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 혹은 관계의 시
이정환
우리는 결국 모두 홀로다. 더불어 살지만 이 땅을 떠날 때 각자 따로 스러져간다. 이것을 두고 단순히 애잔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정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원로시인의 작품 한 편을 읽는다. 문학적 성취 여부를 떠나 눈물을 자아내는 노래다. 진솔한 토로여서 울림이 있다.
살다 보니 내 나이
어느 새 여든 살
해놓은 일 없지만
아직도 건강하다네
말없이 조용히 있다가
눈 감고 떠나고 싶네
오늘도 일찍 일어나
책을 잠깐 읽고 나서
길을 걸어 다니면서
산책을 조금 하다가
별달리 할 일이 없어
책만 읽고 있다네
-정재호, 「독백」전문
「독백」을 읽으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본다.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 그 인생의 끝머리라고 볼 수 있는 여든에 이르러‘해놓은 일 없지만/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말없이 조용히 있다가/ 눈 감고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오늘도 일찍 일어나/ 책을 잠깐 읽고 나서// 길을 걸어 다니면서/ 산책을 조금 하다가’다시 책을 읽는다. 별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일상의 일상이다. 누구나 노년에 접어들면 이것 이상의 다른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은 피로시대에서 소진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어떤 철학자가 진단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실로 그러하다. 현대인들은 스스로를 옥죄고 스스로를 갉아먹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각자 휴대전화에만 매달려서 몸으로 부딪치는 정담의 삶을 단절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어찌 소진시대가 아니랴.
시인은 일찍이 첫 시조집『제3악장』을 펴내어 시조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그동안 시조에만 매진하지 않았던 점은 큰 아쉬움이다. 등단작「제3악장」이 굉장한 의미를 가진 명작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오늘도 안절부절 그 바닥 그 자리서
사람과 사람 사이 살갗을 문지르며
길고 긴
선을 긋는다
의심 따윈 모른 척
살금살금 속곳 잡고 한 발 더, 원 투 스리
처음엔 점이었다 출발이었다 마침표였다
우리는
한때, 딴 생각
궁금하다 성가시게
공손한 예의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아픔인 듯 그리움인 듯 자욱한 생을 건너
차라리
맞물린 사선으로
다가올 너, 지나갈 너
-조명선,「선 긋지 말라더니」 전문
시인의 문체는 독특하다. 시각도 그렇고 전개 방식도 이채롭다. 관계 문제를 노래하고 있다. ‘오늘도 안절부절 그 바닥 그 자리서/ 사람과 사람 사이 살갗을 문지르며/ 길고 긴/ 선을 긋’고 있다는 표현은 관계 맺기에 대한 성찰이다.
‘살금살금 속곳 잡고 한 발 더, 원 투 스리/ 처음엔 점이었다 출발이었다 마침표였다’라는 대목이 인상적인데, ‘속곳’의 등장으로 독자는 오래 생각을 하게 된다. 관계가‘점, 출발, 마침표’로 이어지면서 서로가 ‘한때, 딴 생각’을 가졌음을 떠올린다. ‘공손한 예의가 내 안에서 두근거린다/ 아픔인 듯 그리움인 듯 자욱한 생을 건너’서‘차라리/ 맞물린 사선으로’다가오기도 하고 지나가버리기도 하는 사이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선 긋지 말라더니」는 일정한 선을 긋고 대할 때 진정한 소통이나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 쓴 시조다.
발표된 작품들이 더 있었지만 두 편을 살피는 것으로 이 글을 맺는다. 독백의 시가 아닌 상생 관계의 시가 보다 많이 생산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출처: 정음시조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이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