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에서 본국검을 배우고 있는 스페인 검객들. 왼쪽부터 페르민. 마크. 프란시스코. 가운데에는 이들을 지도하고 있는 십팔기보존회의 사범인 박권모씨. 인왕산 호랑이로 알려진 박사범은 쌍검과 월도의 고수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다섯 검객이 한국의 십팔기를 제대로 배우고자 왔습니다. 지난 주말에 발행된 주말매거진에 이들에 대해 소개해드렸는데 신문에 못다한 얘기를 좀더 풀어보겠습니다.
# 페르민. 창술의 기본을 배우다
스페인에서 지난달 17일 서울에 온 페르민(42) 일행은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십팔기(十八技)를 3주째 배우는 중이다. 십팔기는 신라 화랑의 본국검(本國劍), 동양 최고의 검법인 예도(銳刀) 등 18가지로 짜인 종합무예. 사도세자가 완성시키고 직접 이름을 붙였으며, 정조 때 편찬된 국방무예 서적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의 국기(國技)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에 의해 한때 단절의 위기를 겪었던 우리 무예를 배우고자 이들은 지구 반 바퀴를 날아 온 것이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페르민(FERMIN PEREZ,42)은 14년간 스페인에서 동양무예를 수련하고 있다. 주특기는 창술. 이번 한국행도 창술의 기본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다. 창의 기본은 뭐니뭐니해도 난나찰. 난나찰이란 좌우로 창을 젖히고 찌르는 기법. 흔히들 창술을 한다면서도 난나찰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 우슈의 경우를 보더라도 창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는 동작이나 도약은 많아도 난나찰을 정확히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이는 창술을 무술적인 의미보다는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동작 위주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를 무술에서는 화무(花武), 혹은 화법(花法)무예라고 한다. 꽃처럼 아름답지만 위력은 없다는 것이다. 페르민도 난나찰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 그 먼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불혹의 나이에 말이다.
그는 비행기 공포증 때문에 함께 못온 아내에게 매일밤 공중전화카드를 1만원치 사용하는 애처가이기도 하다.
# 해박한 역사학도 프란시스코
“서양의 운동은 신체만 단련하지만 동양무예는 정신도 단련한다. 상대방과 경쟁하는 스포츠와 달리 무예는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다.” 바로셀로나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프란시스코(20)은 이렇게 무예예찬론을 편다. 그는 비행기 삯만 900유로(140만원)나 하는 이번 여행을 위해 지난 1년간 열심히 아르바이트 했다고 한다. 이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무예, 기공, 요가 등 동양의 전통적인 수양법이 유럽에서 오히려 인기라는 말이 실감난다.
프란시스코의 아버지는 혼자서 가족을 부양하느라 여행 한번 제대로 못간다고 한다. 그런데 아들의 이번 한국행을 선뜻 허락할 때에는 그의 코끝이 찡했다고 한다. 그만큼 아들의 무예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고 밀어준 것이다. 십팔기 경력 5년. 특히 동서양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그는 여러번 사람들을 감탄스럽게 했다.
# 스페인 십팔기 사범, 마크
이들은 바로셀로나에 있는 십팔기 도장의 동문들이다. 이 도장은 한국무예계의 원로이자 십팔기 전승자인 해범 김광석 선생(70)의 제자인 설성(47)씨가 20여년 전 스페인에 건너가 세운 것이다.
“해범 선생을 뵙는 게 이번 여행의 큰 목적이다. 선생은 처음 본 우리를 손자나 아들처럼 자상하게 대했다. 선생께 직접 창술을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통역을 통해서가 아니라 창을 잡은 손을 살짝 쳐가며 일일이 자세를 잡아주었다. 그 후 친구들은 나의 손을 톡톡 치면서 장난친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이자 14년째 십팔기를 수련하고 있는 페르민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유럽과 한국의 십팔기는 칼이나 창 등 병장기의 모양이나 수련 방식엔 큰 차이가 없다. 다만 한국의 십팔기는 무예 종가(宗家)답게 “움직임이 매우 정밀하고 짜임새가 있으며, 수련할 때 진지한 자세가 인상적”이란다.
스페인 십팔기 도장의 사범인 마크(24)는 “무예를 하는 사람은 모두 한 가족”이라며 “국제 교류를 통해 한국의 전통무예가 더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했다. 마크는 이번이 7번째 한국 방문이다. 한국말을 곧잘 하는 그는 “검법(劍法)은 필법(筆法)과 같은 것을 안다”며 서예에도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에 있는 초등학생 제제를 위해 서예책을 20권이나 구입하기도 했다. 마크는 특히 ‘전통무예십팔기’라는 7글자를 붓글씨로 직접 쓰고 싶어 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부지런히 서예를 배우기도 했다.
# 해리포터를 닮은 호세.
서울대 동아리 전통무예연구회 초청으로 한국에 온 이들은 오전과 오후에는 서울대에서 한국 학생들과 함께 수련을 하였으며, 저녁에는 십팔기보존회에서 강습을 받았다.
30도를 오르내리는 불볕더위도 이들의 무예에 대한 열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시에스따(낮잠)도 갖지 못하고 하루에 두세 차례 수련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네요. 하지만 하나라도 더 정확히 배우고 가야죠.”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고등학생인 호세(16)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띄우며 답한다. 그는 영화 해리포터의 주인공을 꼭 빼닮아 가는 곳마다 인기다. 식당에선 그를 진짜로 알고 사인까지 해줬단다. 서비스도 듬뿍 받고.
# 가슴 근육의 까를로스
어릴 때부터 닌자 흉내내기를 좋아하여 동네의 소문난 악동이었다는 까를로스(26)는 애인과의 데이트도 미루고 여름휴가 한 달을 털어서 왔다. 그는 특히 가슴 근육이 인상적인데 자신의 의지대로 가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포복절도 만들게 하는 재주를 지녔다.
일화 하나. 어릴적 동네 친구들 모아놓고 자신에게 돌을 던져보라는 까를로스. 하나씩 던지는 돌을 이리저리 잽싸게 피한 그는 아예 한꺼번에 던지라고 재촉을 한다. 친구들이 일제히 돌을 던지자 이를 고스란히 맞고 피투성이가 된 까를로스 왈 “조금 아프군. 내가 기력을 회복한 후 다시 한번 하자. 이번에 모두 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은 지난 일요일엔 경복궁에서 당당히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경복궁 내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첫째 넷째 일요일에 전통무예십팔기 보존회의 정기시연이 있다. 여기에 그들도 참가해 큰 갈채를 받았다.
무림일가(武林一家)라. 무예를 연마하는 이는 모두 한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