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구로 넘어간다. 조선시대 진잠현(鎭岑縣)의 관리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인 문화재자료 제29호 기성관(杞城館)은 원내동 진잠동주민센터 안에 있다.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이루어져 있으며,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간결하게 짜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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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관 이외에도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 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객사와 관리의 살림집인 내아, 지방관이 행정업무를 처리하던 동헌, 무기를 보관하던 무기고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교촌동에 있었으나 1934년경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서 다시 지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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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관 옆에는 두 기의 비석이 서 있다. 한 기는 현감 김구담(金久淡-마모가 심해 정확하지 않다.)애민선정비인데 윗부분의 모를 죽여 둥글게 다듬은 갈형 비석이다. 대석은 없어져서 새로 조성해 세워놓았다. 다른 하나도 애민선정비로 비슷한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이름도 알아보기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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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센터 한쪽에는 오래 묵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는데 수령은 422년, 높이 22m, 둘레 5.5m로 되어 있다. 수형이 비교적 아름다운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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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자료 제6호 진잠향교대성전(鎭岑鄕校大成殿)은 기성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다. 진잠향교는 조선 태종 5년(1405)에 처음 지은 뒤 여러 차례 고쳐 세웠다고 전한다. 1979년 대성전을 중건하고 1981년 명륜당을 해체한 후 복원하였으며, 1984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담장을 중수하고 1986년 흥학루(興學樓)를 중건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대성전과 명륜당 동재와 서재 등의 건물이 있다. 진잠향교는 문이 잠겨 있어 담장 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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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배치는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하여 입구 쪽에 솟을삼문 형태의 외삼문을 만들었는데, 흥학루(興學樓)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공식 설명들에는 이 외삼문에 대해 ‘중앙칸을 2층의 누각으로 만들어 아래로 통행하고 위에는 루(樓)로 사용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의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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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누각은 없으며, 지붕의 높이가 원래부터 이 정도였다면 누각을 두기에는 너무 낮아 보인다. 게다가 솟을삼문 형태로 만든 뒤 중앙 칸만으로 누각을 둔 경우를 본 기억이 없다. 중앙 칸 위에 아래 위층을 가르는 천정 형태가 있는 것 같지만 이것을 누각으로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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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삼문을 들어서면 명륜당이 있고, 그 앞 양옆으로 동·서재가 있다. 명륜당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바닥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한 칸에 온돌방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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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뒤 높은 대지에 사괴석담장으로-일반적인 의미의 사괴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둘러진 곳에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맞배지붕이다. 비교적 웅장한 편이지만 동무와 서무는 없다. 중앙과 좌우 세 곳에 일각문을 세워 출입하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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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 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五聖) 및 송조6현(宋朝六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 등 29위의 위패를 배향하고,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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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기념물 제3호인 내동리지석묘(內洞里支石墓)를 찾아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도로변에 주차하고 접근하였지만 문을 막아두었다. 고인돌은 충남방적주식회사 내부에 있으며 소유/관리도 이 회사이다. 정문으로 가려면 한참을 돌아가야 했기에 통과하기로 했는데, 지금은 택지개발지구에 수용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전에서 마지막으로 대전역사박물관(유성구 상대동 488)에 들렀다. 1991년 12월 대전직할시향토사료관으로 시작한 대전역사박물관은 도안택지개발지구에 새로운 건물을 지어 2012년 10월 대전역사박물관이란 이름으로 개관했으며 이곳이 본관이고, 기존의 선사박물관은 분관 체제로 운영한다고 한다. 소장유물은 조선시대 고문서 전적유물 등을 중심으로 35,000여점이며, 국가 지정 보물 3점, 대전시 지정문화재 또는 문화재자료 8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옥외에 있는 석불이 목적이었고, 시간도 없어서 내부는 둘러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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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외에는 석가모니여래좌상과, 태실의 석함, 망주석 2기와 석양 1기가 전시되어 있었다.
대전시 유성구 상대동이 안태고향인 석불에 대해 설명석에서는 존명을 석가모니여래좌상으로, 조성 시기를 고려시대로 비정하고 있었다. 그밖에 이 불상에 대한 공식설명 자료를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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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의 높이는 대략 1m 정도 되었을까?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불상으로 두부와 신체의 색이 다소 다르고, 접합한 것이지만 원래 하나로 조성되었지만 떨어져나갔던 불두를 접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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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는 마모가 심하지만 소발과 육계가 표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눈이나 코는 흔적 정도만 남았고, 입은 심하게 떨어져나가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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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합에도 불구하고 삼도는 뚜렷하게 보이고 통견의 옷을 입었다. 옷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으며, 좌우 팔뚝에는 뒤에서 앞으로 옷 주름이 넘어온 모습이다. 복부에 무엇인가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승각기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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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은 왼손은 무릎 위에서 꺾어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손바닥이 위를 향하고 있는지 아래를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오른손은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대고 손가락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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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은 높이나 폭이 그런대로 전체적인 비례에 맞게 표현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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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뒤쪽까지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출토지가 불분명한 것도 아니니 전체적으로 지방문화재 정도로 지정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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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불좌상 옆에는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6호 태실[석함](胎室[石函])이 놓여 있다. 역시 향토사료관에 있던 것을 새 박물관이 개관하면서 옮겨놓은 것이다. 이 석함은 조선 선조의 11번째 왕자로 선조와 온빈한씨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가운데 둘째인 경평군(1600∼?)의 태를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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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당시 태실은 작은 산봉우리 꼭대기에 있는 240㎝ 깊이의 구덩이 속에 묻혀 있었는데, 돌로 만든 동그란 함속에 태를 담은 두 개의 항아리와 태어난 연월일을 적은 태지석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함은 높이 142㎝로 원통모양의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몸체에는 깊이 50㎝의 홈을 판 후 밑바닥에 배수를 위한 구멍을 뚫어 놓았다. 이 구멍은 태의 주인공과 땅의 기원을 연결하려는 풍수적인 목적에서 만든 것이라고도 한다. 태지석에 새긴 내용으로 미루어, 경평군이 태어난지 8년 후인 선조 41년(1608)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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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기의 망주석은 宋炳遠 망주석이라고 되어 있는데 부러진 것을 접합해두었다. 망주석은 얼핏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지만 내력을 조사해보지는 못했다. 두 망주석 각 면에는 전서로 된 명문이 있다. 그 옆에는 석양 한 마리가 외로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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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설명문 출처: 문화재청, 두산백과, 대전시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대전역사박물관]
첫댓글 에혀 선사박물관으로 찾아갔던 기억이 남습니다
카페에 우바이님께서 올려주셨던 글 덕분에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역사박물관 안 유물들은 좀 어떤것들인지요?
그게... 시간이 없어서 패스했습니다. 쥔장님 곧 가실 것 같으니 미리 부탁드려보시지요...
여기도 향교는 문을 열어주지 않는군요.
외삼문 기준으로 문을 열어두는 향교가 약 반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