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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입니다. 내가 기다렸는가? 질문해봅니다. 과연 기다렸다가 맞는 3월인가 자문해보는 겁니다. 겨울 같지도 않았는데 봄을 기다렸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봄은 아니더라도 3월은 기다린 듯합니다. 뭔 말이냐고요? 글쎄, 그냥 왠지 2월까지는 빨리 지나가고 싶었습니다. 새싹 피어나듯 새로운 희망이 솟아날 듯한 기분? 뭐 그런 거 같습니다. 그냥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분 말이지요. 그런 때가 있지 않았던가요? 살다보면 이유 없이 감정이 들떠보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루 다 지나도록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하기야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합니다. 행여 사고라도 났더라면 큰일 아닌가요? 무난히 하루를 보냈다는 것이 감사하지요.
반짝 추위, 이 주말이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 별 것 아니다 싶은 추위 말입니다. 요즘 산행에서 길가에 개나리가 노란 꽃잎을 살짝 내민 것을 봅니다. 이 주말 잠간 으스스 떨겠지만 담 주에는 활짝 웃으며 얼굴 내밀지 모릅니다. 산길에는 진달래도 꽃망울을 영글고 있습니다. 짐작했지만 금년 그 어느 때보다 일찍 꽃구경 하리라 짐작합니다. 벚꽃놀이도 이미 앞당겼다고 듣고 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의 일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기후변화가 우리 코앞에 온 것이지요. 어쩌겠습니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걱정도 됩니다. 우리의 미래가 좋아지는 것인지 말입니다. 이 땅이 변하고 있습니다. 더 걱정되는 것은 우리네 식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인구 말입니다. 노인천국이 될지 노인지옥이 될지 어찌 되려나 가늠이 안 됩니다.
그러나 살아있으니 건강해야지요. 벌이도 없으니 지출이라도 줄이려면 몸이라도 제대로 버텨야 합니다. ㅋㅋ 3월, 꽃처럼 희망이라도 피워봅니다. ㅎㅎ
2024년 3월 2일 김종우 목사 드림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계시록 20 : 13)
<파묘>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져야 믿으려 한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궁금해 했고 알고 싶어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근본적 호기심의 출발은 아마도 죽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래 함께 잘 지내다가 어느 날 말도 움직임도 없어집니다. 죽은 것이지요. 도대체 왜? 어디로? 가장 궁금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다가 갑자기 그냥 돌처럼 굳어진 사물이 됩니다. 이게 무슨 일이지요? 그 사람 어디 간 거죠? 여기 남아있는 이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가요? 여태 있던 그 사람은 어디로 간 거죠? 누구나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 그리고 언젠가 나 자신도 어디론가 가겠지요. 어디로?
때로는 꿈에 그 사람이 나타납니다. 어디엔가 살아있는가? 이것도 궁금합니다. 사람이 땅에 묻혀 흙이 되어버리는 육신으로만 된 것은 아니겠다, 상상해봅니다. 물론 실제 거기에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 떠나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그냥 죽어서 끝나는 인생은 아닌가보다 생각합니다. 때로는 죽은 사람을 보았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이상하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지만 의심과 더불어 궁금한 마음도 가집니다. 사실 알고 싶어도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저런 말들은 있어도 확인할 방법은 없으니 그저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정말 믿거나 말거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직접 보거나 만질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많습니다. 표현은 달라도 뜻하고자 하는 내용은 거기서 거깁니다. 우리 육신이 아닌 영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비단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귀신이나 도깨비 또는 요정이나 정령 나아가 마귀 또는 악령이나 악마 등등. 사실 신자들은 자기네가 믿는 신조차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존재한다고 확신하며 신앙합니다. 물론 우리 사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능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고 의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기야 때로는 불신자도 급하면 기도합니다. 어쩌면 본능이지요.
