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6개월간의 군대사목을 마무리하고 2012년 12월 공군대령으로 전역, 2013년 8월 방배성당으로 부임한 조정래 시몬 신부님을 찾아뵈었다. 긴 시간 동안 용케도 순수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듯 시원시원한 말투와 호남형 인상에서 그늘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반포성당 신자들은 우리성당 출신 신부님이 12지구 주임신부로 돌아오셨다고 반색이고 방배성당 신자들은 오랜만에 젊은 주임신부가 오셨다고 반색인데 정작 조신부님은 조용히 컴백하고 싶었는데 너무 큰 본당을 맡은 것 같다며 웃는다.
“늘상 나도 땀 냄새 아닌 분 냄새 나는 데서 사목활동 좀 하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이건 좀 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하하”
조 신부는 1964년 7월 22일 서울 중구 명동에서 아버지 (고)조영제 베드로님과 어머니 정하금 아나다시아님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생 시절을 반포에서 지내며 공소 시절부터 매일 새벽미사를 다니고 매일 복사를 했을 만큼 성당을 가까이 했었다. 그 뿐 아니라 마산교구와 대구대교구 원로사제인 정하권 몬시뇰과 김영환 몬시뇰, (전)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 소병욱 프란치스코 신부 등이 외가쪽 아저씨, 형님들이며, 성 베네딕토 수녀원의 정하순, 정하돈 수녀가 친 이모일 정도로 신앙심 깊은 집안에서 자랐다. 성소의 계기를 질문이라고 챙겨 간 우리가 오히려 무색할 정도이다. 그저 초등학교 다음에 중학교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 일이었던 걸... 그래도 신학교 진학을 앞두고 두려움과 무서움이 컸는데 그 때 확신을 주는 계기가 있었다. 두 살 위인 누나가 “정래야 너무 많은 생각으로 고민하지 말고 ‘오늘 하루’만 살면 안될까?”라고 말해주었는데 그저 평범하게 들릴 수도 있는 그 조언이 갑자기 크게 뇌리에 박혀 그 때부터 ‘오늘’이라는 단어가 삶의 지침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신부님 상본에도 작자 미상의 <오늘>이라는 시가 적혀있다. 하도 많이 인용하여 신부님의 시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 몇 년 전 인터넷상으로 진짜 그 시의 지은이를 찾아보기까지 했다.
하느님께서 오늘을 너에게 주셨다.
모든 어제는 거두어 가셨고
모든 내일은 아직 그 분의 손 안에 있도다. (작자미상 詩 ‘오늘’ 中에서)
이렇게 밝고 긍정적이고 무엇이든지 누구에게든지 어떤 모습으로든지 다가가겠다는 순명의 자세로 사는 분께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을까. 서품받고 3년만에 군종교구로 가게 된 계기부터 다시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어요. 군 실정도 잘 모르고 뭐 좋겠어요 다들 가기 싫어하는 군대에. 당시 사무처장이던 염 추기경님께서 91년도 서품 받은 우리 중에서 5명이 군으로 가야된다 하시는 거예요. 그 말에 강학회 (미래사목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던 모임) 정신을 이어받아 군종신부로서 열악한 군대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신부가 되어보자는 친구 두명의 설득에 넘어간 거죠. (웃음)”
“입대 후 3개월 훈련을 받고나서 두 명은 육군으로 배치되고 저는 공군소속 광주 전투비행장으로 배치되었어요. 부임 첫 날 저를 반기는 건 사병 2명과 강아지 한 마리가 고작이었고 첫 미사라고 나갔더니 7명 앉아있는 어린이 미사였어요. 정말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 했습니다. 서품 받고 처음으로 허영엽신부님과 함께 머무른 구파발에선 어린이 미사 때도 130명 정도는 나왔거든요. 그날 이후로 절대로 신자 숫자로 실망하지는 않으며 살아왔습니다. 군인 한두 명 참석하는 적도 있는 걸요~”
“그 뿐인가요. 기타치고 노래하며 모금강론 다니는 건 어쩌구요. 무려 34군데를 갔더라고요. 군인주일이면 전원 출동하여 모금해 온 2차 헌금이 군사목 1년 예산의 근간일 정도로 그 일은 중요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힘들었던 걸 꼽으라면 피드백(feedback)이 없는 사목생활의 허전함입니다. 마지막 6년간 계룡대 공군본부에 있었는데 완전히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하는 그냥 공무원이었습니다. 그 일도 중요하긴 하지만 신부라는 사람이 장례, 혼배, 영세, 상담 등 신자들과 함께 나눌 사목활동이 얼마나 많은데 이게 뭔가 싶은 거죠.”
2011년 1월 17일부터 조신부님은 군 지휘부의 핵심인 공군 군종병과장으로 취임했었다. 그 자리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모든 종파를 초월해 상생하도록 아우르는 행정적 역할이 많은 자리다. 척박한 세상에 한 방울의 물이 되어보겠다고 신학교 진학을 서슴치 않았고 광야에 씨를 뿌려보겠다는 심정으로 군사목을 수락한 순수 청년이 버티기에는 세상 잣대와 다른 심적 고통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된다.
초창기부터 비교적 신학생이 많아 이찬홍(야고보) 이승찬(안드레아) 고찬근(루가) 봉재종(마르코) 오세만(바오로) 김동춘(요한) 조정래로 이어지는 반포성당의 오랜 역사를 줄줄 꾀고 있는 한 우리와의 가족 공감대를 지울 수 없는 신부님이다. 여전히 반포성당에 다니시는 어머니와도 월요일마다 함께 식사하고 휴가 때면 여행도 함께 다니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갑자기 바빠진 사목 일정이겠지만 풍광 좋은 방배성당에서 그동안 밀리고 바랬던 신자들과의 교감을 충분히 만끽하시길 바란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여쭈니 큰 목표나 먼 앞날을 생각하기보다 하루하루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면서 넘어지면 일어서고 또 넘어지면 또 일어서면서 생활해 나가야 하지 않겠냐 하신다. ‘오늘 하루 감사하면서...’도 빼놓지 않고 덧붙이신다.
대담 및 정리 박일순 멜라니아, 홍현숙 마리나
사진 한숙희 아네스
첫댓글 신부님 사진은 아네스씨가 보내줄텐데 내가 첨부한 이 '상본' 사진도 꼭 넣줘야 해요~!! 글 가운데 넣어도 좋구요