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 하필 소태산인가!
붓다를 한 마음으로 품어낸 그 분의 대각은 붓다를 우리의 시대에 되살려냄으로서 깨어있는 세상, 열려있는 세상, 따듯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살려내는 살맛나는 세상으로 바꾸어나갔습니다. 그 분의 삶은 동.서 문명이 충돌하는 혼돈의 시대에 새로운 빛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왔습니다. 바로 소통과 상생의 가치를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지요. 인류의 문명은 이제 서로의 세계 속에 갇혀있고 닫혀있던 장막을 걷어내고 소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이 없음을 간파하시고 그 소통의 도구로서 일원의 가르침을 밝혀주셨으며 지구환경을 파괴함으로서 인류의 생존을 장담할 수 없는 오늘날의 시대를 내다보심으로서 인간을 포함한 전체의 생명이 조화를 이루어낼 수 있는 길을 밝혀주셨습니다. 바로 사은의 가르침이지요. 소태산 그 분께서는 그를 몸소 실천함으로서 세상을 개벽시켜나갔습니다.
바로 그 분의 열린 가르침입니다.
진리적이며 합리적인 가르침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 대해 막혀있고 대립하던 문명의 충돌을 조화롭게 회통시켜나가는 역량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류 문명 속에서 고유하게 커 나왔던 각기의 존재언어들은 그 분의 가르침 하나로 아무런 충돌 없이 우리들의 가슴을 활짝 열어놓았습니다. 그 가르침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소통하고 서로가 넘나드는 열린 세상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가르침은 오늘날 분열과 욕망의 시대에 그를 치유하고 그 갈등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희망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 때문에 우리가 소태산 그 분의 가르침을 살려내야 하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연적인 운명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나와 인류의 삶을 소통과 상생이라는 그 가치의 나눔을 통해 調和롭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인도할 수 있도록 길을 밝혀놓으셨기 때문입니다.
2. 왜 하필 수행인가!
세상을 아무리 개벽시켜나간다 하더라도
내가 개벽되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개벽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변하지 않는데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겠습니까?
따라서 동양의 선지자들은 늘 修身을 제일 중요한 덕목으로 가르쳐왔습니다. 修身이 되지 못한다면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없으며 가정이 화목할 수 없다면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지요. 오늘날 일어나는 정치 혹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修身하지 못하고 있는가가 단박에 드러납니다. 修身할 수 없는 지도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기에 얼마나 많은 대중들이 아파하며 고통 받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修身은 바로 개벽의 핵심이며 삶을 변화시켜나가는 키-워드입니다.
修身의 길은 바로 수행이자 수양이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올바르게 세움으로서 가정과 세상이 올바르게 설 수 있음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길만이 우리를 변화시켜나갈 수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창조적 인간으로서의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두발로 걸어 나갈 수 있을 때 세상을 자기 마음껏 주유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등에 업혀가려면 자유롭지도 못하거니와 그가 길을 잘못 들어도 그는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만 합니다.
수행은 닫혀있는 마음의 벽을 허물고 마음의 근원성에 도달함으로서 모자람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마음에 모자람이 없어야 더불어함께 나눌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고 여유가 생겨야 마음은 늘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마음은 늘 고요하고 충만하지요. 그 마음이 나를 살리고 세상을 밝게 만들어 나갑니다. 그 누군가를 믿고 의존함으로서 마음은 흔들리지 않고 나름대로의 중심을 잡아나가겠지만 그 믿음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따라 다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만나면 서로 소통해나갈 수가 없습니다. 늘 갈등과 대립과 충돌이 일어나지요. 왜냐하면 그 무엇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은 자신이란 존재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주는 그 절대의 존재에 대하여 그 누군가가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존재 근거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그는 필사적으로 그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 의존성 때문에 그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늘 자신이 보려는 것만을 보고 있기에 그런 그들이 만나면 늘 대립하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세상을 고통에 빠뜨리며 혼돈 속에 세상을 가두어 놓습니다. 따라서 소태산 그 분께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함께 밝히신 것은 깨어있는 삶, 열려있는 삶, 따듯한 삶을 통해서만 세상은 개벽될 수 있다는 그 분의 의지를 밝히신 것입니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이란 절대적인 믿음을 통한 의존성이 아니라 바로 내적인 함양, 즉 타력을 통해 자력을 길러나가는 수행의 과정으로서 신앙의 길을 밝혀내셨기 때문입니다.
3. 왜 하필 공동체인가!
공동체는 지향점이 같은 이들이 함께 모여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실현시켜나가는 소통의 장을 말합니다. 원불교라는 교단도 하나의 공동체이지요. 소태산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실현시켜내자는 그 함의를 함께 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태산 수행 공동체>를 결사한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교단은 소태산의 가르침과 상관없이 그 구성원들이 살아나가기 위한 삶의 방편으로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공동체의 가장 핵심인 영적 깨달음은 고갈되었고 교단은 그 내적 고갈을 외형적인 성장을 통해 채워나가려 함으로서 교단의 구성원들은 점점 더 세속화된 욕망의 덫을 피해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단의 주인인 교도를 그 외형화 작업에 끌어들임으로서 교화는 그 본질을 잃고 실망한 교도들은 발길을 끊어버리고 있지요.