또 하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현상 중에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작품 속에서도 보았습니다. 지난 세기 우리네 TV 드라마 중 인기 있던 ‘전설의 고향’이 대표적 예일 것입니다. 특히 원한을 품고 죽은 사람이 귀신으로 나타나서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흔히 들었던 ‘처녀귀신’은 많이 알고 있습니다. 직접 만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기야 요즘처럼 시끄러운 현대사회에 나타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워낙 불빛이 많으니 나타날 만한 곳도 마땅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요즘은 웬만한 산동네도 전깃불이 다 들어오니까요. 더구나 TV 드라마에 빠져있는데 귀신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우리 전 세대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묘 자리’에 대한 이야기지요. 어떻게 조상의 묘 자리가 후손들 삶의 행복과 번영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소위 ‘명당자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또 그 자리를 전문적으로 보아주는 사람도 있었지요. 찾으면 그 값이 엄청납니다. 그야 후손들 잘 될 것이라는데 무엇은 투자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말로 바꾸면 자식 일류대학 보내려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 하는 부모의 태도와 별다를 것 없습니다. 그러니 땅을 볼 줄 안다는 명성을 얻어야 하고 그것을 위해 나름 남다른 관심과 관찰 그리고 답사 및 연구를 많이 할 것입니다. 그렇게 이름을 얻고 나면 그가 지적하는 땅은 금값이 됩니다.
놀랐습니다. 땅의 흙을 집어서 입에 넣어 맛을 봅니다. 정말 그랬을까 싶은데 역시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분야입니다. 그런가보다 해야지요. ‘악지’(惡地)랍니다. 묘를 파지 말자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거액이 걸린 일입니다. 포기하기 싫습니다. 좀 문제가 되더라도 감행할 만합니다. 짧은 시간에 큰돈을 쥐게 되는데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기투합합니다. 사업가인 무당 ‘화림’ 그의 제자 ‘봉길’ 그리고 지관 ‘상덕’ 장의사 ‘영근’이 합작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갱단의 합작이 아니라 어쩌면 합법적인 거래입니다. 한 부잣집의 액운을 바꿔주기 위해 이장(移葬)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관이 답사를 하고 나니 소위 악지라는 말입니다. 이장하다가 큰일 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 액운을 떨치기 위해 살풀이굿부터 시작합니다. 정말 실감나는 연기에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이끌고 있습니다. 그렇게 무덤을 파헤치며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일단 관은 무사히(?) 파내서 옮깁니다. 잠시 보관한 장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물론 파헤쳐진 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그냥 귀신 이야기에서 삼천포로 빠져나갑니다. 어찌 보면 대단한 전환이겠고 달리 보면 무슨 뚱딴지같은 이야긴가 싶기도 합니다. 아무튼 보고 나면 기분이 묘해집니다. 이거 우리 무속신앙 이야기인가? 아니면 귀신 이야기? 아니면 국뽕인가? 아무튼 분위기나 배우들 연기는 만점입니다. 영화 ‘파묘’(Exhuma)를 보고 생각해보았습니다.
<데드맨>
권력을 얻고자 발버둥 칩니다. 왜요?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입바른 소리죠. 당선 되고 나서의 하는 짓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두 번 다시 뽑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넘어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 다음 선거를 맞이해야 하는 기간에 그만 잊어버리는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임직 기간을 짧게 만들 수도 없고 참으로 딱합니다. 그래도 그 가운데 의로운 일꾼들이 다소 섞여 있기에 그나마 버티며 나라를 끌고 갑니다. 우리 국민 수준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확실하게 심판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 정신 차려야 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눈을 부릅떠야 하는 것이지요. 정말 나라를 생각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개인들의 삶이 너무 팍팍해서 문제입니다.
권력을 쥐려고 발버둥 치는 이유가 뭐지요? 그야 돈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가지면 또 다른 욕심이 생깁니다. 바로 권력을 쥐어보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돈과 권력은 함께 가게 마련입니다. 돈을 가지려 권력을 쟁취하려 하고, 권력을 쥐면 돈을 차지하려 합니다. 우리의 짧은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함께 보며 지나왔습니다. 한 예로, 남은 것은 30만 원밖에 없다고 우긴 전직 대통령이 골프나 치러 다니는 것을 다 보았습니다. 골프는 없는 사람들이 하는 운동인 모양이지요. 하기야 남은 권력의 그림자로 인하여 대접하겠다고 빌붙었던 사람들이 많았으니 덕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권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니 잡아보려 악을 쓰겠지요.
사업이 막다른 길에 닥치면 뭔들 못하겠나 싶습니다. 마치 사람이 사흘 굶어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르는 일 같이 말입니다. ‘이만재’ 이 사람 결국은 이혼까지 당해야 하는 아픔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판사판 막판으로 갑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어쩌다 사주쟁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의 뜻을 풀어달라고 합니다. 이름이야 대단합니다. 만(萬)재(財) - 재물이 왕창 몰려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주인을 잘못 만난 건가요? 그래서 그 이름을 팝니다. 제대로 된 주인에게 파는 겁니다. 말이 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무슨 짓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그런데 팔고 얼마 되지 않아 기절, 깨고 보니 관 안입니다. 시체도 아닌데 말입니다.
