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밤 눈 뜨고 보지 않아도 어디선가 신선하고 청량한 향기가 밀려온다고 생각된다면 수수꽃다리의 향기일 가능성이 크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로 4월 중순이면 꽃이 핀다. 대부분 식물은 곤충들이 활동할 때쯤 시간에 맞춰 향기와 꿀을 내보낸다. 하지만 라일락의 향기는 밤에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다른 식물들이 잠든시간이라서, 아니면 낮 동안 다른 식물들도 향기를 내뿜어 향기가 뒤섞여 못 느꼈을 수도 있다. 라일락 향기를 느끼면서 못내 아쉬운 것은 이나무가 '라일락'인지, '수수꽃다리'인지 궁금했다.
‘라일락’은 중세 때 아랍에서 유럽으로 건너갔으며, 조선말 우리나라로 건너와 원예용으로 기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모양과 특성이 비슷한 ‘수수꽃다리’가 있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 자생하는 특산식물이다. 해방 전 이나무의 향기가 알려지면서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그후 ‘라일락’과 ‘수수꽃다리’를 구별 없이 재배하면서 현재 우리 주변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가 ‘수수꽃다리’인지 ‘라일락’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되었다. 굳이 구별한다면 수수꽃다리는 꽃이 작고 잎에는 광택이 없다고 한다.
‘수수꽃다리’란 이름은 조금은 낯설다. 그 이유는 사람들 대부분이 ‘라일락’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수수꽃다리’를 ‘개회나무’와 함께 ‘정향나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는 꽃 모양에서 비롯되었는데 꽃을 보면 위가 벌어지면서 화통이 고무래 정(丁)자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는 이름을 바로 잡아 부르기가 조금 복잡해졌다. 한마디로 ‘라일락’은 이 종류의 나무들을 통틀어 부르는 서양식 이름이고, ‘정향나무’는 중국식 이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꽃이 피면 따서 말려 향갑이나 향궤에 넣어두고 항상 방안에 은은한 향기가 돌도록 했으며, 여인들은 향낭에 넣어 쓰기도 했다. 라일락은 영어 이름이고 프랑스에서 ‘리라’라고 한다. 특히 꽃향기가 일상적으로 시와 노래와 소설에 많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알려진 <베사메무초>도 그중에 하나다. 사랑하는 연인을 리라 꽃처럼 귀여운 아가씨로 비유해서 부른 노래다.
유럽에도 라일락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독일에서는 5월에 라일락꽃이 피면 이 시기를 ‘라일락 타임’이라는 축제를 연다. 이때 처녀들은 저마다 라일락 꽃송이를 들여다보고 다닌다고 한다. 라일락꽃은 끝이 넷으로 갈라졌지만 다섯으로 갈라진 꽃이 간혹 있다고 한다. 이렇게 찾은 다섯 갈래의 꽃을 삼키면 연인의 사랑이 변치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면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과 같다. 반면 영국에서는 보라색을 슬픈 색이라 하여 눈에 띄는 곳에는 라일락을 심지 않으며 약혼한 후 라일락 한 송이를 보내면 파혼을 뜻한다고 한다.
일본에도 우리의 수수꽃다리와 유사한 꽃나무가 자란다고 한다. 특히 북해도 아이누족은 이나무의 목재가 썩지 않아 30년이 지나면 돌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묘비 목이나 흙을 파는 연장으로 사용한다. 눈이 많이 내리는 이 지역에서 라일락 나무와 자작나무, 쐐기풀을 한데 섞어 횃불을 만들어 눈을 멎게 하는 제사 때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수수꽃다리와 비슷한 나무가 있다. ‘돌개회나무’, ‘버들개회나무’, ‘꽃개회나무’이다. 수수꽃다리는 꽃이 길고 꿀샘이 꽃 속 깊숙이 들어있어 향기에 비해 찾아오는 곤충이 적어 열매를 충실히 맺기 힘들지만, 개회나무는 길이가 짧고 수술이 길어 벌이 많이 찾는다. 특히 전체적으로 나무의 모양도 짧고 수술이 길어 벌이 많이 찾는다.
예전에는 수수꽃다리류를 통틀어 정향나무라 불렸지만, 이제는 그렇게 부르면 틀린 말이 된다. 1960년 한 식물학자가 수수꽃다리 나무의 종류와 별개의 특징을 가진 나무를 찾아내 그 종류에만 '정향나무'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는 ‘정향나무’, ‘수수꽃다리’,‘개회나무’는 각각 다른 종류로 구별해야 한다. 수수꽃다리와 그의 형제들은 중부 이남 지방에서만 자생하며 남한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가 많다. 더욱이 이들 가운데에는 우리나라 특산이 여럿 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그저 ‘라일락’만 좋아한다.
우리에게는 서양의 라일락에 절대로 뒤지지 않는 수수꽃다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이에 외국에서는 우리의 것을 자기 나라로 가져가 개발하여 되팔고 있다. 1917년 미국인 윌슨은 금강산에서 수수꽃다리를 가져가 ‘와일드 파이어‘ 품종으로 개발하였고, 이후에도 개발된 품종이 십여 종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우리 땅에서 그러한 자원조사가 있는다는 사실도 모른 채 우리의 나무를 내보냈다. 이러한 수수꽃다리 종류 가운데 현재 미국에서 비싼 값에 팔리고 있는 품종이 있다. 1947년 적십자사 직원으로 한국에 온 사람이 북한산 백운대에서 채취한 ‘털개회나무’ 종자 열두 개를 가지고 육성시켜 개발한 나무는 'Miss Kim'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