내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교무들은 열악한 삶의 환경과 부딪치면서 오히려 병들고 아프다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성장이 멈춘 교단지도자들의 무지는 무엇 때문에 교단이 쇠퇴일로에 있는지 아직도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얼마 남지 않은 힘을 건물 하나라도 더 짓기 위하여 그토록 낭비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주인인 교도들의 원성이 무엇인지 모르는 그들은 여전히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로서의 면모를 아직도 잃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지요. 참으로 부끄럽고 안쓰럽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현실 앞에서 변혁과 개벽은 필연적인 흐름이 아닐까요?
그를 개벽시켜나가지 못한다면 세상을 어떻게 개벽시켜낼 수 있단 말인가요?
나조차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이가 누구를 가르칠 수 있단 말인가요?
누군가 위에 군림함으로서 자신의 존재성을 담보 받으려한다면 그것은 바로 중생보다 더 못한 나락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차라리 중생은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라도 있지요.
부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이라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실천은 타인을 자기처럼 공경해나가는 일입니다.
교도들을 공경할 수 없는 교무가 어찌 교화를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신을 해야 하고 수행을 해나감으로서 나 자신부터 온전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고 기뻐야 다른 이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소태산 수행 공동체>는 그래서 필연적인 역사의 과정입니다.
소태산의 가르침으로 돌아감으로서 스스로가 개벽하고 더불어 개벽하려는 것입니다.
교단의 흐름과는 관계없이 그 영적인 충만함을 내가 머무는 곳으로부터 실현시켜나감으로서 나를 살리고 소태산 그 분을 살리며 세상을 소통과 상생의 장으로 변모시켜나가려는 것이 바로 <소태산 수행 공동체>가 하려는 일입니다. 함께 모여 살지 않아도 각자가 서있는 그 곳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서로 소통해나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떨어져 있어도 지금 이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네트워크를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로 만날 수 있습니다. 온라인을 통해서든 오프라인을 통해서든 아니면 허공을 수놓는 그 한 마음을 통해서든 그를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은 모두가 공동체 안에서 녹아들고 있습니다.
요란하게 사진도 내놓고 법석을 떨었지만 그래도 그 일은 역사적인 일이었습니다.
수십 년 간에 걸친 그 고난의 산물들이 더불어 모여 하나의 뜻을 일구어냈다는 사실이 참으로 대견합니다.
붓다의 맥이 수백 년 간 잠들어 있다가 용수보살에 의해서 다시 되살아났듯이
달마의 법맥이 몇 세대를 거쳐 육조 혜능에 의해서 다시 꽃 피워졌듯이
우리는 지금 소태산의 그 법맥을 이어나갈 수 있는 그 실마리를 이제야 찾아냈습니다.
현재의 교단 속에서 그 맥을 이어나가시고자 애를 쓰셨던 약산 박성기 교무님!
소태산 그 분의 역사를 발굴하시고 외롭게 그를 지켜 오셨던 주산 박용덕 교무님!
50여 년을 교도로서 원불교의 발전에 중추를 담당해 오셨던 법산님!
교단의 아픔을 평생을 통해 치유하고자 애를 쓰셨던 前 김우철 교무님!
구도의 열정과 그 깨달음으로 소태산 그 분의 법맥을 이어오셨던 나우님!
끝없는 정성과 헌신 그리고 마당발로 소태산 그 분의 법맥을 잇고자 애를 쓰시는 성권님!
함께 하진 못했지만 불법연구회를 통해 소태산 그 분을 살려내고자 애를 쓰시는 고대승님!
고통스런 삶의 그 모든 상처를 이겨내고 문수와 보현의 심법으로 함께 하는 산사람님 내외!
교무로서의 뜻을 펼쳐보기도 전에 그 안에서 상처받고 좌절해야만 했던 선종님!
그 외에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그 뜻과 함께 하고자하는 그 모든 깨어있고 열려있는 분들!
참으로 감사하고 또 감사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출발합니다.
어떠한 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각기 다르게 성장한 그 여럿이 서로를 知者로서 받아들이고 서로의 부족함을 서로 메꾸어 나감으로서 우리는 서로 간의 간극을 허물고 하나의 꽃을 피워냈습니다.
존재의 근원에서 서로의 벽을 허물고 하나의 마음으로 만났습니다.
이제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제 결집합시다!
이 모임에 참석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뜻을 가진 여러분들이 곳곳에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소태산 수행 공동체>를 통해 결집하고 결사함으로서 소태산 그 분의 가르침과 비전을 우리의 삶으로 녹여냅시다!
간곡히 부탁하건대 이제 서로에게 닫혀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고 우리부터 소통하고 상생해나가는 그 아름다운 전통을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서있는 이곳에서 보여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