다행(?)히 소각장의 화로로 들어가지는 않는데 관을 뜯어내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관 밖으로 나옵니다. 벌어진 광경에 다시 놀랍니다. 하기야 놀랄 틈도 없습니다. 여기저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관 밖으로 나와서는 둘러선 사람들로부터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라고 예외가 아니지요. 말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고 무작정 맞습니다. 초죽음으로 몰아갑니다. 그 지옥의 현장에 한 낯익은 여인이 등장합니다. ‘심 여사’라는 사람이 만재를 살려냅니다. 그리고 거래를 제의합니다. 우선 왜 자신이 그 자리에 처해 있는지부터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보도되고 있는 뉴스를 보여줍니다.
‘이만재, 천억을 사기횡령하고 중국으로 도주 중 자살’했답니다. 이제 자신은 죽은 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답니까? 심 여사의 도움으로 사건의 전후를 맞춰봅니다. 이용당하고 없어진 것입니다. 사실 없어지라고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런데 정보를 알고 심 여사가 다시 사들인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써먹으려고 말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만재로서는 이 일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사기 누명도 벗어야 합니다. 보고 싶은 딸도 만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가능하다면 다시 합하고 싶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서 모두 회복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기댈 곳이 없습니다. 맨바닥에 머리 박기나 마찬가지 상황입니다. 그러니 심 여사가 은인이지요.
사기를 당해 아버지의 죽음까지 맞아야 했던 딸이 복수의 칼을 들고 이만재를 찾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오해를 풀고는 원인자를 함께 찾아 나섭니다. 그런데 상대는 막강 권력을 가진 정치인입니다. 거액을 사기치고는 이만재에게 다 뒤집어씌우고 아예 세상에서 지운 것입니다. 그 사이에 사주쟁이를 껴 넣은 것이지요. 어려웠던 수수께끼를 하나하나 풀어갑니다. 막강 권력자와 상대한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 권력자에게 한 가지 약점이 있으니 바로 국민의 여론입니다. 사실 보도를 통해 그의 실체를 드러내주기만 하면 끝납니다. 법이 권력의 편에 있다 해도 증거 앞에서는 역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해도, 막강 권력을 쥐고 있다고 해도 행복한가 여부는 전혀 개인 사정입니다. 사실 많이 가져서 편리할 수는 있어도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먹기 나름이지요. 있어도 불행할 수 있고, 없어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불안해하며 살 수도 있고 가진 것 별로 없어도 평안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쪽을 택하여 살겠습니까? 역시 사람 나름이겠지요. 영화 ‘데드맨’(Dead Man)을 보았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려 서슴없이 팔고 살해합니다. 목적은 돈이고 권력입니다. 흔한 이야기를 ‘이름’이라는 소재로 꾸몄습니다.
부자지간 확인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계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도 해산이라는 과정이 없이 세상에 올 수는 없습니다. 그 해산의 과정을 만드는 사람이 곧 부모입니다. 물론 사생아인 경우도 있겠지만 부모를 알지 못하는 것이지 부모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경우라도 아이가 장성하면 자기 부모를 찾고 싶어 합니다. 갓난아기 때 먼 이국땅으로 입양되어 간 아이가 다 자라서 고국에 돌아와 자기 생부모를 찾으려는 경우들을 보아 왔습니다. 그 눈물겨운 상봉을 화면을 통해서 본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 부모는 반드시 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다 부모가 있습니다. 물론 이미 돌아가신 분도 있고 아직 생존해 있는 분도 있습니다. 만약 생이별로 헤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보고 싶을 것입니다. 누구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가능하다면 찾고 싶을 것입니다. 때로는 내다 하고 나타나기는 했는데 진짜 내 부모인지 아니면 내 자식인지 분간해내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옛날 같으면 이것을 판명해내는 일이 불가능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가능하지요.
