다. 집시의 속성으로 보아 인도의 하층민을 하리지안이라고 하는데 출신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지만 무사계급이라 주장하며 유난히 청결성을 강조하는 집시들의 자존심도 그럴싸한 면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2차 대전후 집시 문화가 외부에 소개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폴란드 집시, 시인이자 음악가였던 퍼푸사는 바로 가조스와 필요 이상으로 접촉했다는 사실 때문에 집단에서 추방당해 30여 년간 죽음보다도 못한 고독 속의 삶을 살아야 했다 파푸사의 노래가 집시에 대한 일부 가조스의 이해를 얻어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공산정권의 강제적 동화 정책에도 공헌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파푸사의 유죄를 수긍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지난 몇 세기에 걸쳐서 집시들은 구걸하거나 도둑질을 함으로써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방랑자들 또한 그저 일만 하다 죽어가기에 꼭 알맞은 노예들 정도로 취급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유럽 쪽의 규범으로 따질 때 집시의 행동은 범죄적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행동의 태반은 유럽 정주민과 이동하는 민족으로써 집시 사이에 존재하는 가치체계와 생활감정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오해 때문에 야기되기도 하였다. 거기에 몇 세기 동안 지속적으로 가해진 박해의 역사가 그들 간의 틈을 더욱 벌어지게 했다. 집시의 범죄와 그들 사회의 폐쇄성은 시각을 달리하여 본다면 가조스에 대한 자기방어인 것이다. 집시
들의 좀도둑질은 가난한 궁핍 때문이었는데 그날 하루를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획득해 온다는 행위는 서로 그것이 어떤 면에서 범죄로 간주되는 일이라고 해도 그들에게는 허용될 수 있는 생계 수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럽에서 발달한 사적 소유 개념과는 달리 각지를 돌아다니며 그들의 감각에서 볼 때 사회 전체는 공공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따라서 집시들의 필요 이상의 것을 굳이 구하려 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 유럽 사회보다 훨씬 엄격한 척도로 사회질서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셈이다. 알렉산드로 패트로 비치는 말 한다. 집시들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개인적인 이익에 덜 집착하고 자신들의 행위로 인해 초래될 수 있는 장
기적인 결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어쩌면 덜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우리 각자의 내면에 존재하는 악의 부름 이렇게 불러도 된다면 그에 더 쉽게 넘어가는 걸 보면 집시들이 어느 누구보다도 세상의 아름다움과 고통에 대해 덜 예민하고 불행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결코 꺾이지 않은 인내심에 힘입어 집시들은 기나긴 유랑 생활 속에서도 자기 본래의 모습을 간직할 수가 있었다. 그들은 유랑 생활을 통해 가지각색의 민족들과 접촉했지만 결코 집시다움을 잃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집시들이 물질 곧 토지에 얽매이지 않고 양심이나 사회적 인간적인 가치를 더욱 소중히 여겼기 때문일 것
이다. 이 때문에 집시들은 끊임없이 자기 모습 그대로의 유랑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집시들은 유럽에 나타난 뒤 600년 동안 대체로 사회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직업을 그대로 고수하며 살아왔다. 물론 2차 세계대전 이후 산업화가 파급되고 자동차와 농기구의 사용이 늘어나자 많은 집시들이 자기의 전통적인 직업을 포기한 채 공장 노동자가 되거나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철새처럼 계절에 따른 일자리를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한다. 집시들은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는 라우따리(음악가들) 아르긴따리(보석상들) 볼데니(꽃장수들) 그라스타리(말거래꾼들) 우루사이 (곰 조련사들) 등의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게 일반적으로 집시 사회에서는 라우따리와 아르긴따리가 가장 지위가 높은 직업이다. 그렇다면 집시 바이올린의 전설은 언제 생겨났으며 어떻게 발전해온 것일까. 이 물음에 짧은 말로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우리가 보고 듣는 바이올린과 침벌롬 중심의 집시 앙상블의 전형적인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무렵으로 짐작이 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스와 인접한 루마니아 공국 세르비아 등지에서 오랫동안 머문 후 많은 집시들이 서쪽으로 이동을 게시한 것은 1400년 경이었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서로 뺏고 빼앗기던 전쟁지역에서 집시들의 안전이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험 속을 빠져나온 대규모 집시들의 무리가 헝가리와 보헤미아 지역에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은 1418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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