또 한 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나 붙들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내 맘에 든다고 해서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보다 인품이 훌륭하고 생기기도 잘 생기고 돈도 많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가질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자기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이름이 ‘김종우’입니다. 이름이야 그렇다 쳐도 성을 바꿀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영화 제목 같지만 그것은 ‘나의 운명’입니다. 우리가 피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AB형인데 맘에 안 든다고 O형으로 내 맘대로 바꿀 수 없습니다. 세상 말로 운명이고 우리 식의 말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제가 김 씨 집안에 태어났기 때문에 김 씨가 되었습니다. 박 씨 가문에 태어났다면 박 씨가 되었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씨가 다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또 바꿀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막말로 부모는 혹 헤어질 수 있어도 부모 자식 간 관계는 헤어진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이혼 후에도 자식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를 오가며 관계를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씨는 없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마다 기도합니다. 누구를 부르며 기도하지요? 당연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며 그 분에게 기도합니다. 하루에 한 번도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지내는 사람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럴지라도 알고는 있습니다. 현실 삶 속에서도 하루 한 번 아버지를 부르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아이가 자랄수록 아버지 부르는 횟수는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출가하면 한 달에 한 번도 어렵게 될 수 있습니다. 그다지 바람직한 일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그 대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도 많이 부르면서 살면 좋겠다 싶습니다. 사실 클수록 육신의 아버지보다는 하늘의 아버지가 훨씬 기댈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 육신의 아버지와 우리 영의 아버지와는 반대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어릴수록 자주 부르고 자라면 부르는 횟수가 드물게 됩니다. 영의 아버지는 그 반대입니다. 신앙이 어릴수록 부르는 횟수는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자랄수록 부르는 횟수가 많아지지요. 물론 신앙 연륜과는 다릅니다.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신앙이 깊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자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생이별을 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라면서 늘 보았으니까요. 그런데 영의 아버지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궁금하지 않습니까? 무슨 마음이 들지요? 영의 아버지는 도대체 어떻게 생기셨을까? 우리만의 궁금증이 아닙니다. 오래 전 예수님의 제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 14 : 8절 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한심한지 모릅니다. 영의 아버지를 어떻게 본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보여달라고 합니다. 아마 육의 아버지처럼 불 수 있으려니 생각했겠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도 ‘아버지, 아버지’ 하니까요. 우리들은 어떤가요?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리라 여깁니다. 하나님은 육안으로 뵐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듣고 배우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요청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지요.
엄마의 품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아빠 없는 아픔을 안고 아이는 성장했습니다. 엄마가 홀로 키우느라 많이 고생하였지요. 아이가 청년이 되었을 무렵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떠나기 전에 아이 출생의 비밀을 가르쳐줍니다. 너의 아비는 어디어디에 살고 있는 누구란다. 충격이지만 또 한편 반가움도 있지요. 엄마가 죽은 후 아이는 아빠를 찾아갑니다. 대단한 재력가입니다. 옛날 어쩌다 불장난한 결과로 잉태가 되었고 그 사람의 명예를 위해 모른 척했습니다. 그리고 혼자 아기를 낳아 키운 것입니다. 이제는 장성하여 어엿한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 때 당신이 불장난으로 태어난 아들입니다 하고 사실을 밝힌다면 믿을까요?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뭐라고 반응을 할까요? 어려운 문제지요. 우선 과연 자기 자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물론 생김새에 비슷한 점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라고 우긴다면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옛날 같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오늘날은 가능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면 됩니다. 유전자 검사라는 것이 뭡니까? 간단히 말하면 그 사람의 씨가 있느냐 하는 것을 검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눅 6 :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열매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지요? 예, 씨가 들어있습니다. 도사들이야 잘 알겠지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은 씨만 가지고는 이것이 포도 씨인지 사과 씨인지 아니면 무화과 씨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땅에 심어서 싹이 나오게 하고 자라게 하고 그래서 열매를 맺게 하면 알까요, 모를까요? 그야 당연히 알지요.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다고요? 예, 열매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열 매 속에 씨가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포도나무가 되기도 하고 무화과나무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씨가 다르면 나무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렇다 그 말입니다. 김 씨가 박 씨로 될 수 없습니다. 여기 가도 김 씨는 김 씨고 저기 가도 이 씨는 이 씨입니다. 아이가 지나가는 아저씨가 잘 생겼다고 무작정 달려가서 ‘아빠!’하고 부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럴 일도 없거니와 그런다 한들 그 사람이 그 아이의 아비라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세상에서 일어났습니다. 무슨 해괴한 일이냐고요? 아니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누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시며 또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아버지이심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가르쳐줍니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그 동안 거룩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계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늘 아버지라 부르시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마리아가 만났습니다. 그 때도 분명하게 이런 사실을 언급하여 주셨습니다. 요 20 : 17 “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문제는 엉뚱한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를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다는데 있습니다. 그런 해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걱정하는 것은 그런 일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들만이 하나님께로 택함을 받은 백성, 소위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들의 하나님이고 자기들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요 8장에 보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온 사건이 나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현장에서 여인을 붙잡아 예수님께로 데려 옵니다. 그리고 판결할 것을 종용하지요.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 후 예수님은 당신을 책잡으려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요 8 :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유대인들이 반론을 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남의 종 된 적이 없는데 무슨 자유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에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신 예수님이 바로 진리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유케 해주어야 비로소 자유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니 진리와도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기네가 하나님의 백성 즉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지요. 38절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와 유대인들의 아버지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아버지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자 그러면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이상하지요? 그들이 반항합니다.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님이 너희 아비는 내 아버지와 다르다는 것을 은연 중 말씀하시니까 대뜸 반론을 이야기합니다. 자기네 아버지가 누구라고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그러지요.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한 마디로 너희 아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기막힐 일입니다. 이제 보십시오. 똑같이 하나님을 불러도 전혀 다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예를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함을 받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시내 광야에 당도하여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말씀을 받으려 하나님의 산 시내 산에 올라갑니다. 그 기간이 40일, 산 아래서 기다리다 지친 백성이 모세의 형인 아론을 졸라댑니다. 출 32 :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 낸 것이 무엇입니까? 4 - 5절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그렇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을 만들어놓고는 하나님이라 부르며 섬기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네 아버지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들의 아비는 누구입니까?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의 아비가 누구라고요? 마귀랍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아버지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라고 하십니다. 누구 말이 진실입니까?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믿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한 마디로 그들이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우긴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바로 그겁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 말씀이지요.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왜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없습니까? 오늘날처럼 성경이 흔한 때가 아닙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가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네만이 성경을 가장 잘 알고 또 가장 성경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요 8 : 42 - 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즉 깨닫지 못하고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눅 14 :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우리가 다 귀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열린 귀가 있는가 하면 닫힌 귀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완고하고 고집스러우면 남의 말을 듣지 않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십니다. 요 8 : 45 - 47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님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그들은 들을 줄 모릅니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마귀에게 속했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안다고요? 그들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44), 즉 거짓말을 하고 자기가 지어낸 것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행여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는 네 아비가 아니다,’ 하신다면 어쩌겠습니까? 큰일 날 일이지요. 앞에서 예를 들었지만 아버지를 모르고 자랐는데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말을 듣고 찾아 갔습니다. 아버지가 쉽게 인정할까요? 모르지요. 그러면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겁니다. 과연 김 씨인가? 그 씨가 들어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은 무엇으로 증명합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있으면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눅 8 : 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씨가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 8 : 31 - 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고 또한 하나님 말씀 즉 진리가 우리 안에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아버지를 부를 수도 있고 아버지께 달라고 기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요 15 :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손쉽게 구할 수 있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누구나 소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책을 가지고 있다고 다 하나님의 자녀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냥 배우려고 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 특히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갖기 어려운 성경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대로 산다고 발버둥도 쳤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왜요? 올바로 깨닫지를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요 5 :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렇습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 오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진리가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없는 자들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 말대로 될까요?
예수님이 우리에게 예언하셨습니다. 그것이 신약성경으로 지금 우리 손에 들려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옛날 유대인들처럼 오셔도 모릅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먼저 온다고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말 4 : 5, 마 11 : 14) 세상에! 이런 어리석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니 예수님을 알 턱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 다시 오신다니 예수님만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신답니까? 구름 타고 오신답니다.(마 24 : 30) 세상에! 우리 예수님이 손오공입니까? 구름 타고 오시게? 뭘 몰라도 모르고 자기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목이 뻣뻣한 사람들입니다.(출 32 : 9, 신 9 : 6)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실 때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하니 부족한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고 채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서 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의 물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배워야 하고 들어봐야 하고 말씀으로 확인해봐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자처럼(계 3 : 17)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며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자는 예수님께로 내침을 당할 것입니다. 산으로 도망하라는데 어느 산인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묻는 자도 없고 배우려 하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탄식하시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 :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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